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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생명과를 따먹느냐, 선악과를 따먹느냐의 싸움이다.

창세기 궁극이............... 조회 수 1788 추천 수 0 2013.03.26 15: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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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3:1-10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31-10.

 

1-10: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인류의 조상 아담부터 마지막 세상 끝 날까지 인류의 역사는 무형적 투쟁과 유형적 투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공격전에서 패자의 결과와 승자의 결과가 나오고 있는데, 성경에서 이걸 보여주고 있다 그 말이요.

 

에덴동산에서도 싸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신학적으로만 알면 안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신학적으로만 알고 계시 면을 모르면 신앙이 안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에 교회들이 왜 이렇게 어지러운가 하니 신학적으로는 알지만 계시 면으로 모르는 고로 신앙이 안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왜 만들었느냐? 대개 이 선악과를 만든 것을 하나님의 실패작으로 보고 있어요. 하나님이 실패했다. 이 말의 의미가 뭔가 하니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에덴동산에서 아들 낳고 딸 낳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터인데,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려고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지어놓았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은 원인이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라 그 말이지요.

 

따라서 인간이 죄를 범한 책임이 일차적으로 하나님 당신에게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게 하려고 했던 당신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를 보냈다이렇게 된단 말이요. 예수를 보내가지고 인간이 이 예수를 믿음으로 추방되었던 에덴동산으로 다시 회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의 의미가 노골적으로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실패가 들어있다 그 말이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면 하나님은 실패하실 분은 아니지요. 전지전능자요 만능의 능력자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아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 되어진 일이라든지, 마지막 세상까지 전체적인 면을 볼 때에 선악과를 따먹은 그게 실패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요. 그런데 보통 보면 원 기본교리를 하나님을 무능자로 말하고 있다 그 말이요. 하나님은 실패하실 분은 아닙니다.

 

그리고 인류의 죄의 시작을 보통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되는데 따먹은 고로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먹기 전에 그 마음의 움직임이 있잖아요. ‘따먹어야 되겠다. 안 따먹어야 되겠다하는 그 마음의 움직임 그게 먼저 선행이 된다 그 말이요. 활동이 나오기 전에 마음의 움직임이 선행이 된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 따먹고 싶어 한 그 마음이 있는데 그걸 잘 못 본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서 먹었기 때문에 죄이고, 안 따먹었으면 죄가 아니다그렇게 되면 뭘 모르게 되지요? ‘따먹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도 안 따먹었으면 죄가 아니다이렇게 들어가는 거지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느니라한 그 무형적인 걸 우리는 감지를 해야 되거든요. 마귀는 인간의 그런 걸 잘 감지를 해서 인간을 꾀어요.

 

바리새인들은 행동을 보고 말을 하지요? 마음의 움직임을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의 움직임을 보는 거지요.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음이 움직이는 이게 중요하다 그 말이요. 마음이 움직이는 이것을 잘 다스려야 되겠는데 이걸 다스리게 하는 것이 성경이요 진리요 이게 깨우침이란 말이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게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자기가 현재 여기에 있으면서 자기가 자기로부터 떠나가는 마음의 움직임이 있습니까? 자기가 자기로부터 떠나갔다가 금방 돌아오기도 하고. 그런데 자기가 자기로부터 떠났는데 그 자기가 누구인지도 잘 몰라.

 

인간이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라고 하셨는데 아담이 지키지 못했으니 죄를 지은 것이며, 이로 인해 결국 선악과도 따먹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지키고 다스리고, 그 다음에는? 정복하고. 그 때 뭘 정복해요? ‘정복하고 다스리고 땅에 충만하라이것이 진리의 삶이요, 그렇게 사는 삶이 타락이 아니에요. 그런데 타락 후에 그 삶으로 안 돼 있고 사건과 환경 즉, 세상이라고 하는 그 밑에서 지배를 받고 있다 그 말이요. 이게 타락이다 그 말이요. 인간은 세상을 지배를 해야 되는데 지배를 받고 있다 그 말이요. 세상으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니까 자유가 안 되잖아요. 세상으로부터 지배를 받으면 죄다. 그렇게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그 앞서서는 인간이 뱀이 에덴동산에 못 들어오게 뱀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들어왔단 말이요. 즉 다스리고 지키지 못하는 고로 뱀이 들어오게 되고, 뱀이 들어와서 꾀이니 선악과를 따먹게 된다 그 말이요. 자기가 제 마음을 못 다스리면 선악과를 따먹게 돼요. 그런데 따먹는 자는 그 자기가 참 자기인 줄만 알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러면 지키고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그 자가 참 자기요, 아니면 그 말씀을 거스르고 따먹는 그 자기가 참 자기요? 전자지요. 기독교 안에서만 이걸 아는 거지요.

 

아담에게 다스리라할 때에 고맙고 감사했더라면 즉, 자신을 에덴동산에 살게 하신 은밀계시를 알고 왜 이 명령을 나에게 하셨을까? 무슨 뜻으로 하셨을까이렇게 했더라면 감사가 나오는데 즉, 우리 입장에서 볼 때에 환경과 사건을 주신 것은, 그리고 이런 저런 명령을 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에? 우리의 신앙실력을 키워주려고. 즉 하나님의 온전성이 거기 붙어있단 말이요. 그런데 그 때로 가서 보면 아담과 하와가 그걸 몰랐단 말이요. 그런데 우리는 알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그 좋은 에덴동산에 살면서도 불만이 올 때에는 무슨 불만이냐?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대우를 해 주는 것에 대한 불만. 말하자면 하나님 당신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고뭐 이런 현실의 불만 그 말이요. 다스리지 않게 되면 현실에 대한 불만이 나와요. 현실에 불만을 하는 사람은 다스리지 않는 사람이구나이렇게 되어 있다 그 말이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자기는 땅에만 있고. 이 무슨 말인가 하니 자신을 이 현실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모르게 되면 현실에 대한 불만이 나오게 되어 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살게 하신 이유, 그리고 자기에게 현실을 주신 그 은밀계시를 모르면 불만이 나오게 되어 있다. 은밀계시를 알면 자신의 현실에 대해 감사가 나오지만 모르면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환경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나쁜 환경을 준 것을 좋은 환경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예뻐서 그렇게 줬고, 나쁜 환경을 받은 것은 그 사람이 미웁기 때문에 준 것이라는 이런 차원으로 본다 그 말이요.

 

모세를 바로 왕에게 잡혀 죽게 하려고 하나님이 악한 바로왕의 통치 때에 모세가 태어나게 했지요? 바로 왕이 모세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그걸 하나님이 모를까요? 알지요. 하나님은 알아요. 그러니까 바로 왕이 태어나기 전에 모세를 태어나게 해서 한 평생 살다 가게 할 수도 있고, 또는 그 악한 바로 왕이 태어나서 악한 정치를 다 하고 죽은 후에 모세를 태어나게도 할 수 있는 거라요. 이해갑니까? 그런데 왜 하필 악독한 바로의 그 때에 모세를 태어나게 했느냐 그 말이요. 왜 그렇게 한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쉽게 말하면 모세를 모세만큼 영광스럽게 올리고 싶어서 그 때에 태어나게 했습니까? 그렇게 보여집니까? 그런데 이런 걸 못 본단 말이요.

 

우리는 은밀계시로 그런 걸 볼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어떤 사건 환경을 몰아 붙여 주시던 절대로 원망이 안 들어가는 거지요. 문제는 자기의 부족성을 찾고, 거기에서 지혜가 모자라는지 도덕성이 모자라는지 살피고 그 부족성을 말씀을 통해서 보충하고 채워서 아닌 말로 남이 다스리지 못하는 그 사건 환경을 자기가 다스린다면 이 사람은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지요.

 

자기에게 이런 저런 사건 환경을 주시는 것은 영능의 실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그렇지요? 그런데 그러한 은밀계시를 모르면 자신의 현실에 대해 원망불평을 하게 된다.

 

물질계를 왜 만들었느냐? 그리고 우리를 왜 그 가운데 두었느냐? 우리를 온전자로 만들기 위해서. 왜 온전자냐?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모르면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모르면 죄가 됩니다. 그러니까 행동은 하나의 결과입니다. 즉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 이미 죄는 형성이 됐다 그 말이요. 따먹은 것은 마음에 형성된 대로 눈에 보이게 나타난 하나의 결과다 그 말이요. 이해가 되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했다단순히 그것만 보는 게 아니라, 결과만 보는 게 아니라 그 결과 이전에 따먹어라그랬을 때에 발이 걸어갔을 거고, 손이 나갔을 것이니 이게 뭐요? 마음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 아니겠어요? 우리는 그걸 본다 그 말이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물었지요. 담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하고 대답하는 말을 들어보면 선악과를 만들지 말던지, 아니면 선악과는 만들었다고 해도 여자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죄를 안 지었을 것인데 하나님이 다 만들어 놓았고, 또 따먹으려고 그럴 때에 죄를 짓도록 그냥 두었고, 또한 따먹으려고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강권발동을 해서 따먹지 못하도록 했으면 될 턴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말하자면 아담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은 하나님 당신 책임이다 그 말이지. 일종의 원망이지요.

 

정말 아담이 죄를 지은 게 하나님 잘못일까? 선악과를 만든 게 하나님 잘못일까? 뱀을 만든 게 하나님 잘못일까? 강권발동을 안 한 것이 하나님 잘못일까?

 

우리가 알기로 하나님은 완전자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봐도 실패할 리는 없다. 그리고 인간의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고 세상 모든 만물을 만들 때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건 아니란 말이요. 모든 게 조합을 이뤄가지고 물고 들어간단 말이요. 모든 게 초과학적으로 들어가 있단 말이요. 과학은 창조 속에 들어있는 거지요. 과학 속에 창조가 들어있는 게 아니고 창조 속에 우리의 구원의 법칙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초과학적입니다.

 

하나님은 실패작이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인간의 용어로 말한다면 계획을 하셨고 설계를 하셨고 예정을 하셨고 섭리하시는 이 모두는 대국적인 구원을 향한 당신의 주권섭리대로 진행이 되고 있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주권섭리의 모든 역사가 그렇게 진행되어가고 있는데 아담인 사람 나는 그것에 호응적인가, 대립적인가? 내가 그것에 호응을 해도 호응과 함께 그 진행이 계속돼 나가는 거고, 그 면에 대해서 대립을 한다고 하면 그 진행되는 것이 멈춰졌다가 가는 거냐? 아니요. 대립이던 진행이던 중단됨이 없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대로 계속 진행이다 그 말이요. 문제는 대립을 할 때는 나에게 입어질 신의 성품이 입혀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국적인 섭리는 따먹었네, 안 따먹었네하는 거기에 의해서 멈춰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완전자로서 성도들의 신령천국의 누림성을 놓고 예정 계획 설계 창조 섭리를 죽 해 나가고 있다 그 말이요. 우리의 대 구원을 위해서 세상 모든 역사는 진행이 되고 있단 말이요. 쉽게 말하면 마지막 그 날을 향해 가고 있다 그 말이요.

 

그렇게 가고 있는 사이에 누구는 나고 죽고, 누구는 나고 죽고 그러고 있다 그 말이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뭘 이어 받아서 가다가 죽고, 또 이게 안 되면 새롭게 일어나서 가다가 죽고, 또 가다가 죽고 자꾸 이렇게 변동사항을 일으키면서 가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성도의 궁극의 누림성을 위한 역사로 진행이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대국적인 구원을 염두에 두고 예수 믿는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다음에 영이 중생이 되었고, 관계성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로 이렇게 되어진 것을 우리가 느낀다면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상태보다도 비록 선악과를 따먹는 사건이 있었지만 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중생을 얻은 이게 훨씬 나은 겁니까, 못한 겁니까? 훨씬 나은 거지요.

 

이건 왜 그런가 하니 에덴동산에서 범죄 이전 무죄인으로 있을 때에 죄가 없다고 해서 의인은 아닙니다. 의인은 의를 행해야 의인이고, 죄인은 죄를 행해야 죄인이요. 의를 행치도 않고 죄를 짓지도 않은 그 상태는 무죄인이라 그 말이요.

 

그러면 무죄인의 그 상태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의 중생된 영과 같습니까, 질이 다릅니까? 다르지요. 그걸 기독교에서 잘 생각을 못해요. 왜 다르냐? 무죄인의 상태의 그 영은 어떤 방법으로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야 돼요. 무죄인의 상태의 영은 본질상 질적으로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된 게 아니란 말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입어 중생이 된 영은 하나님의 본질과 단일성으로 된 거지요. 그래서 이제 죽어도 그 중생된 영은 천국은 들어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무죄상태이지만 그 때는 아직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영이 중생된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그런 면을 비교하고 가치 평가성을 따져볼 때에 선악과를 따먹기 전보다도 선악과를 따먹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영이 중생된 현재가 훨씬 더 낫지요.

 

그렇다고 본다면 그런 면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해 보니 선악과를 안 따먹은 것보다도 따먹는 게 좋겠지요? 어때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선악과를 또 따먹을까? 그러니까 이걸 우리가 성화구원으로 끄집어 왔을 때에 또 다시 따먹을 수는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게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중생을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이런 과정을 현재적으로 평가를 해 봤을 때에 중생이 된 현재의 자기에게는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게 유익이 됐단 말이요.

 

그러면 이 말이 아담보고 , 죄 잘 지었다그런 뜻이냐? 그런 말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결과는 좋게 되었지만 내가 그 때 당시의 아담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다시 선악과를 따먹겠느냐 그 말이요. 성화구원을 아는 이제는 다시 그 역사를 반복할 수가 없어요.

 

가룟유다나 빌라도 모두 하나님의 예정대로 설계대로 잘 된 거지요? 그럼 잘 됐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협조자들이었느냐 그 말이요. 대립자들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대립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대국적인 구원의 역사가 중단이 되었느냐? 그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변경이 되었느냐? 안 됐잖아요. 이게 생각하기가 어렵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마음 자체는 하나님과 대립성을 일으키고 있지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 그 누가 당신의 대국적인 목적에 대립을 해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대립성 그 자체를 써먹어 버린다 그 말이요. 당신의 대국적인 그 목적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중단이 없이 진행이 된다 그 말이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겠어요? 하나님은 누가 대립을 해도 당신의 선하신 목적에다 그걸 이용을 다 해 버린단 말이요.

 

그러면 대립적인 존재를 당신의 백성을 위해 선으로 썼다고 해서 대립성을 일으킨 그 자에게 선으로 입히느냐? 지금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참 묘하지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대국적인 사역에 거스를 자가 없어요. 거스르면 거스르는 대로 갖다가 잡아 써버린단 말이요. 호응적이면 호응된 그 자는 하나님의 대국적인 구원에 이용당하는 것 같으나 그 결과성은 자기에게 또 오게 돼 있단 말이요. 선이 입혀지는 거지요. 참 묘하지요.

 

이런 게 있습니까? 사람들이 홍수처럼 많이 밀려가는 그 속에 자기가 끼어있을 때에 자기는 가만히 있어도 막 밀려가는 게 있습니까? 안 가고 싶은데도 밀려가는 게 있습니까? 그 참 묘하지요? 그들 자체는 대립적이었지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선에 이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훈적인 면으로 보면 모든 싸움은 요인이 있습니다. ‘먹으라, 먹지 말라하신 여기서 먹느냐, 안 먹느냐하는 싸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에게는 직접적으로 먹지 말라고 하셨고, 하와에게는 아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 다 선악과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런고로 이제는 먹느냐, 안 먹느냐이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진정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사랑에는 인격적 수수관계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지 말라는 이 명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걸 만들려고 그러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말이요.

 

먹으라, 먹지 말라하는 그 명령에서 먹는다, 안 먹는다자꾸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왜 그 말씀을 하셨을까?’ 하는 그게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게 뭐요? 얘기를 걸고 들어온다는 게 뭐요? 관계성을 갖자는 신호가 되는 거지요.

 

만일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 드리고 하나님처럼 되면 그게 좋을까요? 참 이 말이 이상하네?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 드리고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되느냐 그 말이요. 매사에 그렇다 그 말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걸 의식을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외면하지 말라. 나의 삶 전반에서 늘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살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그렇게 산다는 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다. 무슨 일을 크게 만들어서 하는 그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자꾸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 말이요.

 

그리고 싸움의 상대는 사람과도 되고, 하나님과도 되고 그래요. 또 사람과 뱀이 싸우기도 하고, 또 가만 보면 하나님 대 마귀가 싸우기도 해요. 물론 하나님과 마귀가 싸운다고 하는 건 하나님이 마귀와 대등하다거나 마귀를 못 이긴다는 말은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신앙의 교훈적으로 보면 그런 면도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의 싸움에서 안 따먹고 이기는 게 좋지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싸움에는 유인전이 있지요. 그 유인전을 이기고 안 따먹는 것. 그게 있단 말이요.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대립은 알지만 유인전에서 넘어가기가 쉬워요.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바로만 가지면 어느 누가 그 사람에게 덤비겠느냐? 인간 자기의 위치가 하나님 다음의 위치거든요. 자기의 이 위치에서 떨어지면 뱀이 덤벼든다 그 말이요. 그러나 사실은 뱀이 인간의 싸움의 상대가 되는 겁니까? 싸움의 상대가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틀어지면 인간이 뱀과 싸우게 된다 그 말이요. 못된 인간은 길 가는 개잡고 싸웁니까? 인간의 차원이 떨어지면 개잡고 싸워요? 그렇지요. 그런 거와 같다. 왜 이렇게 떨어졌느냐?

 

우리 인간 자기가 자기 위치를 올려야 합니다. 올라가는 게 하나님의 뜻이요. 세상 사람들은 안 올라간 상태에서 자꾸 뭘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잖아요. 그러나 인간은 올라가야 된단 말이요. 올라가는 게 하나님 뜻이요 하나님 말씀이라. 그러니까 돈이나 명예나 존귀 부귀 권세 이런 것을 붙잡으려고 싸우지 말고 인격적 차원적으로 올라가야 할 자기를 잡고 싸우라 그 말이요. 참 어렵지요? 참 어려워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자들이 그걸 잘 몰라요. 너무 무뎌. 마음이 싸우는 걸 몰라. 정신이 싸우는 것에 너무나 무뎌.

 

하나님은 인간 자기를 좋게 해 주려고 하는 분이십니다. 자기의 부모형제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더 사랑하고 더 높이 올리려고 그런다 그 말이요.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싸움에서의 패인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요 불신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패배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해서인데 하나님처럼 오르기는커녕 뱀에게 패배가 돼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싸움의 성질을 모르니 유인전에서 패배가 돼버린단 말이요.

 

그 패배의 결과는 현재의 결과로 나타나 있고, 또 미래적으로 미래의 결과가 나타나는데, 현재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느냐?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뭘 가지고 자기의 치마를 만들었지요? 무화과나무 잎으로. 그리고 또 하나님이 보기 싫어서 숨었습니다.

 

에덴동산 안은 하나님이 거니시는 동산이지요? 그런 에덴동산 안이라면 얼마나 평안하냐? 그런데 범죄 한 후에는 고통의 동산이 돼 버렸다 그 말이요. 그렇지요? 그 불행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에덴동산이 행복의 동산이 아니라 불행의 동산이요 고통의 동산이 돼 버렸어.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 말이요. 쫓겨난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미워서 그들을 쫓아낸 것이라는 그 한 가지만 생각을 말고 그래, 네 수준에 맞추자그 말이요. ‘타락된 네 수준에 맞추자한 것이 에덴동산 밖이야. 이 말이 듣기가 좀 어렵지요? 그러니까 너는 에덴동산 밖에서 살 수준이다. 너는 그만밖에 안 된다. 네 분수대로 한 번 살아봐라.’ 그 참 안타깝지요. 그리고 자손 대대로 전쟁이라 그 말이요. 이게 얼마나 고통이냐? 이제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인지를 좀 알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신앙상태를 보면 참 캄캄합니다. 이걸 아는 우리는 바울이 기도한 것처럼 자기의 마음 상태를 보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상태에서 건져내랴이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단 말이요.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기본구원(중생) 얻은 것에 만족해서 완전 의인이 된 것처럼 중생한 자는 어떤 걸 해도 죄가 아니다이런 말을 하니 이거는 성경을 도무지 모르는 차원이 되는 거지. 그러니까 어떤 부분은 옳은 것 같은데 어떤 부분은 유인이 돼가지고 쏙 빠지고. 이런 마귀의 장난이 있다. 그런 게 상당히 많아요.

 

기도 올립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을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해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겪게 하고, 체험해서 저희들이 말씀에 의해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인간 자기를 이 세상에 만들어놓은 이유, 나그네로 살면서 내가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존재의 이유, 출생의 이유를 성경을 통해서 알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과거에는 깨닫지를 못해서 사건 환경에 얻어맞고, 남과 세상에 대해 원망불평하고, 하나님에 대해 자기 신세타령하고,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삿대질을 하고 원망을 했는지 생각을 해보면 너무 어리석은 나였구나하고 부끄럽기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제 저희들에게 영특한 깨달음을 주시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아 현실에서 어떤 상황을 주더라도 비록 우리가 잘못해서 죄를 지었고 모든 면에서 연약한 상태이지만 그러나 이미 지난 과거로 만족합니다. 이제 더 이상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을 강력하게 붙들어 주시고,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 앞에 모든 면에서 자타를 위해서 성화구원을 이루어가고, 수종을 들면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고 싶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저희들을 영육 간에 온전자로 만들어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그리고 우리 자신도 주님 안에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아버지가 기뻐하니 나도 기쁘고, 내가 기뻐하는 걸 보시고 아버지가 기뻐하시고 이렇게 인격적 애정적 결합자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희들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고 붙잡아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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