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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넓히는/없애는 공동체

창세기 새길교회............... 조회 수 518 추천 수 0 2015.05.23 23:5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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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2:4 
설교자 : 정경일 형제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137838 

경계를 넓히는/없애는 공동체

(창세기 12:4)
2013년 7월 28일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


아브람은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함께 떠났다. 하란을 떠날 때, 아브람의 나이는 칠십오 세였다.

- 창세기 12장 4절

 

불혹(不惑)과 불혹(不或)

 

정말 변화하지 않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공동체도, 여러분도, 저도 참 많이 변화해 왔습니다. 공동체로 돌아와 가장 가슴 아프게 실감한 변화는 이제는 공동체에서 체온을 느끼며 만날 수 없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몇 년 전 이남수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을 때, 마지막으로 남기셨던 글을 인터넷을 통해 읽고, 주셨던 사랑을 기억하며 눈시울이 젖었습니다. “끝없는 사랑으로 대해주신 선후배 친지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우리 삶 전부에서 드리는 유일한 기도가 ‘감사합니다’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했지요. 이남수 선생님은 그렇게 족한, 완전한 삶을 사시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렇게 아프면서도 따뜻한 기억을 선물해 주시고 떠나신 분들도 있지만, 새로 태어나고, 자라고, 성숙해 가는 공동체의 미래도 있습니다. 저와 함께 했던 ‘새길 넥스트’ 청소년들이 이제는 듬직한 청년이 되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이나, 전에는 보지 못했던 분들을 새로 만나게 되는 것도 흥미진진하고 가슴 설레는 변화의 경험입니다. 그렇게 떠나고, 자라고, 찾아오는 자매형제들과 함께 공동체는 변화하고, 성숙하고, 풍요로워집니다.

 

저도 많이 변했습니다. 당장 외모부터 꽤 변했지요. 별로 안 변했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자세히 보시면 흰머리도 많이 늘었고 체형도 좀 바뀐 걸 알아차리실 수 있을 겁니다. 학자의 삼고(三苦)는 ‘읽고,’ ‘생각하고,’ ‘쓰고’인데, 여러 해 동안 매일 책상에 붙박이로 앉아 삼고를 겪으며 지내다 보니 어깨가 앞으로 굽으며 좁아지는 ‘학자 체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제 신학과 신앙은 새길에 있을 때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적, 영적으로 조금 더 대담해진 게 변화라면 변화일 것 같습니다. 그렇게 대담하게 지적, 영적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새길이 길러준 “깊은 신앙 넓은 신학”의 정신 덕분입니다.

 

그런 변화들과 함께 폭풍처럼—그리고 은총처럼—찾아온 내적 변화도 있었습니다. 나이 마흔 무렵, 그때까지 저를 지켜주고 지탱하고 있던 정체성이 산산이 부서지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왔습니다. 돌아보면, 칼 융이 말했던 것처럼,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고 배운 과정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너무 두렵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둠 속에서 괴로워할 때 공자가 가르친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는 “나이 사십이 되어 더 이상 그 무엇에도 미혹되지 않았다”는데, 같은 나이의 저는 오히려 마음의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불혹은 공자 같은 성인의 길이지 저 같은 범인의 길은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에 더 의기소침해졌지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천(天)의 사회적 실현을 꿈꾼 공자가 소수 지적, 영적 엘리트들만을 위한 길로 불혹을 가르쳤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해 뒤 일본의 연극배우 야스다 노보루의 불혹 해석을 읽고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는 공자의 시대에는 ‘미혹할 혹(惑)’이라는 글자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대신 공자가 말한 것은 같은 발음의 '혹 혹(或)'이었을 거라고 합니다. 이 혹(或) 자는 ‘경계’ 또는 ‘영토’를 의미합니다. 즉 나이 사십 무렵의 공자는 경계를 넘어 돌아다니며 그의 사상을 깊고 넓게 했다는 의미로 불혹(不或)을 말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공자 사후 한나라 때 <논어>가 경전화 되는 과정에서 미혹을 뜻하는 혹(惑)으로 글자와 뜻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런 해석의 학문적 타당성 여부는 학자들의 의견을 더 들어봐야겠지만, 저는 공자가 나이 마흔 무렵에 경계에 갇히지 않고 지적, 영적 모험을 계속했다는 이야기에 매료되었습니다. 대개 나이 마흔 정도 되면 자신이 만든 습성으로 굳어지고 자신이 정한 경계 안에 안주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계속 경계를 넓히며 자아를 심화하고 확장하라고 가르칩니다. 어쩌면 제가 겪었던 ‘영혼의 어두운 밤’도 굳어져 가며 경계 안에 안주하려는 저를 경계를 넓히는 여행으로 초대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터프한 은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동체의 나이와 개인의 나이는 다릅니다. 하지만 새 길을 걸어가려는 공동체의 정신과 태도는 경계를 넓히는 의미의 불혹(不或)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불혹의 길이 쉽고 편안한 것은 아닙니다. 경계를 넘어 여행하는 것은 고단하고, 두렵고, 심지어 위험한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때는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고 가고자 하는 곳은 아직도 멀게만 느껴질 때입니다.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여행을 도중에 멈추고 싶어집니다. 길 위에 집을 짓고 싶어집니다. 이런 정주의 욕망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길 위에서 겪게 될지도 모를 위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더 커집니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심을 밀어내는 신앙과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입니다.

 

하란: 갈대아 우르와 가나안 사이에서

 

공자가 가르친 불혹을 떠올리게 하는 성서의 인물은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짧은 본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아브람은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함께 떠났다. 하란을 떠날 때, 아브람의 나이는 칠십오 세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란이 아브람의 고향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원래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해 가던 도중에 하란에 멈춰 거기에 자리잡고 살았습니다 (창 11:31). 즉 데라 가족의 원래 목적지는 하란이 아니라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데라가 가나안으로의 여행을 그만두고 하란에 정착한 이유는 뭘까요? 성서는 이 물음에 답해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브람 일행이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겪은 고초에 비추어 추측해 보면, 아마도 여행의 고단함과 미지의 여정에서 겪을지도 모를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데라의 여행을 도중에 멈추게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데라의 경계는 하란까지였습니다. 그가 경계를 넓히는 여행을 멈춘 순간 그의 경계는 그의 벽이 되었습니다. 안전하지만 닫힌 벽이었습니다. 데라는 안전과 가나안을 맞바꾸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중단했던 여행을 다시 떠나라고 하십니다. 어쩌면 데라가 우르를 떠나는 것보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는 것이 더 어려웠을 겁니다. 원래는 경유지였지만 결국 정착지가 되어버린 하란에서, 모든 것이 익숙해진 하란에서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은, 처음 데라가 우르를 떠났을 때보다 몇 배의 용기를 필요로 했을 테니까요. 또한 전에는 아버지를 따라 우르를 떠났지만, 이제는 자신이 직접 가족을 이끌고 미지의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신앙과 용기 없이는 떠날 수 없는 여행입니다.

 

아브람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 공동체가 어디에 있는 지, 어디를 지나고 있는 지 묻게 만듭니다. 우르, 하란, 가나안 중에서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를 지나고 있습니까? 아마도 낡은 세계인 우르를 이미 떠나왔지만 새로운 세계인 가나안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채, 두 세계 사이 어디쯤을 지나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 하란은 어디일까요? 우리가 여행을 도중에 멈추고 머무는 곳, 경계가 벽이 되는 곳, 바로 거기가 하란입니다.

 

하란은 매혹적입니다. 우르보다는 가나안에 더 가깝고, 가나안으로 가는 길보다는 더 안전합니다. 그러니 위험을 감수하면서 경계를 넓히는 대신 경계를 울타리 삼아 그 안에 정주하고 싶어집니다. 새길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여전히 낡은 길 보다는 더 새로운 길일 수 있습니다. 가던 길 멈추고 집을 지어도 낡은 집들보다는 더 새롭고 좋은 집일 수 있습니다. 나쁜 교회, 없느니만 못한 교회들이 차고 넘치는 현실에서 좋은 교회, 바른 교회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길 가는 것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막다른 길, 데드 엔드(dead end)가 되어버립니다. 죽은 길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란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하란이 죽음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아브람의 죽은 동생의 이름도 하란이었습니다. 그는 데라가 우르를 떠나기 전에 죽었습니다(창 11:28). 죽은 이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여행을 떠날 수 없습니다. 가나안을 향해 가는 여행자에게 하란에 머무는 것은 죽음입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하란에 머무는 것이 왜 죽음인지를 말해줍니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람이 하란을 떠났다고 합니다(행 7:4). 그런데 <창세기> 이야기는 다릅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데라는 70세에 우르에서 아브람을 낳았고, 205세에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오늘 본문대로 아브람이 75세에 하란을 떠났다면, 당시 데라의 나이는 145세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떠난 후에도 데라는 하란에서 60년을 더 살았던 게 됩니다. 그런데도 스데반은 살아있던 데라를 죽었다고 합니다. 사실 <창세기> 이야기에도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데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11장 32절에 나오고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이야기가 12장 4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11장이 “낳았고… 낳았고…” 식의 연대기적 순서로 쓰여진 것을 감안하면 무척 예외적인 배치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데라가 가던 길을 멈추고 하란에 정착했을 때, 그는 정신적, 영적으로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길: 정체성

 

데라가 정신적, 영적 죽음을 감수하면서 여행을 도중에 멈추고 하란에 정착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것은 여행 중에 타자와 만나고, 타자로부터 도전 받고 때로는 위협도 당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을 겁니다.

 

정체성… 지난 몇 달 동안 깊이 생각하고 치열하게 토론했습니다. 사실 새길의 정체성이 무엇(what)인가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되고 또 어느 정도 합의된 것 같습니다. 오늘 아브람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했으면 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게(how) 형성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브람의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의 정체성이 하란을 떠난 지 약 25년 뒤에 길 위에서 변화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창 17:5). 데라가 지어 준 이름 아브람과 하나님이 지어 준 이름 아브라함은 같은 ‘아버지’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둘의 차이는 아브람이 한 가족 혹은 부족의 아버지를 뜻하는 반면 아브라함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를 뜻한다는 점입니다. 이를 공자의 불혹에 비추어 풀어보면 아브람은 '경계에 머무는이'의 이름이고 아브라함은 '경계를 넓히는 이'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의 정체성은 하란을 떠날 때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길 위에서 만난 타자, 아니 동료 여행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후에 형성되었습니다. 길에서 만난 이들과의 관계가 없었다면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이 되게 한 것이 길 위에서 만난 이들이듯, 우리가 새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동료 여행자들과의 관계가 우리에게 새길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줍니다. 이 시대 우리가 특별한 관심으로 가까이 해야 할 동료 여행자들은 “성문 밖” 가난한 사람들, 이웃 종교 신앙인들, 그리고 비종교적 인본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란과 같은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게토에 갇히지 않고 경계를 넓히며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길벗입니다. 스리랑카의 사르보다야 운동은 “우리는 길을 만들고 길은 우리를 만든다”고 합니다. 우리의 참된 정체성은 길 위에서 형성됩니다. 우리와 길은 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들고 걷는 길이 우리의 정체성이 됩니다. 우리는 새 길이고, 새 길은 우리입니다.

 

경계를 없애는 사랑

 

이렇게 경계를 넓히며 하나님나라 여행을 계속하는 불혹의 공동체는 내적으로 더욱 근원적인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치는 공동체 안에서 경계를 넓히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경계를 없애는 데로까지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안의 경계가 없어질 때 비로소 바깥으로 경계를 넓힐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의 ‘다름’에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가슴이 설렐 때, 우리는 경계에서 만나게 될 다름을 반기게 되고, 그 다름과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다름을 두려움이 아닌 설렘의 원천으로 만드는 것은 사랑입니다. 이남수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끝없는 사랑,” 그 경계 없는 사랑이 우리를 일치시킵니다.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예수의 공동체는 경계 없는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그 안에는 희한하게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람들이 경계 없이 함께 어울려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 민족해방을 위해 싸우는 혁명가와 로마 군대의 백부장, 산헤드린 의원과 세리, 창녀, 건강한 이들과 병든 이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여행했습니다. 그렇게 내부의 경계를 없앤 예수의 공동체는 경계 짓고, 차별하고, 억압하는 모든 제도와 갈등했습니다. 예수의 삶을 보면 “적의 적은 친구”라는 통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는 보수적 사두개파의 성전권력만이 아니라 개혁적 바리새파의 회당권력과도 갈등했고, 로마 제국만이 아니라 반-로마 해방운동 세력과도 갈등했습니다. 예수는 나와 남을 분리하여 경계 짓고, 남을 배제하거나 지배함으로써 지탱되는 모든 ‘닫힌 질서’에 맞섰습니다.

 

이런 경계 없는 사랑은 위험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경계 없는 사랑은 경계 짓는 제도에게는 위협입니다. 경계를 넓히는 우리의 여행은 경계를 벽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저항입니다. 그러니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위험한 길입니다. 우리는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예수의 길을 따라 여행하게 될 겁니다. 심지어 그 길 끝에는 십자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경계를 넓히고 없애는 불혹의 여행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길, 예수 믿으미가 예수 따르미의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 길이기에, 새길의 <창립취지문>에서 고백하고 결단한대로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경계를 넓히고 없애며, 하란을 떠나, 이 길을 계속 걸어갑니다. 그 길을 사랑하는 새길의 자매/형제님들과 길벗이 되어 함께 걸어가고 있어 가슴이 설렙니다.

 

길 위의 하나님,

새길이 우르와 같은 제도교회를 떠나

경계를 넓히는 여행을 시작한 지 스물여섯 해가 지났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총이고 모든 순간이 특별한 순간입니다.

이제 하란을 지나는 우리에게

밖으로는 경계를 넓히는 여행을 계속할 믿음과 용기를 주시고

안으로는 경계를 없애는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길이요 길벗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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