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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되찾는 회개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104 추천 수 0 2012.01.08 23: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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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14-15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십자가를 되찾는 [회개]
막 1:14-15

2009.2.15

지난 주일에 드린 말씀은 무엇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성암 50 희년'에 따른 행동들 이었습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는 목적헌금인 '희년 헌금‘을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걸로 10년 넘게 끌어온 건축 부채를 다 갚읍시다. 저도 그래서 헌금 목표를 세우고 기록표까지 만들어 노트에 붙여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금 교육 공간이 절대 부족한 상황입니다. 이것은 문화, 예술, 사회를 아우르는 복합 기능을 가진 공간이어야 할 것인데, 이러려면 땅도 필요하고, 건물도 있어야 하고, 훈련된 사람들도 있어야 합니다. 사회봉사기능을 가진 [영혼의 약국]도 새로운 초석을 놓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일련의 신앙 목표들을 위해 기도도 했지만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종교적인 열심인가 아니면 건전한 기독교 신앙을 위한 길인가 또는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는 중에 김응국 목사가 지은 [십자가]라는 책을 읽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김 목사님과는 통화도 했습니다. 창립 50주년이 되는 날인 3월 15일부터 17일까지 우리교회에 오셔서 '십자가'의 말씀을 증거 하시기로 약속도 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세 번  읽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우리가 하는 '성암 50 희년’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변화를 바라고 있습니다. 미래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겁니까? 기도하는 중에, 책을 읽는 중에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회개”다.
모든 변화는 회개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 개인의 구원과 영생도, 공동체의 희망도 모두 회개에서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달라지려면, 그걸 바란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성암 50 희년’ 행동은 바로 회개를 말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적인 반응이 어떤 것이든지 그것은 [회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김응국 목사와 그들의 회사는 회개를 통해 [십자가]를 되찾았습니다.

구약성서에서 대표적인 회개의 예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탐하여 데려다가 아내를 삼고, 그 죄를 은폐하려고 하다가 우리아까지 죽이는 죄를 범하였습니다(삼하 11). 왕권이 저지른 범죄였지요. 그 누구도 감히 그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의 죄는 흙이 눈에 덮이듯 덮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나단이 그의 죄를 고발하였을 때 다윗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 나단 앞에서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삼하 12:13) 하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이때 지은 시입니다.

"하나님, ...내 죄악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내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십시오. 내 반역죄를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내 앞에 있습니다.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시 51:1-3)

다윗의 회개는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뉘우침과 반성이며 다짐입니다.

신약성서에 오면 세례 요한의 회개 운동이 두드러집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지요(마 3:1). 그는 사람들에게 그러니 회개하라고 하면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형식적인 회개에 그치지 말고 회개에 맞는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촉구한 회개 운동은, 그저 감정적으로 눈물 찔끔거리는 그런 형식적인 회개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는 실천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리와 군인들은 당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누르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그런 죄악을 끊는 행동이 없으면, 성전에 와서 제물을 바치고 회개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회개는 실천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일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의 회개는 공동체적이기는 하지만 과거 지향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의 회개는 전혀 새로운 차원을 갖기 시작 합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본문은 예수의 선교와 선포를 요약하는 말입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4-15)

예수의 선포는 세례 요한의 선포와 아주 비슷합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회개와 예수의 회개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촉구할 때는 심판을 강조하였습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였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눅 3:7-9)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혼인 잔치나 어떤 사람이 베푼 큰 잔치에 비유하였습니다. 큰 잔치의 비유(눅 14장)에서 사람들의 과거의 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지금 주인의 초청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기에서는 굳이 죄를 따진다면 그것은 도덕적 의미의 죄가 아닙니다. 주인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 죄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앞에서 죄의 의미는 전혀 달라집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렇다면 회개의 의미도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회개는 과거의 죄를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초대에 응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어주신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자기를 개방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회개가 과거 지향적이라면, 예수의 회개는 미래 지향적입니다. 그것은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초대 앞에서 우리가 자신을 새로운 세계에 개방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세례 요한의 회개가 참회로서 회개라면 예수의 회개는 방향전환, 곧 돌아섬으로서 회개입니다. 실제로 회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슈브(Shuv)나 그리스어 에피스트레포, 휘포스트레포(epistrepho, hypostrepho)는 모두 돌아서다(turn)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회개는 참회를 함으로써 기존의 질서와 가치 체계로 돌아가 정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것, 정착해서는 안 될 것에 정착하여 거기에서 안전 보장을 구하는 상태에서 탈출하는 행동입니다. 이런 회개는 필연적으로 역사의식을 동반합니다.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식, 그리고 안전을 보장하는 기존의 것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응하는 것은 역사의식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회개와 기독교의 회개의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회개에는 윤리적 참회만 있지 역사의식은 없습니다.

이런 두 가지 회개와는 또 다른 차원의 회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욥기에 나타나는데 ‘자기 비움으로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회개라고 하면 ‘회개하지 않으면 벌(심판)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권선징악이나 <해피엔드>라고 하는 것은 동화나 드라마 속에서 이야기지 현실에서는 전혀 그런 것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도서나 욥기 같은 데 이런 것이 자주 나옵니다.

“나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악한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악한 사람들이 평소에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한다.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탈한 마음 가눌 수 없다. 사람들은 왜 서슴지 않고 죄를 짓는가?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이 백 번 죄를 지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전 8:10-12).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 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자식을 낳고, 자손을 보며, 그 자손이 성장하는 것까지 본다는 말이냐? 그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욥 21:8-10)

이런 생각에서 사람들은 회의에 빠집니다. 삶이 헛되고, 회개니, 용서니, 역사니, 정의니 하는 것이 모두 다 헛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회개 무용론을 주장하는 또 다른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모태신앙으로, 평생 동안 착하게 살아왔고 누구에게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고, 처음에 입교할 때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요즘 와서는 그다지 회개할 만큼 죄에 빠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개방이요 돌아섬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그렇게 하나님 나라 앞에서 살아왔고 좋은 방향으로 달려왔기에 후회도 회개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 꼭 이런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욥이죠. 하나님이 욥을 시험하여 그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건강까지도 잃게 하고, 겨우 목숨만 붙여 놓고 극심한 고통 속에 살게 하였을 때, 욥의 친구들은 뭔가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는 게 아니냐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길게 변호합니다. 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를 돌보았고, 고난 받는 사람과 함께 울었고,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았고, 남의 아내를 탐내지 않았고, 우상을 숭배하지도 않았고, 재산을 믿고 거만하지도 않았고, 나그네를 잘 영접하였다고 합니다(30-31장).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 자신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고 벌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욥에게 하나님은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말씀하십니다.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바닷물이 땅 속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욥 38장)

놀랍게도 하나님은 욥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회개할 것이 있는지 없는지, 그가 받는 벌이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 그런 것을 따질 뜻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길게 말씀하십니다. 그건 이 세상의 창조, 바다와 육지의 창조, 바람과 구름과 천둥과 번개 그리고 별과 별자리들, 짐승들이 새끼를 낳게 하고 그것들을 먹이는 일, 심지어 말이 앞발길질을 하고 콧소리를 내는 것까지, 독수리가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까지 일일이 말씀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능한 하나님과 다투는 욥아,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욥 40:2) 이제 욥이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 42:5-6)

여기에서 욥의 회개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참회로서 회개도 아니고, 새로운 세계로 돌아섬으로서 회개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나를 지으신 분 앞에서 나의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태양 앞의 티끌과도 같은 것임을 느끼는 데서 오는 감동이요 두려움입니다. 악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벌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앞의 전도서와 욥기의 구절들이 약간 허무주의적인 느낌을 준다면, 욥의 이러한 기도는 자기를 비우는 겸허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태까지 놓지 못했던 자기 의를 마침내 놓아버리고, 자기를 비워버리는 데서 찾는 새로운 자아입니다. 욥은 지금까지 주님에 대해 귀로만 들었다고 합니다. 회개니 뭐니 하는 것이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으로 뵙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계시나 환상을 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의에서 벗어나니까, 자기를 비우니까, 비로소 대자연 속에서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참회로서 회개도 좋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제는 용서받았다는 안심, 회개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무시, 또 다시 죄에 빠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방향전환으로서 회개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전환하지 못하고 합당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 후회가 끊이지 않고, 현실 타협에 대한 부끄러움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참회‘해야 한다’거나 방향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회개를 하나의 의무로 만들어서 구속하고, 또 그런 회개의 필연성이 다른 사람을 구속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내가 의로워지겠다는 집착, 또는 누가 뭐래도 나는 의롭다고 하는 교만을 비울 때 비로소 “이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이것이 욥의 회개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회개도 이런 것일까요? 윤리적인 다윗의 회개, 과거지향적인 세례 요한의 회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초청을 받아들이라는 예수님의 회개가 있어야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회개가 그런 것들을 전제로 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것을 지나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교회 안에, 그리스도 안에,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들 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회개]는 ‘십자가를 되찾는 회개’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 죽음, 부활을 믿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믿음에는 그 십자가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잃어버리고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 속에서 ‘잃어버린 십자가를 찾는 회개’가 우리의 [회개]여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를 믿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파생되는 그 ‘무엇’들을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갓 피플'이라는 회사와 '규장'이라는 회사의 직원들에게 일어난 회개, 그래서 마침내 찾게 된 [십자가]를 소개하면서 설교를 마칩니다.

우리가 하는 '성암 50 희년’ 운동은 바로 내 십자가, 그동안 내려놓고 살았던 나의 십자가를 되찾기 위한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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