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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적 코이노니아를 위한 하나 더

누가복음 김흡영............... 조회 수 1867 추천 수 0 2007.12.13 13: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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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5:1-2 
설교자 : 김흡영 목사 
참고 : 새길교회 
탕자의 비유로서 유명한 오늘 본문의 말씀은 보통 개인적인 구원의 문제, 인간의 방탕한 본성, 인간의 곤경, 회개와 교회로의 귀향과 성화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비유가 이것보다 심층적인 면,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에 대한 문제, 특별히 요즈음 세계 교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화해적 코이노니아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저는 이 잘 알려진 비유를 가지고 다음 세 가지 질문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정당한 항거의 조건은 무엇인가? 둘째, 구원 또는 화해의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셋째, 누가 화해의 잔치를 방해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화해적 코이노니아를 위한 "하나 더"는 무엇을 말하는가 입니다.
첫째, 정당한 항거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이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 그는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 아버지 집의 상속자는 그의 형이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의 종으로 운명지어진 그 집을 떠나기로 작정할 정도로 판단이 빨랐고, 아버지가 상속을 분배하기도 전에 그 재산의 몫을 주장할 만큼 계산이 빨랐습니다. 그는 장자 상속권 등 그 당시 사회제도의 불공평성 및 억압적 요소에 대하여 의식화되어 있었고, 분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운명의 주체는 자기자신이라고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의 가출은 그의 인권회복과 자유를 찾기 위한 하나의 정당한 항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이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보다는 신학적 문제들에 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작은아들 같이 허랑 방탕하여 하나님의 품을 떠난, 타락한 인간에 주어진 실존적 조건은 돼지보다도 못한 정황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정의 또는 해방운동의 당위성의 문제보다 중요한 신학적인 질문은 "네가 과연 하나님과 함께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정당한 해방의 노력도 그것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결과는 돼지와 같이 먹고사는 타락한 인간의 궁극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이 비유는 말하여 줍니다. 참다운 항거는 하나님과 더불어 있을 때 성립될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하여 먼저 각 개인이 하나님과 화해(즉 구원)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로, 그 화해의 구성요소는 무엇입니까? 이 비유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한 개인이 돼지와 같은 인간의 궁극적인 조건을 명백하게 깨닫고, 결단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와서 자기의 죄를 공개적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이 개인적인 사항들보다 그 다음 단계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이 이렇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 일어날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서 15장에 나오는 세 비유들은 모두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느끼는 기쁨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잃었던 이들, 곧 죄인들과 다시 이루어진 수직적 화해에 대한 하나님의 환희는 이웃에 있는 모든 공동체와 연대된 수평적 화해잔치로 연결됩니다. 길 잃은 양을 찾았을 때, 잃었던 동전을 찾았을 때, 잃어버린 작은 이가 돌아왔을 때, 이 비유들은 모두 이웃들을 불러 축제잔치를 벌립니다.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를 다시 이룩한, 구원의 한 개인적 행위는 공동체적 잔치놀이, 화해적 코이노니아의 행위로 발전됩니다. 따라서 구원은 단지 한 개인적인 일만이 아니고 공동체적, 좀 더 넓게 말하면 우주적 사건인 것입니다. 화해적 코이노니아는 이웃들과 자연을 우주적 놀이 밥상에 초대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것의 종말론적 비젼은 이사야 11장 6-9절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종말론적 평화공동체, 화해적 코이노니아에서는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어린 사자, 독사와 어린아이 등 약육강식의 먹이사슬과, 천적이었던 상극의 관계가 평화공존과 상생의 관계, 즉 우주적 더불어 살기로 완전히 변화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해의 잔치를 방해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런데 그 곳에 이 화해의 우주적 잔치, 화해적 코이노니아를 방해하는 훼방꾼이 나타납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이 비유는 그는 다름 아닌 소위 하나님의 집의 충실한 청지기로 그 화해적 코이노니아를 이룩해야 할 사람인 바로 큰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무서운 선포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은 예수께서 이 비유를 선포하는 맥락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세리와 죄인들을 향하여 수군거리는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비유는 사실 하나님의 큰아들들을 겨냥해서, 다시 말하면 교회 지도자들을 향하여 선포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셔서 한꺼번에 3개의 비유를 동시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따지고 보면 작은아들이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큰아들의 항변에도 정당한 사유가 있음직 합니다. 상식과 도덕성의 논리로 볼 때 큰아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일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작은아들이 불충과 방탕의 죄를 저질렀던 것은 분명합니다. 말썽 없이 꾸준하게 충성한 자기에게는 칭찬 한번 없더니, 그 못된 짓을 저지른 자를 위하여서는 오히려 잔치를 벌려주는 아버지의 처사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부당하고 분통이 터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의하는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대답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코이노니아를 이룬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미 다 가진 이들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세상에 있으되 하늘나라에 속한 그는 이미 하나님의 삼위일체 코이노니아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수직적 코이노니아는 즉각 이웃들과의 우주적 더불어 살기 수평적인 코이노니아를 성취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과정에서 버려진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들은 모두 잃어 버려진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우선적 선택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 같은, 열심히 잃은 동전을 찾는 여인처럼, 탕자 작은 이가 돌아오는 것을 반기며 큰 이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잔치를 벌리는 아버지와 같이, 잃어버린 이들 버려진 이들 죄인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잔치에 초대하고 계신 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화해적 코이노니아를 완성하기 위해서 큰아들에게 하나님과 더불어 있기 외에 잃어 버려진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하나 더"를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산상수훈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이 "하나 더"에 대하여 말하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가 6:39이하).
복음은 항상 율법의 논리보다 하나 더 나가주기를 요청합니다. 인간의 타락에 의하여 파괴, 균열된 불화와 상극의 창조세계를 다시 화해와 상생의 공동체로 변화시키기 위하여서는 상식적 도덕윤리와 율법으로만은 부족합니다. 그것들만으로는 인간의 굴레, 자기 사랑의 악순환의 궤적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악순환의 굴레를 부서뜨리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되셨습니다. 복음은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우리 십자가를 지고 그와 같이 율법보다 "하나 더"를 실행하기를 요구합니다.
오늘 비유에는 무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큰아들의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하나 더"적 실행이 없을 경우에는 그들은 구원의 은혜를 모르는 이들보다도 오히려 못한 하나님의 화해의 경륜을 방해하는 불충한 종들, 화해적 코이노니아의 훼방꾼, 심지어는 적으로 전락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러한 불충한 큰아들들의 악순환의 역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큰아들들에 의하여 자행된 오만과 시기와 횡포의 역사는 마치 하나님의 구속사와 변증법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듯, 도래하는 샬롬의 코이노니아 운동을 방해하고 소동을 일으킵니다. 창세기 4장은 인류 역사의 첫번째 살인사건은 인류의 시조 아담의 큰아들이 그의 아우 아벨을 종교적 이유에 의해 타살하는 것이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은 온통 이 불충한 큰아들들이 자행한 죄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장 극적인 것은 물론 구약에 약속되었던 메시아 예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당시 큰아들들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 더"를 감당할 수 없는 율법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성경이 큰이들에게 선포하는 "하나 더"의 무서운 기억들인 것입니다.
하나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온 작은아들들이 큰아들들로 행세하게 될 때의 문제입니다. 교회사는 큰이가 된 작은 이들이 전에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은혜를 무시하고, 이 무서운 기억들을 망각하고 스스로 자긍하여 불충한 큰아들들의 오만과 시기의 역사를 이어받는 오류를 범할 때가 많다고 폭로합니다. 콘스탄틴대제 이후 중세기에는 전에 억압받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영적 권세와 세상적 권세를 동시에 소유한 절대적 큰아들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큰아들 교회의 오만과 부패와 작은 이들에 대한 횡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수정하기 위하여 종교개혁은 필연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서구 개신교 교회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대신하여 더욱 넓어진 세계를 향해 큰아들 노릇을 해 왔습니다. 그들은 앞을 다투어 제3세계에 선교사들을 파송함으로 "하나 더"를 실행하는 듯 하였으나, 그것은 화해적 코이노니아를 위한 그리스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 큰아들들이 하나님의 코이노니아를 사유화하여 독점하기 위한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하나 더"이었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에 한국 개신교회는 제일 세계교회들과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동생교회 취급을 받으며 발전하여 왔습니다. 어느 듯 크게 성장하여 한국사회 전체와 제3세계 교회들을 향하여 이제는 또 다른 큰아들 행세를 하는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도 큰아들들을 향한 복음, "하나 더"의 무서운 기억을 심사숙고할 때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소위 20세기 그리스도교 선교의 기적, 한국 개신교회들은 과연 도래하는 화해적 코이노니아를 위해 참된 "하나 더"를 실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아니면 값없이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벌써 대형교회들을 자랑하며 거드름과 오만을 피우며 스스로 큰아들이 되어, 샴페인을 먼저 터트리고 잘난척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불충한 큰아들들의 역사의 바턴을 이어받은 화해의 훼방꾼들로 전락되어 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20세기의 종료와 21세기의 시작 사이의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 아직도 분단의 아픔과 한을 겪고 있는 상황 속에서, 서구 백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직도 돌아오는 작은 동생으로서밖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면서, 우리 사회와 제 3세계에 있는 다른 교회들을 향해서는 큰아들인체 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 오늘 비유의 무서운 선포는 무엇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일까요?
또한 한국교회들은 가난한 사람들, 배우지 못한 사람들, 병자들, 장애자들 등 한국 사회 안에 버려진 이웃들과 특별히 앞으로 만날 과거의 공산주의자들, 무신론자들, 타종교의 사람들 등 많은 이웃 사회 공동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 비유의 무서운 기억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21세기의 화해적 코이노니아의 조성을 위하여 이웃 사람들과 이웃 생태계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 더"는 무엇일까요?
오늘 비유에서 큰아들에게 주는 "하나 더"의 무서운 기억은 우리에게 다음 3가지 교훈을 가르쳐 준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회개와 겸손입니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죄인들입니다. 교회는 아직도 죄인들에 의하여 구성된 공동체인 것입니다. 충성된 큰아들들이 되었다할지라도 아직 하나님의 탕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회의 특성은 개혁을 완료했고, 현재 개혁되고 있으며, 장차도 개혁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질문들을 무엇보다도 먼저 끊임없이 계속하는 회개와 개혁의 맥락 안에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같이 죄인인줄 알고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자만(hubris)이 분쟁의 원인입니다. 작은아들의 의식화적 통찰은 중요하나, 그 "인식론적 자만"은 버려야 합니다. 큰아들의 경건성은 중요하나, 그 "도덕적 독선"은 버려야 합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다가오는 이웃 공동체들에게 겸허하게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20세기 초엽 서구 선교사들이 아세아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 토착전통과 문화에게 저질렀던 오류들, "인식론적 방자성"과 "윤리적 휴브리스"의 전통을 우리는 더 이상 계승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는 용서와 자비입니다. 우리는 구원이 공동체적인 사건이라는 점을 바르게 자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한 사회적 기관입니다. 교회의 선교는 지구촌적 성화와 우주적 화해의 종말론적 잔치상에 이웃들과 자연을 초대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가진 용서와 자비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도 반드시 남을 용서하여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극적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화해의 잔치상을 방해하고 소요를 일으키는 불충한 큰아들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잃어 버려진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서 그 화해의 잔치에 초청하여야 합니다. 진정한 용서와 자비를 가지고, 잃었던 이들을 위하여 뜨거운 사랑의 밥상을 준비하는 것이 21세기에 통일된 조국에 있을 한국교회에 던져지는 가장 중요한 사명의 하나일 것입니다.
셋째는 감사와 찬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는 동시에 우주적 더불어 살기를 말하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화해적 코이노니아를 이루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화해는 이제 존재론적인 것이어서 시기와 증오 또는 도덕율과 공의성과 같은 실존적 가치체계에 의하여 결코 방해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제 필요한 행위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찬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버려진 이웃들과 잃었던 자연을 우선적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벌리고 지구촌의 통전적 성화를 이루게 합니다. 이러한 찬미는 또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존재론적 권세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화해적 코이노니아에 참여하여 우주적 더불어 살기를 성취하게 합니다.
요약하면, 회개와 겸손, 용서와 자비, 그리고 우선적 선택권을 가지고 잃어 버려진 이웃 공동체들, 상처받은 이웃 생태계를 초청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잔치 놀이판, 즉 예배, 그것이 바로 화해적 코이노니아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께서 오늘 비유를 통하여 선포하신 화해적 코이노니아를 위한 "하나 더"에 관한 내용들일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 이 "하나 더"들을 실행하여 위임받은 화해적 코이노니아를 이룩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새길공동체가 그 신앙고백에 있는 것처럼 회개와 겸손, 용서와 자비, 그리고 잃었던 이들에게 우선적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진실한 예배 공동체로서, 21세기에 화해적 코이노니아의 완성을 위해 참된 "하나 더"를 실행하는 주역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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