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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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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s://youtu.be/vmXrMpsfswE |
성경본문 : 누가복음 2:1~14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성탄절, 2022년 12월25일
목자들의 천사 경험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인 눅 2:1~14절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갈릴리 나사렛에 살던 요셉과 아내 마리아가 로마 황제의 명에 따라서 호적을 신고하려고 사흘 길인 베들레헴에 갔다가 그곳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첫아들이었습니다. 마땅한 숙소가 없어서 여관에 딸린 마구간에 머물렀나 봅니다. 아기를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그 아이가 훗날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불리게 될 줄 몰랐을 겁니다. 위르겐 몰트만의 어느 글에 따르면 모든 아이는 잠재적 메시아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탄생 소식을 목자들이 전해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 출산도 그렇지만, 뒤의 목자 이야기도 너무 평범해서 눈여겨볼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평범한 이야기가 인류 역사를 뒤흔든 아주 엄청난 사건을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목자들은 요즘도 크게 보이는 목성을 보았고, 별똥별도 보았을 겁니다. 밤바람을 느끼고, 흙냄새도 맡았겠지요. 양 떼를 노리는 포식자가 접근하는지도 살펴야만 했습니다. 잠시 졸기도 하고, 가족 생각도 하고, 그중에 영혼의 눈이 밝은 목자는 조상 대대로 구전되던 구약 이야기를 친구 목자들에게 들려주거나 시편을 암송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 앞에 ‘주의 사자’가 나타났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비췄다고 합니다. 뜻밖의 놀라운 광경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뜻밖의 광경도 아닙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의 일상 자체가 늘 특이하고 이색적이고 낯섭니다. 오늘 본문의 목자처럼 밤하늘과 별을 보다가, 문득 겨울나무를 보다가, 길을 걷다가, 예배를 드리다가, 설교를 준비하다가, 밥을 하고 먹고 설거지하다가도 그런 낯설고 신비로운 장면을 만납니다. ‘지금 내가 어디서 무얼 하는 거지? 내가 누구지? 저 사람은 누구지? 이 순간이 무엇이지?’ 하는 근원적인 궁금증이 드는 겁니다. 천사를 만나는 거와 같습니다. 일상에서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하는 분들은 영혼이 메마른 게 아닐는지요.
목자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당혹스러웠습니다. 무서웠습니다. 그들은 이제 다시 천사에게서 어떤 소리를 듣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도 어떤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모세도 들었고, 이사야도 들었고 예수도 들었습니다. 목자들이 들은 소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10과 11절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가 말하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즉 그의 오심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에서 무엇보다도 우선 ‘온 백성에게 미칠’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예수의 구원 능력은 일부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수의 구원 능력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입니다. 태양은 착한 사람이나 못된 사람이나,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똑같이 빛을 선물로 주듯이 예수의 구원 능력은 보편적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이 이렇게 예수 출생부터 구원의 보편성을 말해주니,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보편적이라는 말과의 반대말은 ‘선택적’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선택적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게 지나쳐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의인과 죄인을 구분했습니다. 그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렸듯이 율법은 원래 좋은 제도입니다. 율법이라는 규정이나 범주마저 없으면 세상은 카오스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으나 그것이 도그마로 떨어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유대의 율법 전문가들은 율법의 세부조항을 끝없이 늘리면서 이방인이나 죄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요즘 속된 표현으로 ‘꼰대질’을 했습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전수한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백성이요, 복 받은 사람이며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랑질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교 지도층 인사들의 이런 생각과 주장과 사회 질서에 저항하셨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의인만이 아니라 죄인도 사랑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자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두의 하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당시 유대교 고위층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향해서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고 비난하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인간이 나올 수 있느냐고 조롱했습니다.
이런 당시 상황을 가장 적합하게 묘사하는 비유가 소위 ‘탕자의 비유’(눅 15:11 이하)입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풉니다. 큰아들은 못마땅해합니다. 아버지는 모범적인 큰아들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문제아 둘째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율법에 충실한 사람만이 아니라 이방인과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신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닌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다만 그걸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물론 본인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으로 유대교의 구원 표상이 완전히 새로워진 겁니다. 선택적 구원에서 보편적 구원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예수 사건을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외쳤습니다.
차별금지법
오늘 한국교회는 예수 당시의 유대교보다 훨씬 더 심하게 구원의 보편적 차원을 훼손합니다. 자신과 다른 이를 차별하고 배척하는 겁니다. 그중의 대표적인 것은 성 소수자에 대한 배척입니다. 저는 최근에 이에 관한 두 가지 뉴스를 접했습니다. 하나는 분당우리교회와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 목사를 비롯한 서울 지역의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국회 정문 앞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 1인 시위’를 이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분들은 성 소수자를 차별하지 말아야 하고 그들의 인권을 존중해야 하나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오히려 역차별이 생긴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제가 지금 이 문제를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명분으로는 역차별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성 소수자를 단순히 소수자로 보는 게 아니라 비정상으로 본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른 하나는 몇 년 전 성 소수자 모임인 퀴어 축제에 참석해서 축복기도 순서를 맡았던 이 아무개 목사에게 감리교 총회 재판국이 2년 정직을 선고했다는 사실입니다. 성 소수자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교회는 타종교, 특히 요즘은 이슬람을 향한 적개심도 크고,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도 큽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달받았다는 전통 가운데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일부 사람과 계층을 배제하는 데에 열을 올리는 걸까요? 지금 예수께서 한국교회에 와서 성 소수자와 이슬람교도와 공산주의자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구원하신다고, 그리고 예수 당신의 십자가 죽음은 그들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한국교회 너나 잘해!’라고 말씀하신다면 뭐라 대답하려고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저러시는 걸까요? 안타깝습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성 소수자들에게 큰 기쁨은 무엇인가요? 이성애자들이 주류인 사회가 그들을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받아주는 겁니다. 사회 제도도 바뀌어야겠지요. 타종교인에게는 무엇이 큰 기쁨일까요? 서로 다른 종교인들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배척하지 않는 세상이 되는 겁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엇이 큰 기쁨일까요?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뀌는 겁니다. 저는 지금 정치와 사회 윤리 문제를 직접 거론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관심이 있지 어떤 정치제도가 옳은지, 어떤 성 윤리가 옳은지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 문화와 제도는 잠정적이라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고 교정되어야 합니다. 그걸 다루는 전문가들은 따로 있습니다. 저는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입니다. 하기야 목사와 신학자들이 서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서로 다른 걸 주장하는 게 이상하긴 합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온 백성’에게 좋은 소식, 그러니까 복음(유앙겔리온)이 미친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여기에 이런저런 단서를 달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 믿어야 한다는 단서도 사실은 필요 없습니다. 교회에 나와야만 한다는 단서는 더더욱 잘못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지 않아도 좋다거나, 예수 믿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어떻게 상대방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와 함께하고 싶은 노력을 게을리하겠습니까. 다만 그게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발생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생명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론적 생명 사건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착한 사람만이 아니라 못돼먹은 사람, 민폐 끼치는 사람들도 똑같이 숨을 쉰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좋은 반찬으로 밥을 먹거나 나쁜 반찬으로 먹거나 결정적인 차이가 없는 점도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똑같이 숨을 쉴 뿐이며, 밥을 먹을 뿐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조건이 하나님의 절대 생명 사건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지를 실제로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이 착한 일에 힘쓰고 교회 봉사를 많이 해도 여전히 허전할 때가 많지요? 원래 그렇습니다. 그런 일들이 여러분에게 참된 의미에서 기쁜 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온 백성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 자체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로 대구 샘터교회 담임 목사직을 은퇴합니다. 1980년 3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군목을 거쳐서 성결교회 목사로 대략 20년 활동했고, 교단에 속하지 않은 대구 샘터교회 목사로 20년 활동했습니다. 목사의 삶에도 하나님 경험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나이가 들수록 더 절감합니다. 목회 업적과 하나님 경험은 다른 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공생애 첫 마디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가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경험이 핵심이기에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예수 당신이 먼저 그 하나님 나라에 자기의 인생 전체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 탄생에 관한 요셉 전승을 이야기하면서 사 7:14절을 인용하여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또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고 다스림이며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분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돈이 많거나 공부를 많이 해야만 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자격조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조건을 많이 갖출수록 하나님을 경험하기는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께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은 왕이 아니고 귀족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요즘 식으로 야간 택배나 대리운전을 하는 사람처럼 밤중에 노숙하면서 양 떼를 지켰습니다. 그들이 예수 탄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억지로 꾸며낸 이야기인가요?
대구 성서아카데미 회원 중에 전북 진안에 귀촌해서 사는 분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이별 연습’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평생 시골교회 목사의 아내로 산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른 이야기입니다. 어머니를 긴급히 병원으로 옮기기 전 3주 동안 진안에서 모셨다고 합니다. 그때 어머니와 나눈 대화의 한 대목입니다. 한편의 시입니다.
나 죽으면 너 여기서 혼자 어떻게 사냐?
이 서방하고 살면 되지 …
이 서방 죽으면 너 혼자 외로워서 어떻게 사냐?
엄마 걱정 마. 외로워야 하나님과 가까워지지.
그렇지 … (끄덕끄덕)
외로워야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는 말에 하나님 경험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외롭지 않아도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너무 많은 일과 사람으로 쫓기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외로워도, 더 나아가서 죽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경험한다면 그의 인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에 휩싸이는 겁니다. 영혼이 배부른 겁니다.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이런 기쁨 충만한 삶이 보장된다고 선포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동의하시나요? 미심쩍은가요? 어떻게 하면 일상에서 임마누엘을 실질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까요?
딱 떨어지는 정답은 아니나 제가 아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일상에서 어떻게 우리와 함께하시는지를 마치 밭에 묻힌 보물을 찾는 보석상이나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어떤 여인처럼 치열하게 찾고 구하고 기도하면서 사는 게 최선입니다. 그게 깊어지면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간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질 겁니다. 착한 사람만이 아니라 악한 사람도 모두 구원에 이르는 놀라운 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집에서 청소기를 돌릴 때 강력한 공기의 흐름과 청소기를 들고 있는 제 몸 자체를 느낍니다. ‘살아있음’의 원초적 힘을 느낍니다. 우리의 그런 소소한 일상적 행위 자체가 신비로운 겁니다. 가난해진다고 해봅시다. 그게 두려울지 모르겠으나 적은 돈으로도 기쁨 충만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야, 내가 이렇게 가난해도 잘 사는구나.’를 깨닫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Good News)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과 하나 되었던 그분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고(마 28:20)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임마누엘이신 그분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을 주님의 은총 가운데서 오늘 우리가 맞았습니다. 우리는 ‘밤에 밖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처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달받은 사람들이니 일상을 기쁨 충만하게 살아봅시다. 여러분들을 통해서 세상에 사는 ‘온 백성들’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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