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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을 변화시킨 예수 그리스도

빌립보서 소재열 목사............... 조회 수 2520 추천 수 0 2008.01.23 10:4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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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3:7-14 
설교자 : 소재열 목사 
참고 : 의정부평안교회 http://www.uppch.org 

택시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아침 첫 손님이 안경을 낀 사람이면 그날은 재수가 없다는 미신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아침 첫 손님이 안경을 낀 사람일 것 같으면 하루 종일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또한 집 이사를 할 때에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결혼 날짜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합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에도 그냥 시작하면 왠지 불안합니다.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고사를 지냅니다. 이렇듯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다른 신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 같이 신에게 공덕을 쌓고 자신들의 의로움을 통해서 그 신에게 나아갑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말로 인간이 신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인간적인 모든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해서 신에게 나아가면 그 신은 자신을 도와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자기 행위의 종교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 신에게 나아가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종교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종교에는 마음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자유롭지 못합니다. 불안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종교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수고와 노력과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어 보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총 동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인의 종교성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 즉 우리들이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들을 만나 주시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께서 이 사실을 깨닫고 그가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를 변화되게 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에 바울을 변화시켰고 오늘 우리들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소망을 우리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같은 변화와 소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1. 바울은 육신을 신뢰하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대조시키고 있다(1-8절).

바울은 먼저 빌립보서 1-6절 말씀을 통하여 육체를 신뢰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육체를 신뢰한다는 말은 세상적인 것을 더 좋아하고 거기에 모든 가치를 부여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서 얼마나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했는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배경, 즉 가문은 대단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흠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 이후 그런 세상적인 것이나 가문의 배경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께서는 7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얼마나 좋았으면 이제 과거에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것들이 이제는 자신에게 해가 될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세상에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은 우리들에게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런 세상적인 모든 것들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셨던 것들입니다. 가문도 그렇고 부모님을 만나고 좋은 스승을 만나서 공부하는 것들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활동을 위해서 주신 물질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그런 것들은 좋은 것이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이냐면 그런 세상적인 것들이 우상이 될 때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놓고 생각해 봅시다. 그 돈이 우리들에게 우상이 될 때 그 돈은 우리들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패망하게 합니다. 마치 그 돈이 우리들을 구원해 주는 줄 착각합니다. 마치 그 돈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고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양 생각합니다. 그 돈을 우리 인생의 최대 목표로 삼습니다.
그래서 그 돈이 우리들에게 절대화 되면서 우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믿고 신뢰하는 것은 돈밖에 없습니다. 자기 명예 밖에 없습니다. 권력 밖에 없습니다. 이런 돈과 명예와 권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오히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해가 되고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 돈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합니다.
또한 자기가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은 해가 됩니다. 선행과 공로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다거나 종교적인 자신의 열심도 그리스도를 믿는데 해가 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그분이 누구이신지 몰랐을 때는 우리들도 세상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발견하고 믿음과 구원의 감격을 깨달았을 때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위대한 가치입니다. 그래서 이제 세상 모든 것은 나에게 더 이상 소중한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해가 될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고백이 우리들에게 있습니까? 이런 고백은 어떤 신앙을 소유한 자들의 입에서 터전 나온 환희의 소리입니까? 아무 입에서 그냥 나오는 감격의 눈물과 목소리가 아닙니다.
오직 죽었던 나를 살려주신 그 은혜와 사랑의 복음 때문에 나오는 감격입니다. 이런 감격의 눈물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이런 감격의 눈물을 넘치게 할 수 있는 신앙과 믿음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이런 간증들이 있습니까?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다고 생각하고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세상을 배설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조그만한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 예배 시간에 빠진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 그리스도가 나의 생애에 가장 소중한 분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나를 저주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생명이십니다. 내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나를 변호해 주시는 변호사이십니다.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답이시며 해결자이십니다. 그분이 아니면 나는 죽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믿는 믿음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2. 왜 세상을 버렸고 배설물로 여겼습니까?(9-11절)

바울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차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중심 사상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기뻐하라고 합니다.
빌립보라는 도시는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로마 제대 군인들을 빌립보 도시에서 살게 했습니다. 빌립보에 살면서 로마 시민권으로 사는 로마의 제대 군인들은 로마인이라는 특혜와 혜택 속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그들을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빌립보인들이 로마의 식민지로 살고 있듯이 빌립보 성도들은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로 살아야 합니다. 그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 시민으로, 즉 하늘나라의 식민지로 살라는 말씀이 1:27절인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과 3: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비록 고통 많은 이 세상에 살지만 우리들은 이 세상 시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시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라면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했습니다.
바울은 그 그리스도 때문에 가치관이 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변하게 되자 생활까지 변했습니다. 겉과 속이 함께 동일하게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을 배설물을 버리는 것과 같이 버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무엇 때문이라고 말씀합니까?

첫째,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라고 합니다(9절).
이제 우리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충만하게 얻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을 버리라고 했다고 해서 세상을 포기하고 산속으로 들어간다거나 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이 우리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못하기에 그 세상을 신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상을 벗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세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약4:4절에 보시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정죄하여 적으로 생각하시면 우리들도 그 세상을 정죄하고 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정죄하고 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을 우리가 친구로 삼게 된다면 자동적으로 우리와 하나님과는 원수가 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들은 올바른 믿음, 구원받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니면 믿음이 어려서 세상에 유혹에 빠진 자일 것입니다. 세상과 친구로 삼고 있는 자들은 이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 친구 없어도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과감하게 세상을 배설물로 여겨야 합니다.
어떤 분이 술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구가 함께 교회에 가자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나는 술을 너무나 좋아해서 교회에 못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도한 친구는 그래도 교회에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부흥에 참석한 이후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좋다던 술이 오히려 썩은 냄새가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변화의 역사가 예수 생명 안에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계속 일어나고 역사합니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세상을 버렸다고 합니다(9절).
이 말은 최후 심판을 염두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최후 심판 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세상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최후 심판 때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어 있는 자들은 이미 범죄한 자들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한 이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죄의 특성은 숨게 합니다. 언제나 마귀는 어두운 뒷골목에서 숨어서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여 숨어 있는 아담에게 “아담아! 아담아!”하고 부르시면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오시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을 부르시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 가운데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죄 가운데 숨어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 믿음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어떤 두 친구가 큰 회사에 입사 시험을 보았습니다. 합격자가 발표되었습니다. 불합격자는 돌려보내고 합격자만 따로 남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함께 시험을 본 친구의 모습이 발견된 것입니다. 합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시험 답안지가 언젠가는 하나님 손에 들려져 채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합격이냐 불합격이냐를 기다리고 있는 수험생의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우리들의 각자 인생 시험지의 답안지에 어떤 흔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까? 반드시 합격자만이 별도로 모이게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고난에 참예함을 알기 위하여(10절), 또한 넷째, 부활의 소망에 이르려고(11절) 세상을 버린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버릴 때 우리들에게 평안이 옵니다. 기쁨이 옵니다. 그러나 세상에 노예가 되어 살아간 사람들을 보십시오. 돈과 명예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있는 자들을 보라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들에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영생이 있다는 말입니다.

3. 그래서 바울은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간절히 좇아갑니다(12-14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합니다.
교만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고 마지막 결승점을 두고 절력질주는 운동 선수처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직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목표를 잡으려고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몸을 앞으로 빼고 전방을 주시합니다.
13,14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합니다.
“오직 한 일”, 즉 오직 한가지 일이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는 한 가지 일을 위해서 뒤에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과거의 아픈 기억들, 상처들을 완전히 잊어 버려야 합니다. 좋은 일만 생각해야 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중간에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 1등으로 골인할 때 주변에서 환호하는 모습만을 생각하고 연상하고 뛴다고 합니다. 좋은 일만 생각합시다. 그 다음에 자신의 과거 실적들을 잊어야 합니다. 자신의 과거 실적들로 교만하고 자만하면 안됩니다.
다같이 14절을 읽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아멘.

의정부평안교회 http://www.uppc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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