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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정신 가진 그리스도인

갈라디아 류공석 목사............... 조회 수 605 추천 수 0 2016.05.13 23:5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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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3:1-8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제 정신 가진 그리스도인"

2011년 4월 16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갈라디아서 3:1-8 (갈라디아서 강해 9)

   영성 신학자로 유명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쓴 ‘메시지’라는 책이 있다. 그 부제가 ‘일상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 옆의 성경’인데, 말 그대로 성경이지만 직역 성경이 아닌 의역 성경이다. 자신이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깨달은 것들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들을 담아서 일상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어떤 부분은 조금 많이 의역이 되었다 싶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그 뜻을 잘 살려 번역을 했다. 성경을 읽을 때 참고해서 같이 읽으면 좋을 참고용 성경이다.

  그 책 ‘메시지’로 갈라디아서 3장을 읽으면 이렇게 시작한다.
  “정신 나간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여러분은 분별력을 잃었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삶의 중심에 놓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니, 여러분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모습이 여러분의 눈에 선할 텐데,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이것이 1절인데, 그 뜻이 보다 더 잘 전달이 된다. 우리 성경에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되어 있는데, 유진 피터슨 목사가 번역한 것이 더 맞는 것 같다. ‘정신 나간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바울은 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 책망을 하는 것일까? 옳지 않은 것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신앙의 핵심을 놓치고 아무 쓸데없는 것이 진짜인가 하여 그것을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본질을 놓치고 비본질을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틀린 것인지를 안다. 무엇이 핵심이고 무엇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인지 안다.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인지 안다. 무엇인가?

  옳은 것,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신칭의의 복음이다.
  그렇다면 틀린 것, 바울의 말에 의하면 다른 복음, 거짓 복음이고, 아무 의미 없는 것이고 비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 할례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것이다.

  왜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리석은 자들, 정신 나간 사람들인가? 이미 옳은 것, 핵심적인 신앙의 원리, 본질적인 복음을 받았음에도 할례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유대 선동주의자들의 꼬임에 빠졌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것, 최고의 것을 가졌음에도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인 줄 알고 기웃거리고 그들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솝 우화에 보면 어리석은 개가 나오는데 딱 그 짝이다. 제목이 욕심쟁이 개인데, 이 개가 식당에서 고기 덩어리를 얻게 되었는데, 냇가를 건너다가 아래를 보니 어떤 개가 큰 고기 덩어리를 물고 있었다. 그래서 저놈 것을 빼앗으면 더 배부를 것이라 생각하고 크게 짖어댔다. 결과 어찌 되었는가? 자기 입에 있던 고기 덩어리가 그만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물속에 있던 개는 바로 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 우화는 욕심쟁이 개의 모습이지만 정신 나간 개의 모습이기도 하다. 참된 복음을 받았음에도 거짓된 복음이 옳은 가하여 혹해서 넘어가는 모습이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어리석은 개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무엇이 핵심인지, 본질인지를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이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정신 나간 사람들이다.

  결국은 본질과 비본질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본질적인 것을 받았음에도 그것을 버리고 비본질적인 것을 따랐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정신 나갔다고 책망한 것이니까 말이다.

  유대 선동주의자들의 문제도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비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본질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할례와 율법이었다. 이방인 교인들도 언약백성이 되려면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율법을 준수해야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본질이 아니다. 그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았고,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여전히 율법을 존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본질이 아니다. 할례와 율법은 더 이상 의로움의 조건,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그것으로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전히 할례를 언약 백성이 되는 증거로 주장했고 율법 준수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것을 이방인 신자들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바울의 질문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무엇이 본질이냐는 것이다. 그는 유대교에 몸담았던 사람이었다. 유대인이었고 바리새인이었고 랍비였다. 그 역시 할례를 받아야만 언약 백성이 될 수 있고,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대로 행했었다. 그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유대교적인 사고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유대교에서 주장하는 할례와 율법은 본질이 아니라고 말이다.

  바울이 할례와 율법이 왜 본질이 아닌지를 밝히면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다. 6절을 보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이 말씀은 창세기 15:6에 나온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뒤인 17장에 나온다. 믿음과 할례인데, 무엇이 먼저인가? 믿음이 먼저다. 믿음이 있은 후에 할례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할례를 받아야만 언약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이전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할례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아 이미 언약 백성이 된 사람이라는 것을 몸으로 기억하라고 명하신 의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례를 받아야만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할례가 본질이 아니라 믿음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율법도 마찬가지다. 율법이 주어진 때는 언제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받은 것이다. 율법을 받아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 아니다. 이미 선택 받았고 애굽에서 구원 받았다. 선택이 먼저지 율법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다. 선택 받은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규정이 바로 율법이다. 그러기에 율법을 준수했다고 해서 의롭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을 존중하고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율법이 본질이 아니라 선택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초대 교회 당시의 유대교는 어떠했는가? 할례를 언약 백성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여겼고 율법 준수를 통해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할례와 율법을 유대인을 유대인되게 하는 것으로 만들었고, 그것으로 이방인과 구별시키는 울타리로 삼았던 것이다.

  물론 당시 이방민족의 지배하에 있었고 이방의 우상숭배와 음란한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믿음을 지키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유대교는 할례와 율법을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제로 삼으면서 그것들을 의와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웠고, 나아가 이방인들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선민적 배타주의가 된 것이다. 할례 받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은 죄인으로 취급하면서 구원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 신자들 가운데 이러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음식법을 내세워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꺼려하고 함께 식사하는 이들을 비난했으며, 이방인들 신자들에게도 할례를 내세우고 율법 준수를 의의 조건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고 비본질적인 것들을 본질처럼 여기며 강요하는 어리석은 행동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도 어리석은 자요 정신 나간 사람들이지만, 그러한 주장에 꼬임을 받아 본질적인 복음을 받은 자들이 본질을 버리고 비본질을 따라가고 있으니 그런 사람들 역시 어리석은 자요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 책망을 하는 것이다.

  본질을 놓치고 비본질에 집착한 유대교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유대교라는 말처럼 유대인들만의 종교가 되고 말았다. 지금 전 세계 인구 중에 유대교인이 몇이나 되는가? 유대인은 약 1,500만 명에서 약 2,000만 명 쯤 된다. 유대인들은 2천년 가까이 자신들이 사는 나라의 국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수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전 세계 유대인 수가 1,500만 명 쯤 된다고 하고, 이들 중 이스라엘에 약 600만 명 쯤 살고, 나머지는 미국과 유럽에 살고 있다. 이들 인구 비율은 전 세계 인구 중 0.3% 정도로 작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서 정말 유대교를 믿는 이들은 얼마일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유대교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유대인은 곧 유대교인을 뜻했다. 그래서 영어로 Jew는 유대인으로도, 유대교인으로도 번역이 된다. 그래서인지 유대인들을 다 유대교인으로 알고 유대교 분포를 기록하고 있는 자료들이 많다. 잘못된 것들이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인구 비율은 전체 인구 중 80%이다. 약 750만 명 중 600만 명 쯤이 유대인들이다. 이들을 모두 유대교인으로 해서 유대교 80%로 기록한 자료들은 다 엉터리란 말이다.

  오늘날 유대인은 모두 유대교인이 아니다. 이스라엘 내에 유대인 수가 약 600만인데, 그 중 실제로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30%에 불과하다. 그 외는 관습적인 유대인들(Traditional Jewish, מסורתים)이 30%이고, 세속적인 유대인들(Secular Jewish, חילונים), 즉 비종교적인 불신 유대인들이 3-40%이다.

  그렇다면 실제 유대교인은 약 180만명에 불과하다. 많이 잡아봐야 200만명 쯤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밖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전 세계 유대인수 1,500만명에서 30% 정도만 유대교인일 것이다. 그들 중 30%, 약 450만 명만이 실제로 유대교를 믿고 있다는 말이 된다. 유대인들의 종교가 되어버렸고 그나마도 다 믿지를 않고 있다.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비본질에 집착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은 할례와 율법을 내세워 이방인들과 차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이방인들까지도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아닌가? 8절에서 이를 말하고 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약속하신 복은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이방인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선택을 차별로 만들었고, 그들을 통해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이 선민임을 주장하는 선민적 배타주의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가 오늘날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의 숫자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유대교인들이 초대교회 때처럼 그렇게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그때의 상황과 오늘날의 상황은 다르다. 유대교인이지만 이방인과 식사 교제도 하고 이방인에 대해서 우호적이고 친절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을 보면 초대교회 때의 유대인들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어느 한국 분이 예루살렘의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이 몰려 사는 메아 쉐아림 근처를 안식일에 지나갔었는데, 초정통파 유대인 남자가 큰 소리로 ‘이스라엘은 우리 유대인의 땅이다. 이방인은 다 떠나라!’며 욕을 하더란다.

  물론 그들의 역사적인 상처를 알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에서 그리 된 것은 알지만 유대교인들은 아직도 초대교회 때의 그러한 선민적 배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가끔 유대교에 열광 하는 사람들, 찬사론을 펴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유대교의 성서해석이나 사상이 깊이가 있고, 노벨상 수상자의 3분의 1이 유대인이기에 그들의 교육방법에 대해서는 배울 것이 있지만 찬사론에는 반대한다. 실제로 유대교의 성서해석에는 선민적 배타주의가 많고 반기독교적인 의도에서 해석을 한 것들도 많다. 유대교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가장 옳다.

  무엇이 본질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비본질적인 것들을 본질로 착각하고 그것들에 집착할 때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유대교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다. 기독교 역사에서 큰 문제가 있었던 때는 본질을 망각하고 비본질적인 것들에 집착했을 때였다. 중세교회가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특히 요즘 한국 교회를 보면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 세상이 제정신이 아닌데 교회까지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으로 가는 것 같다. 참 부끄러운 말이지만 목사들 중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교인들도 그러하지 않나 싶다.

  교회가 제정신이 아니면 그것은 교회만의 문제로 남지 않는다. 세상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만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이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어도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 그래서 교회가 제정신이 아닐 때 세상이 비난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막는 장애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유대교가 선민적 배타주의가 되면서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막은 것처럼, 또 초대 교회의 유대인 신자들 중 일부가 그러한 선민적 배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해 본질을 망각하고 할례와 율법을 내세워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막은 것처럼, 제정신을 잃어버린 교회는 비난의 대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막는 장애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오늘날 선교의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슬람 같은 타종교나 선교를 금지하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정부가 아니다.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불신자들이나 불신 세상도 아니다. 바로 교회다. 기독교인들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선교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 어찌 생각하는가?

  왜? 왜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선교의 장애물이 되고 있는가? 본질을 잃어버렸을 때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막는 장애물이 되고 만다. 교회가 본질을 버리고 비본질에 집착할 때 그리 되고 만다. 교회가 복음을 손상시킬 때 교회는 선교의 장애물이 되고 만다.

  지금 큐티 본문이 사사기인데, 사사기의 위기가 한국 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는 것이다. 사사기의 위기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라고 택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셨는데, 그 땅에서 그 목적을 잊고 가나안화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나안화 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막는 장애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크나 큰 장애물이다. 이것이 사사기의 위기다.

  지금 한국 교회가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크게 염려가 되는 것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다시 제 정신을 가지고 바로 서야 한다. 다시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 교회가 복음을 손상시켰기에 이리 된 것처럼 한국 교회가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다시 복음을 붙드는 길이다. 십자가가 사라졌기에 이리 되었기에 한국 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십자가를 붙드는 길이다. 십자가가 드러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며 길이며 가르침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고 그 길을 돌이켜야 한다. 그럴 때 한국 교회가 살 수 있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다시 한국 교회를 사용하실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복음을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훨씬 더 많은 목회자들이 힘들고 어려워도 십자가를 붙들고 목회를 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이 참된 신앙인지를 고민하며 세상과 거스르는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사랑하신다. 여전히 사랑하신다. 그래서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의 눈물의 기도가 씨앗이 되어 하나님께서 다시금 회복시키시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는다.

  오늘 설교 제목이 제정신 가진 그리스도인인데, 정말 그러하다. 제정신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 제정신 가진 목회자가 되어야 하고, 제정신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래야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질이 중요한 것이다. 본질을 붙잡을 때 바른 믿음, 바른 가치관이 나오고, 그럴 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본질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십자가의 복음이다. 이것이 본질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본질이다. 이 본질을 붙잡아야 한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꼬임에 빠져 이 본질을 버리고 비본질을 따라가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어리석다고 책망했는데, 어리석다는 이 말의 반대말은 지혜롭다는 말이다. 우리말로도 그렇고 헬라어 원어로도 그렇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무엇이 지혜인가? 어떻게 해야 지혜 있는 자가 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혜의 근본이시다.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그분이 곧 지혜의 말씀이시다. 토라이시다.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했다고 했는데, 그 지혜의 말씀, 능력의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잠언에서 지혜를 사랑하라고, 지혜를 가진 자가 되라고 했는데, 그 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지혜요,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의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지혜이시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에게 참다운 자유를 준다. 참다운 구원과 참다운 샬롬을 준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해준다. 이것이 참다운 복이다. 이런 하나님의 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가 그분을 붙잡을 때, 그분의 복음을 붙잡을 때, 그분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 그 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1절을 다시 보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지 않냐고 묻고 있다. 밝히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지혜이다. 반대로 밝히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신은 죽었다라고 한 니체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며 나는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그는 참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밝히 보임에도 그것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니체가 철학자로서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보지 못했기에 그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 되기를 축복한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볼 수 있는 지혜 있는 자들이 다 되기를 축복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여러분 눈앞에 밝히 보이기를 축복한다.

  십자가가 밝히 보여야 한다. 왜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가 밝히 보여야 한다. 그 십자가가 왜 하나님의 사랑인지, 왜 하나님의 공의인지, 왜 하나님의 구원인지를 밝히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 십자가에 내가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음을 밝히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 볼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밝히 보여주셨다. 밝히 보여주신 것을 보는 것이 지혜이다. 이것을 볼 수 있기를 축복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간구는 다른 것이 아니다. 밝히 보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다.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는 시편 말씀처럼 성령께서 내 눈을 열어주셔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을 밝히 보고, 그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내가 못 박혀 죽었음을 밝히 보고,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이 나를 용서하며 자유케 하며 의롭게 하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며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음을 밝히 보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밝히 보아야 하고 이 눈이 어두워지면 안된다. 어두워지면 다시 어리석은 길로 가게 된다. 어두워졌다고 생각되면 다시 무릎을 꿇고 간구하라. 어두운 내 눈을 밝게 해주셔서 다시금 보게 해달라고, 다시 붙들게 해달라고 구하라.

  나는 목사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 제정신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고 목사로서도 제정신 가진 목사가 되고 싶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고 싶지 하나님을 뜻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러기에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과 함께 내가 못 박혔음을 밝히 보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정신 나간 세상에 살면서, 교회마저도 제정신이 아닌 현실 속에서 제정신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살아가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평생 붙들고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한다. 그 길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의의 길임을 알기에 그리 하기를 소망한다. 그 길이 하나님을 더욱 더 알아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받을 수 있는 길이기에 그리 하기를 소망한다. 함께 이 길을 가지 않으려는가?

* 기도: 본질을 버리고 비본질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따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 제정신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소서. 밝히 보게 하소서. 나의 어두워진 눈을 밝혀 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보게 하소서.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살아가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게 하소서. 한국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십자가를 붙들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다시 회복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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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갈라디아 은혜 받은 자의 행보 갈1:18-24  류공석 목사  2016-03-11 713
174 갈라디아 가장 큰 기적 갈1:11-24  류공석 목사  2016-03-11 732
173 갈라디아 누구를 좋게 하랴? 갈1:6-10  류공석 목사  2016-03-11 640
172 갈라디아 다른 복음은 없다! 갈1:1-10  류공석 목사  2016-03-11 798
171 갈라디아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성령님 갈5:16-18  강종수 목사  2016-03-06 327
170 갈라디아 문화생활의 지혜 갈5:15-18  강종수 목사  2015-11-29 251
169 갈라디아 심는대로 거둡니다(추수감사) 갈6:6-7  강승호 목사  2015-10-31 1388
168 갈라디아 구원과 복 갈3:6-9  강종수 목사  2015-10-18 367
167 갈라디아 십자가만 자랑하라 갈6:14  강승호 목사  2015-08-29 1115
166 갈라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라 갈6:14  한태완 목사  2015-08-19 1264
165 갈라디아 감옥 그리고 [죄]-3 갈3:28  허태수 목사  2015-08-08 230
164 갈라디아 감옥, 그리고 [죄]-1 갈3:27  허태수 목사  2015-08-08 299
163 갈라디아 안녕하세요? 갈6:2  정경일 형제  2015-07-24 312
162 갈라디아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갈2:20  김남준 목사  2015-06-29 1033
161 갈라디아 성령의 열매를 맺자 갈5:16-26  한태완 목사  2015-06-08 855
160 갈라디아 성령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갈5:25  김남준 목사  2015-04-24 751
159 갈라디아 자유와 해방 갈5:1  조용기 목사  2015-04-17 347
158 갈라디아 감격의 신앙생활 갈4:15  한태완 목사  2015-02-28 1075
157 갈라디아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조심하라 갈4:4-5  허태수 목사  2015-02-14 559
156 갈라디아 십자가에 못 박은 것 갈5:24  김남준 목사  2015-02-13 806
155 갈라디아 심고 거두는 법칙 갈6:7-9  조용기 목사  2015-02-10 680
154 갈라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4:4-7  정용섭 목사  2015-02-03 666
153 갈라디아 누구의 종인가? 갈1:1-5  이상호 목사  2015-01-17 414
152 갈라디아 시기심과 질투 갈5:19-26  한태완 목사  2015-01-09 828
151 갈라디아 나는 누구인가? 갈5:1  조용기 목사  2015-01-08 557
150 갈라디아 개신교와 가톨릭교와의 차이 갈1:7  한태완 목사  2014-08-25 2279
149 갈라디아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6:9  한태완 목사  2014-08-12 1761
148 갈라디아 누구의 종인가? 갈1:1-5  이상호 목사  2014-07-11 847
147 갈라디아 그런 부활’은 이제 그만 갈4:9-10  허태수 목사  2014-07-08 1551
146 갈라디아 시기, 질투와 재능 갈5:19-21  한태완 목사  2014-04-28 1647
145 갈라디아 위기가 기회입니다. 갈6:9  한태완 목사  2014-04-27 1570
144 갈라디아 좋은 씨를 뿌리고 좋은 나무를 심자 갈6: 6- 9  한태완 목사  2014-04-18 1795
143 갈라디아 복음(1)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갈1:6-10  김필곤 목사  2014-03-30 1935
142 갈라디아 행복의 항아리 갈4:1-16  최장환 목사  2013-12-18 1985
141 갈라디아 기다림이 필요하다 갈1:1-17  최장환 목사  2013-11-27 2500
140 갈라디아 초지일관의 신앙과 사랑 갈3:3  한태완 목사  2013-11-19 1803
139 갈라디아 중생한 자의 갈등 갈5:17-18  강종수 목사  2013-11-03 1566
138 갈라디아 심은 대로 거두는 추수의 원칙 갈6:7-9  한태완 목사  2013-10-15 2931
137 갈라디아 옥상 갈6:7-9  한태완 목사  2013-10-03 1905
136 갈라디아 믿음의 본질 갈2:15-21  이영화 목사  2013-08-26 2085
135 갈라디아 하나님의 시간에 충실하라 갈6:7-9  강종수 목사  2013-08-18 2450
134 갈라디아 성령의 사람이 되면 갈1:8-12  강종수 목사  2013-07-21 1793
133 갈라디아 아름다운 매듭(송년주일) 갈3:3  이상호 목사  2013-07-18 2868
132 갈라디아 교회를 위한 해산의 수고 갈4:12-20  김동호 목사  2013-07-14 2231
131 갈라디아 율법과 십자가 갈2:15-21  정용섭 목사  2013-07-07 1637
130 갈라디아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갈6:6-9  류공석 목사  2013-06-22 2198
129 갈라디아 사순절과 절제 갈5:22-24  이상호 목사  2013-06-12 2124
128 갈라디아 이런 사람이 되자 갈6:1-18  최장환 목사  2013-06-12 3702
127 갈라디아 성령의 지각을 받으라 갈5:16-18  강종수 목사  2013-06-09 1607
126 갈라디아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1:1-10  정용섭 목사  2013-06-0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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