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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원수가 나를 사랑하다니...

누가복음 한완상............... 조회 수 4323 추천 수 0 2003.07.08 11:24:35
.........
성경본문 : 눅10:33-35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지난 반세기 동안 6월은 우리 민족에게는 쓰라린 상처를 깨우쳐주는 아픔의 달입니다. 6·25의 죽음과 죽임을 몸소 체험 했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괴로운 회상의 달입니다. 저 자신도 낙동강을 건너지 못한 채 구미 어느 언덕 위에서 미군 폭격기가 계곡 마을을 집중 폭격하는 장면을 직접 보았습니다. 고향집으로 가는 길에 폭격을 맞아 급하게 길가 집 부엌으로 뛰어들어 아궁이 옆에 엎드렸던 기억도 납니다. 할아버님 계신 추풍령 골짜기에서 밤나무에 올라갔다가 폭격을 맞아 나무에서 떨어진 일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외사촌 자형은 폭격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식이 불구덩이에서 타 죽는 것을 직접 보고, 우리 집에 뛰어와서 부모님 앞에 눈물을 펑펑 쏟아 부으며 가슴 치던 장면도 생생하게 기억에 선합니다. 그간 6·25의 기억은 불행한 분단 시대를 더욱 고착시키는 방식으로 동원되어 왔습니다. 6·25의 노랫말을 보면 거기에는 동족을 원수로 낙인찍어 그들에게 철저한 복수를 맹세하는 섬뜩한 결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이 노랫말 2절에는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 온 다친 피에 원한을 풀으니,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라는 더 끔찍스러운 복수의 원한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지난 반세기 동안 줄기차게 부르면서 우리의 냉전근본주의 신앙 은 공고해졌습니다. 이 신앙으로 빛나는 나라를 세우겠다고 다짐해왔습니다. 기독교근본주의 신도들은 더욱 열광적으로 십자군이 되어 "맷도적 오랑캐"를 박멸하는 일에 앞장 서겠다고 다짐해 왔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신앙 열기로 지난 21일에도 10만 명의 냉전근본주의 신자들이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어 6.25노래를 힘차게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예수따르미들은 진솔되고 경건하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삶에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동족을 증오하고, 죽이고, 원한의 복수로 이를 가는 자세와 삶이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의 거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마태 6 : 44 - 45)

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

(로마 12 : 20).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따름이들에게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라고 당부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도들도 쫓기는 적을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모조리 무찔러 원한을 풀라고 권고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인 연고로 한국 기독교신자들, 특히 잘 믿는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근본주의 신자들은 이 6·25 의 노래를 확신의 정열을 가지고 힘차게 불러 왔을까요? 그들을 진정 예수 따르미라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자신들은 어떠합니까? 지금이야말로 정말 깊은 자기성찰과 자기반성을 해보아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우리는 전쟁을 피해야하고 절박하게 평화를 한반도에 펼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반성을 위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힘주어 가르치셨던 복음의 핵심 곧 하나님 나라(하나님 지배)의 본질을 새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추상적 기독교 교리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더 더구나 그것은 로마 제국처럼 막강한 군사력으로 지탱해온 왕국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경구와 비유 등의 말씀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증오, 추격, 박멸, 복수, 원한풀이, 전쟁, 승리주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 곳에서는 관용, 껴안음, 세움, 칭찬, 겸손, 용서, 평화, 동고(同苦)의 가치가 꽃피는 사랑의 동산입니다. 한마디로 사랑이 그 나라의 초석이요, 기둥이요, 지붕이며, 또한 가구요 그 집안의 주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우리의 원수로 인식된 사람들까지 사랑해낼 수 있을까요? 비록 사랑의 참 힘이야말로 로마제국의 군사력 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과 그것이 원수까지 사랑해내는 바로 그 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해도, 과연 우리가 그것을 실천해낼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사랑의 참 힘이 원수사랑에 이르게 될 때 폭발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머리로는 시인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그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우리의 수준 낮은 사랑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자식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으로는 어림없다는 것을 알고있지요. 동물도 그런 사랑은 인간 못지 않게 해내니까요. 이성(異性)간의 사랑으로는 더욱 어림없음을 잘 알고 있지요. 동물들은 인간보다 그러한 사랑을 더 잘해내니까요. 비록 인간은 자기 새끼 사랑에서 자기를 비워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긴 해도, 그것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룩할 수 없지요. 혈연, 지연, 학연에 따른 사랑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이 같은 세속적 연과는 전혀 관련 없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배척받듯이 당신도 고향 사람들에 의해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세속적 연줄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 곧 자기를 비워 남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는 사람 그래서 날로 새롭게 나아가는 자기 모습을 기쁘게 발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배에 속하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박해해온 원수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정말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 높은 수준의 사랑을 어떻게 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실마리를 던져 주셨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산 위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 실마리 한 가닥을 발견하게됩니다.

어찌하여 네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될 것이다.

(마태 6: 41 ?42 )

인간에게는 자신과 남을 평가함에 있어 일정한 장애가 있음을 주님께서는 이미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정확하고 진실되게 자기와 남을 인식함에 있어 장애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가 남보다 낫다고 하는 의식, 무의식의 교만, 바로 그것입니다. 이 교만, 더 나아가 독선이 인식과 판단을 왜곡시키는 주원인이지요. 그런데 이 같은 교만이 클수록, 자기 인식과 판단 (눈)속에 더 큰 장애물(또는 편견의 색안경)이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바로 이 점을 예수님께서 적절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원수와의 소통에 이르는 이정표를 발견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눈 속에 장애물(티)이 있음을 겸손히 인식하게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눈의 티가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더 큰 것임을 진솔하게 인정하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다른 사람과 소통의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이 다른 사람이 원수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 원수에게도 많은 결점이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나의 결점에 견주어 덜 심각한 것이라는 깨달음은, 원수에 대해 나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이것은 나아가 원수에게도 장점이 있을 수 있음을 인식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원수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고 있으면서 여차하면 그를 박살내려 합니다. 그 까닭은 우리의 눈에 들보가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들보로 인해 원수의 장점을 우리의 그 눈으로는 도무지 볼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대들보가 눈 속에 박혀있으면 도덕적 색맹이 되거나, 증오의 색안경 하나만을 끼고 세상을 보게 되지요.

그런데 원수의 장점과 매력을 솔직히 인식하고 그것을 느끼는 순간부터 나와 원수간에는 변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작가가 북한을 다녀와서 그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네 하고 감동의 글을 쓴 일이 있었습니다. 북한 주민은 모두 뿔을 달고 있는 붉은 악마(마귀)라고 오랫동안 확신했던 사람들에게 그 곳에 오히려 순박한 인간미 넘친 존재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언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이 신선한 충격으로 느껴지게 된 것은 그 느낌으로 비로소 원수와의 소통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있는 들보가 사라지면서 원수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됩니다.

내 눈의 티가 원수의 티보다 더 큰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내 속의 아름다운 것이 원수의 아름다운 것과 교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아름다움을 서로 키워주게 됩니다. Bush 대통령이 노대통령과 첫 만남 직후 "그 사람 편하게 얘기 할 수 있는 사람이더만"(easy man to talk to)라고 말했다는데, 정말 원수의 매력을 보게 되는 사람은 Bush 수준보다는 한 단계 더 높은 수준 곧 "그 사람 정말 함께 얘기 나누고 싶은 좋으신 분이네요"(good man to talk with)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기야 Bush는 자기 눈 속에 있는 티나 들보를 먼저 깨닫고 한 말은 결코 아닙니다만.

이렇게 될 때 원수는 나에게 아름다운 반면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의 좋은 점은 좋은 점대로 배우고, 그의 나쁜 점은 나쁜 점대로 보면서 그것을 결코 하지 않겠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지요. 나와 원수가 서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하게 되면서, 둘을 갈라놓았던 그 엄청난 차이와 증오의 벽이 점차 낮아지고 마침내 허물어질 수 있게 되지요.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즉 나의 눈 속에 있는 것이 들보요, 원수 눈에 있는 것이 티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특히 독선적 종교신자에게는 그러하며, 더 더욱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는 그러합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본문은 저희들에게 놀라운 하나님나라 세우기 비결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조적 완악함으로 원수를 사랑하지 못할 때, 뜻밖에도 원수가 우리를 오히려 먼저 사랑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철저한 종교적 율법주의에 매어 있거나 근본주의신앙에 갇혀 있을 때 우리는 도무지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그러한 존재의 근거가 원수에 대한 피 끊는 증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원수에 대해 마음 문을 단단히 잠궈 두고 있는 상태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악한 마음 문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원수가 오히려 우리를 먼저 사랑한다는 진리, 전혀 예상 밖의 진리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하나님 지배의 경탄할 만한 특징을 보게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많은 비판적인 성서학자들조차도(예수세미나 학자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비유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기존의 신앙틀, 유대인의 율법주의적 신앙 틀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예수의 <혁명적 발상>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리고 언덕에 쓰러져있는 무명의 한 유대인의 처지에서 이 비유의 교훈을 접근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떼를 만나 가진 것 모두(옷까지)빼앗기고 거의 죽을 정도로 심하게 얻어맞아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누가 와서 돌보아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실로 딱한 처지에 빠지게되었습니다. 그의 평생 이토록 절박하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했던 적은 일찍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어가면서 자기를 살려 줄 구원자를 보내달라고 애절하게 하나님께 간구했을 것입니다.

아. 그런데 마침내 그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거룩한 성직자 한 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의식이 가물가물한 가운데서도, 다가오는 사람이 틀림없이 사제(목사)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살았구나. 저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구해 주겠구나" 라고 감사하면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이 성직자가 가까이 와서 자기의 비참한 몰골, 피투성이가 된 몰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처참한 몰골을 보자 따뜻한 구원의 손길을 뻗치기는커녕, 헛기침 한번 하고 잽싸게 도망가 버렸습니다. 가여운 이 유대인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직자가 저럴 수가 있는가 하며 배신감에 떨었습니다. 어찌하여 선민의 대표자인 성직자가 불쌍한 동족 선민을 이렇게 버릴 수 있는가. 그는 의식이 가물가물한 가운데서도 허탈감과 절망감은 시리도록 아프게 느끼며 몸을 떨었습니다.

이때 또 다른 사람 하나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앞으로 성직자가 될 사람이였습니다. 하급 제관인 레위인이 오고 있었습니다. 저 분이야 말로 나를 살려 주시겠지. 앞으로 선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니까. "하나님 제발 저 레위인만은 저를 이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게 하소서" 라고 더욱 절박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도 가까이 와서 나를 보더니 구원의 손길을 뻗기는커녕, "피는 불결한거야. 시체는 더 불결한 것이니 만져서는 안되지...." 하면서 얼굴을 찌푸리며 사제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정말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도 해보지 않은채 죽었다고 쉽게 판단 내리고, 유대 율법주의에 따라 피와 시체에 대한 금기사항을 철저히 준수하겠다는 신앙의 일념으로 하급제관도 나를 버리고 말았지요. 나는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인데 불결한 시체로 보고 달아나다니... 선민 유대인의 율법이란 사람을 살리는 힘을 지니지 못했음을 새삼 통탄하고 통감하면서 이 불쌍한 유대인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번 배신감으로 떨었습니다.

그때 멀리 또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몽롱해진 의식으로 살펴보니, 그는 사마리아인이였습니다. 아니, 이렇게 절박한 때, 내 목숨이 경각에 달린 바로 이 위기의 순간에 하필이면 저 불결한 잡종인간, 사마리아인이 나타나다니,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 선민 유대인에게는 원수가 되는 저 잡놈 사마리아인이 왜 이 때 나타나게 하시다니.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저 더러운 사마리아인은 나를 보고 유대인인줄 알게 되면 확실하게 나를 죽여놓고 갈 것입니다. 확인사살당할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나님께 애소했을 것입니다. 죽어가면서도 더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 원수 사마리아인의 일거수 일투족이 이상하리만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동작 하나 하나가 관례를 뒤집는 일이요, 경악과 경탄을 자아낼 일이었습니다.

먼저 그도 유대인 사제와 하급 사제처럼 나를 살펴보았습니다. 피 흘리며 다 죽어 가는 벌거벗은 내 비참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좀 더 자세히 보는 것 같았습니다. 보는 것까지는 다른 두 사람과 별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행동이 앞의 두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나는 의식이 희미해지면서도 원수 사마리아인의 몸짓 하나 하나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놀랐습니다. 봉변 당한 유대인인 나의 처지에서 볼 때 다섯 가지의 감동적 충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충격은 이러했습니다. 내 원수는 나의 성직자들과는 달리 나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나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처럼 느꼈습니다. 동고의 표정으로 더 가까이 나에게 왔습니다. 내가 얼마나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나를 그는 느끼고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나와 함께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시체처럼 보인 나를 감히 만졌습니다. 유대인 성직자들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요 몸짓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나에게 바짝 다가와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그의 올리브 기름을 내 상처에 발라 주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포도주를 또한 내 상처에 붓고 붕대로 싸매 주었습니다. 원래 음식으로 먹고 마시는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이 위급한 상황에서 융통성 있게 그리고 아낌없이 활용하여 내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불결하고 재수없다고 믿었던 내 원수가 말입니다.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유대인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는데 사마리아인의 하나님은 응답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나의 기존 신앙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점입가경이라더니, 원수 사마리아인은 나를 일으켜 자기 짐승에 태워주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세 번째 나에게 준 충격이였습니다. 이미 자기 소유인 값진 기름과 포도주를 아낌없이 나를 위해 사용했는데, 즉 나의 원수는 스스로를 비워 나에게 좋은 것으로 이미 채워주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나를 자기의 나귀에 태워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이 세 번째 그의 행동은 자기소유의 비움 이상이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계획의 변경이였습니다. 단지 소유물 몇 가지만 내어 준 것에 끝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 원래의 여행계획 또는 삶의 계획 자체를 나 같은 불쌍한 유대인을 위해 변경시켰습니다. 이것은 그가 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동고주(同苦走)하느라고 자기계획을 수정한 것이지요. 그에게는 달림의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달림의 질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보다 전문적 치유를 할 수 있고 쉴 수 있는 장소인 여관으로 나를 데려갔습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그 때 여관은 호텔과 병원의 기능을 해낼 수 있는 곳이였습니다. 나는 감격에 겨워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이 다만 입술만 달삭거렸습니다.

그런데 더 놀랍게도 나의 원수는 여관집 주인을 불러내어 돈을 선듯 내어 주면서 나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세상 어디에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동족도 아니요, 친척도 아니요, 같은 회당 신자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 선민 유대인들에게는 원수인데 말입니다. 더더구나 사랑과 정의를 그토록 외쳐온 유대 성직자들은 나를 헌신짝처럼 외면했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나의 네 번째 놀람이였습니다. 자기 혼자 힘으로 나를 완전히 낫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치료비가 많이 들것을 감안해서 먼저 비용 일부를 선뜻 내어놓고 주인에게 나의 치유를 부탁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다섯 번째로 나는 정말 놀랐습니다. 그는 나를 여관 주인에게 맡겨놓고 떠나면서, 앞으로 치료비가 더 들 터이니 그것은 돌아올 때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추가 비용 모두를 내 원수는 갚아 주겠다고 다짐하면서 철저하게 나를 낫게 해 주도록 부탁했습니다. 이미 선수금을 받은 여관 주인은 사마리아인을 신임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어디 내 혈육이라고 해서 이렇게 철저한 사랑의 치유를 해 주겠습니까? 어디 내 부모나 형제라고 해서 내 원수만 하겠습니까? 아니, 내 회당의 회당장이, 내 교회 목사와 전도사가, 내 성당의 주임 신부가 저 사마리아인처럼 해주겠습니까? 정말 내 원수는 나에게 그야말로 총체적 사랑을 실천해 보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이 같은 놀라운 새로운 인간관계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본질임을 증언하신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간의 원수관계가 사랑의 관계로 놀랍게 변화되는 과정을 자세히 밝혀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도 유대중심주의를 깨어버리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유대인이 그의 원수를 사랑하는 얘기가 아니고, 반대로 유대인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먼저 유대인을 사랑하는 얘기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새로운 발상(paradigm shift)를 다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감동적이고 참신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유대인 희생자가 변화되는 과정을 다시 한번 주목해 봅시다. 처음 사마리아인을 보았을 때 경계심과 불안감, 특히 확인사살 당할 것이라는 공포감에 떨었는데, 사마리아인의 뜻밖의 돌봄에 그는 감동의 놀람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섯 번씩이나 깜짝 깜짝 놀라면서 그 유대인은 그의 완고한 유대교적 근본주의 신앙과 삶을 뼈저리게 되돌아보고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존 제도화된 유대근본주의가 준 부정적 충격도 한 몫 했습니다. 계속 여관에 머물러 치유를 받으면서 더욱 그는 자기의 유대주의적 관례와 독선적 선민 의식을 부끄럽게 회상하며 눈물의 회개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눈 속에 깊이 박혀있던 유대주의적 편견의 대들보가 사라져 버린 것을 느낀 것도 뜻밖의 놀라운 체험이였습니다. 이제 원수 사마리아인은 새로운 형제로 돋보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더 높고 더 선한 수준에서 자기가 다시 태어나는 것과 전혀 새로운 평화의 사회관계가 움터 나온 것을 감격스럽게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보여주고 싶어했던 새 하늘과 새 땅의 평화스러운 모습입니다.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이슬처럼 내리는 그 아름다운 모습 말입니다. 이 것이 바로 예수따르미가 세워야 할 바로 그 세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황무지 같은 한반도의 6월에 평화의 장미꽃을 피워 나가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비워 남을 좋은 것으로 채워, 나와 남 사이에 하나님 나라를 누룩처럼 번지게 하는 힘이요, 새로운 자아(참 나)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6월이 이제 평화와 환희의 계절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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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누가복음 열매 맺는 삶 눅3:8-9  한태완 목사  2007-11-07 3047
5 누가복음 믿음의 증거 file [1] 눅21:12-13  강종수 목사  2007-05-20 2315
4 누가복음 부활의 가능성 file 눅24:37-48  강종수 목사  2007-04-08 1981
3 누가복음 종교인과 그리스도의 제자 눅5:1-11  강종수 목사  2007-03-25 2328
2 누가복음 예수님과 동행 file 눅24:25-35  강종수 목사  2007-01-14 2770
1 누가복음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눅3: 25  한태완 목사  2006-08-27 4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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