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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5:4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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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성 목사 |
참고 : | 네이버 카페: 말씀의 숲 교회 (서울 은평) |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
(막15:42-47)
나라와 나라를 넘어가는 국경선을 통과해 보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국경을 통과하려면, 비자 심사를 받게 되요. 요즘은 각 나라마다 비자 심사가 까다로워요.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내려도, 비자 심사를 철저하게 받아요. 그리고 힘들게 비자 심사를 받고, 정말 다른 나라 땅을 밟았을 때는, 그것을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정말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설레임과 전혀 경험하지 못한 기대감이 교차 하지요. 공기도 다른 것 같고, 환경도 다른 것 같고, 모든 것이 낯설고 달라 보이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신비로움을 경험할 수 있을 거예요.
그것은 비자 심사를 통과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고, 그것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그 나라에 들어 갈 수도 없고, 비자 심사에 통과하지 아니하면 그 나라에 내렸어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게 되요.
예수를 믿는 사람도 십자가를 통과하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어요. 여러분,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말은 무슨 말 일까요?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오늘 본문의 요셉은 아리마대라는 동네의 요셉이에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누구일까요? 그는 유대의 공의회에 공회원이었다고 하지요. 한마디로 국회의원 정도요. 상당히 높은 고위 지위에 있는 인물이었지요.
경제적인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의 경제적인 상황은 부자인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의 성품은 어떠했을까요? 누가복음23장 50절에 보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다’ 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 사람은 사회적으로 지휘가 높고, 그리고 존경받는 사람이고, 부유한 사람임을 우리는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전의 모습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의 모습이 달라졌음을 우리는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도, 예수님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자기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겼던 것 같지요.
왜요?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숨겼음을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안정된 삶과 지위가 혹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로 빼앗기거나 손해 보는 것에 민감했던 사람으로 추축해 볼 수 있지요.
예수를 따르는 것은 좋은데, 혹 그 따르는 것이, 나의 지위가 예수로 인하여 빼앗기거나, 예수 때문에 안정된 삶을 잃어버린다면, 예수를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자신에게 부여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요. 마치 교회만 오면 성도가 되고, 밖에서는 자신이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는 신분의 노출을 꺼려하는 사람의 모습과 같은 거예요.
그런데 그가 변했다는 거예요. 그 변한 시점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변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이 아직 부활하기 전의 사건이에요. 그러니까 아직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바로 그가 예수님의 죽음의 어떤 과정 속에서 뭔가 깨달은 바가 있고, 작정한 봐가 있어서, 변화된 것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는 것이죠.
43절에 보시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지요. 직접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해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어요. 그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부자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어버리고 다 끝난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빌라도에게 찾아갈 이유가 없지요. 자기는 숨어있고,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을 시킬 수도 있었어요.
그러나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자기 자신을 들어 내놓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임을 이제는 들어 내놓고, 예수님의 시체를 본인이 직접 수습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어요.
다른 사람 상관안하겠다는 것이고요. 내가 예수를 따름으로 인해서 모든 손해를 감수 하겠다는 것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공회원의 높은 지위를 빼앗길 수 있고, 예수를 따르는 추종자라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일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것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당돌히’라는 말 안에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냐? 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상태가 아니라, 그냥 죽은 상태라는 것이죠.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지요. 이제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숨기고 있었던 사람이, 보통사람 같으면 ‘돌아가셨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이고, 내가 숨기고 있기를 잘 했지, 괜히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 믿었다는 것이 남들에게 알려 졌더라면, 내가 큰 손해를 볼 수 있었겠어’ 라고 생각하지 않았겠느냐? 라는 것이지요.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숨겼던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해요. 모든 것이 끝이고, 더 이상 무엇인가 일어날 것 같지 않는 상황에, 단지 예수님이 죽은 후에, 그의 태도는 변했어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그리고 그에게 나타나 무엇이라도 약속을 했다면 몰라요. 그런데 누가, 그냥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자신의 지위와 재산 그리고 안정된 기반을 포기할까요? 심지어 자기의 생명까지도 내 주어야하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모든 것이 사라진 그 시점에, 그리고 예수님이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가장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모든 것이 끝나 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고 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의 태도를 바꿀만한, 그런 강력한 요인이 되는 사건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그는 조용히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에 그 마음이 변화를 받았던 거예요.
어쩌면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비굴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요? ‘왜 나는 이렇게 부끄러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나는 결단하겠다. 그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는데, 나는 그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십자가 앞에서 분명 마음의 변화를 얻은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은 십자가의 능력을 아시나요? 여러분, 십자가는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능력(고전1:18)이라고 했어요. 완전히 나를 구원하는 능력이라는 거예요. 이 능력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구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내 아들을 죽여서라도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나는 내 아들을 버릴 정도로,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래서, 이 십자가의 사랑에 한번 눈을 뜨게 되면, 아무리 절망적인 사람이라도, 이 십자가로 살아 날 수 있어요. 이 놀라운 사랑 앞에 변화된다는 거예요. 아리마대 요셉! 그는 십자가를 지금 통과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정확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녹아졌다면,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누가 끊으리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그 어떤 것이 와도 우리를 그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요. 이것을 정말 경험한자에게는, 절대로 그 십자가에서 떠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제대로 경험하고, 깨닫는 사람은, 더 이상 예수 믿는 것을 숨기지 아니하고,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주를 위해 살 수 있는 마음으로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소극적인 그에게 적극적인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저는 여러분이 정말 이 십자가를 통과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는 주를 위해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지요. 고린도 후서 5장 15절을 우리는 같이 읽어보아야 합니다. (시작) 그래서 정말 십자가를 통과하면, 정말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자나요. 예수가 여러분에게 누구일까요? ‘나 대신 죽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당신이 믿어요?’ 예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고백하고 믿는다면, 예수님 때문에 내 삶에 변화가, 안 일어난다는 말이 맞을까요? 정말 이 십자가를 믿고 고백한다면, 내 삶에 변화가 당연히 일어나야 하지요.
여러분, 정말 나 때문에 어떤 사람이 죽었다면,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살았다면, 여러분의 삶의 태도는 어떨까요? 그 사람 때문에, 자신의 삶이 완전히 바뀐 사람들이 이 땅에도 많이 있잖아요.
뇌사상태에 빠진 젊은 사람의 장기를 수여받은 사람이, 죽었다가 그 사람 때문에 자신이 새로운 삶을 얻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은 그러한 일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과의 삶의 태도는 분명히 다를 거예요. 왜냐하면 한 사람의 가치 있는 죽음을 인정하는 이상, 정말 삶에 큰 변화를 줄 수 있기에, 충분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었다!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나 때문에 죽고,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전혀 삶에 어떤 변화를 찾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아니라는 거예요. 아리마대 요셉은 그 근본적인 뭔가 알고, 그리고 그것을 통과하고 있다는 거예요. 정말 그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 십자가를 통과할 때, 그에게 근본적인 변화 일어났다는 거예요.
예수 믿고 얼마든지 일시적으로 그 열심을 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과하지 아니하면 언젠가, 내가 들어나기 때문에, 그 열심히, 십자가를 통과하지 아니하면,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 안에 내가 들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거리가 먼 신앙, 십자가와 거리가 먼 기쁨, 십자가와 거리가 먼 헌신과 섬김은, 언제나 자기의 의에 넘어질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십자가에서부터 출발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그 골고다 언덕에서 그 십자가를 정말 경험했기에, 예수를 붙잡을 수밖에 없는, 완전한 변화를 일으키는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 십자가를 통과하셨습니까? 그 갈보리 십자가에, 다시 한 번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그 십자가를 올려놓고 자신을 한번 보시지요. 그 죽음이 정말 나를 위한 죽음이요. 그 죽음이 정말 나를 향한 죽음이 되는지를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내 안에 있다면, 아무리 돌 같은 내 마음도 그냥 그대로 있을 리가 없어요. 그것이 확인되면 달라져야 하고, 달라질 수밖에 없고, 정말 변화 됩니다. 바뀝니다. 달라집니다.
토요일이면 우리교회 성도님들은 나오셔서 전도해요. 얼마나 귀한지요. 어제도 비가 와서 전도할까 말까? 그래도 나오셔서 전도를 시작하지요. 어제 저녁에도 집에 가서 있는데, 저녁에 전화가 왔어요. 지난번에도, 수요일 날 한번 오겠다고 하셨던 분도 있고, 또 어제도, 핸드폰 솜 소독제를 받아들고, 전화번호가 있어서, 전화한번 한다고 하면서, 시간되면 교회한번 가겠다고 전화를 하시더라고요.
여러분, 전도가 즐거운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비가 오고, 짜증나고 습도가 높아, 움직이기도 싫은데, 전도가 좋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런데도 그 길을 걸어가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그 힘은 과연 무엇일까? 그저 말없이 묵묵히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거지요. 누가 뭐라해도, 누구의 신앙이 이렇고, 저렇고, 어떠하든, 그저 말없이 주의 길을 가는 그 힘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지요.
예수 믿는 것이 나에게 손해된다면, 예수 믿는 것이 나에게 득이 되지 아니하면,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정말 그 힘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인 줄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그 힘은 금방 지쳐요. 십자가가의 은혜가 아니면, 그 노력은 어떤 상황과 환경이 오면 쉽게 변해요. 그런데,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힘은, 분명 십자가를 통과한, 은혜의 힘인 줄 믿습니다.아리마대 요셉은 그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이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십자가의 은혜가 분명히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삶이 힘들어도, 그 힘으로 살 수 있어요. 삶이 어려워도 그 십자가의 능력이 더 크기에, 그 힘과 즐거움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혹 그 은혜가 없는 분들은 그 힘을 위해 기도하세요. 저에게도 세상의 힘으로 사는 힘 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십자가의 힘을 저에게도 주셔서, 그 능력과 기쁨으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세요. 분명,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 은혜로 늘 승리하며 사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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