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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7:2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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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25절-27절: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5절-26절: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꾀에 넘어가서 수모를 당하고 잡혀 죽고 하는 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런 일을 당하는 거냐? 당신의 몸이 사람들에게 잡히고 안 잡히는 게 당신의 주권에 있는 거냐, 그들의 주권에 있는 거냐? 주님의 주권에 있는 거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이 주님께서 역사적으로 겪은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잡히고, 죽고 하는 게 누구의 주권에 달린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 주님의 주권에 의해 당한 것임을 시인하는 게 놀라운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을 했음에도 세상사람들의 눈에 어긋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에게 잡히고, 죽은 것으로 알게 되면 바른 신앙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하면 당신의 주권으로 어떤 사건을 동원시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시는 건데 이것을 통해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 게 있는 거다.
구약이나 신약시대 때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죄를 할 때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 구약 때 이스라엘이 깨닫고 돌아오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으로 외국의 군대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침략하게 하는 건데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들은 이것을 알지 못한 채 자기 나라를 침략하는 외국군대를 미워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대표적으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같은 시험을 당할 때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고 나갔다. 그렇다면 오늘날 믿는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한다면 누가 이들의 신앙 믿음의 정신으로, 이들의 신앙사상의 정신으로 나갈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천국복음을 드러나게 말을 하는데도, 진리이치, 영적 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를 분명히 알아듣도록 말씀하셨는데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붙잡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예수님의 육신을 붙잡는 것은 인간 자기들의 주권에 달린 게 아니기 때문에 못 붙잡는 거고, 이들이 주님의 말씀에 쫄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을 붙잡아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붙잡아야 하느냐 하면 육신을 붙잡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꽉 붙잡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늘의 보좌가 움직이는 중차대한 일이다. 우리의 적중된 기도는 하늘의 보좌가 움직인다. 성도의 기도가 얼마나 귀한지 금 그릇에 담겨 올라간다.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이 말은 높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았다고 하는 불평불만의 소리다. 꼭 붙잡아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이들이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을 상황적으로 보면 자기가 모르면 아무 말도 못하는 거다. 모르면서 말을 하는 것은 헛똑똑이다. 또 하나는 예수님을 시험한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긍정을 해도 걸리고, 부정을 해도 걸리기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는 거다.
수평저울로 물건을 달 때는 저울을 평평한 곳에 놓아야 한다. 그리고 특별히 사람의 건강을 위해 약을 지을 때는 여러 약재들을 어림잡아서 넣어서는 안 되고 각종 약재를 저울에 정확하게 달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도 얼렁뚱땅으로 믿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이 분명히 있는 건데 내가 여기에서 벗어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단:에서 벨사살 왕이 잔치를 할 때 손이 나타나서 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씨를 썼는데, 다니엘이 이 말의 뜻을 해석하기를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은 자신들이 입만 열면 죄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칭찬하는 것은 자기 듣기에 좋은 소리를 할 때 칭찬을 하는 거지 ‘네 속을 고쳐라’ 라고 하면 칭찬은커녕 도망가 버린다. 잡아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은 숨 쉬는 것조차도 죄다. 공의로운 게 하나도 없다. 안 믿는 사람들이 ‘잘못했습니다’ 라고 해도 하나님에 공의를 기준으로 잘못했다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입지가 어려우니까 이걸 피하려고 하는 말이다. 이들이 예수님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의 말의 이치가 분명한 공의이기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는 거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암송하다시피 하는데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자기의 수준이 자꾸 올라간다. 사고방식이 신령성으로 올라간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뭐든지 주려고 하신다. 세상만물의 창조가 이렇게 들어가 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요셉의 자식이라는 것밖에 모르면서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건데, 그 이유는 첫째로는 예수님께서 감히 여호와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라고 했다는 거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로 통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면 내가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네가 왜 내 자식이냐?’ 라고 하실까, ‘뭘 해 줄까?’ 라고 하실까?
예수님께서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걸까? 아버지가 부인, 즉 하늘의 어머니로부터 예수님을 낳았기 때문이냐? 성경에 보면 하나님 어머니는 없는데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거냐? 무엇인가 말을 해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아버지라고 하는 거다. 즉 성경에서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당신의 자녀를 보호하고 양육을 한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고, 아버지의 것이 자식에게 그대로 상속이 된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교회 인도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면 교인들에게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줘야지 마귀의 유혹과 미혹으로부터 오는 물질성의 소원성을 주는 것은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면 교인들이 영인성장 면에 병이 들고, 망하고, 죽는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율법에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짐승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야 하느냐, 죽게 그냥 놔둬야 하느냐? 건져야 한다. 건져야 하는 이유가 뭐냐? 생명을 살려내야 하니까. 즉 사람의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살리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다. 이런 귀한 일을 안식일이라고 해서 안 해야 옳은 거겠느냐?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을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며 ‘아버지께서 일을 하시니 나도 일을 한다’ 라고 하시니 그들에게 정면 대결이다. 이들에게는 감히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도 뒤집어질 말이지만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게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 예수님을 죽이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다.
이걸 보면 이들의 신앙은 문자대로 들어가 있는 거고 예수님은 영적인 면을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반대가 된다.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정반대다.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것과, 내가 받으려는 것이 정반대일 수도 있다. 계시를 모르면 반대로 된다. 이러면 백날 믿어도 성경을 못 깨닫는다. 이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죽이고 싶어 했으면 예수님께서 19절에서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라고 했겠느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자신들은 성경을 달달 외우는데도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너희 안에 진리가 없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힐까? 우리가 주님께서 보시는 눈, 즉 그 영감을 가지고 당시의 유대인들의 신앙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 안에 진리가 없다’ 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시대를 초월해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 율법사들 앞에 가서 ‘안식일에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라고 말을 하면 맞아 죽겠느냐,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하겠느냐? 예수님을 죽였듯이 나도 죽이려 할 거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너무나도 거룩한 분이라서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들 앞에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면 죽이려고 할 거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마땅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거지만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나도 그냥 따라서 아버지라고 할 게 아니라 내 속이 아버지의 본질로 인격화 되어서 자동적으로 아버지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신앙의 질이 되어서 아버지라고 할 때 아버지께서 듣고 ‘뭘 해 줄까?’ 라고 하신다. 이게 인격 대 인격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인격적으로 와 닿지 않은 채 세상에 절여있는 상태로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위선이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이 시대가 진리의 성도를 부르고 있구나. 교회가 세계적으로 온통 세상화 된 이 상태가 얼마나 갈 런지 모르겠지만 길지 않을 것 같다. 교계적으로 중들과 손을 잡지 않나, 이방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을 하지 않나? 만물이 통곡을 할 일이다. 이런 시대에 살면서 설령 어떤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우선적으로 보호를 해야 만이 진리생명의 말씀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가겠구나’ 하고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지 ‘이참에 너부터 처리해야 되겠다’ 라고 하신다면 예수 믿는 보람이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은 다윗의 진리통치를 받았던 백성들이니 예루살렘의 거민이라면 당연히 그리스도에 대해 전문가처럼 잘 알아야 마땅한 거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더 전문적으로 알아야 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무리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편에 서겠느냐, 살리고자 하는 편에 서겠느냐?
27절: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이들이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육적인 형제들과, 아버지 어머니와, 누이들과 같이 살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잘 안다고 하는 거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이들이 왜 이 말을 하는 걸까? 이것은 이들이 선재적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신다고 한 성경말씀을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들이 고작 안다는 것은 성경 문자적으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 중에 다윗이 살던 베들레헴으로 온다는 것만 알고 있는 거다.
선재적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신데, 구약의 모든 일은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시던 무형적 예수님께서 하신 거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가 구원의 예수로 오시는 것인데 이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었고, 또한 오실 때 당시에 세계에서 제일 믿음이 좋은 성도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성경에 있는 대로 믿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초림 때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가 되어 오신 것에서 신앙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즉 우리가 신앙 믿음이 생기는 이치가 자기가 진리와 성령의 영감으로 감화 감동이 되어야 그때서야 믿음이 생긴다는 거다. 돈 주고, 밥 먹여주고 해야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 믿음이 들어간 사람을 형제처럼 여기면서 돈도 주고, 밥도 주고, 무거운 짐도 같이 지고 할 때 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다. 물질적으로 좋게 해준다고 해서 진리를 따르는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를 통해 이 땅에 오셨는데, 신앙 면에서 ‘동정녀’란 신앙정조를 지키는 성도를 말한다. 믿는 사람이 세상 것을 욕심내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며 신앙정조를 지키면 진리와 성령이 역사를 해서 믿음이 더욱 굳어진다. 구원의 믿음이 성장이 된다. 성령님은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이 역사를 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대로 믿고자 하는 성도를 감동 감화시켜서 굳건한 믿음을 갖게 하신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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