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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971 추천 수 0 2009.04.07 22:5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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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5:11-1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463 

기쁨의 근거

일반적으로 비관론자들은 자기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나쁜 쪽으로 해석하고 그렇게 몰아가는 반면에, 낙관론자들은 정반대로 매사를 좋은 쪽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은 낙관론이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현실을 직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낙관론이 무조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렇게 병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기쁜 일과 나쁜 일을 구분해서 판단합니다.
자기에게 즐거운 일을 만나면 기쁨을 느끼고 나쁜 일을 만나면 슬픔을 느낍니다. 그래서 가능한대로 즐거운 일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게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컨대 자기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직장에서 승진이 잘되었거나 자기가 원하는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리기를 바라면서요. 그런데 어떤 점에서 인간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게 그렇게 객관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똑같은 일인데도 경우에 따라서 기분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이라면 평소에 자기가 기분 나쁘게 생각하던 사람을 만나더라도 얼굴에 함박웃음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기쁨은 어떤 객관적인 조건에 의해서 달라진다기보다는 그 사람의 삶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늘 로또 1등에 당첨된 것 같은 기분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기쁜 삶이 보장될 테니까 말입니다.  
지난 2003년 한 해를 뒤돌아보십시다. 과연 우리가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왔는지 아닌지 말입니다. 지난 한해 동안 정치, 경제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사람들에게는 정말 짜증스러운 한 해였는지도 모릅니다. 올해는 모든 일들이 좋게 풀리기를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희망을 갖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기쁘게 살아야 한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에게 아무리 기분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기쁨의 순간은 잠시뿐이고, 오히려 기분이 축 처질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럴까요? 즐겁게 살아도 짧은 인생을 짜증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배운 게 부족하거나 가정환경이 나쁘다거나, 또는 괴팍한 성격을 타고났다는 것만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기쁘게 살아갈 수 없는 인간 보편의 근본적 한계가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 인간에게는 삶을 완성시킬만한 능력이 근본적으로 부족한 게 아닐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 11절에서 예수님은 '내 기쁨'을 나누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삶의 조건이나 상태이기보다는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연관성이 오늘 본문의 앞부분인 15:1-10에 '포도나무' 비유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읽을 때 약간 마음이 언짢을지 모릅니다. 인간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데 예수를 떠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하고 말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혼자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정신적으로 아주 뛰어난 사람들은 오랜 세월 자기와 세계를 성찰함으로써 어느 정도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획득하기도 합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부처나 노자 같은 성인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달한 세계가 과연 절대적인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도저히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에 들어간 것만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특별한 사람들이 경험한 절대의 세계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가르침이 동일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아직 모르는 차원에서 부처나 노자에게 임한 절대의 경험이 바로 예수가 말씀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문제는 아마 종말에 가서야 우리에게 확연하게 드러나겠지요. 그때까지 우리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절대적인 경험이 바로 예수에게 직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변증하고 확증해내야 할 선교적 사명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에 서술된 이 말씀이 진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즉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의 삶이 기쁨으로 가득 채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기쁨의 토대입니다.  

내 기쁨

11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주겠다는 '내 기쁨'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찾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이외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심으로써 결국 메시아가 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런 예수님의 기쁨을 경쟁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성서는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하나님과 맺은 관계가 배타적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예수님의 자리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특별하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의 기쁨도 역시 그에게만 허락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경쟁할 수는 없지만 그의 기쁨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졌다는 사실은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일상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해도 역시 기쁨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당장 돈을 벌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하고, 친구도 사귀어야 합니다. 교회도 역시 그런 현안이 많습니다. 교회를 운영하기 위한 크고 작은 일들, 전도와 선교 프로그램, 교회당 건축 문제 등등, 일반 기업들이 신경을 써야 할 만큼 교회도 그런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등한히 하게 됩
니다. 이렇듯 사회생활이나 교회생활에서 상투적인 일에 우리의 마음이 고착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무언가 열정적으로 생활하는 것 같지만 그 삶 속에 근본적인 변화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가정 안에서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 형제 사이에 하나님이 주제로 등장하는 경우는 참으로 드뭅니다.
저는 현대적 삶의 틀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경우에 이런 변화는 필수적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토대하고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가 기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이 기독교적 근본주의로 돌아가자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근본주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길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과의 열정적 관계라는 차원에서 바리새인들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습니다만, 그런 열정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켰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깎아 내리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발견해내기 힘든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길을 갔습니다. 한쪽은 자기들의 전통을 절대화하는 근본주의자들이었으며, 다른 한쪽은 자기를 비우고 참되게 하나님에게 마음을 여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요즘 세계의 정치, 경제가 '신자유주의'에 물들 듯이, 한국교회도 역시 '신근본주의'에 물들어간다고 봅니다. 이들은 지난 세대의 근본주의자들처럼 무식하게 '기복주의' 신앙을 전달하지는 않지만 교묘한 방식으로 그런 신앙을 더 고착화시킵니다.
소위 '청부론'을 부르짖으면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념적으로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멀티 미디어를 통한 열린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결국 인간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는 현대의 가벼운 대중문화에 빠져듭니다. 일종의 대중추수주의입니다. 물론 돈이 중요하기도 하고, 대중문화도 역시 우리 삶의 한 부분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런 문화와 동일시해버림으로써 결국 하나님은 침묵하게 됩니다. 오늘의 신근본주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게 아니라 단지 상품화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참된 기쁨이 아니라 욕망의 충족으로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약점이 많았던 기존의 근본주의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쁨은 사랑으로부터

예수님은 '내 기쁨'을 나누어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겠다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9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예수님은 무슨 의미로 기쁨을 나누어주겠다고 하시면서 곧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걸까요?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하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경험은 젊은 연인들이나 가족, 친구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능합니다. 사랑 받고있다는 마음이 있어도 역시 우리는 기쁩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삶이 자주 짜증스러워지고 불안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거나 아니면 사랑을 오래하고 있거나 말입니다.
또는 기쁘게 살고 싶기는 하지만 사랑하고 싶지는 않다는 모순이 우리에게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기 싫다면 기쁨을 포기하든지, 기쁨을 원한다면 사랑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은 외면한 채 기쁨만 원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우리는 기쁨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단지 좋은 영화 한편 보고 나거나,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느낄 수 있는 감동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 감동은 조금 지나면 아주 시시한 일이 되고 말기 때문에 결국 기쁨은 오지 않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우리가 사랑을 욕망의 성취로 생각한다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이혼율이 거의 50%에 육박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현상에 대해서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이 이루어진 결과라는 사회학적 분석이 가능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결혼을 욕망의 계기로 삼았다는 해석이 더 옳습니다. 자기가 기대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더 이상 함께 살고 싶은 욕망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상대방을 이용해서 자기를 성취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참된 사랑 안에서 상대방을 생각하고 결혼했다고 한다면 서로의 생각에 차이가 있더라도 아주 극한 상황이 아닌 경우에는 이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상대방을 이용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귀한 존재로 여기니까 말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욕망을 성취하고 싶다는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 사랑합니다. C.K. 바레트 성서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말하자면 아버지와 아들과 신자들 사이의 연합 안에 있는 존재의 결속이다." 이런 점에서 사랑만이 인간 관계를 진실하게 생산해낼 수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아무리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참된 관계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관계는 늘 소유와 욕망에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간혹 신학대학교 안에서도 상담심리학을 전공한 선생들이 인간관계 훈련을 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몇 과정을 거치면서 독단적이고 폐쇄적이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합니다. 내가 직접 그런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방식의 접근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심리적 치료를 통한 관계 개선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원만한 인격을 형성하게 하는데 일정한 부분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참된 인간 관계로 승화시킬 수는 없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기쁨의 차원으로 끌어올리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인간관계의 뿌리는 하나님이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8절)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너희도 서로 사랑해야만" 기쁨이 넘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이제 기쁨과 사랑은 역학적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높은 지위에 올라서야만 기쁠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사랑함으로써 기쁨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셨습니다. 혼자 유유자적하며 소요하는 듯한 자기만족에 빠져들 수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통해서만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계명과 열매로서의 사랑

예수님은 이 사랑의 삶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사랑을 '계명'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4, 15:12, 15:17에 연달아서 사랑이 곧 새로운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의무감으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랑은 곧 율법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삶에서 가장 우선적인 과업으로 여겨야 할 대상이라는 점에서 사랑은 곧 계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우리의 삶을 걸어둔다는 뜻입니다.
2004년 한해에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리고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의 친구로서 무슨 계명을, 무슨 사명을 갖고 살아야 합니까? 두 말할 것도 없이 서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잃어버렸던 첫사랑을 되찾는 것이라거나 달콤한 연애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은 어느 사이에 우리를 또 다시 분노하거나 짜증나게 할 것입니다. 오늘 16절의 말씀에 의하면 그런 것은 썩을 열매입니다. 썩지 않을 열매인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넘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삶이 우리에게서 풍요로워져야 하겠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늘 그런 삶을 기준으로 나의 삶을 성찰하려고 합니다.
이런 일은 내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단초가 필요합니다. 흡사 내 마음의 화롯불에 불을 지피려면 불씨가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바로 사랑의 불씨입니다. 하나님을 본 분은 외아들인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의 본질을 아는 분도 역시 예수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포도나무인 예수님에게 잘 붙어있으면 '썩지 않을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 말입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넘치게됩니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이 2004년 한해동안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20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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