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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4 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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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6년 8월 27일 주일3부 설교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서론]
‘행복의 조건’이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행복을 갖는 데는 내적, 외적인 많은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조건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불행하면 환경적인 조건을 아무리 잘 구비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은 세계를 정복을 하고 그 꿈을 꾸며 영토를 확장했고 사람들이 부러워할 것은 모두 다 소유했던 사람입니다. 지배와 소유의 정상에서 인생의 성취감도 누렸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 그가 남긴 말은 “내가 진정 행복했던 때는 단 6일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온 유럽을 석권하고 프랑스의 왕좌를 점령하고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나폴레옹도 일평생 행복한 날은 엿새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는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지만 말년에 과거를 회상하면서 “내 인생은 기쁘고 행복한 나날이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의 행복은 소유와 지배가 아닌 마음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마음에 행복을 찾았고 나폴레옹은 환경에서 행복을 찾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행복을 찾지 못하고 헬렌 켈러는 행복을 찾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론]
1. 평화가 넘치는 마음
마음에 평안을 깨뜨리는 요소들이 이 세상에 많아요. 우리가 마음에 죄책으로 인한 양심의 고통을 가지고 있으면 평화가 없습니다. 저는 이런 자매님과 신앙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님이 청춘과부가 되어서 딸 하나를 의지하고 열심히 일해서 교육을 시켜 대학까지 졸업 시켰습니다. 그리고 좋은 사윗감을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이제 어머니가 사위와 딸하고 함께 사는데 늘 딸이 어머니가 몸이 약하기 때문에 바깥에 출입을 못하고 어머니 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사위가 해외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자기 부인보고 동행을 하자고 그럽니다. 그 부인은 어머니 걱정 때문에 동행을 하겠다고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걱정하지 마라. 나는 아직까지 건강히 있으니까 내가 끓여먹고 집 잘 볼 테니까 너는 남편 따라 출장 갔다 오너라.”고 권면을 자꾸 했습니다. 못 내켜 하는 그 딸을 강압적으로 출장을 따라가라 했는데 남편과 부인이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니까 집이 딱 잠겨 있어요.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이 없기에 열쇠 공을 불러서 문을 따고 들어가니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서 세상을 떴습니다. 굉장히 충격을 받은 그 딸은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으니 자기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남편 따라 해외 출장만 안 갔더라면 어머니를 돌봐서 살았을 것인데 자기가 집을 비워 놓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셨다. 그러므로 내가 어머니를 죽였다. 그 양심에 고통으로 견딜 수 없어서 몇 번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 없으니까 제게 신앙상담을 왔는데 제가 그 자매에게 한말이 있습니다. “자매님, 지금 어머님이 살아났다 하더라도 자매님이 한일을 보고 좋아할 것입니다. 어머님은 기뻐하시고 잘 갔다 왔다. 잘 갔다 왔다. 나는 기왕 나이가 들어서 죽을 때 죽었으니 그뿐이고 나는 네가 행복하게 남편하고 출장 갔다 온 것 잘했다고 칭찬할 것입니다. 어머니는 절대로 당신을 정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 청산했습니다. 당신이 인생에 실수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그 죄를 다 청산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하나님도 용서하고 어머님도 용서한 죄를 왜 당신이 용서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머님 앞에서 용서를 받은 죄를 스스로 용서해 주고 당신을 용납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고 격려를 해주었는데 그 양심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나중에는 행복하고 기쁜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 평화가 깨어지면 불행하기 짝이 없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양심에 극렬한 고통을 받으니까 그는 자살하려고 한 것입니다. 행복의 가장 근원이 마음의 평화인 것입니다. 평안이 없으면 부귀영화, 공명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런 것이 행복을 갖다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애 3:39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에 고통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지 않고는 평안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법을 어기고 법적조치를 당할 때도 굉장히 불행해 합니다. 많은 신앙상담을 오는 사람들이 고소를 당하거나 법정에 불려가거나 검찰에 조사를 받고 많은 고통을 가지고 제게 신앙상담을 옵니다. 그들의 삶은 지옥 그 자체인 것입니다. 어떠한 것도 그들을 위로해줄 수 없는 마음에 고통, 괴로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세상의 부귀영화, 공명을 가지고 행복할 수 있습니까? 오직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제가 늘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일을 맡기십시오. 잘했든 못했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고 하나님께 일을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 손에 맡기면 하나님이 끝장에 가서 유익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기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법을 어기고 법적조치를 당해 크게 불안한 사람도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내어 맡기면 그 불행조차도 끝장에 가서는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시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결코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인관계 속에 갈등을 가지고 불행한 사람 많습니다. 가정에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마음이 안 맞아 갈등을 가지면 결코 가정이 평안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서로 싸우고 대결하면 남편이 마음에 평안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밖에 나와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부인도 마찬가지지요. 가사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갈등, 부모 자식 간에 갈등 되어도 부모의 마음에 고통이 말로 다 할 수 없고 사회적인 갈등도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에 사회가 불안한 이유가 왜 그렇습니까? 지역 간 갈등이 있고, 계층 간 갈등이 있고 노사갈등이 있어 서로 대결하기 때문에 사회가 불안하고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이 갈등을 누가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평안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갈등을 가졌을 때 자꾸 상대방 때문에 내 마음에 갈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평안을 가득히 가지고 상대를 대하면 내 평안을 상대에게 전달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내게 평안을 빼앗아 간다고 말하지 말고 내가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상대를 포용하면 평안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지 않고는 가져올 수 없는 평안인 것입니다. 또한 생활의 고통이 극심하면 마음이 굉장히 불안합니다. 직장을 잃을까 싶어 번뇌하고 있을 때 평안이 없잖아요. 사업이 무너져가고 부도가 날 지경에 이르는데 평안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요사이 우리 한국사회가 굉장한 불안에 빠진 이유 중에 하나도 바다 이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제 여름이 다 지나갔는데 철늦게 바다 이야기가 생겨서 온 국민이 바닷물에 풍덩 빠졌습니다. 왜 바다 이야기에 일신을 내걸고 살림을 다 탕진가산합니까? 사회가 불안하고 경제가 어려우니까 어떻게 한꺼번에 큰 부자가 되어 보겠다. 대박을 한번 터뜨려 보겠다는 사행심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살고 평안하면 사행심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생활이 어렵고 고통스러우니까 어떻게 하다가 대박을 한번 때려서 큰돈이나 주어볼까 싶은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 팔고, 집 팔고, 수 천 만원을 가지고서 바다 이야기에 들어갔다가 바다에 빠져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 결코 평안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평안은 양심의 가책, 세상의 법적인 고통, 대인관계의 갈등, 생활의 고통이 있을 동안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외적인 힘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이며 죽어가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물밖에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숨이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고 폐속에 물이 가득해지는데 어떻게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와서 건져줘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이 마음의 불안과 고통에서 건져줄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고쳐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와서 우리를 건져줄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다른 점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에 빠졌을 때 우리를 건져줄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을 얻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짐을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짐 진 자들만 내게로 오라고 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없는 사람 내게로 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가졌을지라도 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께 나올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내게 평안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시91: 1~ 7에 보면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지존자의 은밀한 곳이 뭡니까? 하나님의 은밀한 곳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곳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전능자의 그늘아래 있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여러분의 피난처라 하고 지원자로 거처를 삼으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여러분을 지켜 모든 길에 보호를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면 우리가 마음속에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의뢰할 데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짐을 맡길 데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고 아무도 내손 붙잡아 이끌어 줄자가 없을 때 우리는 절망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23: 4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너무나 놀라운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크고 적은 사망의 골짜기를 안지날수가 없어요. 인생사는 자체가 곧 고난이니까. 크고 작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고 부모, 형제 날 떠나고 아무도 나를 도와줄자 없을지라도 성경에는 주께서 나와 같이 계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언약을 맺었습니다.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피를 의지하는 자는 결단코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않겠다는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주님이 함께 계시는데 주님은 목자로써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오십니다. 지팡이는 길을 열어 주시고 막대기는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길 잃어버린 처지에 있을지라도 주님은 길을 열어 주시고 어떻게 큰 원수가와도 막대기로 막아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평안이 있어야 행복의 기초가 될뿐 평안이 있어야 문제 해결도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영국의 식민 정치가였던 세실 존 로즈(Cecil John Rhodes)는 건강 관계로 남아프리카로 이주해 갔다가 그곳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600만 파운드의 다이아몬드를 옥스포드 대학의 장학기금으로 기증할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한번은 그가 잠시 영국에 귀환했다가 구세군의 2대 장군이었던 브람 웰 부드 장군(Bramwell Booth)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드 장군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거부인데 그 돈을 가지고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자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행복이라니요? 행복이 어디 있어요?” 그러자 부드 장군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하에 진실로 행복한 곳은 오직 한 곳뿐인데 그 곳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만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예수 안에 들어와야 죄도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아버지의 날개 아래 들어갈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평안한 것입니다. 그 속에 들어오면 죄책도 다 사함을 받고 세상에 법적인 고통을 당해도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고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고 믿고 의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 들어오면 이 세상에서 어렵고 고통스러운 문제도 해결받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날개 아래 거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참 평안을 얻고 평안이 있는 곳에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흔히 속세적인 행복을 찾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기진맥진한 두 팔을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때 비로소 행복을 얻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도 ‘인생의 행복이란 소유의 많고 적음에서 오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 아무리 많은 것들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의 생활에는 행복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부귀영화, 공명에 행복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속았습니다. 부귀영화, 공명에는 행복보다도 더 많은 불만족과 고통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를 섬길 때만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께서 안주하실 때 비로소 마음이 풍족해 지고 평안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은 하나님께 의지 안할 때는 없습니다. 돈이 의지할 곳이 못됩니다. 지위나 권세가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세상에 부귀영화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지 못합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만군의 야훼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서만이 진실로 평안하고 행복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항상 감사하는 마음
마음의 행복을 깨는 원망, 불평, 짜증, 탄식 등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깨는 것이 원망, 불평, 짜증, 탄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 속에 들어가는 경향성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바라보고 늘 불평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자꾸 없는 것을 계산합니다. 성경에는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까지 빼앗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생각하고 계산하고 감사를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머리가 머리털로 덮여 있는 것 고맙게 생각하지 않지요? 나처럼 대머리가 한번 되어 보세요. 여름에는 얼마나 뜨겁다 구요. 겨울에는 또 얼마나 춥다 구요. 모자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데 저같이 대머리가 되어 보면 머리숱이 많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한국에 이 모발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서 고쳐주는 시장이 1조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머리숱이 없는 사람들 머리를 나게 한다든지 이식 한다든지 가발을 쓴다든지 하는 그 시장이 1조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보니 여러분 다 머리가 새까만데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것만 하더라도 여러분 얼마나 행복합니까? 머리털이 있는 것을 행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화상을 입어서 눈썹을 잃어버린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눈썹이 있을 때는 눈썹 고마운 줄 몰랐는데 눈썹이 없고 보니 비가 오면 물이 눈으로 다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눈썹이 있을 때는 물이 그곳을 통해서 흘러 나가 버렸기 때문에 눈을 뜰 수 있는데 눈썹이 없으니까 물이 눈으로 들어오므로 눈을 뜰 수 없다. 눈썹 있는 것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눈썹 다 있지요? 그러니 고마울 수밖에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는 입이 있고 수족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것만해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얼마나 넘칩니까? 6.25사변 이후로 한국이 얼마나 가난하고 어려울 때도 살았는데 지금은 너무 너무 잘살잖아요. 그러므로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헤아려 보고 감사해야지 자꾸 없는 것을 계산하면 안돼요.
시42: 5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내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헤아려 보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나은 타인과 자기 사물을 비교하면 안 됩니다. 자꾸 자라는 사람은 저렇게 키가 큰데 왜 나는 키가 작으냐. 다른 사람은 미남, 미녀인데 왜 나는 이렇게 못생겼냐. 다른 사람은 몸이 날씬한데 나는 왜 이 뚱보냐. 다른 사람들은 잘사는데 왜 못사느냐. 자꾸 비교하면 안 됩니다. 우리 옛날 한국 속담에도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고 하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운명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주신 운명, 내 팔자를 다른 사람 팔자하고 자꾸 비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 팔자로 살고 내 팔자는 내 팔자로 사는 것입니다. 내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에 내가 충실할 때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내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거기에 충실할 때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시37: 8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딤전 6: 7~ 8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상담가 아비(Abby) 박사에게 15세의 한 소녀가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불행합니다. 나는 독방도 없고 부모의 간섭은 심하고 나를 믿어주지 않습니다. 나를 청해주는 남자 친구도 없고 좋은 옷도 없습니다. 나의 장래는 암담합니다.”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신문에서 읽은 다른 13세 소녀가 이런 글로 답 글을 썼습니다. “나는 걷지 못하는 불구의 소녀입니다. 사람이 보고 말하고 걷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그러나 나는 비록 걷지 못하고 살지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행복이 있습니다. 나는 못 걷는다는 것보고 불평하지 않고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와 말할 수 있는 입고 팔이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을 생각하고 없는 것으로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런 답 글을 신문에 냈습니다. 맞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점점 축복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점점 그곳에서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 주시는데 원망, 불평, 탄식, 짜증을 하면은 점점 더 하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점점 더 나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행복은 감사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복을 헤아리는 사람만이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평론가인 알랭은 말하기를 “남보다 나은 점에 대해서 행복을 구한다면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남보다 한두 가지 나은 점은 있어도 전부가 뛰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남과 비교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는 데서 얻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며 감사할 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항상 받은 복을 헤아려 보십시오. 아침에 일찍 일어났어도 마음에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거든 그것을 물리치고 받은 복을 헤아려 보십시오. 비 맞지 않고 잠잘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외로운 사람도 많은데 가족이 한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해 보십시오. 감사할 조건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심신의 건강, 가정, 직장, 현실적인 삶에서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아요?
시103: 2에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택을 잊으면 안돼요. 기억하고 손꼽아 감사를 하면 주님께서 점점 더 감사할 것을 많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도 불평하고 원망하면 하나님께서 있는 것도 다 빼앗아 가시는 것입니다.
엡 5:20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려고 노력하면 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자꾸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왜 나를 안 섬겨 주느냐. 왜 나를 안도와 주느냐고 하면은 불행하게 되지요. 한 가정에도 남편이 자기중심으로 아내를 보고 자기를 섬기라. 자식들보고 자기 명령만 순종하라면 폭군이 되고 불행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은 아내를 더 기쁘게 만들어 줄까? 행복하게 만들어 줄까? 어떻게 하면 자식들에게 더 도움을 주고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까? 자기를 생각하지 말고 남의 행복을 생각하고 남을 기쁘게 만들려고 애를 쓸 때 그것이 나에게 행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줄까? 행복하게 해줄까? 더 희망차게 만들어 줄까? 이렇게 노력할 때 여러분에게 큰 기쁨과 행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남에게 주면 그것이 30배, 60배, 100배가 되어서 내게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꾸 내가 받으려고 하면은 있는 것조차 빼앗겨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이웃을 위해서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이 불행해지는 것은 이기주의자들이 모여서 그렇습니다. 자기만 섬겨 달라고 하기 때문에 가정이 불행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들만 모여서 살지 못해요. 꼭 맞는 남편 만난 사람 별로 없어요. 꼭 맞는 아내 만난 사람 별로 없어요. 꼭 마음에 맞는 자식들 낳아서 기르는 사람 별로 없어요. 이 세상에는 꼭 맞는 사람이 별로 없고 대게 다 안 맞고, 뒤틀리고 부딪히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것을 들어서 자꾸 원망하고 불평하고 할퀴고 하면은 상대도 못살고 자기도 못살고 피투성이 되는 것입니다. 주어진 세상이 이렇게 어려운 것을 그대로 내 팔자로 받아들이고 내 몫의 태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그곳에 봉사하고 섬기는 마음을 가지면 어려운 가운데 행복을 갖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내 제자 하나가 와서 내게 ‘야! 조금만 참다가 더 좋은 부인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해요. “아이고, 먹고사니. 조금만 좀 더 기다릴 것 가지고서 그냥 서둘러 결혼해서 지금 내 아내하고 마음이 맞지 않습니다.”라는 말에 내가 “야, 이 자식아! 네가 좀 더 기다렸으면 더 못난 여자 만날지 어떻게 알아. 현재 있는 것으로 감사해라. 현재 주어진 아내를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와 즐겁게 살면 하나님이 더 즐거움을 주신다. 별도리 없다. 인생은 타락한 세상이라 모두다 고통 속에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꽉 마음이 맞으면 그 때는 벼락이 떨어진다.”라고 답해주었습니다. 너무너무 행복하게 마음이 맞은 사람은 언제든지 한편이 죽는다구요. 내가 목회하면서 보니까 잉꼬부부는 너무나 좋다고 하는데 얼마 안 있으면 남편이 죽든지 아내가 꼭 죽어요. 오래오래 사는 사람 물고 찢고 싸우는 사람들이 90까지 살아요. 그러니 세상에는 꼭 들어맞는 부부를 찾지도 말고 부모자식도 찾지 말고 안 들어맞는 것을 들어맞도록 수용하고 감사하면서 사는 가운데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려고 늘 노력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뽑은 존경하는 인물 중에 8년 동안 일곱 번이나 1위를 차지했던 사람이 바로 아베 삐에르 신부인 것입니다. 그는 빈민구호 공동체인 엠마오 공동체를 창설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 삐에르 신부님이 쓴「단순한 기쁨」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간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신사가 자살 직전에 삐에르 신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정적인 문제, 경제적인 파탄, 사회적인 지위의 실추 등을 들며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삐에르 신부는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됩니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면 살 수가 없겠네요. 자살을 결심하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살하십시오. 하지만 죽기 전에 나 좀 도와주고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도움이 필요한데요.” 그 신사는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내가 얼마간 신부님을 돕도록 하지요.” 그래서 요청을 수락했기 때문에 삐에르 신부를 도와서 집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을 위해 집을 짓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일 신부님께서 내게 돈을 주었든지, 내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던지, 무언가를 베풀었다면 나는 다시 자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신부님과 같이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찾았습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만 생각할 때는 꼭 죽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삐에르 신부는 충분히 죽을 이유가 된다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날 좀 도와 달라고 그러니까 이판저판사판인데 좀 도와주고 죽자.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중심의 생각만 하고 자기만 바라보던 눈을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되고 다른 사람 중심으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도와주고 집을 지어주고 하는 바람에 자기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 봉사하는 곳에 참 만족과 행복을 느끼고 죽을 생각이 싹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만 바라보면 썩어지고 맙니다. 남을 바라보고 남을 도우면 맑고, 밝고, 환한 생명의 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데일 카네기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의 유일한 방법은 감사를 바라지 않으며 남에게 '주는 기쁨'을 갖는 데 있음을 기억하라. 당신의 고민거리를 헤아리지 말고 당신이 받은 축복을 헤아리라. 다른 사람에게 흥미를 가짐으로 피곤한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라.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을 띠울 일을 한 가지씩 하라.”
프리올이라는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거든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려고 노력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 감사가 바로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원망, 불평, 짜증, 탄식은 불행과 절망으로 가는 지름길이지만 감사는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여러분 있는 것을 가지고서 감사하고 남에게 비교하지 말고 내 자신을 보고 감사하고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일을 하고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행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감사하는 말을 한다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안 해요.
성경 시50: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감사로 어떻게 제사를 드립니까? 감사하는 말을 하고, 감사하는 찬송을 드리는 것이 감사 제사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도 영화를 느끼고 하나님도 도움을 베풀겠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자꾸 감사하고 칭찬하고 기쁘게 해주면 굉장한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감사하는 말 조금만 애를 쓰면 할 수 있잖아요. 한 가정에도 남편이 부인보고 고맙다고 말하고 잘하는 것을 칭찬해주면 부인이 으쓱해지고 힘이 생기잖아요. 남편에게 감사하고 남편을 칭찬하고 자랑하게 하면 남편이 얼마나 용기백배해서 열심히 일할 수 있잖아요. 어린아이들도 자꾸 쥐어박지 말고 용기와 힘을 주고 칭찬해주면 더 힘을 얻을 수 있잖아요. 우리 민족의 가장 단점은 감사할 줄 모르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단점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까운 일본을 보십시오. 일본 사람들은 놀랄 만큼 긍정적인 것입니다.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말에 긍정적으로 하는 일본민족을 우리가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 처음 부흥회를 갔을 때 굉장히 일본의 문화를 몰라서 당황 한 적이 있습니다. 호텔에서 나와서 밥을 먹으려고 식당에 가니까 준비 중이라고 해놓았어요. ‘아, 준비하는가보다.’ 그래서 돌아와서 잠시 있다가 또 가니까 또 준비 중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어요. 그래서 문을 두드리고 열어보니까 수리를 하고 있어요. 우리 한국은 수리중이라고 할 것인데 일본 사람들은 언제나 준비하고 있다고 준비 중이라고 써 있습니다. 더 긍정적입니다. 이러므로 수리중이라는 것보다는 준비 중이라는 것이 더 긍정적인 말이 안 되겠습니까? 역전에 가니까 시계가 있는데 시계가 고장이 나있어요. 우리 한국 사람은 ‘고장 났음’ 그렇게 할 것인데 일본 사람은 거기에다 ‘수리 중’이라고 해놓았습니다. 수리하는 사람 하나도 눈에 안보여요. 그래도 ‘고장 났음’ 그런 것보다도 ‘수리 중’이라고 한 것이 더 좋잖아요. 말을 긍정적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대게 보면 잘나가는 사람, 성공한 정치가나 경제가나 교육가의 집에 가면 국가 공로자라는 패가 붙어 있습니다. 그곳에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가면 “아, 이 집에는 그 훌륭한 기업가가 있었다. 정치가 이 훌륭한 사람이 살고 있다. 너희들도 배우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이렇게 아버지가 격려를 하는데 우리 한국 사람은 대게 훌륭한 사람 집 앞에 지나가면 애를 데리고 가다가 아버지가 서가지고 “야, 이 새끼가 여기 살았구나!” 당장 애들 듣는 앞에서 비난의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별 볼 일없는 녀석이 어찌하다가 높아져 가지고서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자식들이 뭘 배웁니까? ‘아! 훌륭한 사람은 다 개새끼구나.’ 민족적인 특성이 너무나 부정적입니다. 누구든지 좀 잘되면 어찌하든지 바짓가랑이를 끌어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짓밟아야 속이 시원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식민지 생활을 살았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무언지 우리 성격이 삐뚤어져 있어요. 우리는 고쳐야 돼요. 이웃과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라도 우리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공헌을 한 사람은 잘못된 것보다도 잘된 것을 생각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감사하고 이웃에도 감사하고 늘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해야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굉장히 인색한 것이 감사하다는 말인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밥 먹다가 숟가락하나 전달해줘도 “Thank you!” 물 한 컵 줘도 “Thank you!” 늘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숟가락을 줘도, 물 좀 다오. 하고 그대로 받습니다.자기 아내가 물을 갖다 줘도 “여보, 감사” 남편에게도 “여보 저 젓가락 좀 주세요. 감사합니다.” 꼭 감사를 해요. 서양 사람들의 특성은 감사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를 안 하고 오히려 감사하면 ‘제 무엇 잘못 먹었나? 제 왜 저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해야 돼요. 길을 조금 비켜 주어도 감사합니다. 조금 도움을 베풀어 주어도 감사합니다. 숟가락 전해줘도 감사합니다. 물 한 컵 줘도 감사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도 영화롭게 하고 감사를 받는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떳떳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3. 이웃을 관용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면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다 완전한 사람이면 모르겠습니다만 모두다 죄인들입니다. 모두다 결점이 많고 허물이 많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해주지 않고 그대로 자꾸 비난하고 공격하면 살아나갈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벗기고 할퀴고 흑칠하고 짓밟으면 살아나갈 사람 누가 있어요? 용서해줘야죠.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똥을 몇 섬을 오줌을 몇 말을 받아냅니다. 그저 똥 싸고, 오줌 싸고, 못되게 구는 것 부모가 자식을 오래참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돌보아 주어서 성인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인이 되어 살아도 우리가 얼마나 실수를 많이 하는 것입니까? 서로 용서해주고 용서받아야 살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18:28~ 35에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한 사람이 만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임금이 그를 불러와서 만달란트를 못 갚으니까 처자를 다 팔아서 만 달란트를 갚게 하겠다고 하니까 이 사람이 통곡하며 울며 용서해 달라고 사정을 하고 말미를 달라고 하매 임금이 불쌍히 여겨서 탕감해 주었습니다. “얼씨구나!” 좋다고 춤추고 나오다가 밖에 나오니까 자기 친구 한 사람이 얼마 안 되는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나서 “야! 빚 갚으라.”고 하니, 그 친구가 “나 지금 돈이 없으니 말미를 주면 갚겠다.” 멱살을 잡고 당장 감옥에 가둬 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다른 사람이 너무나 원통해서 왕에게 고발을 했습니다. “왕이 일만 달란트 용서해준 그 사람이 불과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돈 안 갚는다고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임금이 화를 내서 “그놈 불러오너라. 내가 너에게 만 달란트를 갚으라고 할 때 못 갚겠다고 통곡을 하고 울고 빌기에 용서해 주었는데 너도 너의 친구를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용서해줘야 될 것 아니냐. 이놈을 당장 감옥에 가둬서 만달란트를 갚을 때까지 고생시켜라.” 그리고 주님 하신 말씀이 “너희가 이웃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도 이렇게 만들리라” 우리 마음이 감옥에 갇힌 사람 많습니다. 불행과 고통과 좌절과 절망과 슬픔의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 많습니다. 왜, 남을 용서해 주지 않기 때문에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부모를 이웃을 용서 안 해주면 스스로 마음속에 감옥에 갇힙니다. 우리는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용서를 받았습니까? 십자가 밑에 우리가 서 보십시오.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 자신을 주님이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서 용서해 주었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다 청산하고 용서해 주고 의롭다고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용서의 빚을 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용서받은 만큼 남을 용서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감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절망의 감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이웃을 관용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 5: 38~42에 보면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관용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른뺨 뺨을 치는데 왼뺨을 돌려 데려면 얼마나 관용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송사하여 속옷을 가진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고 송사 끝마치는 것 관용하는 마음입니다. 억지로 오리가자면 십리까지 따라가는 것 관용하는 마음입니다. 오늘날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면 많은 마찰을 갈등을 피할 수가 있고 우리 마음속에 평안과 행복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의 서재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화가 나거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까지 세고 난 다음에 화를 내어라. 남을 죽이고 싶으면 그때는 백을 헤아리고 난 다음 그때도 죽을 마음이 생기면 죽여라.” 대게 화가 날 때 열만 세면 화를 안내게 되는 것입니다. 남 죽이고 싶은 마음도 백을 세면 안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이 감정을 가라 앉혀야 되는 것입니다.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면 감정을 가라앉히기 때문에 많은 갈등을 분쟁을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왜 깨집니까? 순식간에 분노가 생겨서 그 분노 가운데 상처를 입히는 말을 남편이 아내에게 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아주 자존심이 상하는 말을 하면 가정이 깨어지지 않습니까? 순식간에 감정적인 말로 깨집니다. 요사이 우리가 신문이나 TV에 보면 정치인들이 서로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 실제 사실을 가지고 하는 것보다도 감정적인 대립을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갖다 주므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언제나 용서하고 포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밑에 있는 나를 항상 생각하십시오. 나는 십자가 밑에서 얼마나 큰 죄 용서의 빚을 지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내 죄가 심하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짊어져야 되었습니까? 내 죄가 보통 죄가 아닌 것입니다. 영원히 지옥에서 멸망을 받아야 될 죄인데 이를 갚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몸 찢고, 피 흘려 내 죄를 대속해 주셨다. 그리고도 주님께서는 자랑하지 아니하시고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품에 품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용서의 사랑이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이런 용서의 사랑을 받았으면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될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항상 용서하고 관용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자기 마음속에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엡 4:32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 3: 13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용서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가정에서 당장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당장 남편을 용서하고 아내를 용서하고 부모를 용서하고 자식을 용서하고 형제를 용서하는 관용의 마음을 가지면 굉장히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와 건강의 관계를 40년 동안 연구해온 북 캘리포니아의 태도치유연구센터에서 내린 결론은 “용서는 건강을 되찾아 준다.”는 것입니다. 분노, 배신감, 상한 마음을 해결하지 못하고 관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일으키고 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루이스 B. 스메데스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잘못에서부터 풀어줄 때, 당신은 당신의 내면세계에서 자라던 악성 종양을 제거하는 것이다. 죄수 한 명을 해방시켜 주었는가? 그 죄수는 바로 당신 자신이다.” 고 말했습니다. 관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고통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4. 사랑으로 실천하는 마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태양과 같아서 온 천지를 비취는 것처럼 만민을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베푼 사랑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했다. 얼마나 사랑했느냐?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 얼마나 사랑했느냐? 몸 찢고, 피 흘리기까지 사랑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하는 사랑이 아니라 증명된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 아들을 주셨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몸 찢고, 피를 흘려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증명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도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하여 이웃을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준 계명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선민계약을 맺을 때 계약 조건으로 십계명을 지키라고 말했습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켜야 하나님과 언약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으므로 구원의 언약을 맺은 사람인데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계명을 주었습니다. 그 계명은 사랑의 계명인 것입니다.
요13:34~35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롬12:10에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십계명을 지켜야 하나님과 언약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사랑을 실천해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시16:11에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주님이 같이 계시면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행복합니다. 사랑받을 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할 때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받으면 행복하지만 얼마 안 있으면 그 행복은 시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행복은 더 살아 넘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행복합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가 행복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행복하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할 때 행복하고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서 헌신적으로 그들을 도와줄 때 행복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요14:23에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면 하나님이 거처를 같이 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알버츠 슈바이처가 운영하는 아프리카의 랑바레네 병원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미모의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프레밍거입니다. 그녀는 헝가리 귀족의 딸로 한때 재색을 겸비한 최고의 미인으로 많은 사람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고 수많은 남자들이 그를 따라 다녔었습니다. 그는 악기 연주에 능해서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배우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에 두 번이나 실패하고 현실 삶에 좌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슈바이처의 찬송가 연주를 듣고 "지금까지 내 인생은 허상뿐이었다. 남을 위한 삶에 진정한 가치가 있다"라고 하면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20년 동안 슈바이처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흑인 병자들을 위해 사랑을 베풀다가 여생을 마쳤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미색을 가진 여인이 귀족의 딸이 명성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모두다 흠모를 받던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미계지역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을 간호사로써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운명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은 “남을 위한 삶이 이렇게 행복한 것을…” 이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떴습니다. 그는 세상 사교계에서 그렇게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둘러싸였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왜, 자기중심으로 살 때 행복이 없습니다. 남을 섬기기 위해서 남에게 행복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살 때 비로써 행복의 샘이 마음속에 터져 넘쳐흘렀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희생하여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하는 사람은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도와줄 때 하나님과 아들이 같이 계시므로 큰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사람들은 행복의 조건을 외적인 면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돈, 지위, 명예, 영화, 사치, 자기과시 등 이런 것들로 행복을 누리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이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도 행복에 보탬이 됩니다. 그러나 행복의 집은 내적 조건인 마음의 평화, 감사하는 마음, 이웃을 보듬어 안는 관용과 용서, 이웃을 섬기는 희생적 사랑이 없이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되어 곧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내적 행복이 있어야 외적 행복의 조건이 가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모두 다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행복을 찾아서 산을 넘어가면 또 저 건너편 산에 행복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외적인 환경을 쫓아서 부귀영화, 공명 이런 것을 통해서 행복을 얻으려고 달음질 해보면 행복은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내 주어진 삶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감사의 뜻을 찾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내 이웃을 진실로 관용하고 용서해주며 남을 위해서 희생 봉사하는 사랑을 실천하면 행복이 마음속에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초가삼간에 나물을 먹고 살아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멀리서 찾지 마십시다. 행복은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다스리면 행복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바깥에 행복을 찾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을 놓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에게 행복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죄악에서 대속해 주시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의와 영광을 얻으므로 평화를 누리고 행복을 가질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므로 행복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있는 것을 감사하고 없는 것을 헤아리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죄 많고 부족한 인간인즉 용서받고 의롭게 된 우리들은 이웃을 보듬어 안고 관용하고 용서해주는 마음을 갖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항상 용서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아버지여 나를 섬기라고 하지 말고 이웃을 희생적으로 섬기는 사랑을 가지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있는 것을 가지고 나누며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행복의 조건’이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행복을 갖는 데는 내적, 외적인 많은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조건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불행하면 환경적인 조건을 아무리 잘 구비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은 세계를 정복을 하고 그 꿈을 꾸며 영토를 확장했고 사람들이 부러워할 것은 모두 다 소유했던 사람입니다. 지배와 소유의 정상에서 인생의 성취감도 누렸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 그가 남긴 말은 “내가 진정 행복했던 때는 단 6일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온 유럽을 석권하고 프랑스의 왕좌를 점령하고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나폴레옹도 일평생 행복한 날은 엿새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는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지만 말년에 과거를 회상하면서 “내 인생은 기쁘고 행복한 나날이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의 행복은 소유와 지배가 아닌 마음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마음에 행복을 찾았고 나폴레옹은 환경에서 행복을 찾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행복을 찾지 못하고 헬렌 켈러는 행복을 찾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론]
1. 평화가 넘치는 마음
마음에 평안을 깨뜨리는 요소들이 이 세상에 많아요. 우리가 마음에 죄책으로 인한 양심의 고통을 가지고 있으면 평화가 없습니다. 저는 이런 자매님과 신앙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님이 청춘과부가 되어서 딸 하나를 의지하고 열심히 일해서 교육을 시켜 대학까지 졸업 시켰습니다. 그리고 좋은 사윗감을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이제 어머니가 사위와 딸하고 함께 사는데 늘 딸이 어머니가 몸이 약하기 때문에 바깥에 출입을 못하고 어머니 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사위가 해외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자기 부인보고 동행을 하자고 그럽니다. 그 부인은 어머니 걱정 때문에 동행을 하겠다고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걱정하지 마라. 나는 아직까지 건강히 있으니까 내가 끓여먹고 집 잘 볼 테니까 너는 남편 따라 출장 갔다 오너라.”고 권면을 자꾸 했습니다. 못 내켜 하는 그 딸을 강압적으로 출장을 따라가라 했는데 남편과 부인이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니까 집이 딱 잠겨 있어요.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이 없기에 열쇠 공을 불러서 문을 따고 들어가니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서 세상을 떴습니다. 굉장히 충격을 받은 그 딸은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으니 자기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남편 따라 해외 출장만 안 갔더라면 어머니를 돌봐서 살았을 것인데 자기가 집을 비워 놓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셨다. 그러므로 내가 어머니를 죽였다. 그 양심에 고통으로 견딜 수 없어서 몇 번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 없으니까 제게 신앙상담을 왔는데 제가 그 자매에게 한말이 있습니다. “자매님, 지금 어머님이 살아났다 하더라도 자매님이 한일을 보고 좋아할 것입니다. 어머님은 기뻐하시고 잘 갔다 왔다. 잘 갔다 왔다. 나는 기왕 나이가 들어서 죽을 때 죽었으니 그뿐이고 나는 네가 행복하게 남편하고 출장 갔다 온 것 잘했다고 칭찬할 것입니다. 어머니는 절대로 당신을 정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 청산했습니다. 당신이 인생에 실수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그 죄를 다 청산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하나님도 용서하고 어머님도 용서한 죄를 왜 당신이 용서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머님 앞에서 용서를 받은 죄를 스스로 용서해 주고 당신을 용납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고 격려를 해주었는데 그 양심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나중에는 행복하고 기쁜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 평화가 깨어지면 불행하기 짝이 없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양심에 극렬한 고통을 받으니까 그는 자살하려고 한 것입니다. 행복의 가장 근원이 마음의 평화인 것입니다. 평안이 없으면 부귀영화, 공명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런 것이 행복을 갖다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애 3:39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에 고통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지 않고는 평안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법을 어기고 법적조치를 당할 때도 굉장히 불행해 합니다. 많은 신앙상담을 오는 사람들이 고소를 당하거나 법정에 불려가거나 검찰에 조사를 받고 많은 고통을 가지고 제게 신앙상담을 옵니다. 그들의 삶은 지옥 그 자체인 것입니다. 어떠한 것도 그들을 위로해줄 수 없는 마음에 고통, 괴로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세상의 부귀영화, 공명을 가지고 행복할 수 있습니까? 오직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제가 늘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일을 맡기십시오. 잘했든 못했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고 하나님께 일을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 손에 맡기면 하나님이 끝장에 가서 유익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기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법을 어기고 법적조치를 당해 크게 불안한 사람도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내어 맡기면 그 불행조차도 끝장에 가서는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시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결코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인관계 속에 갈등을 가지고 불행한 사람 많습니다. 가정에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마음이 안 맞아 갈등을 가지면 결코 가정이 평안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서로 싸우고 대결하면 남편이 마음에 평안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밖에 나와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부인도 마찬가지지요. 가사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갈등, 부모 자식 간에 갈등 되어도 부모의 마음에 고통이 말로 다 할 수 없고 사회적인 갈등도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에 사회가 불안한 이유가 왜 그렇습니까? 지역 간 갈등이 있고, 계층 간 갈등이 있고 노사갈등이 있어 서로 대결하기 때문에 사회가 불안하고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이 갈등을 누가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평안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갈등을 가졌을 때 자꾸 상대방 때문에 내 마음에 갈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평안을 가득히 가지고 상대를 대하면 내 평안을 상대에게 전달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내게 평안을 빼앗아 간다고 말하지 말고 내가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상대를 포용하면 평안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지 않고는 가져올 수 없는 평안인 것입니다. 또한 생활의 고통이 극심하면 마음이 굉장히 불안합니다. 직장을 잃을까 싶어 번뇌하고 있을 때 평안이 없잖아요. 사업이 무너져가고 부도가 날 지경에 이르는데 평안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요사이 우리 한국사회가 굉장한 불안에 빠진 이유 중에 하나도 바다 이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제 여름이 다 지나갔는데 철늦게 바다 이야기가 생겨서 온 국민이 바닷물에 풍덩 빠졌습니다. 왜 바다 이야기에 일신을 내걸고 살림을 다 탕진가산합니까? 사회가 불안하고 경제가 어려우니까 어떻게 한꺼번에 큰 부자가 되어 보겠다. 대박을 한번 터뜨려 보겠다는 사행심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살고 평안하면 사행심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생활이 어렵고 고통스러우니까 어떻게 하다가 대박을 한번 때려서 큰돈이나 주어볼까 싶은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 팔고, 집 팔고, 수 천 만원을 가지고서 바다 이야기에 들어갔다가 바다에 빠져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 결코 평안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평안은 양심의 가책, 세상의 법적인 고통, 대인관계의 갈등, 생활의 고통이 있을 동안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외적인 힘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이며 죽어가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물밖에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숨이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고 폐속에 물이 가득해지는데 어떻게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와서 건져줘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이 마음의 불안과 고통에서 건져줄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고쳐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와서 우리를 건져줄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다른 점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에 빠졌을 때 우리를 건져줄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을 얻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짐을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짐 진 자들만 내게로 오라고 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없는 사람 내게로 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가졌을지라도 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께 나올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내게 평안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시91: 1~ 7에 보면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지존자의 은밀한 곳이 뭡니까? 하나님의 은밀한 곳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곳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전능자의 그늘아래 있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여러분의 피난처라 하고 지원자로 거처를 삼으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여러분을 지켜 모든 길에 보호를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면 우리가 마음속에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의뢰할 데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짐을 맡길 데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고 아무도 내손 붙잡아 이끌어 줄자가 없을 때 우리는 절망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23: 4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너무나 놀라운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크고 적은 사망의 골짜기를 안지날수가 없어요. 인생사는 자체가 곧 고난이니까. 크고 작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고 부모, 형제 날 떠나고 아무도 나를 도와줄자 없을지라도 성경에는 주께서 나와 같이 계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언약을 맺었습니다.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피를 의지하는 자는 결단코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않겠다는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주님이 함께 계시는데 주님은 목자로써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오십니다. 지팡이는 길을 열어 주시고 막대기는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길 잃어버린 처지에 있을지라도 주님은 길을 열어 주시고 어떻게 큰 원수가와도 막대기로 막아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평안이 있어야 행복의 기초가 될뿐 평안이 있어야 문제 해결도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영국의 식민 정치가였던 세실 존 로즈(Cecil John Rhodes)는 건강 관계로 남아프리카로 이주해 갔다가 그곳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600만 파운드의 다이아몬드를 옥스포드 대학의 장학기금으로 기증할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한번은 그가 잠시 영국에 귀환했다가 구세군의 2대 장군이었던 브람 웰 부드 장군(Bramwell Booth)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드 장군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거부인데 그 돈을 가지고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자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행복이라니요? 행복이 어디 있어요?” 그러자 부드 장군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하에 진실로 행복한 곳은 오직 한 곳뿐인데 그 곳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만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예수 안에 들어와야 죄도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아버지의 날개 아래 들어갈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평안한 것입니다. 그 속에 들어오면 죄책도 다 사함을 받고 세상에 법적인 고통을 당해도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고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고 믿고 의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 들어오면 이 세상에서 어렵고 고통스러운 문제도 해결받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날개 아래 거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참 평안을 얻고 평안이 있는 곳에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흔히 속세적인 행복을 찾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기진맥진한 두 팔을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때 비로소 행복을 얻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도 ‘인생의 행복이란 소유의 많고 적음에서 오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 아무리 많은 것들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의 생활에는 행복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부귀영화, 공명에 행복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속았습니다. 부귀영화, 공명에는 행복보다도 더 많은 불만족과 고통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를 섬길 때만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께서 안주하실 때 비로소 마음이 풍족해 지고 평안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은 하나님께 의지 안할 때는 없습니다. 돈이 의지할 곳이 못됩니다. 지위나 권세가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세상에 부귀영화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지 못합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만군의 야훼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서만이 진실로 평안하고 행복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항상 감사하는 마음
마음의 행복을 깨는 원망, 불평, 짜증, 탄식 등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깨는 것이 원망, 불평, 짜증, 탄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 속에 들어가는 경향성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바라보고 늘 불평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자꾸 없는 것을 계산합니다. 성경에는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까지 빼앗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생각하고 계산하고 감사를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머리가 머리털로 덮여 있는 것 고맙게 생각하지 않지요? 나처럼 대머리가 한번 되어 보세요. 여름에는 얼마나 뜨겁다 구요. 겨울에는 또 얼마나 춥다 구요. 모자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데 저같이 대머리가 되어 보면 머리숱이 많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한국에 이 모발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서 고쳐주는 시장이 1조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머리숱이 없는 사람들 머리를 나게 한다든지 이식 한다든지 가발을 쓴다든지 하는 그 시장이 1조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보니 여러분 다 머리가 새까만데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것만 하더라도 여러분 얼마나 행복합니까? 머리털이 있는 것을 행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화상을 입어서 눈썹을 잃어버린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눈썹이 있을 때는 눈썹 고마운 줄 몰랐는데 눈썹이 없고 보니 비가 오면 물이 눈으로 다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눈썹이 있을 때는 물이 그곳을 통해서 흘러 나가 버렸기 때문에 눈을 뜰 수 있는데 눈썹이 없으니까 물이 눈으로 들어오므로 눈을 뜰 수 없다. 눈썹 있는 것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눈썹 다 있지요? 그러니 고마울 수밖에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는 입이 있고 수족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것만해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얼마나 넘칩니까? 6.25사변 이후로 한국이 얼마나 가난하고 어려울 때도 살았는데 지금은 너무 너무 잘살잖아요. 그러므로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헤아려 보고 감사해야지 자꾸 없는 것을 계산하면 안돼요.
시42: 5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내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헤아려 보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나은 타인과 자기 사물을 비교하면 안 됩니다. 자꾸 자라는 사람은 저렇게 키가 큰데 왜 나는 키가 작으냐. 다른 사람은 미남, 미녀인데 왜 나는 이렇게 못생겼냐. 다른 사람은 몸이 날씬한데 나는 왜 이 뚱보냐. 다른 사람들은 잘사는데 왜 못사느냐. 자꾸 비교하면 안 됩니다. 우리 옛날 한국 속담에도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고 하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운명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주신 운명, 내 팔자를 다른 사람 팔자하고 자꾸 비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 팔자로 살고 내 팔자는 내 팔자로 사는 것입니다. 내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에 내가 충실할 때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내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거기에 충실할 때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시37: 8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딤전 6: 7~ 8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상담가 아비(Abby) 박사에게 15세의 한 소녀가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불행합니다. 나는 독방도 없고 부모의 간섭은 심하고 나를 믿어주지 않습니다. 나를 청해주는 남자 친구도 없고 좋은 옷도 없습니다. 나의 장래는 암담합니다.”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신문에서 읽은 다른 13세 소녀가 이런 글로 답 글을 썼습니다. “나는 걷지 못하는 불구의 소녀입니다. 사람이 보고 말하고 걷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그러나 나는 비록 걷지 못하고 살지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행복이 있습니다. 나는 못 걷는다는 것보고 불평하지 않고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와 말할 수 있는 입고 팔이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을 생각하고 없는 것으로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런 답 글을 신문에 냈습니다. 맞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점점 축복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점점 그곳에서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 주시는데 원망, 불평, 탄식, 짜증을 하면은 점점 더 하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점점 더 나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행복은 감사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복을 헤아리는 사람만이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평론가인 알랭은 말하기를 “남보다 나은 점에 대해서 행복을 구한다면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남보다 한두 가지 나은 점은 있어도 전부가 뛰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남과 비교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는 데서 얻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며 감사할 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항상 받은 복을 헤아려 보십시오. 아침에 일찍 일어났어도 마음에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거든 그것을 물리치고 받은 복을 헤아려 보십시오. 비 맞지 않고 잠잘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외로운 사람도 많은데 가족이 한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해 보십시오. 감사할 조건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심신의 건강, 가정, 직장, 현실적인 삶에서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아요?
시103: 2에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택을 잊으면 안돼요. 기억하고 손꼽아 감사를 하면 주님께서 점점 더 감사할 것을 많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도 불평하고 원망하면 하나님께서 있는 것도 다 빼앗아 가시는 것입니다.
엡 5:20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려고 노력하면 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자꾸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왜 나를 안 섬겨 주느냐. 왜 나를 안도와 주느냐고 하면은 불행하게 되지요. 한 가정에도 남편이 자기중심으로 아내를 보고 자기를 섬기라. 자식들보고 자기 명령만 순종하라면 폭군이 되고 불행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은 아내를 더 기쁘게 만들어 줄까? 행복하게 만들어 줄까? 어떻게 하면 자식들에게 더 도움을 주고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까? 자기를 생각하지 말고 남의 행복을 생각하고 남을 기쁘게 만들려고 애를 쓸 때 그것이 나에게 행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줄까? 행복하게 해줄까? 더 희망차게 만들어 줄까? 이렇게 노력할 때 여러분에게 큰 기쁨과 행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남에게 주면 그것이 30배, 60배, 100배가 되어서 내게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꾸 내가 받으려고 하면은 있는 것조차 빼앗겨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이웃을 위해서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이 불행해지는 것은 이기주의자들이 모여서 그렇습니다. 자기만 섬겨 달라고 하기 때문에 가정이 불행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들만 모여서 살지 못해요. 꼭 맞는 남편 만난 사람 별로 없어요. 꼭 맞는 아내 만난 사람 별로 없어요. 꼭 마음에 맞는 자식들 낳아서 기르는 사람 별로 없어요. 이 세상에는 꼭 맞는 사람이 별로 없고 대게 다 안 맞고, 뒤틀리고 부딪히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것을 들어서 자꾸 원망하고 불평하고 할퀴고 하면은 상대도 못살고 자기도 못살고 피투성이 되는 것입니다. 주어진 세상이 이렇게 어려운 것을 그대로 내 팔자로 받아들이고 내 몫의 태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그곳에 봉사하고 섬기는 마음을 가지면 어려운 가운데 행복을 갖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내 제자 하나가 와서 내게 ‘야! 조금만 참다가 더 좋은 부인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해요. “아이고, 먹고사니. 조금만 좀 더 기다릴 것 가지고서 그냥 서둘러 결혼해서 지금 내 아내하고 마음이 맞지 않습니다.”라는 말에 내가 “야, 이 자식아! 네가 좀 더 기다렸으면 더 못난 여자 만날지 어떻게 알아. 현재 있는 것으로 감사해라. 현재 주어진 아내를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와 즐겁게 살면 하나님이 더 즐거움을 주신다. 별도리 없다. 인생은 타락한 세상이라 모두다 고통 속에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꽉 마음이 맞으면 그 때는 벼락이 떨어진다.”라고 답해주었습니다. 너무너무 행복하게 마음이 맞은 사람은 언제든지 한편이 죽는다구요. 내가 목회하면서 보니까 잉꼬부부는 너무나 좋다고 하는데 얼마 안 있으면 남편이 죽든지 아내가 꼭 죽어요. 오래오래 사는 사람 물고 찢고 싸우는 사람들이 90까지 살아요. 그러니 세상에는 꼭 들어맞는 부부를 찾지도 말고 부모자식도 찾지 말고 안 들어맞는 것을 들어맞도록 수용하고 감사하면서 사는 가운데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려고 늘 노력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뽑은 존경하는 인물 중에 8년 동안 일곱 번이나 1위를 차지했던 사람이 바로 아베 삐에르 신부인 것입니다. 그는 빈민구호 공동체인 엠마오 공동체를 창설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 삐에르 신부님이 쓴「단순한 기쁨」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간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신사가 자살 직전에 삐에르 신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정적인 문제, 경제적인 파탄, 사회적인 지위의 실추 등을 들며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삐에르 신부는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됩니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면 살 수가 없겠네요. 자살을 결심하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살하십시오. 하지만 죽기 전에 나 좀 도와주고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도움이 필요한데요.” 그 신사는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내가 얼마간 신부님을 돕도록 하지요.” 그래서 요청을 수락했기 때문에 삐에르 신부를 도와서 집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을 위해 집을 짓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일 신부님께서 내게 돈을 주었든지, 내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던지, 무언가를 베풀었다면 나는 다시 자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신부님과 같이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찾았습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만 생각할 때는 꼭 죽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삐에르 신부는 충분히 죽을 이유가 된다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날 좀 도와 달라고 그러니까 이판저판사판인데 좀 도와주고 죽자.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중심의 생각만 하고 자기만 바라보던 눈을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되고 다른 사람 중심으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도와주고 집을 지어주고 하는 바람에 자기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 봉사하는 곳에 참 만족과 행복을 느끼고 죽을 생각이 싹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만 바라보면 썩어지고 맙니다. 남을 바라보고 남을 도우면 맑고, 밝고, 환한 생명의 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데일 카네기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의 유일한 방법은 감사를 바라지 않으며 남에게 '주는 기쁨'을 갖는 데 있음을 기억하라. 당신의 고민거리를 헤아리지 말고 당신이 받은 축복을 헤아리라. 다른 사람에게 흥미를 가짐으로 피곤한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라.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을 띠울 일을 한 가지씩 하라.”
프리올이라는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거든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려고 노력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 감사가 바로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원망, 불평, 짜증, 탄식은 불행과 절망으로 가는 지름길이지만 감사는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여러분 있는 것을 가지고서 감사하고 남에게 비교하지 말고 내 자신을 보고 감사하고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일을 하고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행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감사하는 말을 한다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안 해요.
성경 시50: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감사로 어떻게 제사를 드립니까? 감사하는 말을 하고, 감사하는 찬송을 드리는 것이 감사 제사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도 영화를 느끼고 하나님도 도움을 베풀겠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자꾸 감사하고 칭찬하고 기쁘게 해주면 굉장한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감사하는 말 조금만 애를 쓰면 할 수 있잖아요. 한 가정에도 남편이 부인보고 고맙다고 말하고 잘하는 것을 칭찬해주면 부인이 으쓱해지고 힘이 생기잖아요. 남편에게 감사하고 남편을 칭찬하고 자랑하게 하면 남편이 얼마나 용기백배해서 열심히 일할 수 있잖아요. 어린아이들도 자꾸 쥐어박지 말고 용기와 힘을 주고 칭찬해주면 더 힘을 얻을 수 있잖아요. 우리 민족의 가장 단점은 감사할 줄 모르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단점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까운 일본을 보십시오. 일본 사람들은 놀랄 만큼 긍정적인 것입니다.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말에 긍정적으로 하는 일본민족을 우리가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 처음 부흥회를 갔을 때 굉장히 일본의 문화를 몰라서 당황 한 적이 있습니다. 호텔에서 나와서 밥을 먹으려고 식당에 가니까 준비 중이라고 해놓았어요. ‘아, 준비하는가보다.’ 그래서 돌아와서 잠시 있다가 또 가니까 또 준비 중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어요. 그래서 문을 두드리고 열어보니까 수리를 하고 있어요. 우리 한국은 수리중이라고 할 것인데 일본 사람들은 언제나 준비하고 있다고 준비 중이라고 써 있습니다. 더 긍정적입니다. 이러므로 수리중이라는 것보다는 준비 중이라는 것이 더 긍정적인 말이 안 되겠습니까? 역전에 가니까 시계가 있는데 시계가 고장이 나있어요. 우리 한국 사람은 ‘고장 났음’ 그렇게 할 것인데 일본 사람은 거기에다 ‘수리 중’이라고 해놓았습니다. 수리하는 사람 하나도 눈에 안보여요. 그래도 ‘고장 났음’ 그런 것보다도 ‘수리 중’이라고 한 것이 더 좋잖아요. 말을 긍정적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대게 보면 잘나가는 사람, 성공한 정치가나 경제가나 교육가의 집에 가면 국가 공로자라는 패가 붙어 있습니다. 그곳에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가면 “아, 이 집에는 그 훌륭한 기업가가 있었다. 정치가 이 훌륭한 사람이 살고 있다. 너희들도 배우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이렇게 아버지가 격려를 하는데 우리 한국 사람은 대게 훌륭한 사람 집 앞에 지나가면 애를 데리고 가다가 아버지가 서가지고 “야, 이 새끼가 여기 살았구나!” 당장 애들 듣는 앞에서 비난의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별 볼 일없는 녀석이 어찌하다가 높아져 가지고서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자식들이 뭘 배웁니까? ‘아! 훌륭한 사람은 다 개새끼구나.’ 민족적인 특성이 너무나 부정적입니다. 누구든지 좀 잘되면 어찌하든지 바짓가랑이를 끌어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짓밟아야 속이 시원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식민지 생활을 살았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무언지 우리 성격이 삐뚤어져 있어요. 우리는 고쳐야 돼요. 이웃과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라도 우리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공헌을 한 사람은 잘못된 것보다도 잘된 것을 생각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감사하고 이웃에도 감사하고 늘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해야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굉장히 인색한 것이 감사하다는 말인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밥 먹다가 숟가락하나 전달해줘도 “Thank you!” 물 한 컵 줘도 “Thank you!” 늘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숟가락을 줘도, 물 좀 다오. 하고 그대로 받습니다.자기 아내가 물을 갖다 줘도 “여보, 감사” 남편에게도 “여보 저 젓가락 좀 주세요. 감사합니다.” 꼭 감사를 해요. 서양 사람들의 특성은 감사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를 안 하고 오히려 감사하면 ‘제 무엇 잘못 먹었나? 제 왜 저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해야 돼요. 길을 조금 비켜 주어도 감사합니다. 조금 도움을 베풀어 주어도 감사합니다. 숟가락 전해줘도 감사합니다. 물 한 컵 줘도 감사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도 영화롭게 하고 감사를 받는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떳떳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3. 이웃을 관용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면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다 완전한 사람이면 모르겠습니다만 모두다 죄인들입니다. 모두다 결점이 많고 허물이 많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해주지 않고 그대로 자꾸 비난하고 공격하면 살아나갈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벗기고 할퀴고 흑칠하고 짓밟으면 살아나갈 사람 누가 있어요? 용서해줘야죠.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똥을 몇 섬을 오줌을 몇 말을 받아냅니다. 그저 똥 싸고, 오줌 싸고, 못되게 구는 것 부모가 자식을 오래참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돌보아 주어서 성인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인이 되어 살아도 우리가 얼마나 실수를 많이 하는 것입니까? 서로 용서해주고 용서받아야 살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18:28~ 35에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한 사람이 만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임금이 그를 불러와서 만달란트를 못 갚으니까 처자를 다 팔아서 만 달란트를 갚게 하겠다고 하니까 이 사람이 통곡하며 울며 용서해 달라고 사정을 하고 말미를 달라고 하매 임금이 불쌍히 여겨서 탕감해 주었습니다. “얼씨구나!” 좋다고 춤추고 나오다가 밖에 나오니까 자기 친구 한 사람이 얼마 안 되는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나서 “야! 빚 갚으라.”고 하니, 그 친구가 “나 지금 돈이 없으니 말미를 주면 갚겠다.” 멱살을 잡고 당장 감옥에 가둬 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다른 사람이 너무나 원통해서 왕에게 고발을 했습니다. “왕이 일만 달란트 용서해준 그 사람이 불과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돈 안 갚는다고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임금이 화를 내서 “그놈 불러오너라. 내가 너에게 만 달란트를 갚으라고 할 때 못 갚겠다고 통곡을 하고 울고 빌기에 용서해 주었는데 너도 너의 친구를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용서해줘야 될 것 아니냐. 이놈을 당장 감옥에 가둬서 만달란트를 갚을 때까지 고생시켜라.” 그리고 주님 하신 말씀이 “너희가 이웃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도 이렇게 만들리라” 우리 마음이 감옥에 갇힌 사람 많습니다. 불행과 고통과 좌절과 절망과 슬픔의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 많습니다. 왜, 남을 용서해 주지 않기 때문에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부모를 이웃을 용서 안 해주면 스스로 마음속에 감옥에 갇힙니다. 우리는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용서를 받았습니까? 십자가 밑에 우리가 서 보십시오.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 자신을 주님이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서 용서해 주었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다 청산하고 용서해 주고 의롭다고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용서의 빚을 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용서받은 만큼 남을 용서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감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절망의 감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이웃을 관용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 5: 38~42에 보면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관용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른뺨 뺨을 치는데 왼뺨을 돌려 데려면 얼마나 관용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송사하여 속옷을 가진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고 송사 끝마치는 것 관용하는 마음입니다. 억지로 오리가자면 십리까지 따라가는 것 관용하는 마음입니다. 오늘날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면 많은 마찰을 갈등을 피할 수가 있고 우리 마음속에 평안과 행복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의 서재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화가 나거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까지 세고 난 다음에 화를 내어라. 남을 죽이고 싶으면 그때는 백을 헤아리고 난 다음 그때도 죽을 마음이 생기면 죽여라.” 대게 화가 날 때 열만 세면 화를 안내게 되는 것입니다. 남 죽이고 싶은 마음도 백을 세면 안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이 감정을 가라 앉혀야 되는 것입니다.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면 감정을 가라앉히기 때문에 많은 갈등을 분쟁을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왜 깨집니까? 순식간에 분노가 생겨서 그 분노 가운데 상처를 입히는 말을 남편이 아내에게 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아주 자존심이 상하는 말을 하면 가정이 깨어지지 않습니까? 순식간에 감정적인 말로 깨집니다. 요사이 우리가 신문이나 TV에 보면 정치인들이 서로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 실제 사실을 가지고 하는 것보다도 감정적인 대립을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갖다 주므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언제나 용서하고 포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밑에 있는 나를 항상 생각하십시오. 나는 십자가 밑에서 얼마나 큰 죄 용서의 빚을 지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내 죄가 심하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짊어져야 되었습니까? 내 죄가 보통 죄가 아닌 것입니다. 영원히 지옥에서 멸망을 받아야 될 죄인데 이를 갚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몸 찢고, 피 흘려 내 죄를 대속해 주셨다. 그리고도 주님께서는 자랑하지 아니하시고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품에 품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용서의 사랑이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이런 용서의 사랑을 받았으면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될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항상 용서하고 관용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자기 마음속에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엡 4:32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 3: 13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용서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가정에서 당장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당장 남편을 용서하고 아내를 용서하고 부모를 용서하고 자식을 용서하고 형제를 용서하는 관용의 마음을 가지면 굉장히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와 건강의 관계를 40년 동안 연구해온 북 캘리포니아의 태도치유연구센터에서 내린 결론은 “용서는 건강을 되찾아 준다.”는 것입니다. 분노, 배신감, 상한 마음을 해결하지 못하고 관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일으키고 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루이스 B. 스메데스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잘못에서부터 풀어줄 때, 당신은 당신의 내면세계에서 자라던 악성 종양을 제거하는 것이다. 죄수 한 명을 해방시켜 주었는가? 그 죄수는 바로 당신 자신이다.” 고 말했습니다. 관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고통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4. 사랑으로 실천하는 마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태양과 같아서 온 천지를 비취는 것처럼 만민을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베푼 사랑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했다. 얼마나 사랑했느냐?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 얼마나 사랑했느냐? 몸 찢고, 피 흘리기까지 사랑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하는 사랑이 아니라 증명된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 아들을 주셨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몸 찢고, 피를 흘려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증명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도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하여 이웃을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준 계명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선민계약을 맺을 때 계약 조건으로 십계명을 지키라고 말했습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켜야 하나님과 언약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으므로 구원의 언약을 맺은 사람인데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계명을 주었습니다. 그 계명은 사랑의 계명인 것입니다.
요13:34~35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롬12:10에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십계명을 지켜야 하나님과 언약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사랑을 실천해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시16:11에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주님이 같이 계시면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행복합니다. 사랑받을 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할 때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받으면 행복하지만 얼마 안 있으면 그 행복은 시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행복은 더 살아 넘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행복합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가 행복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행복하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할 때 행복하고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서 헌신적으로 그들을 도와줄 때 행복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요14:23에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면 하나님이 거처를 같이 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알버츠 슈바이처가 운영하는 아프리카의 랑바레네 병원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미모의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프레밍거입니다. 그녀는 헝가리 귀족의 딸로 한때 재색을 겸비한 최고의 미인으로 많은 사람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고 수많은 남자들이 그를 따라 다녔었습니다. 그는 악기 연주에 능해서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배우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에 두 번이나 실패하고 현실 삶에 좌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슈바이처의 찬송가 연주를 듣고 "지금까지 내 인생은 허상뿐이었다. 남을 위한 삶에 진정한 가치가 있다"라고 하면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20년 동안 슈바이처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흑인 병자들을 위해 사랑을 베풀다가 여생을 마쳤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미색을 가진 여인이 귀족의 딸이 명성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모두다 흠모를 받던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미계지역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을 간호사로써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운명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은 “남을 위한 삶이 이렇게 행복한 것을…” 이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떴습니다. 그는 세상 사교계에서 그렇게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둘러싸였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왜, 자기중심으로 살 때 행복이 없습니다. 남을 섬기기 위해서 남에게 행복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살 때 비로써 행복의 샘이 마음속에 터져 넘쳐흘렀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희생하여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하는 사람은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도와줄 때 하나님과 아들이 같이 계시므로 큰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사람들은 행복의 조건을 외적인 면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돈, 지위, 명예, 영화, 사치, 자기과시 등 이런 것들로 행복을 누리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이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도 행복에 보탬이 됩니다. 그러나 행복의 집은 내적 조건인 마음의 평화, 감사하는 마음, 이웃을 보듬어 안는 관용과 용서, 이웃을 섬기는 희생적 사랑이 없이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되어 곧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내적 행복이 있어야 외적 행복의 조건이 가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모두 다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행복을 찾아서 산을 넘어가면 또 저 건너편 산에 행복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외적인 환경을 쫓아서 부귀영화, 공명 이런 것을 통해서 행복을 얻으려고 달음질 해보면 행복은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내 주어진 삶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감사의 뜻을 찾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내 이웃을 진실로 관용하고 용서해주며 남을 위해서 희생 봉사하는 사랑을 실천하면 행복이 마음속에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초가삼간에 나물을 먹고 살아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멀리서 찾지 마십시다. 행복은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다스리면 행복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바깥에 행복을 찾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을 놓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에게 행복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죄악에서 대속해 주시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의와 영광을 얻으므로 평화를 누리고 행복을 가질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므로 행복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있는 것을 감사하고 없는 것을 헤아리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죄 많고 부족한 인간인즉 용서받고 의롭게 된 우리들은 이웃을 보듬어 안고 관용하고 용서해주는 마음을 갖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항상 용서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아버지여 나를 섬기라고 하지 말고 이웃을 희생적으로 섬기는 사랑을 가지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있는 것을 가지고 나누며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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