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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42 추천 수 0 2023.09.10 10: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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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9:34-44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934-4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34-40: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마지막 상경 길에 어떤 자는 나귀를 제공하고 어떤 자는 자기의 겉옷을 제공했는데, 제공한 이들이 모두 거지가 되고 얼어 죽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왕이 될 자는 나귀를 탄다고 했는데 모두가 예수님이 왕이 될 것을 믿고 그렇게 했는데, 만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들이 주님께 나귀나 겉옷을 제공을 했을까? 그리고 조금 지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것을 보고서 제공한 그 자들이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38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이 찬송은 어떤 자들이 부른 것이냐? 37절에서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해서 기뻐하는 자들의 찬송이었다. 그러니까 주님은 성지순례를 오심이 아니고, 또 예루살렘에서 명예와 영광과 출세를 해서 그 영광을 받으심이 아니고, 또 세상 일반사람들처럼 살으심이 아니었다.

 

주님의 나심도 우리의 구원, 살으심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살으심이고,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오심도 하나님의 지공법에 만족을 이루어 드리시는 곧,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려고 오시는 발걸음이다. 이 일을 위해서 역사하신 주님의 능한 일을 본 자들이 찬송을 불렀다. 또 이 찬송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군천사들이 부른 찬송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이 이 찬송을 부르지 못하도록 한 것인가?

 

하늘에서 주님탄생 때 찬송소리가 났고, 또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들어가시는 길에 무리들이 자기 옷을 펴며 찬송을 불렀다. 처음 탄생 때 부르는 내용과 지금 부르는 찬송의 내용이 같다. 그런데 이 찬송 부르지 못하게 한 자들이 어떤 자들이었느냐? 바리새인들이다. ‘어떤하는 여기에는 누가 또 못 부르게 하지?’ 하는 의미가 들어있다.

 

천군천사들이 부른 찬송과, 주님이 들어오실 때 무리들이 부르는 찬송이 다 하늘의 찬송이다. 사람이 불렀어도 그 내용은 천사들의 찬송과 같은 거다. 그런데 천사들이 부른 이 찬송을 지금 사람들이 불렀다고 해서 듣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그러서 부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사람이 깨닫지를 못하면 성경을 가지고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거역을 할 수도 있다.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거역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을 전달하는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성이 들어있는지도 분별해야 한다. 자꾸 세상적 사역으로 나가면 그 인도자는 주님의 의도성에 거역성으로 들어가 있는 거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요하는 뜻은 예수님은 인간을 불러 회개시켜서 하나님과 의사단일성으로 이루시는 분이요, 하나님과 의사단일성으로 이룬 자들이 부르는 찬송이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라는 것이다.

 

가장 높은 곳은 하나님의 보좌요 하나님의 나라요 신령한 천국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의 그 일을 한 자가 최고의 존귀 영광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도 즉, 모든 교회는 이 일을 하고, 사람이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영광자가 되는 것이요 존귀자가 되는 것이다.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구주 예수의 오심도 모르고, 하늘의 그 찬송을 못 들은 자는 마지막 찬송도 못 부른다. 어떤 삶이 참 삶이며, 어떤 신앙이 참 신앙인지 알지를 못하면 이 찬송은 못 부르는 거다. 찬송을 할 때 다 같이 부르는 찬송이 있는가 하면 자기 마음속에서 증거가 되어서 나오는 찬송도 있다. 각 찬송의 감화는 다른 거다.

 

바리새교인들은 어떤 왕이 참 왕이며, 무엇이 참 평화며, 무엇이 참 영광인지를 모른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이미 아는 자들은 아는 거다.

 

예수님은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가난한 목수의 집에서 태어나셨고, 사회적으로 유대인 동족들이 알아주는 학벌도 없고, 헤롯이 로마황제를 등에 업듯이 그런 것도 없는 볼품없는 자로 여김을 받고, 무시와 천대를 다 당했다. 그러니까 이런 예수님께 찬송을 부른다는 것이 그들의 귀에 거스리는 것이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께는 영광을 돌릴만한 인물이 못 되니까 그 찬송을 막은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교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모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알고 있다. 당신의 삶 속에는, 당신의 언행심사의 모든 발걸음 속에는 우리의 이 죽을 것을 죽지 않을 것으로 살려낼 수 있는 것이 들어있다. 전도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당신의 언행심사 생활 모두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삶이었다. 우리로 말하면 우리가 그런 정신으로 사는 것 전부가 믿음생활이다.

 

또 예수님의 삶의 걸음걸이 속에는 하나님의 온전으로 성장될 수 있는 실상의 이치가 들어있다. 인간들이 보기에는 전도 하고 병 낫게 하고 한 것이지만, 교인들이 볼 때는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고 살았지만 실은 성도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입히는 그 일을 하신 것이다.

 

깨닫는 것도 최고점을 깨달아야 감동도 진하고 생각도 깊고 사람이 고상해진다. 깨달음이 낮으면 사람이 올라가지 못하고 자기 수준이 기껏 올라가봐야 그 수준밖에 안 된다. 우리가 최고의 것을 알아도 얕은 수준에 머물고 있는데 얕은 수준의 것을 듣고 있다면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이렇게 되면 예수는 믿어도 그 사람의 신앙의 상태는 참 비참한 거다. ‘사람이 무슨 사건을 당해서 망했다그게 아니라 사람 속에 말씀의 열매로 들어있지 못하면 그 사람의 인격이 비참하고 처참한 것이다. 그 점을 생각을 좀 해 봐라 그 말이다.

 

곡식이 잘 여물지 못하면 타작이 되느냐? 버린바 된다. 곡식이 추수가 돼서 주인의 창고로 들어가야 할 텐데 여물지 못한 것은 추수를 하면 더 손해다. 그러니까 내팽개쳐 버린다. 곡식이면서 곡식이 아닌바 된다. 예수 믿는 사람도 그런 자가 많다. 그래서는 안 된다.

 

사람이 잘 깨달아서, 잘 다듬어져서 하나님의 손에 등용이 되고 쓰임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 세상도 일반적으로 똑똑하고 유능해서 대통령에게 들림을 받아 쓰임이 된다면 영광스럽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어느 쪽으로 등용이 되고 싶으냐?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의 정신 사상이, 삶의 지배성이 세상위주로 돼 있으면 그건 세상 등용성이다. 주님 쪽으로 등용이 되면 사람이 점점 존귀스러워진다. 존귀해지면 그 정도에 따라서 존귀한 일에 쓰임이 된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영광을 입히는 그 일을 하신 것이다. 주님은 진리의 왕으로서 진리통치, 선통치, 거룩통치, 생명통치,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입히는 이 통치를 왕으로서 하신 것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 되는 게 하나님의 영광을 입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영광을 입은 자는 입은 것만큼 찬송이 나오게 돼 있다.

 

9:9을 제사장들과 서기관 율법사들과 장로들 바리새인들 교인들 모두 읽고 들었다. 선지자들의 그 예언이 그들의 눈앞에서 실현이 되고 있는데도 그들은 몰랐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이 그들의 눈앞에 실현되고 있는데도 몰랐다.

 

지금도 계:을 보면 계:에 나오는 사건 상황 속에 자기가 끼어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걸 보고 내 신앙사상은 이러니 내가 이런 사건에 등용으로 들어가 있구나이걸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자기 위치 자기를 못 깨달으면 어떻게 깨닫느냐? 일반교회에 다니는 것처럼 하나의 종교인으로 주일만 지키는 게 아니다. 자기가 성경의 어느 속에 들어있느냐?

 

역사적으로는 당시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는데 무리들이 자기 옷을 길에 펴고 찬송을 부르는 거지만 그러나 그들이 부르는 찬송의 뜻 속에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있는 건데 그것을 모른다면 자기는 그 찬송에서 제외가 돼 있는 거다. 바로 알고 깨닫는다면 그 때의 그 찬송은 자기가 부를 찬송이기 때문에 내가 그 때 살았다고 하면 거기에서 내가 그 찬송을 부르게 되는 거다.

 

그들은 성경을 외우고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에게 대한 예언이 성취됨을 모른다.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메시아를 죽이고, 자신들이 진리의 대적자로 심판을 당할 자로서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그걸 모른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말세뿐만 아니라 현재 자기의 신앙정신 사상이 긍정적으로 이뤄져가고 있는지 부정적으로 이뤄져 가고 있는지, 자기의 정신도 이 구원운동에 대적인지 부정인지, 찬성인지 협조인지 동참인지 그게 들어있다. 자기의 신앙정신 사상이 어떤 바람을 타고 있는 건지 그게 있는 거다.

 

성경을 가르치며 마귀에게 이용을 당하다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그 찬송을 막은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40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냥 하고 내뱉는 소리가 아니다. 그런 인간은 길에 굴러다니는 돌보다도 더 못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이 된 것은 분명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있는 것인데 성경을 가지고도 그걸 모르고 하나님과 대적적으로 신앙을 해서 심판이 누적되고 있음에도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돌보다도 못하구나.

 

말세에 사는 우리에게는 자기 앞에 마지막 날의 심판의 상벌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자기의 신앙상태의 정신과 질을 잘 검토해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 예수님과 다른 입장에 서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는 소속도 진리, 입장도 진리다. 그런데 진리에 자꾸 뭘 둘러씌우고 가미하느냐? 이건 벌써 이질이다. 진리로써 사람이 돼야지 다른 것을 자꾸 가미하고 배경을 삼으면 큰일 난다.

 

하나님에게 옷을 입힌다면 무엇을 입히겠느냐? 어떤 걸 입혀야 하나님보다도 더 영광스런 하나님이 되겠느냐?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나타내려고 하게 되면 하나님은 자꾸 쪼그라진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학생들이 삼위일체에 대해 자주 왈가왈부하는데 이건 인간이 아무리 말을 해도 알쏭달쏭하다. 아무리 물어도 어느 목사도 뚜렷하게 말을 해 주는 목사가 없다. 하나님께서 눈에 나타나 보이는 일을 하신 것에 대해 말하기도 어려운 건데 하나님 자체를 삼위일체로 말을 하려니 어떻게 나타내겠느냐?

 

41-44: 어린아이들은 몸이 아프면 울고, 어른들은 마음이 아파야 운다. 저질적인 신앙은 세상의 일, 땅의 일에 속한 것에 울고, 신앙이 높은 신앙은 영에 속한 것에 대해 운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우는가? 우는 것을 보고, 우는 내용을 보아서 하늘에 속한 사람과 땅에 속한 사람이 나오게 된다. 예수를 믿으면서 무엇을 위해 우나? 무엇을 위해 사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알 수 있고, 또 기도는 잘 할지라도 실지로 사는 면에서 위주를 보아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성을 보고 울었다. 왜 울었나? 1. 집이 없어서 울었느냐? 2.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생각하니 슬퍼서 울었다? 3. 하나님의 심판이 예루살렘 거민에게 닥칠 것을 생각하니 울었다? 3번이다. 기독자는 우는 울음이 달라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게 그냥 전쟁난다그런 게 아니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위주와 중심으로 들어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교회가 아무리 진리로 나간다고 할지라도 신앙이 육적으로 나간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몰려오게 된다. 기독교 모든 교회가 육적으로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몰려오고 있는 거다.

 

구름이 몰려오면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면 구름이 형성되고, 검은 구름이 형성되면 반드시 빗방울이 떨어지게 돼 있다. 벼락이 치게 돼 있다. 이치다. 또한 평지에서 살면 비가 오면 그곳에 물이 차이는 게 이치다. 우리가 평지의 신앙으로 있으면 세상정신 사상에 잠기기 마련이다.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성경에 시온산은 높은 성읍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우느냐? 예루살렘 성 평화의 도시 안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또 그 안에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있다. 성전은 전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는 것인데, 그런데 당시에는 이 성전에 법궤가 없다. 그걸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라고 한다면 무형교회가 원 중심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영이 중생된 하나님의 독권적 주권적 역사가 들어있다. 이 무형교회를 중심을 해서 유형교회가 무형교회의 질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게 교회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하나님의 성전 성전하면서 이 성전 안에 법궤가 없다. 신앙의 중심이 되는 사상이 없다. 법궤가 없어진지 오랜데 이게 언제 없어진 줄을 모른다. 바리새교인들도 모르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모른다.

 

오늘날도 교회가 무형교회의 중심이 돼야 하는 하나님의 주권섭리 진리중심의 사상이 언제 없어졌는지를 모른다. 법궤가 없어졌는지 있는지도 모른다. 말세교회의 형태가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다른 사람이 갖다 내어버린 그 하나님의 진리이치를 찾아와야 한다. 모든 사람이 어린예수를 다 갖다 내버렸다. 우리는 찾아와야 한다. 찾아와야 구원이다.

 

진리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과 바꿔치기 하고 세상위주로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울음을 여기서 공감해야 한다. 예수님의 울음이 저 이방인들을 보고 우는 것이냐? 말하자면 주님이 보실 때 예수 믿는 나를 두고, 예수 믿는 우리교회를 두고, 예수 믿는 우리 가정을 두고 웃게 생겼는지, 울게 생겼는지 그걸 느껴봐라.

 

예수 믿는 자기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전이다. 그렇다면 자기 속에 성령님이 주격적으로 거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성의 정신과 위주 목적으로 살다보니 하나님의 신이 떠나더라. 네 개인적으로 볼 때 성령님이 떠났구나. 그런 너는 죽을 날밖에 없는 거다. 심판 받을 준비를 하라.

 

그들은 종교적인 의식은 다 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강대국 로마의 속국이었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직자들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 헤롯 밑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리고 그 후에도 역시 그랬다. 헤롯이 서기관들에게 왕이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으니까 그때서야 하는 말이 미가서의 예언을 들어서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했다. 그것도 헤롯왕이 물으니 그렇게 말을 했다. 그러니 그 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신앙사상을 생각해 보면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헤롯 밑에 있다는 것은 세상정신 사상 밑에서 세상의 일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종교 지도자들이 세상위주로 돌아간 신앙이라는 것이다. 오늘날도 이런 걸 많이 볼 수 있다. 이치로 보면 이게 보인다. 이치로 안 보고 세상 명예 영광으로 사역으로만 보면 못 본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평화인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그것이 아니고 완전히 세상과 평화가 돼 버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고 우시며 하시는 말씀이 42절에 네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몰랐다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과의 평화의 일을 몰랐구나.’ 이 평화는 유엔평화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몰랐구나.’

 

예수님은 아시기 때문에 자기의 백성에게 오셨다. 그런데 요:자기 백성에게 오매 영접치 않았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오니까 진리이치는 무시하고 내밀어 내는구나. 그러니까 종교적인 세상을 원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바꿔지는 게 구원인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건 모르고 종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일만 잘 해서 세상이 살기 좋아지고 평화롭게 지내고 하는 평화를 외치고 있다. 오늘날도 모든 교회가 특히 크리스마스 날 하늘에는 평화요하는 게 유엔평화 개념으로 외치고 있다.

 

평화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평화의 반대는 전쟁인데, 전쟁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다 평화를 원한다고 하는데도 싸운다. 그런 소원 목적을 가지고 전쟁을 하면서 이게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라고 하는 거다. 모두가 평화를 원하니까 안 싸우면 되는 건데 왜 싸우느냐? 통치자가 서로 다르고, 평화라는 바른 지식을 몰라서 그렇다. 그러니까 다 자기 식대로 해야 평화라고 하는 거다.

 

미국은 민주주의다. 대통령이 될 때도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한다. 그런데도 얼마 전에 난리가 났다. 그건 왜 그러냐? 서로가 자기 식대로 해야 된다고 해서다. 그러니 이것은 피 터지게 싸워도 평화는 안 된다. 왜 그러냐? 선악과 따먹고 나온 평화의 지식이라서 그렇다. 평화 하자고 할 때는 듣기는 좋으나 들어보면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평화를 말하는 거다.

 

교회도 역시 그런 사고방식의 사상을 가지고 평화를 외치고 있으니 오늘날 교회가 이 모양이다. 이게 말세교회의 현상이다. 교회에서 인조적인 평화를 외치지만 사람이 평화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그렇게 외치니 그런 거다. 교회통합? 안 된다. 교회에서 하나같이 연합해서 통일하자고 하는데 그건 안 되는 거다. 그건 성경이 하지 말라는 짓을 하는 거다.

 

유엔평화는 하나님 앞에서의 근본적 질적 평화는 아니다. 그러나 세상의 분쟁을 부분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억제를 시키는 역할은 된다. 그러나 근본적 역할은 안 되는 거다. 세상 법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잘 믿게 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견제하게 하려고 두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고 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 풀어놓는다. 그때는 유엔평화도 없다. 완전히 마귀세상이 돼서 최악을 발악을 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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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 누가복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18:43-19:10  김경형목사  2023-07-30 51
1400 누가복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눅18:35-43  김경형목사  2023-07-23 116
1399 누가복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눅18:34-43  김경형목사  2023-07-16 138
1398 누가복음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눅18:31-34  김경형목사  2023-07-09 34
1397 누가복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다 버린 자는. 눅18:23-30  김경형목사  2023-07-02 63
1396 누가복음 (계시보기)부활 속의 부활성을 붙잡아야 부활신앙이다/외. 눅12:27  김경형목사  2023-06-27 20
1395 누가복음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눅18:18-30  김경형목사  2023-06-25 76
1394 누가복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18:15-23  김경형목사  2023-06-18 76
1393 누가복음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18:9-17  김경형목사  2023-06-11 52
1392 누가복음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2:1-14  정용섭 목사  2023-06-09 182
1391 누가복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18:1-8  김경형목사  2023-06-04 112
1390 누가복음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눅18:1-6  김경형목사  2023-05-28 51
1389 누가복음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눅17:31-37  김경형목사  2023-05-21 94
1388 누가복음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눅17:22-33  김경형목사  2023-05-14 87
1387 누가복음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4  김경형목사  2023-05-07 138
1386 누가복음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21:10-19  정용섭 목사  2023-05-02 102
1385 누가복음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18:1-8  정용섭 목사  2023-05-02 153
1384 누가복음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정용섭 목사  2023-05-02 69
1383 누가복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눅17:16-19  김경형목사  2023-04-30 112
1382 누가복음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눅17:6-19  김경형목사  2023-04-23 70
1381 누가복음 신앙의 부부 눅1:5-13  강승호목사  2023-04-19 135
1380 누가복음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눅17:1-10  김경형목사  2023-04-16 104
1379 누가복음 만일 네 형 제가 죄를 범하거든. 눅17:3-5  김경형목사  2023-04-09 58
1378 누가복음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16:19-31  정용섭 목사  2023-04-03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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