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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693 추천 수 0 2010.03.21 23:30:28
.........
성경본문 : 요13:34-35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 

2003.1.19

 

결혼한지 60년이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었답니다. 오래 동안 같이 살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하여 정이 붙지 않았습니다. 그저 마지못해 살았답니다. 두 분이 하도 답답하게 사셔서 어느날 자식들이 텔레비전 노인들이 출연하는 프로에 보내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스피드퀴즈를 하였답니다. 할아버지가 문제를 내고 할머니가 답을 맞추는 것입니다. 사회자가 '천생연분'이란 문제를 할아버지에게 보여 주었답니다. 그 때 할아버지는 '당신과 나 사이'라고 설명했답니다. 할머니 조금도 주저함 없이 '웬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당황스럽지만 다시 설명했답니다. '두 글자 말고 네 글자' 그 때 할머니가 '평생웬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같이 살면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원수로 살고 있습니까? 자녀들을 원수로 생각하십니까? 교회 다니면서 교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원수 보듯 대하고 있습니까? 교회에 나오기 싫다는 어느 성도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분 때문에 교회에 나오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 직책을 맡기에는 역량이나 인격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그 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요?" "예수님께서 그 분이 그 직책을 맡는 것을 싫어할까요?"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약한 자를 들어 쓰시고 부족한 자를 사랑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아닐까요? 우리는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흠이 있고 모순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롬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모순 덩어리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우리가 머무는 곳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머무는 가정이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머무는 직장이 우리가 머무는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자신을 부인하고 도망갈 제자들, 서로 높다고 다투는 제자들 앞에서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설교의 대 주제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통해 검색해 보면 요한복음에서 ‘사랑’이라는 말씀이 56회 이상 나옵니다. 그런데 그 중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시는 13장에서 21장 사이에 40회 이상이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예수님께서 사랑을 강조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명령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사랑해도 좋고 사랑안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명령은 순종을 요구하고 그 명령을 거역하면 그에 따른 형벌이 따르는 것입니다.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그에 따른 징계를 당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사랑하지 않으면 가정은 지옥같고 교회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차고 나라는 전쟁의 위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랑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랑은 감정에 의해 변화되는 정서적인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명령했기 때문에 의지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나와 성격도 맞지 않고 보기 싫은 점이 있어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더불어 한 시대를 살게 하신 우리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은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결심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결단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람을 보는 사람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남편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면 남편을 돈버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아내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면 파출부로 생각합니다. 부모를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은행으로 자녀를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면 자녀를 노후 보장용으로 생각합니다. 사랑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사랑하면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가족 공동체도,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두에 이야기한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텔레비전을 보았던 동네 친구가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바깥 어른은 잘 계쇼?" 그러자 할머니가 태연하게 "지난 주에 죽었다우. 저녁에 먹을 상추를 캐러 나갔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지 뭐유?" 할아버지가 회개하고 남은 여생 사랑해 보리라 마음 먹고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상추를 캐러 가다 그만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친구가 "저런, 쯧쯧, 정말 안됐수. 그래서 어떻게 하셨수?" 그랬더니 "뭐, 별수 있나? 그냥 깻잎 사다 먹었지."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적인 사랑은 오래 가지 않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사랑의 정체를 연구한 것이 신문에 발표되지 않았습니까? 사랑의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의 정체를 분석해 보니까 암페타민, 엔돌핀 옥시토신이란 체내 화학물질에 근거하여 사랑의 감정이 나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의 양이 부족하게 되면 연애, 사랑의 열정이 식어져 버린다는 얘깁니다. 암페타민계통의 물질은 사랑의 순간부터 2~3년이 지나면 분비량이 줄어들어 사랑의 감정이 식어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부부사이 불화가 오기 시작하는 시기가 3~4년이라고 볼 때 어느정도 들어맞는 얘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부부애가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이유는 사랑의 묘약같은 암페타민의 분비가 줄었다해도 평화와 안정감, 기쁨을 주는 엔돌핀 생성이 계속되기 때문이라고 과학자들은 주장합니다. 만일 엔돌핀 마저 줄어든다면 그때는 사랑이 완전히 끝장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만병 통치약으로 "사랑의 묘약"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언젠가 텔레비전 광고에 예쁜 여인이 나와 "사랑, 이 한 알이면 끝내 줍니다."라고 선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회사에서 중대한 결제를 맡은 때 미리 "사랑의 묘약"을 한알 사장에게 먹인 후 들어가 결제를 맡고, 부부가 가정 문제로 사랑이 식어지면 "사랑의 묘약" 한 알씩을 먹으면 사랑의 감정이 부풀어오르고, 문제있는 인간 관계를 회복하는 특효약으로 사랑의 묘약이 사용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단지 동물적 사랑에 불과할 것입니다. 유희적 사랑, 자기를 만족시키는 사랑에 불과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의지적인 자기 희생에 있습니다. 이 사랑의 능력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이미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5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시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파도타는 사람은 파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파도를 잘 타면 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능력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이미 받는 사랑을 하면됩니다. 드라이브하는 사람은 차를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차를 타면됩니다.

2.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1)예수님께서 사랑한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34). 사랑의 동기가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1)희생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제자들을 사랑했습니까? 오늘 본문의 맥락을 보십시오. 유월절 마지막 성찬식을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종들이 하는 일을 선생으로 낮아져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이 희생적인 사랑은 어떻게 발전합니까? 십자가를 지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가장 고귀한 생명을 내어 놓았습니다. 내의 유익을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욕구 충족의 사랑이 아닙니다. 타인을 위한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것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위한 희생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0)"라고 했습니다.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섬기는 사랑입니다. 섬기되 생명을 내어놓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원리가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힘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힘있는 자가 지배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는 힘있는 자가 희생으로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직업군인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에서 아이들이 모였답니다. 한 아이가 "너희 아버지 계급이 뭐야" "우리아버지 상사야" "까불지마 우리 아버지는 대위야" 그 아이가 대장이 되었습니다. 이때 느닷없이 "까불지마 우리아버지는 대령이야" 한 아이가 "내가 대장이야" "네 아버지 계급이 뭐야" 물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헌병이야" 아무리 대령이라도 헌병은 잡아가는 거야 이제 헌병아들이 대장이 되었습니다. 이때에 한 아이가 "어림없는 소리하지마 너희들 모두 내 부하야 내 말에 복종해야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때 아이들이 일제히 니네 아버지는 계급이 뭐야 "우리 아버지는 헌병도 처분하는 엿장수야 " 그러드라는 것입니다.
직분 자랑하지 말고 힘자랑하지 말고 돈 자랑하지 말고 지식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어진 것으로 희생하며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수님이 원하는 교회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희생의 원리, 섬김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힘으로 얻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희생의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남이 나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보다 나에게 해를 끼쳤을 때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는 사람들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2)포용적인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맥락을 보십시오. 21을 보십시오. 유다가 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예수님은 분노하며 유다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영광을 얻을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역을 완수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릴 것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자신을 팔아 버리고자 한 가롯 유다의 배신을 아시고도 끝까지 그를 품에 안아주십니다. 이렇게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끝없이 포용하며 용서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발전합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끝까지 용서함으로 사랑합니다. 끝없는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경험한 베드로는 [벧전]4:8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다고 경고하면서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계명과 질적으로 다른 새 계명입니다. 성경에서 새롭다는 단어는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네아가 아닙니다. 질적으로 새롭다는 카이넨을 쓰고 있습니다. 옛계명도 사랑의 계명이 있습니다. 십계명도 결국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레위기19:18절에서는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새계명입니까? 예수님의 계명은 동족 이스라엘 사람만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한다는 것에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원수라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사랑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계명입니다. 죄인을 사랑하신 사랑이며, 배반자까지도 사랑하신 사랑이며,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포용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가 그의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그를 게으르다하고 내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나는 너무 바쁘고 많은 일에 눌려 있기 때문이라 하고, 만일 그가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하면 수다장이라 하고, 내가 다른 이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건설적인 비판을 한다고 하고, 만일 그가 자기 관점을 주장하면 고집장이라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개성이 뚜렷해서라 하고, 만일 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콧대가 높다고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그 순간에 복잡한 다른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고, 만일 그가 친절하게 하면 나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 그렇게 친절하다 하고, 내가 친절하면 그것은 내 유쾌하고 좋은 성격의 한 부분이라 한다"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보고 계십니다. 사랑이 없이 교역자를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이어리면 경험부족이라고 합니다. 많으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합니다. 식구가 많으면 미련하게 애만 많이 낳다고 합니다. 적으면 가정을 이해 못한다고 합니다. 옷을 잘입으면 사치한다고 하고 못입으면 교회 위신과 명예를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설교를 박력있게 하면 소리만 꽥꽥 지른다 하고 차분하게 하면 아침밥도 안 먹었나 합니다. 목사가 뚱뚱하면 밤낮 돼지처럼 무엇을 잘 먹어서 저렇게 뚱뚱할까?라고 하고 날씬하면 얼마나 은혜가 없어서 먹기는 혼자 먹으면서도 저렇게 빼빼할까?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예뻐지는 것입니다. 자식 사랑하니까 자식 낳고 얼마나 예쁩니까? 행복의 범위는 사랑의 범위와 같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면 그만큼 우리의 행복의 범위는 넓어지는 것입니다.

2)서로 사랑해야 합니다(34).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쪽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어떤 사람은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가진자든 못가진 자든, 배운자든 배우지 못한자든, 미운자든 고운자든, 성공한 자든 실패한 자든, 내게 유익을 끼친자든 손해를 끼치자든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까운데서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가족부터 사랑하고 옆에 앉은 교회 식구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상품이 아닙니다. 사랑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사랑은 유희의 도구가 아닙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 4:20)"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우리에게 사랑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내가 시어머니에게 애교있는 말로 안부전화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 내가 세상지식과 지혜로 교회의 집사가 됐을지라도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재물로 시어머니에게 용돈을 드려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은 시어머니가 무리한 요구를 할지라도 참고, 시어머니가 좀 심한 말을 할지라도 온유하며, 남편이 시어머니 앞에서 재롱을 부려도 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시어머니 앞에서 교만하지 않으며 시어머니에게 무례히 행치 아니합니다. 사랑은 화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와도 참으며, 가사가 힘겨울지라도 끝까지 견딥니다”

3. 우리가 사랑하면 사랑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납니까?(35)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확실한 표식이 바로 사랑입니다.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터튤리안(Tertullian)이라는 교부의 글에 보면 초대교인들은 종종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라는 말로 전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하면 사랑이라는 등식이 성립이 되었습니다. 프 란시스 쉐퍼 박사는“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제자 된 유일한 표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교회는 규모로 예수님이 판단하지 않습니다. 가정도 얼마나 부가 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온 교회를 보십시오. 얼마나 좋은 프로그램이 있느냐 얼마나 규모가 크냐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첫사랑을 잃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 열린 교회 식구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요한복음13:34-35/김필곤 목사/200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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