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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29:12-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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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만남과 축복
본문: 삼상29장 12-17절
다원적인 사회에 살다보니 많은 신들이 있는데 유독 기독교만이 한분 하나님을 주장하느냐는 질문을 숱하게 받습니다. 우치무라 간조가 대답을 줍니다. 그는 800만의 일본 신들을 신심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신들은 대개 한두 가지 금기가 있습니다. 신들에 따라 들, 산, 강, 바다를 싫어합니다. 콩이나 계란을 금하는 신도 있습니다. 800만의 요구와 금지를 지키기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요구와 금지가 너무 많고, 심지어 서로 충돌합니다. 제대로 지키려면 어디라도 가면 안 되고, 무엇도 먹으면 안 됩니다. 신들의 벌이 두렵고, 이도 저도 못하게 된 믿음 깊은 간조는 점차 성마르고 소심한 소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가장 위대한 한 신만 섬기면 다른 신들이 정한 금기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많은 신이 아닌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은 내 작은 영혼에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쾌활해졌고, 지적으로 건강해졌습니다. 많은 신이 아니라 한분 하나님이 전인적인 구원과 자유를 줍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면 죽게 된다는 '신앙적 관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굉장히 쉽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야 영적으로 살아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서운 하나님을 만나기 쉬운 하나님으로 바꾸어놓으신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필요를 따라 하나님께 요구할 기도제목을 잔뜩 가지고 나아가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수많은 방법이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하나님과 친밀함입니다. 그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쫓겨남' 혹은 '낮아짐' 혹은 '비움'이 필요합니다.
오늘, 나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영적 갈망과 목마름이 있습니까? 나의 필요를 채우고 싶은 욕심을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갈망이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이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을 '영적 깨어남'이라고 합니다.
어느 애완 동물을 파는 가게에 한 소년이 강아지를 사러 왔습니다. “아저씨! 저 강아지 얼마예요?” 그 아이는 강아지 값을 물어보고는 부탁을 합니다. “돈을 마련해 올 테니 꼭 저 강아지를 저에게 팔아 주세요.” 돈을 마련해 온 그 소년은 당당하게 자기가 원하는 강아지를 달라고 합니다. 강아지를 아주 좋아하는 애구나! 라고 생각한 가게 주인은 소년에게 선심을 쓸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년이 사고 싶어하는 강아지는 다리 하나를 저는 강아지였기 때문입니다. “얘야! 너는 강아지를 몹시 사랑하는 아이 같구나! 내가 같은 값에 저기 있는 튼튼한 강아지를 대신 줄게 그걸로 가져가거라!” 그런데 가게 주인이 기대하는 소년의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아저씨! 그냥 제가 원하는 것으로 주세요!” “왜? 저 강아지는 다리를 저는 데두...” “알아요” 주인은 의아해 하면서도 할 수 없이 다리를 저는 강아지를 그 아이에게 팔았습니다. 아주 기뻐하며 강아지를 품에 안고 가게를 떠나는 그 소년을 바라보다가 가게 주인은 문득 가슴 찡한 소년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 역시 한 쪽 다리를 절며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멋있고 의미 있는 만남이지요?
일생에 중요한 만남이 세 번 있습니다. 한 번은 부모님과의 만남, 또 한 번은 스승과의 만남, 다른 한 번은 배우자와의 만남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만나야 될 또 다른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주님이 지금 간절히 만나기를 원하시며 찾고 계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이분을 반드시 만나야 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만남 중에서도 가장 복된 만남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입니다. 이것은 뜻있는 만남이요, 영원한 만남이요, 영광스러운 만남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전도자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어느 날 미네소타대학에서 강연하게 되었습니다. 강당을 가득 메운 교수와 학생들은 “호기심과 기대”를 갖고 그레이엄을 주시했습니다. 그때 그는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때문에 만남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것은 생명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 파멸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호기심은 생명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주인이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보다 더 귀하고 기쁘고 복된 만남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듯이 성경을 읽다가 내가 만난 예수님, 그 분은 진정한 참사랑을 내게 보여주시고, 영 죽을 죄인인 나를 살리시며 부드러운 어머니의 젖가슴과 숨결처럼 나의 삶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내겐 너무나도 소중하고 고귀한 분이십니다.
내가 외로울 땐 나의 진실한 친구로서 또 내가 슬플 땐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 그분은 늘 나와함께 하시는 영원한 삶의 피난처요, 반석이요, 나의 유일한 보금자리입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에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 각각 다른 은혜로 찾아오신 예수님, 어떤 이에게는 공의로우신 분으로서 또 어떤 이에게는 인자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할지라도 어느 누구에게나 귀중한 예수님,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만난 느낌이 다르다 할지라도 한 가지는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지요. 주님은 사랑으로 이 세상 모두에게 끊임없이 베푸십니다. 또한 우리가 드리는 진실한 사랑을 받으시며 주님은 기뻐하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하신 주님은 나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너무도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또한 그 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함께 늘 동행하시며 이 죄인을 성령의 아름다운 성품으로 변화시키십니다. 나의 모든 삶 속에서 주님을 인정하게 만드셨고 나의 피부에 스치는 생의 감촉들로서 주님께 나아가게 하신 나의 예수님. 그 분은 진정 나의 산 기쁨이요 영원한 삶의 동반자이십니다. 내게 향한 주님의 아낌없는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도 내 이웃에게 그 사랑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에 나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늘도 나의 삶 속의 당신은 변함없이 조용히 스치는 숨결. 늘 조용한 나의 보금자리. 작은 내 가슴은 당신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터져 죽을 수 밖에 없기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마음이 당신의 사랑 주님이시여... 기계적인 삶의 차가움과 외로움 속의 모든 이의 그리움 조용히 스며드는 당신의 사랑 돌 같은 나의 마음을 사랑으로 녹이시고 이 몸과 마음을 사랑의 끈으로 묶어 주님과의 사랑의 결속을 이루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주 앞에 나옵니다. 주님의 위로로 나의 상처와 아픔이 씻김을 받고 주님의 손길이 어루만져 주실 때 나는 가장 편안한 안식을 찾습니다.
풍족한 기쁨 넘쳐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이시여! 당신은 나의 행복, 나의 소망, 나의 생명, 풍요로운 삶의 윤활유, 영원한 나의 동반자 되시옵소서 살아서 주님을 사랑하고, 죽어서도 주님을 사랑하겠사오며, 호흡이 있는 동안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이마에 죽음의 찬 이슬이 내릴 때 나를 언제 사랑했느냐고 물으신다면 나의 예수여, 나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했노라고 고백하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 이 목숨보다 소중하기에 이 입술로 영원히 주님을 드높이고 이 생명 다하도록 주님을 사랑하며 두 팔 치켜 올리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나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나를 변화시켰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예수님은 만나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 그 크신 사랑안에 거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우리 인간의 삶은 태어나면서 부모, 형제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형태의 만남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들 만남이 어떤 만남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을 상당부분 좌우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 만남이 우리의 인생살이의 방향과 삶의 질을 결정짓게 됩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삶은 여러 가지 만남을 통해서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행복은 만남을 통해서 시작되며, 만남을 통해서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인생, 행복한 인생을 원하는 사람들은 좋은 만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해를 하러 바다에 나갈 때에는 한 번 기도하고, 전쟁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을 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고 했나 봅니다. 배우자와의 만남은 인생에서 아주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만남들이 존재합니다. 그 만남들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만남이 있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만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만남은 어떤 만남이든지 모두가 다 불완전한 만남입니다. 불완전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 만남들이 어떤 경우에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같은 만남이라도 불행과 고통을 안겨주기도 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는 이 세상의 어떤 만남도 영원한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 중요한 이유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만남도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인, 죄로부터의 구원과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에 이르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만남은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불완전한 이 세상의 다양한 만남과 같지 않은 또 하나의 만남이 있습니다. 이 만남은 완전한 만남이요 사람들은 이 만남을 통해서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영원하고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만남입니다. 만약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만남이 이 세상에서의 다양한 그런 만남들뿐이라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을 수 없겠지만 이 세상에서의 이런 저런 만남 속에서 상처를 받고 실망한 사람들일지라도 이 만남을 통해서는 위로를 받고 상처가 치유함을 받으며 삶이 새로워지고 참된 소망의 항구를 향해서 항해를 할 수 있게 되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손에 들려진 성경은 다른 책이 아니라 이 축복된 만남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책이며, 어떻게 이런 만남이 가능한지, 그리고 그 만남 이후에 그 관계를 어떻게 지속하며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인지를 안내하고 있는 책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 만남의 대상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 분이 우리를 얼마나 애타게 만나고 싶어하시는지를 아주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으며, 이 축복된 만남을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분과의 만남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를 실감나게 증거함으로써 누구라도 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거룩하고도 축복된 만남 가운데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책입니다. 이 만남의 대상이 누구십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세상 모두가 만나야 할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이 하나님을 만나서 축복된 삶을 살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만나지 못해서 축복된 삶을 살지 못했음을 대조적으로 증거함으로써 어떻게 하면 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모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며, 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길을 아주 자세하게 안내해 주고 있는 책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극적인 축복을 누렸던 한 사람인 다윗 왕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축복된 평생을 살고나서 그의 인생 말년에 기록한 시편 23편의 말씀 가운데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성경은 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필요성을 죄와 구원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이 이 하나님을 반드시 만나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곧 우리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요 그 죄의 결과는 영원한 파멸과 죽음인데, 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영원한 죽음에 이르지 않고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죄를 하나님과의 분리, 곧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하나님과의 헤어짐이라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으며, 인간의 구원을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 사건, 곧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라는 관점에서 기록해 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다고 하는 것은 마치 나무 뿌리가 땅에서 뽑혀지는 것이나 물고기가 물 밖으로 던져지는 것, 그리고 갓난 아기가 엄마의 품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잃어버리고 미아가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그 아이가 영영 부모를 찾지 못하게 된다면 그 아이는 미아가 아니라 이제는 고아가 되어서 평생을 슬프고 힘든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될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미아가 되고 고아가 된 이 아이에게는 그 어떤 사람의 보호나 사랑보다도, 그리고 그 어떤 선물이나 좋은 음식보다도 가장 필요한 만남이 바로 부모님과의 만남이듯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고아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만남보다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반드시 만나야 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29장 38-4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거하실 거룩한 장소로 지어야 할 성막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을 말씀하시는 내용 가운데서 특별히 제사장 직분의 위임에 덧붙여진 말씀으로, 제사장들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번제에 관한 규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출애굽기 29장 42절-4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번제를 드리는 장소인 회막(성막→성전→교회)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며 대화를 나누시며 교제하시는 장소임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회막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로 인해서 거룩해지고 그 번제단도, 제사장들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비로소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 바로의 손에서 구원해 내신 이유이며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부분을 보면,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 주인, 왕, 부모와 목자와 같은 존재임을 천명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야 되며, 관계를 맺고 교제해야 할 이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시며 그들 중에 거하시고자 원하시는 목적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진정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데,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나시기 위해서 영광 가운데 임하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죄인인 우리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 곳,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가지고 세우신 회막(교회)밖에 없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는 죄인, 곧 하나님과 헤어져 고아처럼 살던 영혼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고 그것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되돌려 드리며,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곳입니다.
이 교회의 주인이시며 머리이신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신데 죄인인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고 만나시며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스런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인간의 대속제물,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죄인인 우리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마련하신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오늘도 이 교회와 성도들을 은총 가운데 다스리시고 거느리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죄인인 우리 인간을 만나시기를 애타게 원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고 만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만드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도 바로 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지혜롭고 복된 사람은 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빨리 깨달으며 늘 그 분의 거느리심 가운데 인도와 보호를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한 소년이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시골 소년이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10년 후 두 사람이 다시 만났습니다. 시골 소년은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소년의 아버지는 시골 소년이 의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물에 빠졌던 소년은 훗날 영국의 수상이 됐습니다. 가난했던 시골 소년은 페니실린을 발명해 노벨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윈스턴 처칠과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 이야기입니다.
1940년 5월 처칠은 폐렴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당시엔 한번 걸리면 낫지 않는 죽음의 병이었습니다. 처칠의 꺼져가는 목숨을 건진 건 바로 페니실린이었습니다. 좋은 만남은 생명을 살리고 인재를 키웁니다. 인간은 혼자만 살 수 없습니다.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서로 돕고 살아야 합니다. 상대방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만남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섭리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요나단의 축복된 만남이 있는가 하면 아합과 이세벨의 불행한 만남도 있습니다. 항상 서로의 만남이 축복이 되길 기도합시다.(행13:22∼23).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만남을 경험합니다. 만남에는 좋은 만남도 있고, 불행한 만남도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좋은 만남도 있고, 절대적으로 좋은 만남도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좋은 만남은 생명과 직결된 만남입니다. 절대적으로 좋은 만남을 위해 세 가지(3M)를 잘 만나야 합니다.
첫째는 영원한 말씀(Message)을 잘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말씀과의 만남이 일어나면 소망과 용기와 기쁨이 생깁니다. 성경을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 마음 판에 새겨야 합니다.
둘째는 훌륭한 스승(Mentor)을 잘 만나야 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변했고, 바울은 바나바를 만나서 사도가 되었고, 디모데는 바울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삼중고(三重苦: 입과 눈과 귀의 장애)를 겪는 어린 헬렌 켈러를 만난 설리반은 헬렌에게 있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 가엾은 소녀 속에 감추인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평생 헌신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선생을 만난 헬렌 켈러는 장애인 복지, 사회사업 개선을 위한 사회운동과 여성 참정권 획득에 기여하고 많은 장애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셋째는 위대한 사명(Mission)을 잘 만나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면 사명이 생깁니다. 고기 낚던 어부가 예수를 만나 사람 낚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명을 만나면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은 바로 만남입니다. 이 만남이 인간생활에 행복과 불행을, 또는 성공과 실패를 결정지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밭으로 나가 이삭을 줍다가 우연히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되고, 다윗 왕의 조모가 되는 축복을 누립니다.(룻2: 1- 3) 바울은 바나바를 만났기에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하고 위대한 주의 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삼손은 데릴라라고 하는 여인을 만나, 블레셋 사람들에게 체포되어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또한 암논은 요나답이라는 친구를 잘못 만났기 때문에 자기 이복 누이인 다말을 겁탈하게 되었고 결국은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와 노를 품은 자 그리고 음행하는 자와 술과 고기를 탐하는 자, 반역하는 자와 사귀지 말고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13:20)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나라」(잠17: 12)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잠22:24)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고전5:9)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잠23:20)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잠24:21)
본문에는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 나타나 있는데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입니다. 다윗이 골리앗 대장군과 싸워 승리하자, 온 이스라엘에 다윗의 인기가 충천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왕은 이 사건 때문에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왕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기로 계획을 세우고 다윗을 추격합니다. 그때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왕의 아들인 요나단과 친구로서 아름다운 만남을 갖게 됩니다. 다윗은 자기의 마음을 다 털어놓고 요나단에게 이야기 합니다.(삼상18:1) 다윗은 자신을 사랑하는 요나단을 통해서 보호를 받고, 다윗이 이스라엘 통일 왕이 되는 일에 있어서 큰 도움을 받게 됩니다. 한편 요나단은 앞으로 사울왕권이 무너지게 되고 다윗이 왕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가문이 망하게 될 때 후손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을 하게 됩니다. 후에 다윗은 이 말대로 요나단의 후손을 잘 돌봐주게 됩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만남은 이렇게 아름다운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바로 만남의 위기를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서로 상처뿐인 만남, 고통의 만남, 괴로움의 만남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만남을 통하여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남을 통하여 괴로움을 얻고, 고통당하고, 눈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을 살펴 그 특징을 밝혀보고 아름다운 만남을 통해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1. 믿음과 신뢰의 만남입니다.
상식적으로 다윗과 사울왕의 관계를 고려할 때, 다윗과 사울왕의 아들인 요나단과의 관계도 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을 경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요나단을 전폭적으로 믿었습니다. 더불어 요나단도 역시 다윗을 뜨겁게 사랑하여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삶의 만남의 문제점은 바로 불신의 만남입니다. 부부간, 친구간, 형제간에도 상호불신의 만남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런 만남은 날마다 불행과 상처와 아픔을 갖게 합니다. 성경에는 엘리야와 사렙다 과부의 신뢰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오랜 기간의 기근으로 한 끼의 음식을 먹고 굶어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때에 그녀는 엘리야 선지자를 만나게 되었고, 자신이 가진 마지막 음식을 선지자에게 대접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과 선지자를 믿고서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녀는 3년 6개월의 기근 동안 기름과 가루가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뢰의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으로 우리는 행복한 부부,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 행복한 사회를 만들게 됩니다.
2. 사랑의 만남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삼상18:1)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곳에는 여자의 사랑보다 승했다고 했습니다.(삼하1:26) 특히 그들의 사랑은 위로와 용기를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다윗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곤경에 처해있었습니다. 이때 요나단은 다윗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합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의 계획을 다윗에게 확실하게 전해주겠다고 했습니다.(삼상20:13) 또한 다윗의 대적을 하나님께서 치실 것이라고 합니다.(삼상20:16) 그뿐만 아니라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많은 군사를 이끌고 갔을 때에 요나단은 다윗을 찾아가 위로합니다.
이 사건은 다윗이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는 일이 됩니다.(삼상23:16) 그리스도인의 만남의 특징은 서로가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만남은 만날수록 은혜가 넘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경건한 삶을 추구하게 되고, 주님을 위해서 더 열심히 봉사하고, 더 기도생활 많이 하게 되고,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3. 희생과 포기의 만남입니다.
요나단의 입장에서 다윗을 살려주게 되면 자기의 왕권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디를 바라보아도 의지할 곳 없는 험난한 시대에서 오늘 우리는 부부간, 가족간, 교우간에 이러 희생과 포기의 만남의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이 희생과 포기의 만남은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요, 행복한 만남입니다. 성경에는 주님과 나사로와의 가정에서 이런 만남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시고 힘드실 때에 그 집에 들러 위로를 받곤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를 다시 살려주는 생명의 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서 삼백 데나리온 이상의 많은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주님과 이 가정의 만남은 희생과 포기의 만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만남의 특징은 희생과 포기의 만남입니다. 내가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포기하며 헌신할 때 거기에 참 행복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희망의 만남입니다.
그 숱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서로 대화하며 다윗이 왕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희망을 부어주었습니다.(삼상23:17) 오늘 우리의 만남은 희망의 만남이어야 합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을 만났을 때 희망을 부어주는 만남, 좌절에 빠졌을 때에 용기를 부어주는 만남, 쓰러졌을 때에 붙들어 일으켜 주고 다시 세워주는 만남, 이런 만남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의 텅빈 마음속에 희망을 심어 넣어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넣어줄 수 있는 만남이 진정 복된 만남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요한복음 4장 2∼26절에 보면 아무도 물을 긷지 않는 뜨거운 대낮에 한 여인이 물가로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나온 여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려 남편을 다섯 번을 바꾸어야만 했던 기구한 인생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과의 만남에서 부분적인 만남으로 인해 인생의 고통을 맛 본 여인이었습니다. 마음속에 외로움과 고독이 많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는 대낮의 수가성 물가에서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첫 만남을 통해서 자기가 찾고 있었던 만남, 즉 만남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재능이나 기술, 혹은 노동력만 필요해서 만났지만 수가성 여인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자기의 마음 속 아픔을 털어놓을 수 있는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슬픔과 고독 속에 허덕이던 그 여인을 예수님은 만나주셨을 뿐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만남의 축복이었습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 여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해 주는 만남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인간관계에 있어 부분적인 만남으로 인해서 아픔을 겪고 있지 않는지요? 이제 수가성의 여인처럼 주님과의 전격적인 만남을 갖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요나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할 때 전적으로 신뢰하고 또 다윗이 요나단을 사랑할 때 전적으로 믿고 의지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믿음의 대상입니다. 또한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었습니다. 위로와 격려의 만남이었습니다. 용기의 만남이었습니다. 희망의 만남이었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용기를 주시며 삶에 지쳤을 때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담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절망의 고통 가운데 빠져 헤맬 때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도 한 분도 빠짐없이 주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만나서 주님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리고, 문제를 해결 받고, 용기와 희망을 얻고, 주님과 더불어 교제 하면서 오늘과 내일도 승리의 삶을 살아가며, 만남의 축복된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때마다 좋은 이웃의 만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그들과의 만남이 나의 삶에 큰 유익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그리하여 우리 모두 성숙에 이르게 하시고 삶의 가치를 깨달아 살게 하소서.사람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삶이 축복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 성숙에 이르게 하시고 삶의 가치를 깨달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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