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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4: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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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4.5.24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그런 부활’은 이제 그만
갈4:9-10
오늘 설교 제목이 도발적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부활절 지난 게 언젠데 벌써 네 번인가 다섯 번째 부활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제도화되고 의식화로만 끝나버리는 예수 부활이 너무 안타까워 그러는 겁니다. 부활절 행사를 위한 부활은 아니라는 겁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행사용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 화 할리는 없지 않습니까? 오늘 역시 오늘날 우리가 절기로만 지키는 ‘부활’의 본질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탄절이 12월 25일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건 안 믿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법 교회를 알차게 다닌다는 사람에게 부활절이 언제냐고 물어 봅시다. 똑 부러지게, 성탄절 기억하는 것만큼 아는 이가 있습니까? 그러니 아예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은 부활절이 뭔지 언젠지 관심도 없을 겁니다.
대부분은 주보에 나와야 아는 거고, 일반인들은 시청 마당에 군중들이 모여야 귓등으로 듣는 정도일 겁니다. 이게 참 수상하다는 겁니다. ‘태어나는 일’이야 포유동물에게 주어진 일반적인 특권이라면 ‘부활’은 실로 역사이전과 역사 이후에 나타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임에도 어찌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부활’의 날을 시큰둥하게 알고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된 데에는 성탄절처럼 날짜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부활절은 그 날짜가 왔다갔다 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부활절은 특정한 계산법에 의해 해마다 날짜가 틀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절은 언제입니까? 정답은 ‘춘분이 지난 첫 번째 보름을 기준으로 바로 직후’가 부활절입니다. 사실 부활절은 성탄절 보다 더 오래된 절기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날짜가 왜 이리 왔다리 갔다리 하는 걸까요? 그것은 동.서방교회 즉 에베소교회와 로마교회가 부활절 논쟁을 하다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모두 종교권력을 내세우면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렇게 카톨릭과 개신교는 부활절을 이렇게 하자고, ‘춘분이 지난 첫 번째 보름을 기준으로 바로 직후’주일에 하자고 부활절을 정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춘분 직후 보름이 기준이 되었을까요? 이는 예수님이 부활한 날이 ‘유월절 절기중의 안식일 다음 날’이라는 복음서의 기록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유월절은 3~4월 15일입니다. 이 유대력은 태음력이므로 15일은 보름달이 뜨는 날입니다. 그래서 보름이 지난 후 첫 번째 주일이 된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태음력이 아니라 태양력 즉 서구사회로 오면서 ‘춘분직후 보름 이후 첫 번째 주일’로 바뀌어 진 것입니다.
교회는 절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절기는 순환합니다. 그리고 절기의 기준은 부활절과 성탄절입니다.
12월25일 이전 4주일 동안은 대강절 혹은 대림절이죠.
12월 25일을 지나 1월6일 이후부터 주현절(소아시아나 이집트의 콥트교회는 이날이 성탄절입니다)즉 세례의 절기입니다.
한 편 부활절을 기준으로 6주간은 ‘사순절’이죠. 참회의 수요일에서 시작해서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사순절 주간은 고난주간이고, 그 금요일은 성금요일이라고 하고, 부활절 이후 40일째 되는 날은 ‘승천일’입니다. 그리고 10일 후, 즉 부활 후 50일 재 되는 날은 ‘강림절’이죠.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사순절-성금요일-부활절-승천일-강림절’로 이어지는 부활절 기준 절기입니다. 이게 대체적인 교회력의 구성입니다.
그런데 강림절 이후 11월까지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또 뭘 만들어요. 그게 ‘삼위일체 교회력’이라는 거예요. 대림절에서 강림절까지는 ‘성자계절’, 9-11월은 ‘성부계절’, 성령강림 이후 8월까지는 ‘성령계절’이렇게 된 겁니다.
그리고는 여기에 맞춰 성경본문을 정하여 설교하고, 상징적인 색깔로 치장을 했습니다. 녹색은 성탄절-1월초, 9-11월까지 사용합니다. 고난을 상징하는 보라색은 사순절과 대림절에 사용했습니다. 성탄과 부활절엔 흰색을, 붉은색은 성령감림절 및 성령의 계절에 썼습니다. 이게 그동안 교회 지도자들이 치열하게 다투며 정리한 치적입니다.
부활절은 유대교의 유월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은 모세의 출애굽과 연관이 있죠. 재앙을 피해서 출애굽을 한 경험에서 비롯된 걸 여러분이 아십니다. 문설주에 발라진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피해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비켜가다’가 바로 ‘유월절 Passover’입니다. 그렇게 죽음이 피해갔기 때문에 대탈주가 실현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날이 ‘해방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유월절의 핵심은 ‘해방’입니다.
부활절은 유월절에서 기인되었고, 부활절의 바탕이 되는 유월절은 바로 ‘해방’이 핵심이니, 예수의 부활은 바로 ‘해방’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해방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꺾인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오래도록 품고 살아온 해방의 염원을 그렇게 살해당한 채 끝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속에서도 그들의 염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품고 살아온 해방의 염원을 불굴의 의지로 되살리는 날이 바로 ‘부활절’이었던 것입니다.
부활신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중의 소망에 기초합니다. 그것은 낡은 시대, 주님을 죽게 하고, 주를 따르는 이들을 죽게 하며, 주에 대한 대중의 꿈을 죽이는 시대, 그런 ‘죽임의 시대’를 추방하겠다는 간절한 의지며 결단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의 부활은 새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인 셈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임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정치권력과 종교의식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나 권력이 사람을 죽이기는 하나 현저히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인간의 물질적인 욕망’이 사람을 살해하는 시대입니다. 여기에 모든 믿는 자는 저항해야 합니다. 그걸 고취하고 결단하는 날이 바로 이 시대의 부활절인 것입니다. ‘피게티’라는 젊은 사회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21세기 자본주의’에서 ‘과거에는 신분이 세습되어서 계층사회를 만들었는데 오늘날은 자본을 세습함으로 여전히 과거보다 더 나쁜 신분계층의 사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죽임의 시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지키는 부활절은 ‘해방’을 기억하고 결단하는 날이 아니라 도래하는 미래의 몫에 미리 취하게 만드는 겁니다. 꿈에 취해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몰라라하게 만드는 겁니다. 나 외에는 관심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현재를 읽는 비평적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드는 오늘날의 신앙관례는 결국 그리스도인들을 우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부활절을 기린다는 것은 ‘현재’라는 우리 삶의 지평 속으로 육화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안에서 세계를 비평적으로 읽고, 교회를 비평적으로 바라보고,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비평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물론 자기 자신도 냉철하게 비평하며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월호’ 참변이 일어나고 리본을 달고, 플랙을 걸고, 추모와 위로 음악회를 하는 것은 모두 예수의 부활을 우리의 삶 속에서 육화하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은 바울의 말은 비평이 살아 있는 신앙의 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날과 달과 해의 절기 준수를 신앙의 요체로 믿는 종교심을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짜 신앙은 그런 것들을 지키는 게 아니라 정작 그런 ‘시간과 달의 종교’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무슨 때에 신앙을 고정시키지 말고 시간 속에 벌어지는 사건의 생생함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니까 맨날 절기는 지키는데 그 속에 인간사의 희노애락이 생략되는 게 아닙니까?
바른 신앙은 하나님의 해방 사건을 기리기 위해 그때마다의 역사의 구체적인 경험과 결합되어야 하는 겁니다. 신앙은 고정시켜서는 안 됩니다. 세계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 자신을 던져 넣어 해방의 염원을 실현해야 되는 겁니다. 그게 예수의 부활을 기리는 겁니다. 그리고 예배는, 절기는 그것을 고백하는 무대인 것입니다.
신영복이라는 분이 ‘강물과 시간’이라는 곳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 말씀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말씀들을 명쾌하게 함축하고 있습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약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 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영복, 강물과 시간, ‘진보평론’3(2000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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