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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2: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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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라!
2011년 4월 2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갈라디아서 2:11-16
역사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헤로도토스가 쓴 ‘페르시아 전쟁사’ 3권에 보면 ‘관습이야말로 만물의 왕’이라는 장이 있다. 여기서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느 나라 사람에게라도 세상의 모든 관습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라면, 곰곰이 생각해 본 다음 누구든지 자기 나라 관습을 선택할 것이다. 이처럼 누구도 자기 나라의 관습을 제일 훌륭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를 조롱하는 것은 제 정신을 가진 자가 아니다.”
그러면서 누구든 자기 나라의 관습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예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고 있다.
“다레이오스(다리우스) 왕이 페르시아를 통치하던 시절 측근의 그리스인들을 불러 돈을 얼마나 주면 죽은 부모의 시신을 먹을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리우스 왕은 이번에는 부모 고기를 먹는 풍습을 가진 칼라이타이라고 불리는 인도인들을 불러, 앞서의 그리스인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통역을 하도록 한 다음, 어느 정도의 돈을 주면 죽은 부모를 화장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 인도인들은 큰 소리로 왕에게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달라는 간청을 했다.”
그러면서 그의 결론은 관습의 힘이란 이처럼 강하며 ‘관습이야말로 만물의 왕’이라는 핀다로스의 시구가 진실로 옳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관습이야말로 만물의 왕이다, 이 말에 동의하는가? 이 말은 관습의 힘이 어떤지를 말하는 것이다. 관습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중동 지방에서도 많은 예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명예 살인이다. 예로부터 중동 지방 사람들은 명예를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자신이나 가문의 명예를 누군가가 손상했을 때 그를 죽일 수 있는 관습이다. 그리고 살인한 자는 그 벌이 가볍게 처리된다. 지금도 이 관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요르단만 해도 명예 살인이 있다. 일종의 관습법으로 성문법보다 앞서고 있다.
관습의 힘은 실로 크다.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세운 것도 다른 면에서 보면 관습의 힘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이 당시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과 가치들을 무시하고 몰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유대교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다. 관습의 힘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때는 지난주까지 나누었던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의 회동이 있은 후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예루살렘 회동과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11절에 보면 게바, 베드로가 안디옥에 갔다고 했다. 어느 지역으로 가던 중에 들린 것인지, 박해를 피해 이리로 온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 갈라디아 지방의 안디옥으로 왔다. 12절을 보면 이곳에 일정 기간 머문 것 같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여기서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라고 되어 있는 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즉 이 말은 한번 먹었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 번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뜻이다. 게바,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식탁 교제를 즐겨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다고 했다. 야고보는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떠난 후에도 남아 예루살렘의 지도자로서 교회를 이끌었었다. 그러니까 야고보에게서 왔다는 말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왔다는 말이다. 또한 야고보에게서 온 자들과 할례자들은 같은 말로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교인들을 말한다.
이들이 오자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하다가 그들이 두려워 슬그머니 물러났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대면하여 책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이신칭의가 나오게 된다. 이것을 안디옥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관습의 힘을 보아야 한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식사는 물론 일반적인 접촉도 삼갔다. 그런 이유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방인에 대한 인식과 유대인들의 식사법과 정결법, 그리고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식을 보자.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방인은 단순히 이방민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은 우상 숭배자를 뜻하며 죄인을 뜻한다. 우상을 숭배하며, 폭력적이고 더럽고 부도덕하며 음란하고 정결하지 못한 사람을 뜻한다. 예수님 당시에 이미 죄인과 이방인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었다. 그러기에 이방인과 접촉을 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부정한 죄인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것으로 여기고 피했던 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탈무드에 있다. 아보다 자라(우상숭배) 2:1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방인 여관에 가축을 놔두지 말라. 이는 그들이 수간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자를 홀로 그들 가운데 있게 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음란하기 때문이다. 남자 역시 홀로 그들과 함께 있지 말라. 이는 그들이 피 흘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딸이 이방인의 출산을 돕지 말지니, 이는 우상 숭배하는 아이의 출산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같이 음식을 먹는 것은 개와 함께 먹는 것과 같고 혐오스런 고기를 탐식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이방인들과 함께 목욕하는 것은 죽은 동물과 함께 목욕하는 것과 같고, 이방인을 만진 것은 시체를 만진 것과 같다고 여겼다. 이는 이방인들의 삶이 마치 죽은 자와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매우 극단적인 배타주의인데, 사실 이 정도로 배타적이지는 않았다. 이방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그 이전부터 있었지만 이 정도로 극단적인 배타성을 보이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리스를 거쳐 로마가 이 땅을 지배하면서부터 더 심해졌고, 이것이 후에는 할라카 법령으로까지 정해지게 되었다.
이 당시에 가장 유력했던 유대교 학파가 둘 있었다.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인데, 샴파이 학파에 의해 이방인과의 접촉을 금하는 18개의 법령이 정해진 것이다. 그때가 바로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던 주후 66년 얼마 전이었다. 그러니까 대략 사도 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하던 시기였다. 이는 우상숭배를 멀리하고 음식법과 정결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더욱 더 확대해서 아예 이방인과의 접촉을 금하는 법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음식법과 정결법이라는 것이 있다. 이 둘은 많은 경우 같이 연결되어 있다. 유대인들이 지켜야 하는 음식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그 재료가 정결한가 부정한가하는 것이다. 특히 고기가 그러하다. 정결한 고기가 있고 부정한 고기가 있는데 정결한 고기만을 먹을 수 있다. 되새김질을 하고 굽이 갈라진 가축과 닭과 같은 가금류, 비늘이 있는 생선이 그러한 것들이다.
둘째는 어떻게 도살했는가 하는 것이다. 육류의 경우 정결법에 따라 잡되 피를 다 쏟아버려야 한다. 피 채 먹으면 안 된다. 피를 잘 빼내기 위해 도살할 때 소금을 뿌리는데, 그래서 이스라엘 슈퍼에서 파는 고기들이 짠 맛이 있는 것이다.
셋째, 고기와 우유를 함께 먹으면 안 된다. 이는 신명기 14:21의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는 명령에 따른 것으로, 육류와 유제품을 같이 먹지 않는다. 그래서 아랍 호텔을 제외한 이스라엘의 호텔에 가면 육류와 유제품이 같지 나오지 않는다.
이 세 가지 기본 조항 외에도 더 있다. 누가 도살했는가? 누가, 어떻게 음식을 조리했는가? 음식을 만든 후에 봉헌을 했는가 하는 것들도 역시 중요했다. 정식으로 하면 할례 받은 유대인이 도살하거나 잡은 물고기만을 유대인들은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지중해에서 잡힌 생선보다 갈릴리 호수에서 잡힌 생선을 유대인들이 더 많이 선호했던 것이다. 더불어 할례 받은 유대인이 정결법에 따라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음식에 대한 봉헌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방인들과의 식사는 이런 것들을 지킬 수가 없다. 우선은 음식의 종류 자체가 부정한 것들이 많다. 또한 어떻게 도살했는지도 알 수 없고, 어떻게 조리를 했는지도 알 수 없다. 또한 이 음식들을 우상에게 드린 것인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당시는 음식은 종교제의와 연결된 경우가 많다. 우리로 하면 제사음식, 고사 음식이다. 신이나 귀신에게 음식을 차려 제사를 드리고 먹는 경우가 많았다. 이방인들과 식사에서 그 음식들이 우상숭배에 사용된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금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경우 음식을 차려놓고 먹기 전에 봉헌을 한다.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이고 음식을 준비한 주인에 대한 축복의 말과 기도를 한다. 아무리 정결한 음식이고 정결법에 따라 음식을 차렸어도 하나님께 대한 봉헌이 없으면 그 음식은 정결하지 않은 것이다. 반드시 봉헌을 하고 식사를 했다. 그런데 이방인들과 식사에서는 그리 할 수가 없다. 그 자체가 부정한 것이다.
여기다가 정치적인 이유까지 더해졌다. 원수로 여기는 로마인들과 접촉을 막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앞서 말한 샴마이 학파에 의해 제정된 18개의 법령이었다. 이방인과의 식사뿐만 아니라 목욕, 신체 접촉까지도 금한 것이었다. 로마와의 갈등과 대립이 심해지면서 아예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을 접촉하지 못하게 할라카, 법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이처럼 당시의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루는 할례와 음식법 등의 율법적인 관습,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까지 얽혀있는 문제였다. 본문의 경우도 그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는데, 당시 유대인들의 이러한 인식과 관습이 초대 교회 내에서 어떠한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이 사건은 추가적으로 유대인 선교 문제까지 더해졌다. 안디옥에 온 사람들은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이었는데, 야고보는 왜 이들을 안디옥 교회에 보냈을까 하는 것이다. 왜 보냈을까? 그 이유는 유대인 선교 문제였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이 당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과 반목이 매우 심했었다. 유대인이 유대인일 수 있는 것은 단순히 혈통이 유대인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남자의 경우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안식일과 음식법과 정결법을 지켜야 한다. 할례는 언약 백성이 징표였고, 안식일과 음식법과 정결법은 유대인으로서의 가장 기본이 되는 관습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는 그 구성의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처럼 유대인 교인들 외에 많은 이방인 교인들이 생긴 곳이 문제였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인들은 여전히 할례와 유대교의 관습을 중요시 했다.
할례는 언약 백성의 징표이고 교회 역시 언약 백성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방인 교인들 역시 비록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나 할례를 받아야만 언약 백성의 울타리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었고, 음식법과 같은 율법적인 관습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바리새파 출신의 교인들이 그러했는데, 이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갈라디아 지방까지 찾아가 이방인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했던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 교인들의 경우는 바리새파 출신의 유대 선동주의자들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들 역시 유대인으로서의 이방인에 대한 인식과 관습에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더불어 이 문제가 유대인 선교에서 장애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점차 메시아닉 유대인들, 즉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을 이단시하기 시작했다. 이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헤롯의 박해 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종파가 유대교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유대교에 헌신하지 않으면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최초의 메시아닉 유대인들, 즉 초대교회는 자신들을 유대교와 다른 어떤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를 뿐이지 여전히 유대교인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성전에 가서 예배드리고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이들은 할례 받은 유대인이었고, 여전히 안식일과 음식법과 정결법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 세워진 교회에서는 달랐다. 그 교회들에도 유대인 교인들이 있었지만 더 많은 이방인 교인들이 생겼다. 이방인 교인들은 유대교의 관습을 잘 몰랐고 따르지 않았다. 또한 그 지역의 유대인 교인들은 그런 이방인들 교인들과 비교적 자유롭게 접촉을 하고 교제를 나누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서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외부에 있는 유대인들이 이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너희 종파는 왜 이방인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방인들에게 왜 할례와 음식법을 따를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런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식탁을 같이 하고 접촉을 하면서 유대인의 관습을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후에는 교회를 핍박하게 된 이유가 된 것이다.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도 이런 이유 때문에 파송되었을 것이다.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것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고, 그것이 유대인 선교에 있어서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행위를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본문에는 자세하게 이런 내용을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당시의 정황과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 등에 기록된 내용들을 토대로 이런 유추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온 이들 때문에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사를 하던 중에 이들이 두려워 슬그머니 물러난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드로였다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그런 행동을 보이자 함께 식사를 했던 다른 안디옥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도 자리를 피했고 심지어 바나바조차도 그리 했다는 것이다. 이에 사도 바울은 분노했고 베드로를 대면하여 책망을 했다는 것이다. 대면했다고 했는데 이는 공개석상에서 책망을 했다는 말이다.
베드로가 누구인가? 예수님의 수제자이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며 존경받는 사도였다. 이런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이러했으니 사도 바울이 화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베드로는 이미 이방인을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사람이었다. 욥바에서 부정한 동물이 담긴 광주리 환상을 통해 당시 유대인들이 부정한 짐승처럼 여기며 접촉 자체를 꺼려했던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는 차별 없이 사랑하시고 그들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 후 베드로는 아무 거리낌 없이 이방인 고넬료에게 가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고 함께 식사도 했다. 안디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방인 교인들과 함께 즐겁게 식탁을 나눈 것이다.
그런 그가 이런 행동을 보인 것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두려워 자리를 피했던 것이다. 이는 관습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사도 바울의 책망은 그러한 베드로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행동이며 자기의 확신을 저버리는 모순이며 위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미 알았고, 얼마 전에 예루살렘에서 회동을 가지면서 이방인 선교에 대해 의견일치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리 했음에 책망했던 것이다.
베드로를 사람들 앞에서 책망했다는 것은 자신이 베드로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도로서의 권위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베드로처럼 그런 모순된 행동을 보이지 말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라는 촉구이다. 아무리 관습이 중요해도, 복음의 진리가 양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4절을 보자.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게바는 욥바에서의 환상을 본 이후 유대인이지만 이방인을 따르는, 정확한 번역은 유대인이지만 이방인처럼 살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안 다음부터 유대인의 관습을 뒤로 하고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고 교제를 하는 것을 전혀 거리낌 없이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신자들이 오니까 뒤로 물러나 이방인들을 유대인처럼 만들려는 이들의 주장에 동조했다는 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것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라는 것이다. 관습이 아무리 중요하고 유대인들의 비난의 눈이 아무리 매섭다 하나 복음의 진리를 저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시와 지금 우리의 상황과 문화와 관습이 다르지만 우리 역시 자칫 관습과 사람들의 비난이나 눈을 의식해서 복음의 진리에서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는 없는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따라야할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세상의 관습에 따라 행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과 비난을 의식해서 신앙양심을 저버린 적은 없는가?
복음의 진리란 무엇인가? 16절이 그것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는 이것이다. 할례가 언약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며, 음식법이나 정결법을 지키는 것 같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구주로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되어 언약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이고 핵심이고 모든 것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명하시고 율법을 주신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복음의 진리가 아니다. 본질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할례를 명하시고, 그것을 언약의 상징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신 것은 사실이나 본질은 할례가 아니라 택하심이다.
할례가 먼저가 아니라 택하심이 먼저다. 부르심이 먼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에 언약 백성이 된 것이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언약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 교인들에게도 유대인과 같은 할례를 요구하는 것은 본질이 무엇인지를 망각하는 행위다.
율법도 마찬가지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율법을 어떻게 지키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을 주신 목적과 그 정신이다. 율법을 결코 의의 조건으로 주신 적은 없다.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지킬 것인가, 거룩한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으로 주신 것이 바로 율법이다. 그리고 율법의 정신의 사랑이다. 하나님을 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요약해주시지 않았는가?
율법을 잘 지키려는 자세는 좋은 것이나 이것이 자기 의가 되거나 우월의식이나 배타적인 태도가 될 때가 문제이다. 율법의 정신은 약화되고 율법의 조항과 준수가 앞서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세부적인 조항을 추가하고 그러한 셀 수 없고 지키기도 어려운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도록 강요하고 그래야만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지키지 않는 자들은 부정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할례와 율법을 의롭다함의 조건으로 만들어 버리고 배타적인 우월의식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스라엘의 외침과 박해의 역사와 그런 가운데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앙을 지키려고 했던 유대인들의 노력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 노력 자체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노력이 본질을 잃어버리고 그 정신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차별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이유는 차별이 아니라 축복이다. 그들도 복을 받을뿐더러 모든 만민들을 향한 복의 통로로 삼으시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는 복이 될지니라 하는 것이었다. 복의 통로로 삼으시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이 바로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이유는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만들어 모든 만민들이 복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죄악으로 인해서 그 뜻이 지연되었고, 나아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노력이 결국 부르심을 차별로 만들고 이방인들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우월의식과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꺾이지 않았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다시금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복의 통로로 삼으시려 했다. 그래서 세우신 것이 바로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인이 다시금 제사장 나라로 서고 복의 통로로 서는 것이고, 동시에 이방인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고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 없이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다.
거듭 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은 없다. 오직 하나 되게 하시는 거룩함만 있을 뿐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혈루병 앓은 여인을 고쳐주신 사건이다. 마가복음 5:21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달라는 청을 받고 가시는 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인이 많이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이 여인의 혈루 근원이 곧 말라 병이 낫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보게 되는 데, 왜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는지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정결법의 기준으로 따지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든 것은 부정한 것이 있고 정결한 것이 있으며 거룩한 것이 있다. 정결한 것이 부정한 것과 접촉을 하면 부정해지고 다시 정결해지려면 정결의식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정결한 것이 거룩한 것이 되려면 하나님을 위해 따로 구별되어야 한다. 거룩은 정결한 것을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하시거나 하나님을 위해 따로 구별할 때 거룩해지는 것이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부정한 물건이나 부정한 사람을 만지면 그 사람도 부정해진다. 혈루병은 피를 하혈하는 병이라 부정한 것이다. 이 부정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졌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부정해져야 한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접촉을 하면 부정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어찌 되었는가? 예수님께서 부정한 이 여인으로 인해 부정해지신 것이 아니라 이 부정한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 정결해졌다. 거꾸로 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다. 그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부정한 여인과 접촉했을 때 부정한 여인이 정결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구약에서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등이 하나님과의 접촉을 통해 정결해진 것과 같은 경우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차별이 없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할례와 율법에는 차별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차별이 없다. 오직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부르심만 있을 뿐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보혈로 말미암아 정결하게 되며,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거룩한 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오직 거룩함으로 하나 되는 부르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밖에는 없다. 믿는가?
그런데 유대인 교인들 중 일부가 여전히 유대교의 관습을 내세워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고 이방인에게도 할례를 요구했으며, 여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대교의 관습에 묶인 채 이방인과의 식사를 꺼려하고 접촉을 멀리했던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조차 비록 순간적이라고는 하나 관습에 얽매이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차별 없이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인 것이다. 꼭 기억해야 한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은 차별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하게 하심으로 하나 되게 하심이며, 하나 됨으로써 제사장 나라요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은 없으며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 없이 거룩하게 하시며 하나 되게 하시는 부르심만 있을 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리이며 본질이며 핵심이다.
이 복음의 진리를 붙잡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의 관습보다 사람들의 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복음의 진리이다. 세상의 관습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관습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눈과 비난이 두려워 신앙양심을 버리고 타협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관습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사람이 되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라.
이 복음의 진리를 붙잡고 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할 때 교회는 비로소 힘을 얻고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고 원수 되었던 자들이 화해하고 형제 자매가 되어 하나가 되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고 그것이 교회의 거룩함이고 능력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차별 없이 사랑으로 대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하나 되기에 힘쓰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모습이고 능력이다. 복음의 진리를 붙잡으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대해서도 이 화해의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고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화해하며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사명이 바로 제사장 나라이며 복의 통로이다. 복음의 진리를 붙잡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할 때 이룰 수 있는 사명이다.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놓치면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또 다른 차별을 만들어내어 배타적인 공동체가 되고 만다. 불신 세상과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구별이다.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구별일 뿐이며, 제사장의 사명은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복음의 진리를 붙잡고 그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사람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관습과 사조에 휩쓸려 가지도 않고 신앙양심을 저버리는 타협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현장에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우리의 신앙도 건강해질 것이다. 복음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며,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온전해지는 것이며,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인격과 삶을 뒤 따라가는 것이며, 주님께서 이 땅에 임하게 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이며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며 본질이다. 물질의 복과 삶의 안녕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것은 덤으로 주시는 선물일 뿐이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힘을 잃어버린 것은 이러한 복음의 진리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놓치고 부차적인 선물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다. 복음의 진리를 다시 붙잡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의 진리를 붙잡고 그 진리를 따라 행하는 길 밖에는 없다.
사도 바울의 절박한 외침으로 다시 한 번 권면한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되라. 어떠한 경우에도 복음의 진리를 놓치지 말라.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사람이 되라. 우리 교회도 그러하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 세상 가운데서 왕 같은 제사장, 복의 통로가 되는 거룩한 성도요 교회가 되길 축복한다.
* 기도: 1. 복음의 진리를 붙잡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세상 관습과 풍조에 휩쓸려 복음의 진리를 외면하거나 신앙양심을 저버리는 타협을 하지 말게 하소서.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는 인간관계를 갖게 하시고 그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사랑이 우리의 능력이 되고 정체성이 되게 하소서.
3.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진리를 붙잡고 그 진리를 따라 행함으로 세상 가운데서 왕 같은 제사장, 복의 통로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래서 다시금 한국 교회가 영적 힘을 회복하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 복의 통로로 세워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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