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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신30:1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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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67036 |
http://dabia.net/xe/1067036
설교보기 : https://youtu.be/kBw2HUlDJG8
성경본문 : 신명기 30:15~20
양자택일
주현 후 여섯째 주일, 2023년 2월12일
모압 설교
오늘 설교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지금부터 3천4백 년이나 3천2백 년 전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소수민족으로 살던 애굽을 떠나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유목 생활을 하다가 이제 요단강 동편 모압 평지까지 왔습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입니다. 애굽을 떠난 이후 40년간의 여정을 이끈 사람은 <이집트의 왕자>로 유명한 모세입니다. 그 사이에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생존 자체가 힘 버거웠습니다.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생떼를 부리는 이들도 나왔고, 모세의 권위를 아예 부정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요단강 동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는 자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폭탄선언을 합니다. “이제 내 나이 백이십 세라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신 31:1) 그가 요단강을 건너지 못한 이유가 실제로 무엇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모세가 어떤 특별한 사정으로 소리소문없이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고, 전략적으로 열두 지파 모두 건너지 말고 일부는 요단 동편 지역에 남는 게 좋다고 여겨서 모세 자신은 그대로 머문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일무이하다 할 정도로 위대한 영도자였던 모세의 역할은 여기서 끝납니다. 끝나기 바로 직전에 행한 연설이 신명기이고, 오늘 설교 본문인 신 30:15~20절은 연설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나온 신명기(申命記)라는 이름은 ‘되풀이한 계명의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70인역>에서 따온 라틴어 성경 이름인 ‘듀테로노미움’을 한자로 적은 겁니다. 듀테로노미움은 ‘두 번째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겁니다. 이 두 율법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비슷합니다만, 두 번째 율법이 좀더 강력합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고대 이스라엘이 역사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하나님 신앙이 더 확실하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자란 청년이 독립한 뒤에 느슨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계기에 이르러서 좀더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경우와 비슷합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두 가지 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합니다. 백성들은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야말로 ‘양자택일’입니다. 그런 표현이 본문에서 반복합니다. 생명과 복으로 가는 길이 있고, 사망과 화가 임하는 길이(15절) 있습니다. 생존하며 번성하는 길이 있고(16절) 망하는 길(18절)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복이 있고 저주(19절)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19절)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가나안 땅에 두 발을 딛고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생명을 얻고 행복하지만, 불순종하면 죽고 망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신명기 역사관의 핵심입니다. 그 신명기 역사관이 구약 전체를 관통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이 말씀대로 살기는 어렵습니다. 어렵지 않았다면 모세가 이렇게 반복해서 말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이런 말씀대로 살기 어려운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서 살게 될 가나안에 이미 이스라엘보다 문명이 더 발전된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유목민으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가나안 원주민들은 한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명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철기 문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당연히 더 고급스러운 문명이라 할 인근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가나안 땅에 발을 디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은 그야말로 신천지와 같았습니다. 이제 자신들도 가나안 백성들처럼 멋지게 살게 되리라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 노동자들이 대한민국에 처음 들어와서 느꼈을 법한 꿈입니다. 그렇게 살려면 가나안 원주민들의 삶을 배우고 따라야 합니다. 그들의 신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들의 신을 섬긴다는 말은 그들의 세계관을 추종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은 바로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
가나안 사람들의 신은 바알과 아세라입니다. 그 신들은 풍년과 다산을 보장했습니다. 그 신들을 제사하는 곳이 산당(山堂, high place)입니다. 가나안에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도 그런 산당 제사에 참석했습니다. 일종의 종교 축제인 그런 산당 제사에 가면 볼거리도 많고 먹을거리도 많습니다. 젊은 남녀들은 미팅 기회도 잡습니다. 고대 이스라엘도 초기에는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왕상 3장에는 솔로몬의 ‘일천 번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제사를 지낸 장소가 가나안 토착 종교의 산당입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된 다음에는 산당 제사를 금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정치가 지파별 지역분권에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화하면서 종교도 역시 중앙집권화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중앙집권화가 되었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신들의 유혹에서 벗어난 건 아닙니다. 사람은 재물과 후손에 대한 욕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시리아 제국과 바벨론 제국을 거치면서 인간 문명이 얼마나 막강하고 매력적인지를 목격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믿어도 이런 제국의 힘에 굴복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힘 앞에서 무력하다면 하나님을 믿을 필요는 없는 거 아닙니까. 요즘 대한민국의 젊은 그리스도인들도 대부분이 이런 생각에 젖어있을 겁니다. 대학생이 되거나 사회에 진출하면서 어린 시절에 자신들이 배웠던 그리스도교 신앙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교회에는 젊은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이런 상태로 30년만 지나면 한국교회는 반이나 삼 분의 일로 쪼그라들 겁니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서 괴멸되었고, 왕실과 귀족과 지도급 인사 대부분은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 역사는 끝났고, 따라서 하나님 신앙도 끝난 겁니다. 하나님 신앙은 발붙이기 어려웠습니다.
생명의 근원
영혼의 눈이 밝은 선지자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신앙을 철 지난 유행가 정도로 여길 때 선지자들은 생생한 능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연설도 그런 선지자 전통에서 나온 겁니다.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합니다. 사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20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공동번역입니다.
그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야훼께서 너희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자리잡고 오래 잘사는 길이다.
모세의 설교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로운 말씀으로 들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일부 똑똑한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했겠지요. ‘우리가 선조 대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았는데도 이렇게 아시리아에 당하고 바벨론에 망했다. 이런 신세가 된 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냐.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 불릴 정도로 의로운 사람이었으나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며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하는 운명으로 떨어졌는데, 도대체 그건 누구의 책임이냐?’ 이런 질문 앞에서 모세가 어떤 대답을 했을지는 제가 예상할 수 없으나, 대답이 궁핍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파멸적인 운명을 하나님 신앙과 직결해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번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서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세상의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라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려움을 당한 신자에게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거나 믿음이 식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쉽게 내뱉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어떤 불행한 운명도 당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쏟아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다가 십자가 운명에 떨어졌던 한 인물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자가 되거나 이스라엘을 인근 나라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발전하는 방법을 알려주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신앙은 인생살이에서 출세할 수 있는 ‘노하우’가 아닙니다. 그런 노하우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강력하게 경고하는 가나안의 바알신앙과 바벨론 제국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제시합니다. 하나님 신앙은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영적인 태도를 가리킵니다.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참되게 신뢰하는 태도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런 신앙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에서 반복해서 바알숭배에서 떠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가나안의 세련된 문명은 실감이 나지만 하나님 신앙은 밋밋했습니다. 바벨론의 막강한 세력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는 분처럼 느껴집니다. 주로 부동산 문제와 주식투자, 그리고 연예 사업과 성공한 유튜버 활동에서 ‘사는 맛’을 느끼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생명을 택하라.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는 모세의 말이 귀에 들리겠습니까? Chat-GPT가 현실이 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서 생명의 원천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지금 ‘당신들 앞에 죽는 길과 사는 길이 놓여 있으니 선택해라. 양자택일하라.’라고 다그치듯이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고,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일상에서 영적인 긴장감을 놓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조금만 느슨해지면 사람들은 너나 가릴 것 없이 가나안 땅의 풍요와 바벨론 제국을 향한 욕망을 떨쳐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일상에서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하는 방식으로 살지는 못합니다. 늘 생명의 본질에만 마음을 두기도 힘듭니다. 그런 긴장된 삶은 우리의 영혼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풀어질 때는 풀어지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단순한 놀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일상은 궁극적으로 매 순간 양자택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엄청나게 큰 사건에서만 양자택일하는 게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서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매일 티브이 통속 드라마나 홈쇼핑만 시청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고, 자연 다큐나 과학과 인문학 유튜브 강의를 시청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또는 스마트폰으로 게임만 하는 어린이가 있고, 톨스토이 동화를 읽는 어린이가 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가 쌓이면 거리를 좁히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한쪽은 죽음이고 다른 한쪽은 생명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정치 선동이나 값싼 종교적 위로에 떨어지는 예배와 설교에 치우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성경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깊이에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삶이든지 신앙생활이든지, 더 나아가서 우리의 육체적 건강까지 포함하여 매 순간에는 죽음과 생명의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겠으나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어느 쪽인가에 들어선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선 자신을 발견하고 싶으신가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나름으로 열심히 살기만 하면 충분합니까?
거룩한 예술품으로서의 그리스도인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모세의 가르침이 우리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고대 이스라엘 백성도 나름대로 종교행사에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들은 양을 잡고 비둘기를 잡아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백성들은 유대교 절기를 지켰습니다. 유대교 신앙에 독실한 사람들은 일 년에 한두 번씩 예루살렘 성지 순례도 다녀왔습니다. 그런 종교적 열정이 곧 하나님 사랑 자체는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종교행사에 매달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교만한데도 겉으로 겸손한 척할 수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서도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소유를 내주고 몸을 불사를 정도로 희생적으로 살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고전 13:3) 말합니다.
앞에서 생명을 택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세의 설교가 일상에서 영적인 긴장감을 놓치지 말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긴장감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비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길을 갑니다. 한 사람은 스마트폰으로 풍경을 찍기에 바쁩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전화 통화하기에 바쁩니다. 발도 불편하고 배도 고픕니다. 그걸 참지 못합니다. 빨리 목적지에 도달해서 씻고 맛있는 식사를 할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자기가 걷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발이 불편하고 배고파도 그것 자체를 걷기의 과정으로 받아들입니다. 그에게는 지금 이렇게 길을 걷는 그 순간이 생명 충만입니다. 똑같이 길을 가지만 두 사람의 태도는 다릅니다. 자기 인생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배가 고프거나 몸이 피곤한 일로, 또는 외로움으로 생명 충만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두 발을 딛고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지금 모세의 설교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은 곧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동시에 유혹의 땅입니다. 재미있는 일들이 많은 땅입니다. 그곳 토착 젊은이들은 성적으로도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들을 보는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바알을 섬기게 됩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의 유혹을 받아서 망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를 미리 내다본 것일까요? 그 꼴을 보기 싫어서 늙었다는 핑계로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서 아무도 그의 무덤을 찾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은 본래 양자택일이지 양다리 걸침이 아닙니다. 바울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라고 충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도예가가 그냥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영적인 도예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거룩한 예술품으로 만들기 위해 한눈팔지 않고 최선을 다합니다. 예술가적 ‘마인드’로 매 순간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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