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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8:3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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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성 목사 |
참고 : | 말씀의 숲 교회 (대한 예수교 장로회) |
https://www.youtube.com/watch?v=lNFwONoGT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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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라가다
(막8:31-38)
‘교회오빠’라는 기독교 영화가 요즘 계속해서 극장가에서 상영이 되고 있습니다. 몇 해 전 kbs 다큐멘터리로 방영된 것이, 영화를 만들어서 상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천국에 가셨지만, 고 이관희 라는 대장암 말기환자의 삶을 다룬 영화입니다.
저는 ‘교회오빠’를 책으로 먼저 만났습니다. 그 책은 한 번의 몰입 감을 저에게 주었고, 3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을 단숨에 읽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덮는 순간,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 마다, 읽고 또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0세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대화중에 참 저의 마음속에 오래 기억되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말하는,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이 그의 꿈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왜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과 한 시간이라도 더 있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분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루라는 시간을 통해서, 제가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 앞에 온전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은 것입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삶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좀 더 가까이, 좀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삶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결코 마냥 꽃길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늘 행복한 길만 가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갈 때, 부자로 살고, 아무 문제없이 사는 것을, 믿음의 삶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행복은 아니지만, 정말 존재 가치의 삶으로, 부자의 삶은 아니지만, 진정 잘 사는 사람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없어지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나를 만드시고, 나를 창조하신 그 분 앞에서, 좀 더 온전한 삶을 살고자하는, 그런 삶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최고의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정말 그는 불후의 명작을 남겨 놓았습니다. 지금껏 이것보다도 더 한 고백이 아직도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그 고백으로 예수님께 축복을 그 자리에서 받았지요.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라는 축복을 받았지요. 평생 그 이름이 불후의 고백이 되어, 이름이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후의 고백’을 남겼지만, 또 그는 ‘불후의 실언’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 고백을 듣고 나서, 자신이 고난을 받을 것이며, 십자가에 죽을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그 말씀에 대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말립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베드로는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잘 모르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을 잘 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정말 모르는 고백을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앞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반응과는 전혀 다르게 심한 책망을 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16:23) 그리고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지요. 3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시작)
믿는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분의 제자 된다는 것은, 마냥 행복한 것처럼, 멋있고 아름다운 길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교회 오빠 이관희 집사님의 삶처럼,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하면, 더 온전한 삶을 하루라도 더 살 수 있을까?’ 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구지 힘들게 믿는가? 그렇게 힘들게 믿어서 뭐하려고, 그렇게 힘든 것이 교회 다니는 것이라면, 나는 결코 믿지 않겠다고, 쉽게 결정하고 다시 교회를 떠나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을 살면 살수록,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힘들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기뻐하실 수 있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기쁨으로 여기고, 최고의 온전한 삶으로 여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나로 살다가, 어느 순간, 점점 내 안에 그분이 살아계심을 알고 되고,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 것이라’ 의 고백이, 점점 안에 있게 되면, 우리는 하루라도, 더 그분을 위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지요.
이 땅에서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아무리 많은 것들을 가져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누릴 없는 아무리 좋은 행복을 이 땅에서 누려도, 그것은 아주 짧은 ‘잠시’ 이기에,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쉽지는 않지만, 복된 길이고, 가장 가치 있는 길이기에, 그 길을 선택하여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 길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 라고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훌륭한 고백을 했지만, 우리처럼 베드로에게는 아직 깨어지지 아니하는 나! ‘자아’가 있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 자아가 여전히 있다면, 그러한 신앙고백을 할 수 없었고,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 불후의 고백을 했다면, 이런 자아가 없어야 하는데,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훌륭한 믿음의 고백과, ‘나’ 라는 자아 사이에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아무리 근사한 고백을 해도, 언제라도 돌아서서, 내 속에서, 내가 더 많은 나를, 더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느 순간에 예수는 내안에서 물어나고, 어느덧 내 안에 ‘나’ 라는 자아가 더 강하게 자리 잡을 수 있고, 또 이러면 안 되지 할 때, 또다시 어느 순간에 예수의 삶이 다시 내 안에 꽉 차서, 주님 뜻대로 살려는 그 믿음이 자리 잡기도 하지요.
여러분, 우리는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면서, 이 고백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부인해야할 자기가 없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 안에는 불후의 신앙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이 고백이 자기는 항상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항상 옳은 길을 간다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남을 정죄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고백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 주시면서, 아무리 훌륭한 고백이 있어도,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지 아니하면, 너도 베드로가 될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두 가지가 늘 공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적인 고백을 하는 나와, 내가 살아있는 나와 충돌을 일으킬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 나를 부인하는 시작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내 안에 예수님을 따르는 온전한 삶을 살아 볼 수 있는, 그 작은 시작은 무엇일까? (한 주간 내내 기도하며,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깨달은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제외하고, 어떠한 일을 하거나, 내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 라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우리의 말을 들어 보면, ‘내 생각이 절대로 맞습니다’ 라는 생각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내 자아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단지 이 고백으로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첫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믿음 위에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버리고, 포기하고, 부인하고, 오늘도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될, 자기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둘째로,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는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시 죄인을 사형시키는 사형제도 중에 가장 극형이 바로 십자가 형이죠. 그런데 십자가로 사형을 시킬 때, 그 십자가에 매달릴 십자가를, 그 죄인이 지고 가야 했습니다. 고통스럽지요. 자기가 지고 가서, 자기가 그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고통을 짊어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의 삶은 그 십자가를 짊으로 말미암아, 내가 더욱 하나님 앞에 온전하여 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상징하지만, 그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나를 더욱 거룩하게 하고, 더욱 믿음으로 성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분투하고 고통을 당하는 삶을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사람들은 부담 없고, 평안하고, 안락하고 부담 없이 사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를 통해, 힘들지만, 어렵지만, 아프지만 내가 지고 가야할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더 온전히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는 성경의 많은 사람들은 모두 고난의 사람들 이었습니다. 성경의 다윗을 보시지요. 그에게 찾아온 말 할 수 없는 기쁨은, 고통과 고난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최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은혜인 것처럼, 그 고통을 믿음으로 견디어 내는 삶을 그는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의 십자가 뒤에는 다윗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에 살 때, 어느날 집을 비워줘야 했습니다. 집을 비워줄 날짜는 다가오는데, 이사 갈 집이 없는 것이지요. 많은 부동산을 돌아다녀도 그렇게 쉽게 외국인에게 집을 임대해 주지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입이 마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한군데 가능성이 있는 곳을 부동산으로부터 소개 받았습니다. 하지만 외국인이라고 해서 쉽지 집을 내어줄지, 주인이 결정하지 못했다 합니다. 저녁밥을 먹고 늘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문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사 갈 날짜는 다가오는데, 이사 갈 집이 없어요’ ‘하나님 도와 주세요~~’ 힘든 시간이었고, 어려운 시간이었고, 마음이 참으로 무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쓸모없고, 괴롭기만 했던 십자가가, 어느날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시는 신비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쓸모없이 내가 짊어지는 십자가, 정말 힘든 십자가, 정말 고통스러운 그 십자가를 지게 함으로,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게 하셔서, 괴롭기만 했던 그 십자가가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시는, 아주 신비한 방법임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며,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감사를, 어두움 속에서 기쁨을, 눈물 속에서 즐거움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예수를 따르라’ 하십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 자신이, 그 십자가의 길을 가서 우리를 그렇게 힘들게 우리를 살렸다면, 정말 우리를 사랑한다면, 당신만 가시면 되는데, 왜? 우리에게도 그 길을 가라고 하셨을까? 여러분, 왜 그 길을 우리도 따르라 하셨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온전한 삶을 누구나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 부인이 쉬울까요?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 십자가를 그렇게 쉽게 지고 갈 수 있을까? 매번 내려놓고, 힘들다 하지요.
여러분,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를 끝까지 부인할 수 없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끝까지 욕심을 버릴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구할 것이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즐겁고, 기쁜 것이 아니기에, 그것을 감당하며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예수님은 알 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온전히 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예수를 따르라! 나를 바라보라 하시는 것입니다. 끝까지 나를 부인할 수 없고, 끝까지 십자가를 질 수 없지만, 예수님만 바라보면, 그 힘든 가운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는 순간에,
그렇게 무겁게 느끼고, 힘든 십자가를, 예수님 당신이, 나를 위해 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예수님만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늘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오늘
하루 온전한 삶을 사는 최선의 방법임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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