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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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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
2010년 8월 22일(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하나님의 손은 부드럽다” (God’s Soft Touch)
사무엘기상 (1 Samuel) 3:1-9
1.
소설 <오두막>에 대해 연속 설교를 하던 중, 어느 교우로부터 꽤 심각한 질문을 하나 받았습니다. 그분은 대수롭지 않은 듯 혹은 농담인 듯 질문을 던지셨지만, 실은 묵직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의 요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여행을 떠날 때, 오는 길 가는 길에서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연쇄 살인범으로부터 맥의 딸 미시를 보호하지 못하셨다면, 여행을 앞두고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 질문을 던지신 분은 제가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씩 웃으며 갈 길을 가셨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오랫 동안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문제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그 교우의 말씀대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간절히 기도한다고 하여, 통제력을 잃고 나를 향해 질주해 오는 음주 운전자를 하나님께서 강한 손을 펴 잡아채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내릴 때,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강한 손을 펼치셔서 내리는 비를 ‘뚝’ 그치게 하는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군인이 되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자녀를 둔 부모는 매일 같이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를 향해 날아오는 폭탄의 파편을 하나님께서 낚아 채지 않으십니다. 캠퍼스로 떠난 자녀들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는 부모님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 때문에 탈선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자녀의 차를 하나님이 돌려 세우지 않으십니다.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로 인해 진행되던 질병이 멈추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기도가 무슨 소용인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셨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면서 살도록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는 자연 법칙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우주가 제 스스로 돌아가도록 마련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인간의 삶에 혹은 우주의 운행에 강력한 손으로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다반사가 되면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질서를 당신 자신의 손으로 허물어 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두신 이유도, 자연에 법칙을 부여하신 이유도 모두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과거 이신론자들(Deists)이 믿었듯이,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신 분은 우주 저 편으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 제 스스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만 계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과 우주의 운행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십니다. 다만, 강한 손을 펼쳐서 개입하는 일은 아주 드물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부드러운 손으로 활동하십니다. 그같은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대로 혹은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상황이 바뀌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2.
하나님께서 강한 손을 펼치시는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2천 년 전, 유대 청년 사울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아주 헌신적인 유대교인이었습니다. 명석한 두뇌와 율법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열심은 사울을 지도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유대교를 오염시키는 이단자들을 보아 줄 수 없었습니다. 최근에 생겨나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는 ‘예수당’은 그 중에서도 가장 참을 수 없는 이단이었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사는 예수당원들을 색출해 냈고,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다마스커스를 향해 달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강력한 손을 펼쳐 그의 길을 가로막으십니다. 사울과 그 일행은 태양 빛 보다 더 환한 빛을 보고 모두 땅에 고꾸라집니다. 그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의심할 수 없이 분명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사울의 인생의 궤도는 뒤집어집니다. 불가항력적인 힘에 압도되어 사울은 변신합니다. ‘예수당’의 앞잡이가 된 것입니다. 유대교인들 편에서 보면 배신이요 변절이며, 예수당 편에서 보면 전향입니다. 그는 ‘바울’이라는 헬라식 이름으로 당시 로마 도시들을 두루 다니며 예수의 복음을 전했고, 신약성경 안에 묶여져 있는 많은 편지들을 남겼습니다.
질병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질병을 두고 기도할 때, 때로 하나님은 강한 손을 펼치셔서 기적적인 치유를 일으키십니다. 몇 달 전, 예배 후에 어느 여성 교우께서 기도를 부탁하러 오셨습니다. 그분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렵고 의료 보험도 없었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몇 주일 전부터 하혈을 하는데, 너무 두렵고 힘겹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같이 있던 목회자들과 함께 그분에게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애끓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두 주일 후, 그분이 찾아 오셨습니다. 기도 받은 그 날로 하혈이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알리고 싶었지만 경과를 보고 확실해진 다음에 말씀 드리려고 이제야 말씀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 교회 전병구 장로님의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장로님의 허락을 받고 말씀 드립니다. 장로님은 조지타운대학교 의과대학 병리학 교수를 지내시다가 은퇴하시고, 한국의 한림대 의대를 창설하는 데 이바지하신 분입니다. 평생을 의학자로 사신 장로님은 질병에 관한 한 기적을 인정하지 못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기적적인 치유를 받았다고 말하면, 장로님은 ‘우리가 알지 못해서 그러는 거지 뭔가 이유가 있었을 거야. 기적 같은 것은 없어!’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몇 달 전, 그 믿음이 뒤집어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허리 통증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수술을 하기로 했습니다. 장로님은 가까운 교회 새벽기도회에 늘 나가시는데, 그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믿지도 않는 기적을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죠.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아내의 무덤을 매일 방문하는데, 무덤 곁에서 자주 이렇게 넋두리 같은 기도도 올리셨답니다. “당신, 거저 나보다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있으니까니, 빽 좀 쓰자우야. 제발 이 통증 좀 제거해 달라구, 하나님께 부탁 좀 해 줘. 아님, 나를 그만 데려 가시든지. 이거, 뭐, 이래 가지고야 어떻게 살갔니?”
하지만 증상은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드디어 수술 날짜가 다가왔습니다. 수술을 위해 의사를 만나기로 한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기 위해 침대 밑에 둔 지팡이를 찾았습니다. 지팡이를 잡으려고 손을 뻗으려면 허리에 통증이 느껴지곤 했기에 조심 조심 손을 뻗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아무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이상한 느낌에 조용히 몸을 일으켜 봅니다. 지팡이 없이는 일으키지 못했던 몸이 가뿐하게 일으켜집니다. 이번에는 일어나 방 안을 걷습니다.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밖에 나가 걸어 봅니다. 그 전 날 저녁까지 두 손에 지팡이를 잡고 이를 악물고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고 바람처럼 자유로와졌습니다.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장로님은 스스로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십니다. 그같은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날만한 이유가 있었는지를 병리학적으로 꼼꼼히 따져 봅니다. 생활 습관이 바뀌었거나, 음식에 변화가 있었거나, 새로운 약을 먹었거나,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장로님은 평생토록 붙들었던 당신의 입장을 포기하셨습니다. 그 일 이후로 장로님은 기적 전도사가 되셨습니다. 기적은 일어난다고 전파하고 다니십니다.
3.
이런 이야기만 듣다 보면, 하나님이 다반사로 강한 손을 펴셔서 기적적인 일을 만들어내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앞에서 한 이야기 때문에 오늘부터 예배 후에 중보기도실이 미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기도를 드리면서 늘 하나님의 강한 손과 기적적인 개입만을 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더 많은 경우에 부드러운 팔로 일하시고, 속삭이는 음성으로 말씀하시며, 긴가민가한 방식으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로써 하나님의 강한 손을 구하고 기적적인 개입을 구하는 사람에게 그분은 종종 귀 먹은 것 같고, 침묵하시는 것 같으며, 무능력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기도가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경우에라도 여전히 기도는 소용이 있습니다. 기도할 이유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시며, 보이지 않게 움직이시고, 들리지 않게 말씀하시고, 느껴지지 않게 만지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에게는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여 화를 내고 투정을 하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어린 아이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부모에게는 그렇게 할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혜로운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힘을 쓰지 말고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조급한 우리 마음에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분에게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문 하나 정도는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어느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숨어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홀연히 그 한 가운데 나타나신 것처럼, 주님은 잠겨진 우리의 마음 문을 건드리지도 않고도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능력을 억누르시고 우리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마냥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노크하십니다.
문 밖에 서서 문을 열어줄 때까지 노크하시는 주님의 이미지는 1907년 런던 뒷골목에서 아편 중독의 무숙자(homeless)로 죽은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의 시, ‘하늘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의 한 구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카톨릭 신부가 되기로 서원했다가 스스로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다른 길로 들어섰던 톰슨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고 아편 중독자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그는 그분이 자신을 따라다니며 돌아서기를 촉구하고 계신 것을 느낍니다. 자신을 찾는 하나님의 추적을 톰슨은 이렇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추적하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는,
침착한 발걸음으로,
정확히 계산된 속도로,
긴박하지만 위엄 있는 기품으로
걸어오는 그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보다 더 긴박하게 들리는
한 음성이 들립니다
"네가 나를 등졌기에
만물이 네게 등진 것이다."
하나님은 서두르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천둥같은 목소리로 우리를 위압하는 경우도 별로 없고, 문을 뚫고 침입해 들어오는 경우도 별로 없습니다. 달려가는 우리의 뒷덜미를 잡아 채는 경우도 드뭅니다. 악행을 결심하고 달려가는 우리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는 일도 잘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실 수도 있지만, 비상의 경우가 아니고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따뜻한 손길로, 그리고 미풍같은 영향력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인생 여정을 같이 걸으십니다.
4.
하나님에 관한 이같은 진실을 알고 믿게 되면,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전격적이고 기적적인 개입으로 응답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 기도할 수 있고 또한 우리의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았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 기도로 인해 하나님의 강한 손이 펼쳐져지 않았을지라도, 그분의 부드러운 손이 움직이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강한 손이 움직여 병의 뿌리를 뽑아 버리면 좋겠지만, 그분의 부드러운 손이 움직여 그 질병의 고통을 견뎌내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도와주는 것도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오래도록 치유를 위해 기도했던 교우 세 분을 차례로 보내야 했습니다. 파킨슨씨 병으로 3년 이상 침상에 누워 눈빛으로만 의사 소통을 하다 가신 이창호 장로님, 2년 동안의 암투병 끝에 우리 곁을 떠나신 한정숙 집사님, 그리고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떠나 보내야 했던 양승길 장로님이 그분들입니다. 이분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개인적으로 그리고 교회적으로 많은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기도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도가 그분들에게 어떻게 역사했는지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침상에 누워 하루 하루 어려운 싸움을 하다 가신 이창호 장로님은 믿음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약해지지 않으셨습니다. 가끔 방문하여 기도를 드릴 때면 몸에 남아 있는 힘을 모두 끌어 모아 “아멘!” 하고 응답하셨습니다. 지내시기 어렵지 않으신지 여쭈어 보면, 검지 손가락 하나를 펴서 하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분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한정숙 집사님의 마지막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임종 예배를 드릴 때, 감당하기 힘 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입을 벌려 소리 없는 찬송을 부르셨습니다. 그분이 제게 남긴 마지막 말씀은 “나는 부족하여도…”였습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라는 찬송가의 3절 가사입니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 집사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그분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임종 예배가 끝나고 집사님은 침상에 고요히 누워 계셨습니다. 항암 치료로 인해 머리카락이 다 빠진 그분의 머리를 보고 있는데, 문득 렘브란트의 성화 ‘돌아온 탕자’가 생각 났습니다.
한정숙 집사님의 머리 모양이 아버지의 품에 안긴 둘째 아들의 머리 모습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거룩한 전율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손으로 한정숙 집사님을 안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떠나 보낼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홀연히 떠나버린 양승길 장로님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한 없이 퍼주셨습니다. 그랬기에 그분의 병환 소식을 듣고 많은 이들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양장로님도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유를 믿으셨고 그것을 구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저렇게 선한 종을 왜 하나님은 내버려 두시는 것이냐?”고, 제게 항의한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을 내버려 둔 것이 아님을, 저희는 그분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에서 명료하게 보았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믿음을 모두 마비시킬만큼 공포스러운 고통에도 불구하고 장로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을 부르시면서 보는 이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분을 치료하던 호스피스 의사는 양장로님의 평안을 보고는, 이런 환자는 처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던 어느 날, 의사가 장로님께 물으셨습니다. “Where are you, Mr. Yang?” (양선생,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의식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의사가 기대한 대답은 “My home”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씩 웃으시며 “I am in heaven.”(저는 하늘 나라에 있습니다) 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도 좋아하셨던 찬송가를 그대로 사신 것입니다.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5.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이렇게 부드러운 손으로 역사하십니다. 속삭이는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긴가민가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 부드러운 손을 느낄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분의 부드러운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귀가 필요합니다. 아지랑이와 같은 그분의 임재를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혹은 “볼 눈이 있는 사람은 보아라”고 했는데, 그 눈과 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어린 사무엘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다. 사무엘은 ‘한나’라는 여인의 가슴 아픈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으로써 태어났습니다. 한나는 젖을 떼자 사무엘을 제사장 엘리에게 맡겨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성전에서 지냈습니다. 그의 잠자리는 하나님의 궤가 모셔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가 아직 어릴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새벽, 사무엘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속삭이듯 부르는 그 음성이 제사장 엘리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그를 부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금 잠을 청하려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 음성이 또 들립니다. 사무엘은 다시 엘리에게 확인했으나, 이번에도 대답은 같았습니다. 세 번째로 같은 일이 반복되자 엘리가 말합니다. “가서 누워 있거라. 누가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여라.”(9절) 엘리의 추측이 옳았습니다. 그 음성은 바로 하나님의 속삭임이었습니다.
사무엘에게 들렸던 그 음성은 천둥과 같지도 않았고 사자의 포효와 같지도 않았습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늙어버린 엘리의 음성으로 착각할 정도로 하나님은 속삭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제사장 엘리가 어린 사무엘에게 권고한 것은 하나님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레와 같은 음성으로 말씀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영혼의 귀에 말씀하시기에, 들을 귀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사무엘의 이야기에서 만들어진 기도문이 있습니다.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는, ‘사무엘의 귀를 주소서’(O, Give Me Samuel’s Ear)라는 제목의 기도문입니다.
오, 사무엘의 귀를 주소서.
오, 주님,
당신의 속삭이는 말씀을
하나도 놓지지 않고 들을만큼
살아있고 민첩한
열린 귀를 주소서.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우선적으로 주님께 순종한
사무엘처럼.
아멘.
이런 귀를 가지면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에도 그분은 여전히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눈을 가지면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을 때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게, 드러나지 않게, 하지만 분명히 역사하시고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당장 병의 치유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의 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레와 같이 말씀하시는 음성만이 아니라 희미한 속삭임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볼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불꽃 같은 임재만이 아니라 아지랭이같은 임재까지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을 항상 느낄 수 있는 영적 감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분의 강한 손만이 아니라 부드러운 손길까지 느끼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실로 그것을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영성의 바퀴’(wheels of spirituality)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을 끌고 가는 큰 바퀴는 세 개입니다. 세 개의 바퀴가 모두 튼튼하고 잘 돌아갈 때, 영적 생활은 진보하게 되어 있고, 그럴 때, 우리는 ‘볼 눈’과 ‘들을 귀’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첫째 바퀴는 ‘개인적인 영적 생활’(personal devotion)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교제를 말합니다. 둘째 바퀴는 ‘영적 교제’(spiritual fellowship)입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삶을 나누며 신앙의 여정을 같이 걸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속회에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 바퀴는 ‘공적 예배’(public worship)입니다. 영감 깊은 공적 예배를 통해 우리의 영혼의 눈은 밝아지고 마음의 귀는 예민해집니다.
이제, 여름이 끝나갑니다. 결실의 계절을 내다 보며, 영적으로 해이해졌던 것이 있다면 추스러야 할 때입니다.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십시다. 영적 눈과 영적 귀가 얼마나 밝은지, 영적 감각이 얼마나 예민한지 점검해 보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영성의 바퀴에 바람을 넣고 기름을 칩시다.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튼튼한지 점검하십시다. 이 가을, 든든한 영성의 세 바퀴로 우리의 영적 여행을 즐기십시다. 매일, 주님의 부드러운 손이 우리를 만지시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매일, 매 주일, 그렇게 신실하게 살 때, 우리의 삶은 속에서부터 변모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비로소 입을 열어 우리의 믿는 바를 이웃에게 전할 용기를 얻을 것이며, 그 전도에 결실이 맺혀질 것입니다.
이같이 거룩한 열망을 마음에 품고, 하루 하루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
때로 주님의 강한 손을 경험하게 하소서.
때로 불꽃 같은 주님의 임재를 보게 하소서.
때로 뇌성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하지만 더 자주
주님의 부드러운 손을 경험하게 하시고,
아지랭이같은 주님의 임재를 보게 하시며,
주님의 속삭임을 듣게 하소서.
저희의 영성의 바퀴에
바람을 넣어 주시고
기름을 칠해 주시어
매일같이
신나게 달리게 하소서.
아멘.
<속회 자료>
2010년 8월 22일 설교
“하나님의 손은 부드럽다”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447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사무엘상 3장 1절부터 9절을 읽습니다. 어린 사무엘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한 가지씩만 나누어 보십시오.
2) 하나님의 ‘강한 손’을 경험해 본 일이 있다면, 그 경험을 나누어 주십시오.
3)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 혹은 ‘미세한 속삭임’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까? 당신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십시오.
4) 당신의 ‘영성의 바퀴’는 어떤 상태입니까? 하나씩 점검해 보십시오.
5. 중보기도
1) 하나님의 ‘강력한 손’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십시오.
2) ‘사무엘의 귀’를 얻도록 기도하십시오.
6.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485장
7. 광고 후 주기도문을 드림으로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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