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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행복 코드: 그의 역설적 행복

빌립보서 한완상............... 조회 수 1808 추천 수 0 2008.10.05 09:3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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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1:21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7.1.7 주일설교 

빌립보서 1:21,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새해를 맞으며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장 많이 하는 화두는 바로 행복입니다. “Happy New Year”도 그러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도 그렇지요. 그런데 과연 우리가 행복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이 말을 하며, 듣는지를 보다 진지하게 성찰하고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새해가 바로 그 성찰의 시간입니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이며, 행복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특히 예수따르미에게 행복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세계적 경제시사지 이코노미스트(Economist)는 새해를 맞아 행복을 주제로 특집을 꾸몄습니다. 자본주의가 사회를 풍요롭고 자유롭게 하지만, 자본주의에게 행복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경제적 부가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함은 오늘의 미국과 일본 국민들의 행복감이 다른 나라들에 견주어 더 크지 않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돈이 오히려 독이 되어 가정을 파탄시키는 사례들을 흔히 듣고 보게 되지요.

그러면 권력이 과연 행복을 보장해줄까요? 역사적으로 보아도,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사람들의 말로가 대체로 비참했습니다. 연말에 전격적으로 교수형을 당하는 후세인의 모습을 보면서, 또한 그를 사형에 이르게 한 강대국의 지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권력이 결코 행복을 보장하지 못함을 느끼게 합니다. 지난날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살펴봐도 권력은 잠시 권력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같지만 마침내 절대 권력일수록 절대로 불행해진다는 진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명예와 명망이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한때 이름을 날렸던 연예인들, 운동선수들이 반드시 더 행복했던 삶을 누린 것 같지 않습니다.  명망이 높을수록 그만큼 교만해지기 쉽고 그 만큼 아픈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명망가들의 말로가 또한 얼마나 쓸쓸하고 괴로운지를 어렵지 않게 우리는 주변에서 듣게 됩니다.

결국 넉넉한 물질, 막강한 권력, 더 높은 명성 그리고 무병장수(無病長壽)가 행복의 조건도 그 내용도 아니라면, 무엇이 참 행복일까요? 예수따르미들이 새삼 확인해야 할 행복의 조건은 어떤 것일까요?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을 쳐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구체적 삶과 그의 메시지 속에 소중한 행복코드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행복코드를 찾기 전에 먼저 그의 메시지 가운데 우리에게 행복의 진수를 알려주는 말씀이 무엇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첫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이 권면이 바로 예수따르미의 행복을 뜻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6-18)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신약성서 중 가장 오래된 문건입니다. 이 편지에서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행복임을 그는 강조했지요. 그런데 항상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것은 행복의 극치를 나타내기는 하지만, 그 높은 수준에 이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가정 예배를 통해 바울의 이 말씀을 자주 접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가장 즐겨 강조하셨던 성서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선영에 묻혀계신 부모님의 묘비에는 이 말씀이 가훈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나’에 대해 고민했었지요. 때때로 기뻐할 수 있지만,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특정한 경우 감사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요.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권고를 사도 바울이 할 수 있는가라고 불평하기도 했지요.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그렇게 대담하게 권면할 수 있었던 그의 독특한 삶의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바울이 겪었던 갖가지 객관적 역경에 대해 살펴봅시다. 처절한 역경 속에서 도 그가 강렬하게 체험했던 행복감에 주목해야합니다. 그의 삶은 위기와 곤경의 연속으로 점철된 독특한 삶이었지요. 한마디로 객관적으로 보면 불운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것을 수고로 넘치는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고생했지요. 특히 그를 항상 괴롭혔던 유대인 크리스쳔들을 염두에 두면서 그는 그들 보다 더 많은 옥고를 치렀으며, 매도 수없이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고백했습니다(고후 11:23-29).

그것은 그가 로마 시민권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정말 억울한 고통이기도 하지요. 그는 유대인의 율법(신명기25:1-3)에 따른 형벌인 태장을 맞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당당히 거부할 권리가 있었지요. 그는 로마 시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번에 39번씩 죽도록 맞게 되는 태장형벌을 세 번이나 맞았으니 적어도 세 번은 태장 맞아 죽을 뻔했었지요. 지난해 싱가포르 적십자 회의에 참석했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여러해 전 미국 청년이 비행을 저질러 그곳에서 아직도 유효한 태장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공개적으로 시행되기에 육체적 고통에 더하여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청년은 귀국한 뒤 수치심과 심리적 압박을 이겨내지 못해 결국 자살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렇게 무서운 형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공개적 십자가 처형의 그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고통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태장 외에도 돌로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이것도 유대식 형벌인데도 말입니다. 게다가 가는 곳마다 그를 기다렸다가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그를 비방하고 괴롭혔던 율법주의 신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이것이 그가 말한 <동족의 위험>이었습니다. 여기에다 불면으로 밤을 지새우는 고통이 그를 항상 따라 다녔지요. 불면의 고통은 인간 고통 중 가장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고문 중에 가장 견디기 힘든 것에 잠재우지 않는 고문이 들어갑니다. 그것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잘 모르지요. 고문이 아니더라도 불면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울의 이 고통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면의 밤을 수없이 많이 보내는 고통에 더하여 바울은 주리고 목마르며 춥고 헐벗음에서 오는 또 다른 원초적 인간 고통을 겪었지요. 이 같은 악조건에서 손발이 부르트도록 손수 노동하면서 선교 활동을 했지요. 그래서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같은 삶이야말로  쓰레기 같은 삶이었고 인간 찌꺼기 같은 삶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지요(고전 4:13).

한마디로 바울이 겪은 역경은 바로 불행과 불운의 구체적 사례들입니다. 우리의 상식적 행복은 이 같은 역경 속에서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바울의 삶 그 자체가 불행 그 자체요, 불운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같은 역경의 한가운데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남에게 자기를 높이는 자랑을 해서는 안 되지만(이 점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부득불 자랑해야 한다면 그 역경들 속에 처해 있는 자기의 약함을 그는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때로 태장을 맞고 때론 돌의 공격을 받아 목숨이 경각에 이르게 되어 형편없이 약해진 자기의 처지, 바로 그 약함을 그는 자랑하겠다고 했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목말라 애타는 자기의 연약함에서 그는 오히려 행복과 긍지를 느꼈습니다. 그 역경 속에서 그는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고 또한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 연약함의 극치에서 희열과 감사를 느끼게 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그렇게 약해졌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실감나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수를 벤치 마크하는 기쁨,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특권을 그는 체험했기 때문이지요. 예수의 삶 자체가 <말구유>에서부터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 까지 처절한 연약함의 연속이었기에 그러한 예수 삶에 바울이 동참할 수 있다는 깨달음 그것이 너무나 벅찬 감동을 그에게 안겨준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행복은 역경속의 연약함에서 잉태되고, 더 아픈 역경의 연속 속에서 마침내 활짝 핀 아름다운 꽃이요, 풍성한 열매였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꼭 자랑해야 한다면 역경과 연약함을 자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격은 곤경을 소개할 수 있다면, 그 경험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1980년 여름 서대문 교도소 2층 감방에 갇혀 있을 때였습니다. 아침 10시경 젊은 교도관이 갑자기 내 감방 문을 열고 후다닥 쳐들어왔습니다. 나보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비켜서라고 했습니다. 나는 놀라 어리둥절했지요. 그가 내 자리에 앉더니, 나보고 2층 교도소 문을 쳐다보며 누가 오는 지를 살펴달라고 했습니다. 그를 위해 망을 봐달라는 부탁이었지요. 나는 이 젊은 교도관이 왜 이 같은 엉뚱한 짓을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지요.

“교수님 자리에 한번 앉아 보고 싶어요. 그 자리에 앉으면 행복해질 것 같아서요.”

교도관이 죄수의 자리를 탐하다니. 죄수의 자리에 앉으면 행복해 질 것 같다니.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왜 그가 그렇게 말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감옥 창살로 나를 쳐다보며, “무엇이 그리 좋아서 노래를 흥얼거리세요?”라고 힐난조로 묻곤 했지요.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성서를 읽은 뒤 찬송가책을 펼쳐 노래를 조용하게 부르곤 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 전문 서적이나 소설을 읽었지요. 그러한 내 모습이 그 교도관에게는 행복한 상태로 비췬 것 같습니다. 내가 그를 볼 때마다 미소를 지으면 “무엇이 그렇게 좋아 웃으세요?” 하고 핀잔을 주듯 얘기했습니다. 하기야 나도 속으로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과 믿음을 놓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내 모습이 그에게는 오히려 높은 수준의 행복으로 비쳤고, 그것을 그가 탐했던 것입니다. 내 연약함이 그에게는 강렬한 소망과 행복의 징후로 다가간 듯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그에게는 행복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는 감사해했습니다(고후 12:7-8). 그의 지병이 무엇인지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지병으로 그의 고통이 심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것을 그는 <몸속의 가시>로 표현했습니다.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엄청나게 인내심이 강했던 그로서도 그 가시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세 번이나 간절히 주님께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었지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께서 영의 음성을 통해 그의 간구를 거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고후 12:9)

이 같은 매정스러운 거절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더욱 놀랍습니다. 주님의 거부를 그는 정말 성숙하게 받아들였지요. 지병으로 고생하는 그 연약함 속에서 주님의 강하심을 체험하는 역설적 기쁨, 그의 몸속의 가시가 주는 통증 속에서 오히려 강렬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희열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같은 통증이 없으면 그가 교만해질 수 있음을 새삼 깨닫고 오히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병의 아픔 한가운데서 역설적으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체험하게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행복이었습니다. 그의 놀랍게 성숙한 믿음, 그의 역설적 기쁨을 그는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고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 12:10)

예수따르미의 역설, 그 역설의 기쁨, 바로 그것이 예수따르미의 행복이지요. 1970년대 후반 한국 교회가 군사 정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고 있을 때 한국을 방문했던 세계교회협의회 지도자들은 바로 위의 바울의 메시지로 우리 한국 교회를 위로했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군사 독재 하에 매우 어렵게 되고 약해졌을 때 그들이 우리를 이 말씀으로 격려해주었지요. 그때 기쁨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모두 행복했었습니다.

새해에도 우리 공동체에는 질병으로 고생하시는 자매 형제들이 계속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연세 드신 분들의 아픔도 생길 것입니다. 이 시간 사도 바울의 행복이 우리 모두의 행복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육체가 연약해져서 질병에서 자유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바울처럼, 그 연약함 속에서 움틀거리는 하나님의 강하심, 그 은혜의 넘침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셋째로 가장 뚜렷한 바울의 행복코드는 다음과 같은 그의 고백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공동번역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빌 1:21)

이 같은 그의 고백은 그의 특별한 처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로 갇혀있으면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선언했습니다. 죽을 뻔 한 온갖 역경을 수없이 거치고 이제는 지병으로 몸속의 가시를 품고 살 수밖에 없는 고통에 더하여,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의 그 괴로운 처지와 그 답답한 마음을 한번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상태보다 더 처절하게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같은 편지에서 두 번씩이나 기뻐하라고 교인들을 격려했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이 같은 위로와 격려는 감옥 밖에 있는 자유로운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 마땅히 해야 할 메시지인데 반대로 최악의 역경 속에 있던 죄수 바울이 오히려 자유로운 교인들에게 그렇게 격려했지요. 도무지 기뻐할 객관적 조건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이 같은 위로를 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된다>는 그의 확신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죽음이 그에겐 그렇게 이득이 된다고 믿었을까요? 그의 행복의 궁극적 코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 심각한 선택의 고민에 빠져 있음을 고백합니다. 죽음과 삶 사이에 끼어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빌 1:22). 도대체 이런 고민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우리는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죽음은 무조건 피해야 할 최악의 상황입니다. 죽음은 죽어라 하고 피해야 할 극악의 상태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진시황제처럼 불로초를 항상 찾고 갈망하게 되지요.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소망하지요. 우리는 결코 죽음과 삶을 놓고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조건 삶을 선택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것이 심각한 고민이었습니다. 죽어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차지만, 동시에 살아 교회를 위해 그리고 복음을 위해 해야 할일 또한 많기에 사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었으니 그에게는 생과 사가 선택의 심각한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얼마나 행복한 고민입니까.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죽음이 주는 기쁨을 아주 구체적인 것, 실용적인 것, 실질적인 것으로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죽음이 이득이 된다고 했는데 여기 이득은 장사를 통해 얻는 경제적 소득과 같이 구체적인 것입니다. 죽음의 기쁨을 추상적인 것, 감상적인 것, 종교적인 것으로 묘사하지 않고 몸으로 쉽게 느낄 수 있는 실리적인 이득으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이득은 그에게 결코 형이상학적인 관념이나 환상적 환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두려움 없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현실적 토대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영적으로 체험한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실제(reality)였습니다. 그는 우리처럼 역사적 예수를 만나 본적이 없습니다. 비록 예수와 동시대를 살았으나 예수와 직접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역사적 예수를 직접 만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바울은 오늘 우리와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 그의 귀에 쟁쟁히 울리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그는 결코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도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이것은 단순한 환청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겐 이 소리가 너무나 생생한 소리였고 너무나 현실적인 부름의 소리였습니다. 이 음성으로 그는 세계사를 바꿔놓은 엄청난 힘을 실제로 발휘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서신들이 불러일으킨, 그 엄청난 역사적 충격을, 이를테면 종교개혁, 우리가 조용히 헤아려 보면, 누가 감히 그 소리를 한낱 환청으로 격하시킬 수 있겠습니까!

인간과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실체적 힘이 그의 예수 체험, 예수 부활 체험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즐겁게 선택하고 수용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죽음이 공포와 절망의 극치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비참한 단절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환희와 감사의 연속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연속성의 경험을 통해 바울이 체험한 행복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이고 미완성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완전하고 온전한 행복은 영의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임을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다시 말해 육신으로 바울이 살아 있을 때 들었던 주님의 이 음성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어느 정도 간접적인, 또한 희미하게 보이는 그러한 주님의 실체에서 나온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영의 몸으로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서로 마주보며 만나게 되는 벅찬 행복감, 주님의 모습 전체를 똑바로 바라 볼 수 있는 벅찬 희열, 그리고 주님의 사랑의 온전함을 총체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벅찬 행복감을 맛보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그에겐 엄청난 행복이요, 사랑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2)

마치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안타깝게 그리워했던 애인을 직접 만나, 그의 얼굴과 전체 모습을 뚜렷하게 서로 눈을 마주치며 보게 되는 바로 그 행복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보장해주는 행복으로 표현했습니다. 죽음이 그래서 모든 것의 비참한 끝장이 아니라 오히려 신나는 새로운 영적 삶의 시작으로 믿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행복이었습니다.

죽음을 이렇게 총체적 환희를 안겨다 주는 행복의 기회로 믿게 되면,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조건에서든지, 끊임없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로 행복은 여기에서 활짝 꽃피게 될 것입니다. 마치 예수의 사랑이 불구하고의 사랑이듯,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행복도 불구하고의 기쁨이요, 불구하고의 감사입니다.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고질적 질병으로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기뻐하게 됩니다. 그때 세상의 모든 악조건들은 역설적으로 행복의 조건들이 되고 말지요. 한걸음 더 나아가 죽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보다 더 벅찬 특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이 행복의 특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해를 맞는 자매 형제 여러분들에게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새길 공동체 여러분, 이 시간 바울의 행복이 바로 여러분의 행복이 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Happy New Year! 새해 정말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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