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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는 삶

에배소서 조용기............... 조회 수 1966 추천 수 0 2009.05.14 13:3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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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2:5-6, 계3장:20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4년 7월 18일 주일2부설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함께 나누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남한과 북한은 한반도에서 함께 삶을 살고 있지만 서로 나누는 삶은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정치 이념과 체제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함께 살아도 함께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의 공동목표와 가치관을 갖고 사랑과 믿음으로 함께 살며 이해가 일치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가족의 함께 나누는 삶

첫째로, 우리가 가족을 보면 가족은 함께 나누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냥 모여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삶을 나누면서 살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는 가정이란 공동체에서 공동의 목표와 가치관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가족의 건강은 공동의 목표입니다. 가족이 서로 다 성공하는 것도 공동의 목표고 함게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것도 공동의 목표인 것입니다. 또 가족이 공동의 목표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 신앙 등의 삶의 가치도 함께 나누는 것이 가족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가족보다 더 함께 서로 나누면서 사는 단체가 없습니다. 결혼할 때 신랑,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 부모를 보면 됩니다. 가정이란 공동체 안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모범으로 삼고, 딸은 어머니를 모범으로 삼습니다. 미국의 아동 교육 전문가 폴 디 마이어는 아이 인격의 85%가 1살에서 6살 사이에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아이들은 주로 부모와 함께 있습니다. 늘 아버지를 바라보고 어머니를 바랍봅니다. 부모와 자식의 가치관이 같고 삶에 대한 이해가 서로 일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함께 살 뿐 아니라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중국 고사에 보면 정자의 부인이 하루 시장을 가는데 어린 아이가 시장을 따라 가겠다고 몹시 울고 보채니까 그 어머니가 하는말이 “집에 있어라. 내가 시장에 갔다오면 돼지고기를 고워 주겠다.” 어린아이가 좋아서 울고 발버둥치는 것을 그쳤습니다. 그 엄마는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서 잠시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시장에 갔다 오니까 그 남편이 집안 살림밑천인 돼지를 잡고 있거든. “아니 여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에요? 집안 살림 밑천인 돼지를 왜 잡아요?” “당신이 시장갈 때 어린아이가 울면서 따라가려고 하니까 시장에서 돌아와서 돼지를 잡아 구워 주겠다고 하지 않았오? 어린아이는 부모를 보고 배우는 거에요. 부모가 어린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면 ‘아 인생은 거짓말을 하고 살아야 되는구나!’ 그렇게 잘못 가르치는 것이 되는 것이오. 그러므로 당신이 말했으므로 말 그대로 해야 돼요.” 그래서 돼지를 잡아서 구워서 어린아이에게 주었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언행일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을 여기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래전 한 유치원의 어린아이들에게 아버지를 그려 보라고 했더니 애들이 그림을 그렸는데 보니까 술마시는 아버지, 회사가는 아버지, 신문보는 아버지, 화를 내는 아버지 그림이 제일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눈에 비치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기와 함께 놀아주고 사랑을 나누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한 집에서 같이 살지만 거리감이 있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올바른 모습으로 비춰지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이 서로 관심을 갖고 즐거움을 함께 나누어야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돌아보면 저의 어릴 때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라고 하면은 항상 책을 읽고 계시는 아버지를 그릴수가 있습니다. 늘 아버지는 책을 읽고 계셨어요. 그리고 술을 잡수지 않고 담배를 피지 않았어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제가 자랄 때 마음속에 박혔기 때문에 ‘아~ 인생이란 책을 갖고 사는 가보다.’ 그래서 한평생 저도 책을 갖고 살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한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혈통으로 맺어진 사랑과 믿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3절에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긴다고 한것입니다.
부모님은 자식을 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건강 가족 운동가 존 더 프레이닝 교수는 인터뷰에서 “가정은 사회 안정과 국가간 연대등에 기반이 되며 세계 어느나라에서나 건강한 가족이 건강한 사회를 지탱해 나가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나라마다 가치 체계는 달라도 건강은 가족 즉, 성공한 가족은 모두 일반적으로 다음 다섯가지 특징을 띠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건강한 가족의 특징은 가족 상호간에 인정과 애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서로 인정이 있고 애정이 있고 부모가 자식을 따뜻하게 사랑하고 자식들도 부모를 따뜻하게 사랑하는 인정과 애정이 넘치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입니다. 그 다음에는 헌신적인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멋대로 엄마 멋대로 자식 멋대로 이기주의적으로 서로 이용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희생하며 서로 돌보아 주는 헌신이 있는 그런 가정이 건강한 가정입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의사소통이 있는 가정입니다. 일방통로로 내말만 들으라. 아버지가 내말만 들으라고 하고 엄마가 또 내 말만 들으라고 하고 어린아이들은 어린아이데로 자기들 고집을 부리고 이러면 건전한 가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로 상대를 존경해서 말을 들어주는 의사소통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저도 어린아이를 기를 때 일방통로로 많이 말을 했습니다. 우리 애들이 말하기를 “아버지는 일방통로로 말만 한다. 우리말은 안들어 준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의 가부장제도의 아버지의 위치가 될 때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해서 말을 들어주고 긍정적인 의사소통이 되어야 건강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야 됩니다. 그것은 의무인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시간을 함께 보내고 부모 자식간에도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야 건강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같이 해서 정신적인 평안을 가져야 됩니다. 함께 예배 드리고 기도하므로 정신적인 평안을 함께 공유하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트레스와 위기 대처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문제가 안다가올수 없습니다. 가장에게도 문제가 다가오고 자녀들에게도 문제가 다가옵니다. 그러면 온 가족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힘을 주고 능력을 주고 긍정적인 마음을 주고 기도해 주고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스트레스와 위기대처 능력이 있는 이런 가정이 건강한 가정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발리리스키 부부의 가정은 10명의 자녀중 6명은 해외 선교사로 4명은 독실한 신앙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어릴때를 회상하기를 “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병에 들어서 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로 아름다운 기독교 가정을 이루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같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첫째, 부모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 우리를 하나님께 벌써 드렸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는데 처음에는 힘들고 귀찮고 몸서리가 났지만 이제 장성하고 집을 떠난 오늘날 돌아볼 때 결코 잊을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아버지는 우리의 친구가 되어 허물없이 대해 주셨지만 가장의 권위로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판결과 같이 추상같았다고 말했습니다. 넷째, 부모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공평하게 대해 주셨다. 잘못했을때는 벌을 받았고 잘했을때는 칭찬을 아낌없이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부모님은 언제나 말씀과 삶이 일치하여 그들은 삶으로 가장 이상적인 모범을 보여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진실로 우리를 사랑해 주었다고 그 자녀들이 말했습니다. 훗날 성장하여 중년이 된 자녀들의 기억속에 이렇게 남을수 있다면 그 부모의 사명은 다 한 것입니다. 이처럼 부모와 자식은 함께 나누는 삶을 삽니다. 그냥 함께 집단으로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운명을 같이하고 그들의 삶의 가치를 공유하는 나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2. 부부의 함께 나누는 삶
둘째, 부부는 함께 나누는 삶을 삽니다.
부부는 법적으로 만나서 그저 남녀가 서로 같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는 남남끼리 만났을지라도 삶의 동일한 목표와 가치를 나눕니다. 부부는 함께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고 같은 신앙과 도덕관을 가지고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한몸 이라는 것은 뿔뿔이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 한몸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는 함께 살기 때문에 이해가 일치합니다. 함께 평안하고 행복하고 성공하며 살기를 원하는 이해가 일치하는 것이 부부인 것입니다.
미국이나 구라파에 가면 문화적인 차이를 절실히 실감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남편과 아내의 것을 분명히 구분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많은 목사 친구들에게 제가 간증을 합니다. “나는 결혼하고 난 다음 지금까지 월급 봉투를 본적이 없다. 내 월급봉투는 우리 집사람에게 직행을 하고 내가 돈이 필요하면 언제나 타서 쓴다.” 미국이나 구라파 목사 친구들이 아연실색을 합니다. “세상이 그런법이 어딨느냐. 월급은 자네 돈인데 왜 자네돈을 부인에게 주느냐. 내돈은 내돈이니까 내가 취해야지. 그럴수가 어디 있느냐!” 그리고 그 사람들은 물건을 사면 장부를 두고서 남편이 산물건 적어놓고 부인이 산물건을 적어 놓습니다. 왜 적느냐 하니까 나중에 이혼할 때 서로 자기것 찾아가는데 분쟁이 없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문화적인 차이입니다. 그런데 저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것은 부부가 결혼하면 일심동체가 되어 사는 것이기 때문에 네껏 내껏이 어디 있을수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벌었다고 해서 내가 가지고 있어야 된다. 그런법도 있을수 없잖아요. 서로 함께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부부의 삶인 것입니다. 부부는 법적으로만 아니라 사랑과 신뢰로 함께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부부는 함께 살뿐 아니라 삶의 내용도 함께 나누어야 됩니다. 남편따로 부인따로 사는 것은 함께 나누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부부나 가족등 친한 사람끼리는 목소리가 닮는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조선일보 2004년 3월 10일 발표에 보면 숭실대학교에서 3백여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친밀도가 높은 부인일수록 남편일수록 부부간에 목소리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 부부간에 얼마나 친밀한지 집에가서 한번 ‘도레미파솔라시도’ 한번 해보십시오. 남편의 목소리와 부인의 목소리가 근사하게 닮았으면 굉장히 친밀하게 살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뭘 그럴라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의 몸에서는 도파민과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발생하는데 도파민에는 성격을 닮게 하는 성분이 들어있고 옥시토신에는 외모를 닮게 하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매일같이 많이 대하면 많이 대하는 사람끼리 자신도 모르게 사고방식이나 외모가 닮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남남끼리 만났을지라도 함께 살면서 서로 성격이 닮게 되고 외모도 닮게 됩니다. 제가 많은 성도들과 신앙상담을 하는데 깜짝 놀라는 것은 오래 산 부부일수록 같이 앞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 서로 형제, 자매같이 닮았어요. “야~ 희안하게 닮았다. 어떻게 서로 살면 이렇게 닮아질수 있느냐.” 오늘날 과학적으로 이제 그것이 증명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도파민은 성격을 닮게 하고 옥시토신은 모습을 닮게 하는데 서로 많이 대할 때 이 호르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이마를 맞대고 사니까 이와같은 호르몬이 생겨서 서로 성격도 닮고 모습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부라는 것은 서로 나누면서 함께 사는 것이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오래전 오클라호마 성회때 두 부인이 울면서 가정 파탄으로 인한 고통을 가지고 제게 호소를 했습니다. 한 부인이 말하기를 남편을 지금까지 좋은 아빠이며 좋은 배우자로 생각했는데 49살이 되자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더 이상 살기싫다. 더 이상 위선적인 생활을 하기 싫다. 당신이 곁에 오는 것 조차 몸서리가 친다.” 그렇게 하면서 보따리 싸서 가출을 해버리고 말았다고 나보고 울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왔어요. 또 한사람은 남편이 53살이 되었는데 훌륭한 의사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나는 당신이 실증이 나서 못살겠다. 나는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보따리 싸서 가출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년기의 가정파탄은 어느날 갑자기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쌓였던 실망과 증오가 갱년기에 폭발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 이렇게 뒤늦게 부부간에 애정이 파탄에 이르게 될까요? 그것은 그들이 함께 나누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이후로 계속해서 상대방을 이용가치로만 생각해서 단물다 빨아먹고 난 다음에 단물 안생기니까 차버리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한 이용가치로만 생각했지 서로 함께 삶을 나누지 않고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기주의적으로 산 결과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나누는 삶을 산다면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며 서로 도와주고 사는 참여하고 함께 하는 삶이기 때문에 끝없이 같이 인생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더구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우리는 마르지 않는 샘의 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꿀을 다 빨아 먹어 버리면 빈 껍데기가 되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서로 함께 주를 찬미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섬기면 마음속에서 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넘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늘 기도하고 함께 늘 찬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서로 함께 인생을 매일같이 나누면서 살면은 평생을 살아도 지치지 않고 피곤하지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39대 대통령이었던 카터는 부인 로젤린 여사와 함께 살았는데 여사는 신앙심이 깊고 현숙한 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종종 말다툼을 했습니다. 카터는 시간을 칼날같이 지키는 사람으로 항상 약속시간 30분 전까지 약속 장소에 도착해야 직성이 풀렸기 때문에 약속에 절대 늦는 법이 없는데 부인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언제나 약속이 되어도 아직까지 화장한다고 화장대 앞에 앉아 있습니다. 카터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시작해서 부인과 이것 때문에 다투었습니다. 약속전에 적어도 10분 먼저 모이는데 가있어야 된다고 하는데 부인은 10분 딱 될 때 도착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대게 어떤 남편이나 부인들이 시간 때문에 많이 다투는데 이 분들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카터 대통령이 아무리 부인에게 훈계를 하고 다투고 교육을 해도 절대로 고치지를 못해요. 부인이 항상 늦어요. 그래서 이제 나이 늙어서 부인의 생일날 카드를 쓰다가 카터 대통령이 생각하기를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못고치는 병이니 저버릇을 이제는 내가 받아 들여야지. 싸워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그 카드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오늘까지 당신을 너무 많이 괴롭혔는데 지금부터 당신은 시간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 자유해도 좋다.’ 부인이 카드를 받고 얼마나 기뻐했던지 이런말을 자주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준 최고의 생일선물은 시간을 지키는데서 자유하라는 말이었다.‘고 했습니다. 부인의 성격을 뜯어 고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안고쳐 집니다. 천성을 받았으니 어떻게 고쳐집니까? 그러니 별수없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수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고치려고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보조를 맞추고 살아가면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과의 함께 나누는 삶
우리 인생은 부모 자식간에 함께 나누며 살고 부부간에 함께 나누고 살지만은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을 나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처럼 사람이 되어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의 불행을 자신의 짐으로 짊어졌습니다. 함께 나누는 삶은 상대를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불행을 당신의 불행으로 짊어졌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짐을 짊어졌지요.
이사야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찬송가 작가로 알려진 영국의 윌리암 카우퍼는 여섯 살때 어머니의 죽음을 체험하고 평생을 우울에 시달리며 여러번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하루는 그가 템즈 강에서 투신자살하려고 택시를 타고 템즈강으로 가려는데 어찌나 안개가 깊게 끼었던지 택시 운전사가 런던시내를 빙글빙글 돌다가 나중에 택시를 도로 댔는데 내려 보니까 자기집앞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못했습니다. 그 이튿날 그는 자살하기 위해서 부엌칼을 손에 들었는데 보니까 누가 잘못써서 부엌칼이 부러져 있었어요. 그래서 자살 못했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노끈으로 목을 천장에다가 묶었는데 매달려 있는데 막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데 끈이 탁 떨어져 가지고서 그래서 또 죽지를 못했습니다. 결국 카우퍼는 33살 때 18개월 동안 정신병원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성경을 읽던 그는 로마서 3장 25절의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죄를 간구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읽고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그때 일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그 말씀을 읽는 순간 의의 태양이 비춰 내게 비춰져 나는 그리스도께서 용서와 의를 위해서 이루신 속죄를 보았다. 기쁨과 감격이 나를 압도했다. 내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사랑과 경의에 잠겨 조용한 침묵속에 하나님을 처다볼 뿐이었다.” 그날로 그는 새 사람으로 거듭났고 그의 인생은 변화되고 정신병에서 완전히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의 삶을 딛고 일어나 기쁨과 감격으로 시를 쓰기 시작해서 위대한 시인이 되었는데 그의 아름다운 시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도 우리가 즐겨 부르던 찬송가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찬송가 190장을 바로 이 윌리암 카우퍼가 지었습니다. 그는 임종때 스데반처럼 얼굴이 환하게 빛나면서 “나는 결코 천국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할렐루야~” 하면서 세상을 떠나게 된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죄악으로 얼룩지고 마음에 억울함으로 정신병에 걸린 사람도 짐을 함께 짊어지고 나누어지고 그를 치료해서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허물의 짐을 지므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허물없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허물을 대신 짊어져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또 주님은 병의 짐을 지심으로 우리를 함께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병으로 고생하십니까? 크고 작은 병이 우리의 삶에 크나 큰 부담이 되고 우리의 소원은 한평생 살면서 건강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아닙니까?
성경에는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했으며
마태복음 8장 17절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콩고에서 선교사로 갔다가 간암에 걸린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침대에 누워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베드로전서 2장 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는 성경 구절을 읽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말씀이 마음에 강하게 부딪혔습니다. 목사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주님께 이 은혜에 대한 감사기도를 드렸는데 기도중에 주님이 마음에 고요하고 잠잠한 음성을 들려 주었습니다. ”내가 너의 질병을 대신 짊어지고 빌라도의 뜰에서 등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채찍을 맞았다. 그리고 너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모든 죄를 청산했다. 내가 채찍에 맞음으로 네가 나음을 입었다는 사실을 네가 믿느냐“ 목사님은 ”아멘!“ 하고서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자신의 병고침을 받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즉시 사모님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 성경 말씀을 보시오. 분명히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소. 예수님이 친히 내 병을 짊어지시고 다 청산하셨다는 말씀이오. 나는 더 이상 간암 환자가 아니오. 그러니 드러누워 있을 필요가 어디 있소. 나에게 옷가져 오세요.“ 그는 옷을 입고 도로 하나님의 사역에 출발했는데 얼마동안 일하다가 나중에 조사해 보니 간암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질병도 함께 나누어 짊어지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저주의 짐을 지시므로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므로 저주를 가져왔어요.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너희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된 이러한 삶의 고난. 이 저주를 주님이 함께 짊어지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이 저주를 나누어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의 부요함을 우리와 나누고 우리의 가난함은 당신이 친히 나누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가난은 사라지고 부요가 태양처럼 떠오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죽음의 짐을 함께 나누어 짊어지시므로 정말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로 15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
죽음이 즐거운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죽음을 우리가 다 두려워 합니다. 이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죽어 음부에 내려갔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므로 우리를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죽음과 삶에 동참하고 함께 나누는 삶을 사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주님 부활은 우리위한 부활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정말 여러분과 나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말씀처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에베소서 2장 5절로 6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보십시오. 혼자 아닙니다. 함께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님과 우리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늘 함께 존재하며 살며 함께 나누며 삶에 동참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님과 우리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여러분의 거처가 고대 광실 좋은 집이든 초가 삼간이든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와서 여러분과 함께 거처를 하겠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저에게로 들어가 저와 더불어 먹고 저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가족이 하는 일 아닙니까? 주님은 우리와 가족이 되어서 함께 인생을 동참하겠다는 것입니다.

4. 성공적인 함께 나누는 삶
넷째로, 성공적인 삶을 함께 나누는 삶을 어떻게 살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함께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누가 그 공동체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서 인도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공동체에서는 부모가 이끌어 가야 되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서 함께 살지만 누가 선두에 서서 이끌어 줘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을 인도해 줘야지 자식이 부모를 이끌어 주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신명기 5장 16절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성경에는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의 리더십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0절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식간에 공동체 속에서는 부모가 리더십을 가지고 자녀들을 이끌어 줘야지 나는 책임없다고 낳기만 낳고 내 던져 버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부부의 공동체에서는 남편이 이끌어야 됩니다. 부부가 함께 남남끼리 만나서 한몸이 되어서 살 때 남편은 머리요, 아내는 수족과 같습니다. 남편이 리더십을 쥐어야 돼요.
에베소서 5장 33절에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으로 이끌어 줘야 됩니다. 아내는 경외하며 따라야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또 주님과 우리의 공동체에서는 주님이 이끌어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이끌면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는 신랑과 신부 아닙니까? 주님이 신랑이요, 우리가 신부이므로 주님이 우리를 이끌어 가야 되고 우리는 그냥 따라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절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아이젠 하워 대통령은 대단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지도자로 손꼽힙니다. 하루는 그의 지도력에 감탄한 기자들이 그를 방문하여 비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무말없이 50cm 정도의 실을 책상위에 똑바로 놓고 뒤에 밀어 보라고 했습니다. 기자들이 실을 뒤에서 밀어 보니까 실이 꼬부랑 꼬부랑 꼬이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이젠 하워 대통령이 일어나서 실의 앞을 잡고 싹 당기니까 쭉 펴지면서 쭉 끌려 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쓱 웃으면서 하는말이 “지도력이란 이것입니다. 뒤에서 밀면 꼬부라지고 비뚫어지고 나아가지 않습니다. 지도자는 앞에서 끌어야 되는 것입니다. 짐승은 뒤에서 때리면 앞으로 나가지만 사람은 지도자가 앞에서 끌어야 끌려간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려면 부모와 자식의 공동체 속에서는 부모가 앞에서 끌어야 됩니다. 남편과 아내의 공동체 생활속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끌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편을 가정의 지도자로 만든 아내에 대한 글을 읽고 저는 깊이 감동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IMF한파로 인해서 그 남편은 명예 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로써 또 남편으로써 자신감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명예퇴직을 당한후에 살아갈 의미를 잃고 자살한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도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많이 느꼈습니다. 집에 있어도 마음이 불편하고 밖에 나와도 갈곳이 없습니다. 부인앞에 머리를 들수 없고 자녀들 앞에 아버지 이름을 들을수가 없었습니다. 가정에서 지도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가정이 풍지박산이 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낙심이 되어서 등산이나 가야 되겠다고 집에서 나오는데 부인이 노란종이쪽지 하나를 손에다 쥐어 주더랍니다. 그래서 그 쪽지를 가지고 산위에 올라가서 펴 보았더니 거기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여보 당신은 직장을 잃어도 내 남편이요, 돈이 없어도 내 남편이요, 못나도 내 남편, 잘나도 내 남편입니다. 당신이 있는 곳에 나도 있고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고 당신이 사는 곳에 나도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낙심하지 마세요. 당신은 어디까지나 우리 집의 가장입니다. 저는 아이들과 함께 당신을 잘 받들겁니다.” 그 쪽지를 읽는데 얼마나 마음에 감동이 되든지 눈물이 줄줄 흘러더랍니다. 그리고는 “이래봐도 나를 인정하는 아내가 있다. 그렇다면 용기를 내자. 나는 직장도 잃고 돈도 벌지 못하는 못난 남편이지만 그래도 나를 남편으로 아버지로 인정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으니 내가 뭘 못하겠는가. 가장으로써 나의 위치가 굳건한 즉 풀빵 장사라도 하자. 결코 나는 뒤로 물러갈수 없다.” 그래서 산을 내려와서 과거에 회사의 부장까지 올라갔던 사람이 그날 리어커를 끌고 그길로 나가서 풀빵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풀빵 장사를 하면서도 “이토록 나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데 이들을 위해 일할수 있으니 얼마나 떳떳하고 행복한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글을 적은 것을 읽고 저도 굉장히 감동을 느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리더로 만들어 준것입니다. 보통 여자같으면 “야~ 못난 인간아, 직장도 갖지 못하고 월급도 받지 못하고 처자도 먹여 살리지 못하는 너가 무슨 가장이냐. 나가라! 나가!”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어딜 나갑니까? 서울역 지하도밖에 나갈때가 어디있어요. 홈래스가 되고 말지요. 여러분 아내가 남편을 리더로 만들어 줘야 되고 또 남편은 리더로써 어떤 희생이라도 감래하고 자식과 아내를 이끌어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어떠한 리더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와 삶을 함께 나누는데 예수님은 어떠한 리더인 것입니까? 여러분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보호하고 양육하고 인도하는 능력과 책임을져야 되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보호할 능력이 있습니까?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우리를 건져 내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쳐 십자가에 몸을 찢고 피를 흘리기까지 희생한 그분이 우리를 보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호자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야웨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저가 너희를 세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양육할 능력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의 염려하는 것이요.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줄을 아시느라고 말한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로 3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40일 먹이신 하나님, 오병이어로 5천명 먹이고 12바구니 남게한 예수님은 우리를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생활에서 양육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이끌어갈 리더십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알고 계신 예수님이 길을 아시는데요. 내가 길이라고 하는데 우리를 못이끌어갈 택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는 자식들을 보호하고 양육하고 인도하는 능력이 있어야 되고 남편은 아내를 보호하고 양육하고 인도할 능력이 있어야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해서 우리를 보호하고 양육하고 인도할 능력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격을 넉넉히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당당히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로 29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나누는 삶을 살 수 있는 위대한 리더라는 것을 확실히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리더를 따르는 우리들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자녀들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를 따라야 되며 아내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남편을 따라야 되며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이 어떠한 심정으로 주님을 따라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리더를 따르는 자의 역할은 온유하게 순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순종을 해야 이끌어 나가지 불순종하고 반항하고 대결하면 어떻게 이끌어 갈 수가 있겠습니까?
신명기 30장 20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배워야 여러분 우리를 이끌어 갈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중에 3분의 1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뉴욕의 경우, 중고등학교 선생님의 절반이 유태인이요, 하버드, 스탠포드, 예일의과대학과 법과대학교수 중 절반이 유태인입니다. 한국인 최초의 맹인박사로 미국 장애인협회 회장인 강영우 박사님이 미국에 사는 유태인을 조사해 보았더니 미국 최고 지성인 21명중에 15명이 유태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유태인들이 어떻게 성공한 비결을 연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유태인들은 다음 두가지에 대하여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모든 힘은 하나님께로부터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조건 옳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의지. 순종의 삶이 그들의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이끌어갈 때 우리가 절대로 순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 줄수 없습니다. 디트리트 본 해퍼는 말하기를 신앙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맥도날드는 순종이야말로 모든 문을 여는 열쇠라고 말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믿음은 순종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그분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고 영향을 받으며 통제되기 위해 그분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를 따르는 우리들은 믿고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어야 돼요. 내가 모른다고 안믿으면 안돼요. 지도하는 사람이 다 알고 이끌어 가는 것이지 우리는 믿고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5절로 6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믿어야만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위기의 순간마다 기도하고 믿음으로 살기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링컨에게 찾아와 “왜 위기의 순간마다 기도를 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저는 기도 이외에는 그 어떠한 최선의 방책도 알지를 못합니다. 제가 가진 지혜와 주변 사람들의 재능으로도 어려움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오직 전능하신 그분이 최선의 방책을 알고 계시므로 저는 겸손히 주님을 믿고 의지할 뿐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역사상 위대한 대통령이 된 것은 그는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믿고 의지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흙같이 어두워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를 따라가는 사람은 지도자를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섬기지 않고 지도자를 섬겨야 됩니다. 이끌어 주고 일해 주는 지도자를 섬겨야 돼요.
요한복음 12장 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섬겨야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나와서 나 자신을 섬기기 위해서만 산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을 사는 것입니다.

[결론]
포도나무와 가지는 삶을 함께 나누지 않아요. 포도나무따로 놀고 가지따로 놀지 않잖습니다. 나무란 공동체에서 포도나무 가지를 보호하고 영향을 공급하고 자라게 하는 절대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나무가 가지를 잡고 있지 가지가 나무를 잡고 있지 않습니다. 나무가 영향을 공급하지 가지가 영향을 공급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가지를 통해서 꽃피고 잎피고 열매맺지 가지 스스로 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가지는 나무에 절대 복종하여 붙어 있으며 의지하며 줄기의 뜻을 따라 잎피고 꽃피고 열매를 맺으며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과 우리의 공동체 삶에서는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했습니다. 포도나무가 가지를 붙잡듯이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를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가지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피를 공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를 위해서 잎피고 꽃피고 열매맺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일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잎피고 꽃피고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동체 삶이요, 함께 나누는 삶입니다. 부모와 자식도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야 돼요. 부부간에도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야 되고 예수님과 우리도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함께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를 인도하는 사람은 우리를 이끌 능력이 있어야 되고 우리를 양육해줘야 되고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하고 믿고 의지하고 섬기는 삶을 살면 놀라운 공동체 생활을 하고 함께 나누는 삶을 살게 되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행복한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는 너무나 뿔뿔이 헤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성도는 성도대로 예수님은 홀로 외롭게 두시고 사는 이러한 삶이 너무나 많습니다. 참된 공동체 삶은 함께 참여하고 함께 나누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도와 주시옵소서. 부모와 자식도 삶을 함께 나누고 부부간도 함께 삶을 나누지 이용 대상으로 삼지 않고 더구나 예수님과 우리는 금세와 내세에 영원히 함께 나누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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