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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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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소재열 목사 |
참고 : | 의정부평안교회 http://www.uppch.org |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자나 높은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일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높은 사람이나 가진 사람이 가난하고 천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세상이 각박해 졌다. 내가 가진 것이 없고 힘이 없다면 나를 친구 삼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권력과 재력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서로 가까이하려고 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상대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냉정하리만큼 외면하는 것을 보았고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은 “없는 척하지 말고 있는 척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없는 척한다거나 불행하게 보이면 동정해 주고 도움을 줄 것 같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에게서 무엇인가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면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비정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절대로 상대에게서 무슨 도움을 받기 위해서 접근한 일은 없습니다. 도움을 받기 위해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아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시대 천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위로해 주셨습니다. 눈물을 닦아주시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소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시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들의 구원자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 주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무엇 때문에 오셨는가를 살펴봄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복음의 기쁜소식을 누시기를 원합니다.
1.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4-5절)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여러 지역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증거하셨던 사실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아무렇게나 계획도 없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시고 다니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행하셨습니다.
본문 4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면서 “(반드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기 위하여 다른 길로도 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는 것이 필히 되어져야 할 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반드시 자신을 나타내어야(계시해야) 할 뜻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로 가셨고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가라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이 있는 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셨습니다. 여인을 만나자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유를 본문 9절에서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둘째, 본문의 사건이 기록된 당시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같은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 시대 상황을 좀 이해해야 합니다. 즉 이 본문이 기록될 당시의 배경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함 때에 와서 나라가 둘로 갈라섰습니다. 북쪽은 이스라엘이라 했고 수도는 사마리아였습니다. 남쪽은 유다라고 했고 수도는 예루살렘이라 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경에 앗수르의 포로로 잡혀가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사마리아 성에 앗수르 사람들을 이주시켜 당시 잡혀가지 않고 남아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북쪽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순수한 유대 혈통을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혼혈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남쪽 유다 사람들은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신약 시대 유대인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돼지 처럼 취급했습니다. 또한 반대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적대시하였습니다. 이런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접근하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9절)고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사마리아 인들은 무시를 당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대제사장, 장로들, 사두개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은 귀족층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정치적 권력을 배경으로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이들은 613개조항에 달하는 방대한 생활 규제법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 법만 해도 꼭 지켜야 할 39개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규례들을 다 준수하려면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이 있는 기득권 층이 아니면 불가능하였습니다.
포도원 비유 등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인 하루벌이 품팔이꾼, 목동, 어부, 떠돌이 장사꾼, 창기, 그리고 세리 등의 사람들은 도저히 지키기 어려운 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과 규례 자체가 일반 사람들의 삶을 전혀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처절한 상황이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수가성 우물가에 등장한 여인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만족과 향락을 위해서 여섯 번이나 결혼을 해야 하는 여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 여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혼할 수 있는 권한은 없고 이혼을 당할 수밖에 없는 여인, 그래서 먹고살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여인의 가련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여인에게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그 여인이 안고 있는 상징성은 무엇입니까? 그 시대 비참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종교적 기득권에 있는 자들이 613개의 조항을 만들어 죄인으로 매장되어 있는 그들에게 우리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버렸고 외면했던 그 죄인들을 예수님은 말없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진정한 죄가 무엇이고 그 죄에서 구원을 받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희망과 소망의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 자신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 수가성 여인에게 찾아오셨던 우리 주님은 그 여인과 같은 그런 천한 자리에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말동무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얼마든지 그분과 기도를 통해서 만나고 대화를 합니다. 그래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소망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2. 영원한 생수로 자신을 나타내신(계시)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우물 가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사마리아 여인은 달라는 물은 주지 않고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을 물을 달라고 하는 예수님이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살펴 본 대로 유대인은 사마리아 여인과 상종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고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에 의해서 죄인 취급을 당했던 가냘픈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영원한 생수”로 나타내셨습니다.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영원한 생수”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수를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여섯명의 남편을 둘 정도로 쾌락의 만족을 위해서 몸부림쳤을지도 모릅니다. 갈증을 느끼며 만족을 누리지 못하며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갈증과 불만족 속에서도 유대인들의 괄시와 천대에 회의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여인에게 우리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의 말씀, 영생의 생수를 주셨습니다.
저는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의 잦은 싸움으로 불안한 정서를 갖고 성장기를 보냈다. 불안한 정서는 그 사람의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자 교회 중직의 직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란 불행한 환경들은 그 사람을 불평과 불만의 사람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교회에서 그는 언제나 부정적인 시각이었고 가슴 속에 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른 성도들과 어울리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그런 그를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있는 대로 대화를 했습니다. 개인 상담을 했습니다.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를 위로하면서 어려서부터 그의 가슴 속에 있는 응어리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당시에 그 사회에서 가장 천하다고 생각되었던 그런 사람에게도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영혼의 만족을 주신 예수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동안 형식적으로 자신의 약점에 대해 보상을 받기 위해 교회 다녔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큰 소리 치는 것이 자신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유일한 길이었고 그것이 삶의 숨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영혼의 만족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에서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위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더불어 다른 지체들과 연합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 교회 없어서는 안될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샘물로 오신 우리 주님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십니다.
3. 위로와 소망과 희망을 주신 예수님(6-14절)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한 순간의 만남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쓰라린 아픔과 고통은 그 여인을 불행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으면서부터 그의 의식은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과연 미래에 대한 소망과 희망이 있습니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 가운데 우리들은 방황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필연적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실적 위주입니다. 실적을 내지 못하면서 사회에서 도태되고 맙니다. 낙오됩니다. 그래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실적을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합니다.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게 되고 희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형태로든지 나를 붙들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 믿음은 우리들을 담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꿈이 있고 소망이 있는 자들에게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들의 소망과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절대로 우리들을 낙심케 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
말씀에로 초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멸시와 조롱과 천대를 받고 있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위로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더이상 희망이 없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희망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내가 너와 함께 해 주리라”고 하십니다.
왜 우리가 불안합니까? 그분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믿는 자녀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모시고 사는 우리들의 마음은 든든합니다. 희망이 보입니다. 모든 일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나누어주고 싶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제 그들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눈이 띄어졌습니다. 죄인에게 찾아오신 우리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의정부평안교회 http://www.uppch.org
그러나 내가 권력과 재력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서로 가까이하려고 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상대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냉정하리만큼 외면하는 것을 보았고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은 “없는 척하지 말고 있는 척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없는 척한다거나 불행하게 보이면 동정해 주고 도움을 줄 것 같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에게서 무엇인가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면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비정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절대로 상대에게서 무슨 도움을 받기 위해서 접근한 일은 없습니다. 도움을 받기 위해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아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시대 천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위로해 주셨습니다. 눈물을 닦아주시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소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시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들의 구원자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 주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무엇 때문에 오셨는가를 살펴봄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복음의 기쁜소식을 누시기를 원합니다.
1.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4-5절)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여러 지역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증거하셨던 사실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아무렇게나 계획도 없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시고 다니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행하셨습니다.
본문 4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면서 “(반드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기 위하여 다른 길로도 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는 것이 필히 되어져야 할 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반드시 자신을 나타내어야(계시해야) 할 뜻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로 가셨고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가라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이 있는 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셨습니다. 여인을 만나자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유를 본문 9절에서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둘째, 본문의 사건이 기록된 당시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같은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 시대 상황을 좀 이해해야 합니다. 즉 이 본문이 기록될 당시의 배경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함 때에 와서 나라가 둘로 갈라섰습니다. 북쪽은 이스라엘이라 했고 수도는 사마리아였습니다. 남쪽은 유다라고 했고 수도는 예루살렘이라 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경에 앗수르의 포로로 잡혀가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사마리아 성에 앗수르 사람들을 이주시켜 당시 잡혀가지 않고 남아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북쪽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순수한 유대 혈통을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혼혈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남쪽 유다 사람들은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신약 시대 유대인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돼지 처럼 취급했습니다. 또한 반대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적대시하였습니다. 이런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접근하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9절)고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사마리아 인들은 무시를 당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대제사장, 장로들, 사두개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은 귀족층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정치적 권력을 배경으로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이들은 613개조항에 달하는 방대한 생활 규제법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 법만 해도 꼭 지켜야 할 39개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규례들을 다 준수하려면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이 있는 기득권 층이 아니면 불가능하였습니다.
포도원 비유 등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인 하루벌이 품팔이꾼, 목동, 어부, 떠돌이 장사꾼, 창기, 그리고 세리 등의 사람들은 도저히 지키기 어려운 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과 규례 자체가 일반 사람들의 삶을 전혀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처절한 상황이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수가성 우물가에 등장한 여인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만족과 향락을 위해서 여섯 번이나 결혼을 해야 하는 여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 여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혼할 수 있는 권한은 없고 이혼을 당할 수밖에 없는 여인, 그래서 먹고살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여인의 가련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여인에게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그 여인이 안고 있는 상징성은 무엇입니까? 그 시대 비참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종교적 기득권에 있는 자들이 613개의 조항을 만들어 죄인으로 매장되어 있는 그들에게 우리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버렸고 외면했던 그 죄인들을 예수님은 말없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진정한 죄가 무엇이고 그 죄에서 구원을 받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희망과 소망의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 자신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 수가성 여인에게 찾아오셨던 우리 주님은 그 여인과 같은 그런 천한 자리에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말동무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얼마든지 그분과 기도를 통해서 만나고 대화를 합니다. 그래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소망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2. 영원한 생수로 자신을 나타내신(계시)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우물 가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사마리아 여인은 달라는 물은 주지 않고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을 물을 달라고 하는 예수님이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살펴 본 대로 유대인은 사마리아 여인과 상종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고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에 의해서 죄인 취급을 당했던 가냘픈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영원한 생수”로 나타내셨습니다.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영원한 생수”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수를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여섯명의 남편을 둘 정도로 쾌락의 만족을 위해서 몸부림쳤을지도 모릅니다. 갈증을 느끼며 만족을 누리지 못하며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갈증과 불만족 속에서도 유대인들의 괄시와 천대에 회의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여인에게 우리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의 말씀, 영생의 생수를 주셨습니다.
저는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의 잦은 싸움으로 불안한 정서를 갖고 성장기를 보냈다. 불안한 정서는 그 사람의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자 교회 중직의 직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란 불행한 환경들은 그 사람을 불평과 불만의 사람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교회에서 그는 언제나 부정적인 시각이었고 가슴 속에 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른 성도들과 어울리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그런 그를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있는 대로 대화를 했습니다. 개인 상담을 했습니다.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를 위로하면서 어려서부터 그의 가슴 속에 있는 응어리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당시에 그 사회에서 가장 천하다고 생각되었던 그런 사람에게도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영혼의 만족을 주신 예수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동안 형식적으로 자신의 약점에 대해 보상을 받기 위해 교회 다녔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큰 소리 치는 것이 자신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유일한 길이었고 그것이 삶의 숨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영혼의 만족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에서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위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더불어 다른 지체들과 연합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 교회 없어서는 안될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샘물로 오신 우리 주님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십니다.
3. 위로와 소망과 희망을 주신 예수님(6-14절)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한 순간의 만남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쓰라린 아픔과 고통은 그 여인을 불행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으면서부터 그의 의식은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과연 미래에 대한 소망과 희망이 있습니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 가운데 우리들은 방황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필연적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실적 위주입니다. 실적을 내지 못하면서 사회에서 도태되고 맙니다. 낙오됩니다. 그래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실적을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합니다.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게 되고 희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형태로든지 나를 붙들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 믿음은 우리들을 담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꿈이 있고 소망이 있는 자들에게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들의 소망과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절대로 우리들을 낙심케 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
말씀에로 초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멸시와 조롱과 천대를 받고 있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위로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더이상 희망이 없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희망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내가 너와 함께 해 주리라”고 하십니다.
왜 우리가 불안합니까? 그분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믿는 자녀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모시고 사는 우리들의 마음은 든든합니다. 희망이 보입니다. 모든 일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나누어주고 싶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제 그들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눈이 띄어졌습니다. 죄인에게 찾아오신 우리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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