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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8:1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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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8장 15절-23절: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15절-17절: ‘어린아이처럼 받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 천국을 받을 수 없다.’ 어린아이를 받들 때 어떤 마음으로 받드느냐? 좀 큰 애보다 갓난아이를 다루기가 더 힘들다. 짐스럽게 생각한다면 가볍지만 그게 아니라 이건 생명 덩어리라. 소망 덩어리라. 사랑 덩어리라. 희망 덩어리라. 부모의 총 희망이 그 아이에게 들어있다. 그래서 힘들다는 거다.
‘어린아이를 받드는 것처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는 신령천국을, 하나님을, 하나님 나라를 받지 못한다.’ 어린아이는 사랑이고 희망이고 소망이고 부모의 모든 소망이 거기에 다 담겨있다. 그런데 사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천국을 그렇게 받드느냐? 오늘날 무슨 이유로 빠지는지 주일날 빠지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든다면 그렇게 받들겠느냐?
교회 올 때는 아파 죽는다고 하면서 딸네 집에 가고 아들 집에 갈 때는 하나도 안 아픈 모양이다. 그게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정신일까? 주일 거스르고, 하나님 나라를 빠뜨리고, 인간의 참 복된 새사람은 굶겨놓고 그렇게 하면 그 자식들이 부모를 잘 섬길까? 하나님을 모르는데 어떻게 부모를 아느냐? 하나님을 알수록 인간을 아는 건데 하나님 모르고 어떻게 부모를 섬기느냐?
하나님을 바로 알면 신령천국을 받든다. 사람 속에 심령천국을 심어놓으면 그만큼 받듦이 나온다. 사람을 대할 때 그렇게 존경하고 공경하고 받들어야지 그게 아닌 맨 돈에 두고, 세상 제일에다 두니 사람이 물질취급 시 된다. 자식을 그렇게 길러봐야 그 자식이 물질을 따라가지 부모공경은 안 한다.
모를 때는 몰라서 부모를 못 섬기고, 안다고 해도 그만큼 모든 게 늦는 거다. 옳은 것을 안다고 해서 그 즉시로 돌아서느냐? 안 그렇다. 뒤에서 잡아당기지, 옆에서 잡아당기지, 추석날 고향에서 잡아당기지, 자식들이 잡아당기지, 일가친척들이 잡아당기지. 뱀이 하와의 발뒤꿈치를 물것이라고 한 것이 다 그거다. 그런데 교인들이 그걸 모른다. 성경을 모르니 모르는 거다.
성경 깨달음이 인간을 깨닫는 거다. 성경 깨달음이 인간을 존귀하게 대하고, 존귀한 교육이 들어가고. 이게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 아무리 성경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도 대부분 세상지식을 가지고 세상 사는 그 쪽으로 따지지 사람 되는 쪽으로는 안 따진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세상공부를 많이 하면 훌륭한 사람이 돼서 좋은 사람이 되겠구나’ 하지만 세상공부를 많이 했지만 이웃을 아나, 부모를 아나, 자식을 아나? 제 멋대로다. 돈만 있으면 제 세상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런 사람을 어떻게 취급해 주실까? 하나님께서 취급해 주시는 그 취급성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예수 믿는 가정에서 어린아이를 세상 불타지고 썩어질 기준에 맞추고 기르고 양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린아이를 누가 줬느냐? 하나님께서 부정모혈로 통해서 어린아이를 만들었으니 그게 누구 아이냐? 하나님 아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께 합격이 되는 아이로 잘 길러봐라’ 하고 준 것인데 왜 인간세상에서 높아지게 키우느냐? 인간교육은 거기서 거기다. 부모로부터 자식의 교육이 잘못됐는데 학교에 가면 잘 될 것 같으냐? 누가 그렇게 길러놓은 거냐? 부모들이 다 그렇게 길러놓은 거다.
사람이 사는 걸 보면 ‘저 사람이 교육을 무슨 교육을 받았기에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맨 세상에서 잘 사는 그것만 생각해서 월급 많은 거, 좋은 회사 다니는 그것만 따진다. 좋은 회사 다닌다고 해서 다 사람이 좋은 거냐? 그렇지도 않다. 못된 사람이 참 많다. 이웃도 모르고, ‘큰 회사에는 사람이 많은데 거기에서 어떻게 사람을 사귀고 살까’ 하는 사람도 있다. ‘저런 사람을 어떻게 알아줄까’ 하는 사람도 많다.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는 인간관계다.
이방 세상 사람들 모두는 천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것은 전혀 모른 채 어린아이들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면서 세상교육을 중점으로 시키는구나. 또한 기독교 목사님들의 세계를 보면 교육을 시키는데 있어서 종교적인 교육밖에 없다. 우리 입장에서는 진리신앙 중심의 하나님 본질의 교육이 아니라면 하나의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교육으로 보는 거다. 타 종교와 같은 레벨권에서 보는 하나의 기독교 교육으로 보는 거다. 그런 교육의 정신은 세상 사람들의 정신과 똑같은 것이다.
애굽을 출발한 하나님의 선민들은 모든 사고방식이나 지혜지식이나 도덕성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가면서 점점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져 가는 것이 들어있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런 걸 모른다. 예수를 믿어갈수록 점점 인격적 속성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전혀 없다. 세상바람을 따라다닌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태도를 보면 자기 자식을 마치 인형처럼 키우는 부모가 있고, 또 사회의 큰 인물로 키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공부나 어떤 특정한 교육에 매달리는 부모도 있고, 즉 자식이 공을 잘 차면 우리나라에서 축구 잘 하는 선수가 다닌 학교로 보내고 한다. 또 아이의 기능과 재능에 별 상관없이 아이들 멋대로 자라나게 하는 부모도 있다. 또 부모 자기가 못 배웠으면 자식에게 자기 소원을 집어넣어서 부모의 욕심대로 키우느라고 아이를 달달 볶는 부모도 있다. 자식이 부모를 모르는데 영어를 하면 뭐 하고, 몇 개 국어를 하면 뭐 할 거냐? 어디를 가도 사람을 모르는데 그런 걸 잘 하면 뭐 할 거냐?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키워야 하고 자라나야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키우는데 먼저 엄마의 젖이 들어간다. 엄마가 많은 음식을 먹고 안 좋은 독소는 어머니가 다 취하고 어린아이의 젖은 순전한 젖이다. 그리고 품에 앉고 기르고. 그렇게 들어간다. 이와 같이 아이들은 자라면서 어른의 피부에 많이 다고 느껴야 한다. 그런데 자식을 쓰레기 버리듯이 버리는 부모도 있다. 또 자식을 편애하는 부모도 있다.
예수님의 교훈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오늘날 부모의 교육이, 아이를 양육한다고 하는 것이 천국교훈이 없는 버린바 되다시피 한 교육이 많다. 이것은 아이들의 장래가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보면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일이다. 오늘날 부모의 교육이 미래적으로 보면 비참한 거다.
그렇게 한 결과는 장차 진노의 날이 이르게 되는 건데 ‘아이 밴 자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한 거기에 들어가는 거다. 세상정신을 잔뜩 집어넣은 교육으로 기르는 자에게 화가 있으리라는 그 말이다. 교회 같으면 비진리적 이질적 세상 육적 부패성적 마귀적인 가르침을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세상성으로 가르치는 게 마귀적인 것인 줄을 아느냐? 하나님이 진노의 심판을 어떻게 하려느냐? 자기에게 어떻게 형벌이 올지 알고나 살자 그 말이다.
성경은 분명히 새사람이 있고 옛사람이 있는데, 성도라면 새사람 속사람이 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속사람을 모른 채 사는 기독교인들이 수없이 많다. 속사람이 잘 돼야 만이 ‘영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 된다’ 하는 그게 되는 거다. 그런데 영이 뭐가 잘 되는 건지도 모른 채 자꾸 껍데기만 잘 되기를 바라고 있다. ‘속이 깨끗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예수 믿는 원리를 말하는 거다. 이치를 말하는 거다.
18절-23절: 어떤 관원이 묻기를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어떤 관원이 영생을 말을 하고 계명을 지킨 것을 보니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관원이다.
이 사람은 나라의 일을 보는 관원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관원직까지 올라갔으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죽을 때까지 무난히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의 눈을 가지고 이 사람을 보면 신앙 좋고, 부자고, 그리고 관원이니 좋게 본다. 이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부러워하는 축복관이다. 직장 좋고, 부자이고, 신앙 좋고(?). 여기에 뭘 더 말 할 거냐? 예수 믿으면서 이런 사람을 달라고 하고, 그런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는데 이 성경을 보고 말 할 게 뭐가 있느냐?
‘선한 선생님이여’ 했다.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이다. 그런데 이 관원이 이 말을 한 것은 하나님은 선이시니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선에서 오신 분인 줄을 알고 ‘선한 선생님이여’ 하고 부른 것일까, 아니면 일반 도덕적인 개념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니까 ‘선한 선생님이여’ 하고 부른 것인가? 후자다.
선하다고 할 때 일반 도덕적 개념으로 세상 일반적으로 좋은 일을 하니까 그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하나님의 본질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 당신 자체가 선하시니 하나님의 그 선한 일을 하니까 그 말을 하는 건지 그게 중요하다. 이 관원은 예수님께서 세상 일반적인 좋은 일을 많이 하니까 그런 뜻으로 부른 것이 아닐까?
19절: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예수 당신은 선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이 관원이 근원적인 선을 모른 채 활동적인 선만 알고서 그 말을 하기 때문에 이 관원으로 하여금 자기의 말을 생각해 보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근원적인 선을 알아야 영생도 알 수 있는 건데 이것을 모른 채 일반적인 또는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영생이 얻어지리라고 알고 있는 그 지식이 잘못됐다 그 말이다.
질적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성품으로 만들어져야 영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관원은 자기 스스로가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하며 예수님께 자랑스럽게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다.
20절-21절: 예수님께서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냐? 아시고 물었다. 그러니까 2천 년 전의 그 부자의 속셈을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니라 다 아시면서 지금 현재 우리를 의식을 하면서 우리로 깨닫게 하려고 우리를 위해서 그 부자에게 그렇게 말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부자에게 첫째 계명에서부터 넷째 계명을 묻지 않으신 것은 아마도 부자가 영생을 물을 정도라면 이 관원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 지켰다고 보신 것이다. 이 관원은 어릴 적부터 신앙을 가진 부모 밑에서 문자적으로 십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철두철미하게 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이 있고 없고 간에 교역자 가정에서, 장로의 가정에서, 집사의 가정에서 부모들부터가 기본적인 신앙 규범조차 안 지킨다면 이게 말이 되느냐? 나중에 자기 눈에 피눈물이 나도록 하나님께서 치시면 어떻게 할까?
주일을 지키는 것도 이게 습성화 관습처럼 돼서 지키는 사람이 있고, 또 그나마도 안 잡혀서 제 멋대로 믿는 사람도 있다. 좋은 관습 습성은 자기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 더 올라가서 사람의 차원이 높아야 한다. 그래야 자유가 된다. 그런데 지극히 당연한 것마저도 지키지 못하면 제재가 온다. 남이 입으로 통해서 자꾸 제재가 간다. 그러면 그게 듣기 좋으냐? 그래서 ‘아이고, 이 교회 안 나온다.’ 그러면 어디로 갈 거냐? 제 멋대로 할 수 있는 교회로 가야지.
부자관원이 어릴 때부터 문자적으로만이라도 십계명을 지킨 것과 같은 이런 신앙마저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다. 목사도 추석날이라고 아침에 예배하고 오후에는 고향으로 가버린다. 그러니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 부자청년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
오늘날 교인들이 예수님 앞에 온 관원의 신앙을 보면서 첫째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 관원의 신앙이 참 좋다. 내 마음이 부끄럽다’ 그렇게 보든지, 아니면 십계명을 철저히 지켰다고 하니까 ‘고리타분한 율법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든지 할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은 십계명을 안 지켜도 되는 거냐? 아니다. 글자대로는 지키지 않지만 십계명의 정신은 그대로 지키는 것이다. 십계명 여기에는 이유가 없는 거다. 그대로 명령이다. 하나님의 법을 변개하면 어찌 되는지 아느냐?
그 다음에 오늘날 교인들이 그 관원의 신앙이 좋다고 하면서 ‘나는 그렇게 못 살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목사들 중에도 진리말씀을 들을 때 ‘말은 옳기는 옳은데 나는 저렇게 못 산다’ 하는 목사도 있다. 옳으면 옳은 대로 그렇게 살려고 하는 게 옳은 태도인데 ‘나는 그렇게 못 살아’ 한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목사의 세계에도 하나님 앞에 마음자세가 이상한 사람이 참 많다. 자기는 ‘나는 그렇게 못 살아’ 하면서 설교를 할 때는 이 관원을 판단할 것이다. 자기는 관원처럼 못 살지만 관원을 보며 판단을 할 거다.
22절-23절: 심히 근심하면서 갔으니까 이 부자관원이 죽을 때까지 평생 심히 근심하며 산 것이다. 그게 들어있다. ‘무슨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갔느냐’ 한 그것이 ‘그 사람은 평생 그렇게 살았다’ 하는 의미가 들어있다.
예수님 앞에서 병자가 나음을 받고 ‘기뻐서 돌아가니라’ 한 것도 있는데, 이 말에는 ‘집에 살면서 평생을 기쁘게 살았겠구나’ 그게 들어있다. 그리고 광야에서 ‘오병이어 떡을 먹고 집으로 갔다’ 할 때도 집으로 가서 이적의 떡을 먹은 것을 평생 생각을 하며 산 것을 말한다. 이적의 떡을 먹고 예수님이 축복하는 광경이라든지 하는 것을 마음에 품고 집으로 돌아가고, 집에 가서도 그렇게 살았고, 자녀의 교육도 그렇게 들어갔고. 이게 다 은밀계시다.
22절과 23절의 말씀을 한 분은 예수님이시다. 이 분은 천지창조 우주 천체와 모든 만물을 만드신 분이요, 인간 우리를 만드신 분인데 이 예수님의 말씀이 믿어질까?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이 믿어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을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늘의 보화를 얻을 것이 틀림이 없는 거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요 인간 자기를 만든 분이다. 이 분이 오늘날까지 여러 환경과 말씀 깨달음으로 자기를 간섭하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렇게 안 믿어지고 이상하게 세상이 말하는 것은 귀담아 잘 듣고 그리로 잘 쫒아간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다.’ 문자대로 보면 이것을 실천하기가 참 힘든 것이다. 우리는 문자가 문제가 아니라 생각을 돌려야 한다. 문자대로 보니 힘든 거지 생각을 돌리면 편하고 바로 믿는 건데 이 생각을 잘 못 돌린다. 자기 생각을 살짝 돌린다는 게, 고쳐진다는 게 그렇게 힘든 모양이다.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두 물질의 소유다. 이건 몸 밖에 있는 것이다. 이 물질의 소유는 땅에 속한 것이고 세상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물질이 풍부해도, 내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물질의 소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신령세계에 물질이 어찌 들어가느냐?
내가 가진 물질의 소유는 불타고 썩는 것, 변질될 거, 진동될 거다. 그러나 하늘에서 나에게 주시는 것은 참 보화인 하늘의 것, 신령한 것이다. 보화라 할 때는 굉장히 귀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하늘의 것, 신령한 것, 영능의 실력자가 되는 이게 다 보화다. 세상에서는 보화를 제일 귀하게 여기지만 그러나 땅에 속한 것은 보화가 아니다. 땅에 속한 것은 많이 가질수록 그로 인해서 자칫하면 자기 목숨을 빼앗긴다. 하늘나라에 가면 성이 전부 뭘로 돼 있느냐? 각종 보석으로 되어 있다. 거기에는 보화가 널려 있다.
땅에 속한 것은 보화가 아니다. 하늘의 것을 선택하여 갖는 것이 보화다. 그러니 선택을 하란다면 어느 것을 선택을 하겠느냐? 하늘 것? 땅의 것? 선택하는 지식에 의해서 그 지식이 ‘믿음 있는 지식이냐, 믿음 없는 지식이냐’ 이게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그 사람이 부자인고로 심히 근심하니라.’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네게 하늘에서 보화가 있다. 그리고 와서 나를 쫓아라’ 이 말씀을 하신 분이 인간을 만드신 분이요 만물을 만드신 분이다.
나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무엇을 가졌건 다 주님의 것이요, 심지어 우리의 몸과 목숨도 다 주님의 것이다. 땅의 것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다 불탈 것이다. 하늘에서 나에게 주시는 것은 영원히 생명의 것, 영능의 실력, 하나님의 속성화 되는 것, 영생이다. 땅의 것은 보화가 아니다. 하늘의 것을 갖는 게 보화다. 무엇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냐?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하다못해 자기 몸 목숨 건강이 있지 않느냐? 이것도 이 시간에 바꿔야 한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배우는 게 뭐냐? 돈과 바꾸는 거다. 그러면 그 학생은 실력이 높아진다. 그 실력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살면 돈만 있느냐? 보화만 있느냐? 그런데 깨닫지 못한 교회 인도자는 충성봉사만 죽도록 시킨다. 교회에서는 사람을 깨닫게 하고 차원을 높여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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