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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구원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99 추천 수 0 2017.04.12 23: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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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3:1-1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2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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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구원

요 3:1-17, 사순절 둘째 주일, 2017년 3월12일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과 일대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제법 자주 등장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니고데모입니다. 이 사람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요 3:1). 유대인의 지도자라는 말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대법원 판사, 또는 헌법재판관에 해당됩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밤에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떳떳하게 낮에 찾아오지 왜 밤에 찾아왔냐 하고 시비를 거는 건 옳지 않습니다. 요 19:39절에 따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묻힐 때 장례에 필요한 물품인 ‘몰약과 침향 석은 것’을 가져왔습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당시는 제자들이 위해를 당할까 걱정해서 십자가 처형 장소에 얼씬하지 못할 정도로 위중했던 때입니다. 그리고 예수 처형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종교 기관이 바로 니고데모가 속한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이런 걸 감안하면 예수에 대한 니고데모의 진정성은 인정받을만합니다.

 

행위에서 존재로!


니고데모는 예수에게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표적’을 근거로 예수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인물이라고, 아주 특별한 존재라고 고백한 겁니다. 평생에 이런 사람을 만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궁극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문장 자체는 서술문이지만 그 내용으로 보면 질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느냐,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막 10:17 이하를 따르면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 19장과 눅 18장에도 병행구절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먼저 십계명의 후반부에 속한 윤리 항목들을 언급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등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어릴 때부터 계명의 내용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과장된 말이겠지만 나름으로 최선을 다 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재산을 다 처분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 실망하고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재물을 처분해야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계명 준수를 통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생각의 한계를 짚으신 겁니다.


이 사람의 질문과 비슷한 질문을 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오늘 설교 본문 요 3:3절에서 뜻밖의 대답을 주셨습니다. 일종의 선문답처럼 들립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여기서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의 차원으로 바꾸신 겁니다. 삶에 대한 관점이 행위로부터 존재로 달라진 겁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는 다시 예수에게 묻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당대의 유대교 최고 전문가가 예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삶의 중심을 이해하는 건 지식이나 사회적 신분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여기 바이올린 선생이 있다고 합시다. 그걸 돈벌이로만 여기는 사람은 자유와 기쁨이라는 예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문자주의에 떨어져서 타종교를 부정하고, 성 소수자들을 배척하고, 진화론을 부인합니다. 니고데모는 왜 거듭난다는 말을 오해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물은 세례를 가리킵니다. 세례 받을 때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을 통해서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새로워지는 겁니다. 영적으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영생과 구원을 알지도 못하고 얻지도 못한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새로워진다는 말을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가장 큰 오해는 그걸 심리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하는 겁니다. 기도를 많이 했더니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주장이 그런 것입니다. 경배와 찬양 유의 집회에서 마음의 감동을 경험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심리적으로 뜨거워지거나 감정적으로 간절해지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그런 현상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그런 현상은 사이비 이단에게서도 자주 나타납니다. 사이비 이단에 가까울수록 그런 현상은 더 강렬하게 나타납니다. 또 다른 오해는 신비한 모양을 보거나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을 영적인 경험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현상이 성경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문학적 수사입니다. 성경의 그런 구절들을 사실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이상한 현상을 실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에 마음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된다는 말은 존재가 새로워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게 바로 거듭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이를 고후 5:16,17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바울의 표현은 거듭난다는 요한의 표현과 같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세례를 분명히 받았는데도 거듭났다거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느낌이 없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니고데모도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모태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반문한 걸 보면 이 문제는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기 전에는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실감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일단 요 3:13절에서 끝내고 14절부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고상한 철학에 속한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 것이 곧 거듭나는 것입니다. 14절은 모세 전승에 나오는 광야의 놋뱀(민 21:4-9) 이야기를 거론합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백성들이 독사에 물려 죽어나갔습니다. 겁을 먹은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는 놋뱀 조형물을 만들어 장대 위에 걸어놓고 그걸 쳐다보게 했습니다. 그걸 본 사람은 다 살아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에 대한 경고입니다.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다보고 살아난 놋뱀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5). 이어서 아주 유명한 16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어린이 주일학교를 제대로 다닌 분들은 다 외우는 구절입니다. 이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멸망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는 거구나, 하고 막연하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신앙의 내용이 막연하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못합니다. 율법적인 신앙에 젖어버리거나 냉소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게 무슨 뜻이며, 그게 거듭난다는 말과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요? 그 답이 17절에 나옵니다. 16절과 똑같은 내용의 반복처럼 들리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을 훨씬 더 명료하게 설명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6절에 나오는 멸망과 영생이, 17절에서는 각각 심판과 구원이라는 단어로 나옵니다. 멸망과 심판, 영생과 구원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가 세상에 온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사실, 즉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이 바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이 보통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이 사실을 현실로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요 3:5)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판 지향과 구원 지향


심판과 구원이라는 이 말씀과 연결해서 볼 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심판 지향적인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심판 지향적이라는 말은 자신이 알고 있는 기준으로 삶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강렬하게 심판 지향적으로 사는지 아실 겁니다. 사람들을 점수로 판단하고, 연봉으로 평가합니다. 그게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심판 지향성은 사람을 두려움과 걱정으로 몰아갑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로 평생을 보내게 합니다. 그런 조건들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도 염려를 놓지 못합니다. 숨이 끊기는 순간까지 온갖 것에 대한 염려로 힘들어합니다. 또는 반대로 다른 이들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교만에 빠집니다. 자기 염려나 교만 모두 어둠의 삶입니다. 그게 바로 심판 지향적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심판 지향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헌금을 드리지 않으면 벌을 받지 않을까, 성경을 읽지 않으면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믿음 생활을 잘못하면 ‘지옥 불에 떨어진다.’는 저주를 쏟아냅니다. 예수 사건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심판 지향적인 삶과 달리 구원 지향적인 삶은 이해하기가 약간 더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말만 그렇게 할 뿐이지 실제로 거기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결국 악순환에 떨어집니다. 구원 지향적 삶을 알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이 심판 지향적 삶에 떨어지고, 심판 지향적 삶에 머물다보니 결국 생명 지향적 삶에 이르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것은 믿는 자가 멸망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고, 또한 세상을 심판하려는 게 아니라 예수를 통해서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게 분명한 사실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생명과 구원이 무엇인가에 마음을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 지향성은 축소되고 구원 지향성은 확대됩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소풍 나가서 보물찾기 하듯이 생명과 구원을 찾는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의 영혼은 반짝거립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이나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신부의 심정이 됩니다.


설교하는 당신은 정말 그런 심정으로 사냐, 하고 질문하고 싶으신가요? 그것의 한 단면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저의 삶에서 저의 소유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돈을 비롯해서 저의 몸도 그렇고, 저의 책이나 글이나 신학 지식도 다 저의 것은 아닙니다. 원래부터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니 모든 것은 다 밖에서 주어진 것이고, 임시로 관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저의 삶과 인생을 저의 능력으로 완성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모든 것이 선물로 주어진 것이니까 건강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어도, 때로는 힘들고 불편하겠지만 아쉬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저에게 영원한 생명은 무엇인지, 참된 구원은 무엇인지를 찾고 구하고 은총으로 받아 누리는 것에 집중합니다.


이런 생각과 삶의 태도에서 핵심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입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통해서 영생과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유대인들의 율법과 표적에 매달렸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에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아침 해가 떠올랐기에 더 이상 손전등이 필요 없는 거와 비슷합니다. 그런 사람은 작은 사물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것들과 삶을 빛으로 경험합니다. 삶이 기쁨과 해방과 평화로 가득 찹니다. 이것은 구원의 기쁨이자 믿음의 능력입니다.


예수 십자가가 왜 영생과 구원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실감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걸 억지로 이해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테니스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공을 칠 때 팔에 힘을 빼는 겁니다. 그건 말로 해서 설명이 안 됩니다. 힘을 무조건 빼면 공을 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 3:7,8절에서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바람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합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모르는 것처럼 예수의 십자가를 영생과 구원의 길로 믿게 되는 것은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믿음도 이런 점에서는 은혜입니다. 이런 믿음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가리키는 생명의 신비에 전적으로 몰입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왜 그런 은혜를 주시지 않을까?’ 하고 마음이 불편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은혜를 거부할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예로 든다면 율법주의자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는 게 너무 많았습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자신들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인생경험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을 자기가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주장합니다. 돈과 권력이 인생 성공의 길이라는 확신으로 살아갑니다. 은혜를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복음 기자의 주장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심판 지향의 삶으로부터 구원 지향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그로 인해서 죄와 죽음의 삶이 극복되고 의와 생명의 삶이 환한 빛으로 드러났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앞으로 이 땅에서 몇 십 년을, 또는 몇 년을 더 살지 모르겠지만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삶이 날이 갈수록 더 풍요로워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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