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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17:32-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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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27120 |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17:32-49, 성령강림후 네째 주일, 2015년 6월21일
32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38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41 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니라 42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성경 퀴즈를 하나 낼 테니까, 속으로 정답을 말씀해보십시오. 거인 격투사 골리앗을 죽인 사람은 누굴까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알만한 질문입니다. ‘다윗’입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정확한 게 아닙니다. 삼하 21:19절에 따르면 가드 사람 골리앗을 죽인 인물은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입니다. 우리말 성경인 개역개정에는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고 되어 있지만, 원래 히브리 성경에는 아우 라흐미가 빠져 있습니다. 마틴 루터 번역에도 물론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인 것으로 나옵니다. 우리 성경 개역개정은 이 구절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배치된다고 보고 작은 글씨체로 ‘아우 라흐미’를 첨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골리앗을 죽인 인물이 다윗이냐, 또는 엘하난이냐 하는 논란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점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1) 고대 역사는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영웅을 드러내는 데 무게가 있습니다. 다윗이 고대 유대의 전쟁 영웅이었기 때문에 모든 유대의 역사는 다윗 중심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습니다. 2) 구약성경에 나오는 고대 유대 전쟁 이야기는 영웅 서사라는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통해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을 배우는 것이 성경읽기의 핵심입니다. 그 신앙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우리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사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들인 요나단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중의 하나가 다윗의 등장입니다. 다윗으로 인해서 자신의 왕위가 흔들릴 것을 알았다면 아예 처음부터 다윗을 멀리하거나 제거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그런 상황을 눈치 채고 몇몇 조치를 시작했을 때는 이미 다윗의 세력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자리를 잡은 후였습니다. 당시의 권력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도 젊었을 때는 전쟁을 통해서 용맹을 떨치곤 했는데, 다윗은 사울보다 더 뛰어난 용맹을 보였습니다. 당시 여인들은 다음과 같은 민요를 부르곤 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다윗이 자신의 이름을 떨치게 된 처음 사건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제1독서에 나오는 블레셋과의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를 거듭하면서 블레셋과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삼상 17장이 말하고 있는 전쟁이 벌어질 당시에 다윗은 자기 집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서 막내입니다. 큰 아들 세 명은 이미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직업군인의 길을 걸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 이새는 다윗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전쟁터에 나간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고 오라는 것입니다. 전쟁터에 다윗이 도착했을 때 마침 블레셋 진영에서 골리앗이 나와서 유대 군대를 향해 조롱을 퍼붓는 중이었습니다. 골리앗은 거인이었습니다. 키는 3미터가 훨씬 넘고, 60킬로그램 나가는 무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온 몸은 철갑으로 무장했습니다. 천하무적의 용사입니다. 골리앗은 전쟁 때마다 나타나서 적군의 기선을 제압하면서 큰 무공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장군들과 군인들은 공포에 질려 그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서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큰일이네. 저 블레셋 골리앗을 우리가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냐. 오죽 했으면 우리의 왕 사울이 골리앗을 제거하는 사람에게 많은 재물을 주고, 세금도 면해주고, 더구나 공주를 주어 부마를 삼겠다고 약속했겠나.’ 다윗은 지금이야말로 자기가 고속 출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또는 이스라엘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에게 모욕당하는 것에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골리앗과 싸워보겠다는 뜻을 사람들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 소문이 사울 왕에게 전달되어 결국 다윗은 사울 앞으로 불려갔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가상하게 여기긴 했지만 골리앗과의 싸움은 무모한 일이니 포기하라고 말했습니다. 프로 격투사인 골리앗 앞에서 양치기 촌놈은 명함을 내밀 수 없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큰 소리를 칩니다. 자신이 양치기를 하면서 사자나 곰이 나타났을 때 싸워 이긴 경험이 많다는 겁니다. 삼상 17:35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물론 과장된 표현입니다. 어쨌든지 이런 말로 허락을 받은 다윗은 임금이 입는 군복과 칼을 사양하고, 평소 복장으로 양을 포식자들에게서 지킬 때 사용하던 막대기와 매끄러운 돌 다섯 개, 그리고 물매를 들고 블레셋 골리앗과 맞짱 뜨러 나갔습니다. 이들의 격투 장면이 삼상 17:41-49절에 나옵니다.
다윗이 양 진영이 대치하고 있는 중앙에 먼저 나섰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함성을 질렀을지 모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거라고 기대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한번 붙어본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삼을 수 있었습니다. 골리앗은 방패를 든 사람들 앞세우고 다윗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그가 다윗을 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싸움꾼의 용모다 전혀 아닙니다. 예술가나 학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골리앗은 가소롭다는 듯이 43절에서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들고 왔구나.’ 하고 말한 뒤에 블레셋의 신 ‘다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목소리도 천둥 같았겠지요. 이런 말을 들으면 기가 죽을만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히려 더 강한 기세로 45-47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골리앗이 말로 다윗을 당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화가 난 골리앗은 다윗을 작살내기 위해서 성큼성큼 다가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달려가면서 물매를 사용해서 미리 준비했던 돈을 던졌습니다. 물매질은 평소 양치기 일을 하면서 손에 익은 것이었습니다. 물매를 떠난 돌이 화살처럼 날아가 완전무장한 골리앗의 이마 정중앙에 박혔습니다. 골리앗은 그 자리에 고꾸라졌습니다. 이것으로 싸움이 끝났습니다. 너무 시시한 결과였습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 사건으로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일약 거물이 되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누가 보아도 통쾌하기 그지없습니다. 정의로운 약자가 불의한 강자를 이긴다는 이야기 형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맞춤합니다. 그러나 실제 인류 역사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대개는 골리앗이 승리합니다. 다윗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골리앗과 싸울 엄두를 낼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 동네에 대형 매장을 갖춘 마트와 작은 매장을 갖춘 마트가 서로 경쟁한다고 합시다. 또는 한 동네에 현대식 건물을 갖춘 중대형 교회와 상가 건물을 빌려 예배를 드리는 미자립 교회가 서로 경쟁을 한다고 합시다. 경쟁이 될까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아주 드믄 일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골리앗 같은 주변의 강대국에 의해서 수없이 시달림을 당했으며,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일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게 이스라엘을 비롯해서 세계 모든 나라와 민족, 그리고 개인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에서 벌어진, 그리고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유대인들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골리앗 같은 세상을 다윗의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는 의미일까요? 우리도 다윗처럼 물매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늘 약자를 돕는다는 가르침일까요? 또는 아무리 약한 상대와 싸우더라도 골리앗처럼 방심하다가는 자기가 오히려 당할 수 있다는 교훈일까요?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에 몰입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격투를 벌이기 직전에 다윗이 한 말에 들어 있습니다. 그 구절을 우리는 바로 앞에서 읽었습니다. 그중에서 47절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골리앗은 칼과 창을 상징합니다. 당시 싸움은 어느 나라가 칼과 창을 더 많이 더 강하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칼과 창은 철기문명과 비례합니다. 철을 잘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칼과 창도 잘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당시 블레셋에는 이스라엘보다 더 발전된 철기 문명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블레셋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이 반드시 군사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입을 통해서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다.’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이 과연 옳을까요? 현실적으로 보면 전쟁에서의 승패는 칼과 창에 달려 있습니다. 세계의 패권을 휘둘렀던 제국들을 보십시오. 칼과 창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은 지금 칼과 창으로 패권을 행사합니다. 특히 미국의 군사력은 천하무적입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자처하는 지금의 이스라엘도 칼과 창으로 무장하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방비도 천문학적 액수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칼과 창은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학력, 스펙, 돈, 인간관계 등이 출세의 지름길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돈이 많아야만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없는데도 모두 이런 길을 가려고 하니까 결국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인생살이 자체가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칼과 창을 준비해야 하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무장하기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칼과 창으로 작동되는 이 세상을 표면적으로만 보지 않고 더 심층적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다.’는 표현이 가리키는 것입니다. 칼과 창은 사람의 방식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너무 이상적으로, 종교적으로, 낭만적으로 들리지요? 멋진 말이긴 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생각되지요?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칼과 창을 통해서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것으로 온전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점에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티브이 등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연예인들에게 대한 이야기도 많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많은 것을 이룬 사람들이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을 자주 봅니다. 대개 그런 장면들은 의식적인, 또는 무의식적인 위선입니다. 더 이상의 기쁨이나 행복을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 안주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렇게 부러움을 받은 사람은, 또는 존경받은 사람들은 정말 자기가 행복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악순환입니다. 이런 악순환에서는 모두가 칼과 창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이라는 말은 구원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말고 도대체 여호와의 구원이라는 게 뭔데, 하고 궁금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 하나님과의 일치가 곧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 동네에서 아이들이 딱지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서로 많이 따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합니다. 싸우기도 합니다. 어떤 아이는 딱지치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서 책도 잃고 티브이도 보고 맛난 것을 먹으면서 즐겁게 지낼 일을 생각합니다. 이 아이는 그 즐거움으로 인해서 딱지를 잃어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딱지를 딴다고 해서 도에 넘칠 정도로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중심이 다른 데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세상 사람들이 몰두하고 있는 칼과 창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유한 방식으로 이루시는 생명의 절정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전투구처럼 살벌한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세계를 향해서 영적 촉수를 예민하게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 말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 제3독서인 막 4:35-41절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는 중에 풍랑을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배가 난파될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셨는지 배 고물에서 낮잠을 주무시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아우성을 치자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나서 바람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졌습니다. 이 사건 앞에서 제자들은 두려워하면서 서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막 4:41).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칼과 창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진정한 평화가 가능하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골리앗 앞에서 선 다윗이나,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칼과 창으로 무장한 힘들이 우리를 가로 막습니다. 똑같이 칼과 창으로 맞서겠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그들을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며, 그런 방식으로 이긴다고 해봐야 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직접 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싸움을 보고 놀라워하며, 그것을 증언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 싸움의 극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칼과 창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에서 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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