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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아들

역대상 민영진 목사............... 조회 수 2730 추천 수 0 2008.01.09 22: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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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대상4:9-10 
설교자 : 민영진 목사 
참고 : 새길교회 
구약성경 역대상의 처음 아홉 장은 무수한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 여러 가지 족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름과 이름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족보들입니다. 그런데 역대상 4장 9-10절에는 그러한 족보의 문맥이 갑자기 끊어지고, 한 토막의 짧은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앞뒤 문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야베스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자기 형제들 가운데서 아주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아들을 낳을 때의 해산의 고통을 잊지 못하여 아들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을 뜻하는 히브리어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야베스의 어머니가 정상적이지를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들이야 모두 해산의 고통을 치르고서 아기를 낳기 마련인데, 자기가 낳은 아들의 이름에 그 산고의 기억을 새겨 넣어서, 아들이 평생 자기 어머니가 고통 속에서 자기를 낳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야베스의 어머니의 경우 꼭 난산이었다는 말도 성서에는 없습니다.
저는 또 야베스에 대해서도 별로 호감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넓은 땅 많은 땅을 간구한 것이라든가,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실 것을 비는 기도를 보면서, 저는 그의 믿음의 태도를 기복신앙이라고 매도했었습니다. 다만 풀리지 않는 숙제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이기적인 기도, 기복신앙에 젖은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셨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 최근에 와서야 야베스와 그의 어머니의 삶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되었고, 그리하여 저 자신의 그릇된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을 오늘 여러분 앞에 고백하고, 그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여러분과 함께 역대상 4장 9-10절의 본문을 읽고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이 이야기에서 야베스의 어머니를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해산의 고통을, 여성들마저도 당연한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해산의 고통을, 이 여성은 남성인 자기 아들의 이름에 새겨 넣어서, 모든 남성들에게 여성의 해산의 고통을 기억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의 고통을 호소할 가장 가까운 대상으로 남성인 아들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 어머니로서는 자기의 아들이야말로 여성인 자기의 호소를 들어줄 남자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여성 자신이 직접 자신의 고통을 나누자고, 자신의 고통을 남성들이 알아달라고, 여성들의 아픔을 남성들이 기억해 달라고 호소하였다는 사실이 퍽 소중하게 생각됩니다. 자기의 아들의 이름에 그러한 고통을 새겨가면서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호소가 그의 아들에게는 먹혀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성인 저에게는 조금이나마 여성들의 해산의 고통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그렇게 관심을 가진 그만큼, 그 관심이 저와 같은 남성을 더욱 사람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야베스에게서도 저는 다른 면모를 발견합니다. 그는 단순히 복에 복을 더 받으려는, 복을 받고 또 받고자 하는 기복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야베스"라고 하는 자신의 이름 자체가 "고통"이란 뜻을 지녔기 때문에 그의 생애가 고통으로 점철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를 언제나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이름이 자기에게 불행을 가져다 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고통을 상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들로서 어머니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어머니가 지어준 그 이름을 버리지 않습니다. 다른 좋은 이름으로 개명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바로 이 점에 주목을 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뜻하는 야베스라는 이름이, 듣기에 즐거운 이름은 아니지만, 어머니의 한을 담고 있는 숙연한 이름이기에 그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베스가, 한편으로, 하나님께 복에 복을 더 주실 것을 빈 것은 어머니의 산고가 담긴 그 불행한 이름을 지니고 살아도, 그 이름이 자신의 생애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가 물질의 복을 받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그의 이름 때문이라고, 그의 어머니가 방정맞게도 아들의 이름에다가 여인의 해산의 고통을 담아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야베스는 그러한 욕을 먹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한편, 그가 하나님께, 예상되는 고난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빌고 있는 것 역시, 이름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통속적인 믿음을 부정하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야베스로서는 자기 어머니의 아픔이 새겨져 있는 그 이름이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행한 이름이 불행을 가져온다는 통속적인 믿음을 부정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불행을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복을 가져왔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더니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더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렇게 복을 받게 해 주시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은 야베스의 어머니의 모험적 용기와 그의 아들 야베스의 믿음 때문에 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야베스의 어머니처럼 자신의 아픔을 외치는 여성들의 부르짖음이야말로 남성들의 그릇된 고정관념을 깨우쳐주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부르짖음이나 한을 듣고 나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고쳐나갈 때, 여성들의 그러한 부르짖음이 나로 하여금 여성에 대한 편견을 회개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 여성들의 그러한 부르짖음과 호소는 남성들을 새 사람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기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더라는 점입니다.
제가 야베스의 어머니에게서 뿐만 아니라 야베스에게서도 배운 바가 있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야베스의 믿음, 곧, 예상되는 타고난 운명을 수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간섭으로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강한 믿음이 야베스에게는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야베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그가 복의 복을 간구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만, 그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에 담긴 불행한 뜻 때문에 그의 운명도 불행해질 것이라고 하는 막연한 미신을, 오히려 어머니의 산고를 기억하는 아들은 복을 받는다는 확신으로 바꾸고 싶은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께 복에 복을 주실 것을 빈 것입니다. 단순한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의 아내와 근 30년을 살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제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분노라고 할까요, 아니면 한이라고 할까요, 어쨌든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이 있습니다. 제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가지고 있는 그 몇 가지 분노 중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공개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정동 예배당에서 결혼할 때, 제가 저의 신부에게 그 멋진 서양 웨딩드레스를 입지 못하게 하고, 한복을 입도록 강요한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때 우리의 주례를 맡으셨던 고 청암 홍현설 박사께서는 신부가 서양풍의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고 한복을 우아하게 차려 입었다고 얼마나 칭찬하셨는지 모릅니다. 신부를 보는 사람들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것이, 한국 사람이 어설프게 서양 예복을 걸친 것보다는 훨씬 더 예식을 빛냈다고 한 마디씩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저의 색시는 그때부터 오늘 이때까지 웨딩드레스를 입지 못하게 강요한 사람이 다름 아닌, 버젓이 서양 양복을 입고 결혼 예식을 치르겠다고 한 남편이기 때문에, 저에 대한 일종의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는, 제 아내가 한복을 입고 혼인 예식을 치렀던 것을 보람있게 생각할 날이 오고, 그래서 자기의 며느리들에게도 그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시킬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만, 아직 제 아내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결혼식 이야기만 나오면 그때 웨딩드레스 못 입은 한을 상기시키곤 해 오기를 무려 삼십여 년 동안이나, 지치지도 않는지, 줄곧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저는 제 태도가 옳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 제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우리가 서양 웨딩드레스와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한복을 놓고 볼 때, 우리가 어는 것을 입고 결혼 예식을 치렀어야 옳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지금 뉘우치는 것은, 이 둘 중의 어느 하나를 택하든, 제 신부의 뜻을 묻지 않고 나의 뜻을 어린 신부에게 강요했고, 그리고 위협적으로 관철했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 결혼이나 할 것이지, 결혼을 빙자해서 제 고집이나 복장 문화에 대한 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려 했으니,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제 스스로 인정합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저는 제 아내에게 감사할 것이 있습니다. 저의 그러한 강요에 마지못해 한복을 입긴 입었지만, 지금까지 자신의 주장이 옳았고 저의 요구가 무리했다는 것을 30여년 동안 줄곧 주장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제가 저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깨우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손이 귀한 민씨 집에 시집와서 죽을 것 같은 해산의 고통을 두 번씩이나 겪어가며 아들을 둘씩이나 나았는데, 한 번도 아들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 자신이 참여하지 못하고, 시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지어버렸다는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제 아내는 지금도 저를 향해 말합니다. "내 마음대로 애 이름을 짓겠다는 것은 아니다. 열 달 동안 고생한 어머니에게도 자식의 이름을 짓는 작명 과정에 참여할 기회나 권리는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자식의 이름은 일반적으로는 으레 어머니들이 짓는 게 상례인데, 민영호 목사와 민영진 목사는 성경도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민영호 목사는 제 아내의 시아버지입니다.
제 아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저는 제 손자와 손녀의 이름을 짓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제 처도 손자나 손녀의 이름을 지을 때 며느리들의 의견을 일차적으로 존중해 줄 것 같습니다. 이제 더 발달하면 저의 집안에서 아기를 낳은 산모가 아기의 이름을 짓는 전통이 생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이처럼 한 대에 걸친 한 여성의 굳은 의지와 항의가 있었다는 것을 저는 제 자손들에게 알릴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아내의 줄기찬 항의에 존경을 보내면서 남자들의 근거 없는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도록 인식을 바꾸어준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셋째 아이를 낳을 때의 일과 관련돼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이미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셋째를 낳고 보니 또 아들이었는데, 이 아이는 달을 채우지 못하고 일찍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일곱 달밖에 안 된 아이가 심장 기능이 약한 상태에서 미리 나왔기 때문에 인공 모태인 인큐베이터 속에 넣었습니다. 어른들도 친척도 없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아기가 시일을 앞당겨 생존이 불안한 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저는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무척 우울했습니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부속병원 산실 복도 벤치에 근심스러운 모습을 하고 앉아 있는 저에게 아기를 받은 의사가 다가 왔습니다. 저를 본 그 의사는 저를 위로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만삭이 되기 전에 태어난 이들 중에 훌륭한 이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베토벤이 그러했고, 모차르트도, 칸트도, 헤겔도, 나폴레옹도, 큐리 부인도, 이스라엘 대통령 바이즈만도, 육일 전쟁의 영웅 모세 다얀도 모두 다 만삭되지 못하고 난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네 아들도 그런 유명인 중에 들어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도 아느냐고 물었더니,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대학 병원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이름난 자기 역시 일곱 달만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러한 이들을 잘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좀 싱거운 의사라는 생각이 들고, 그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는 제게 농담을 한 것일 것입니다. 듣기에 싫지는 않았습니다.
의사가 그렇게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아이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잘 자랄 테고, 아내도 이스라엘 산모들과 함께 며칠 동안 병원에서 푹 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금은 불안해하는 아내를 안심시키고, 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병원에는 보호자가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함께 있을 수 있다한들 남자가 임산부들만 있는 입원실을 아침부터 들락거린다는 것도 좋을 것 같지 않아서, 다음 날 오후 늦게서야 병원에 도착했을 때, 지쳐 있는 아내를 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던 아이는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고, 의사는 아내에게 퇴원하라고 했는데, 그래서 남편이 아침 일찍 오면, 퇴원 수속을 밟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남편은 더디 오고... 전화가 귀하던 시절이니 연락할 수도 없고, 아내가 남편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순간에 남편은 아내로부터 장시간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산모의 눈에서 아이를 잃은 슬픔과 남편에 대한 실망과 원망과 분노가 섞여 있는 것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저대로 그 아이를 위한 장지 확보와 매장 절차를 병원 당국과 상의해야 했고, 예루살렘 시의 위생 담당 직원과 상의하여 "사울의 언덕(기브앗 사울)"이라고 불리는 이방인 묘지의 한 모퉁이를 얻어, 한국의 아이를 이방 땅 예루살렘에 매장하고, 자식을 잃은 슬픔 때문에, 산모를 위로하거나 돌 볼 정신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슬픔에 집착하여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상당한 기간 우리 부부 사이는 정상적이지를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그것도 먼 후일에 비로소 저는 깨달았습니다. 깨닫기는 했지만 이미 너무 늦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후회가 되는 것은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그 고통의 순간에, 그리고 생명이 탄생되는 그 환희의 순간에 제가 제 아내 곁에서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하고, 우리 아버지들의 오랜 전통을 따라서, 오히려 평소보다 아내에게서 더 먼 곳에 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삶을 설교하는 목사이면서도 생명의 산실을 지켜보지도 못하고,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아내가 분만하는 고통의 현장을 일부러 외면한 것이, 저는 두고두고 후회가 됩니다. 다만 핑계가 있다면, 남편의 산실 출입을 금기시하는 문화에서는, 어느 누구도 분만하는 아내와 그 현장에 함께 있으라고, 산모 주변에서 늘 대기 상태로 있어야 한다고, 제게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젊은이 여러분에게 우리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이 자리에 함께 계신 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는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 고통을 남성들에게 호소하시고, 그 고통 속으로 남성들의 참여를 유도하십시오. 그 고통을 감추거나 혼자서 참고 있지 마십시오. 남성들이 잘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만, 그것이 여러분의 의사 표시를 위축시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 함께 있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어머니들이, 아내들이, 딸들이, 며느리들이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새겨 놓는 곳을 찾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감히 자식의 이름에 당신들의 고통을 새겨 넣지 않습니다. 아들들이 모르는 곳에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새겨 넣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찾지 못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머니에게 효자일 수도 없고, 아내에게 좋은 남편일 수도 없고, 딸들에게 좋은 아버지일 수도 없고, 며느리들에게 좋은 시아버지일 수도 없습니다.

특히, 이 자리에 있는 젊은 형제들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아기를 낳는 그 현장에 여러분도 함께 있어서 생명이 탄생되는 그 순간을 지켜볼 뿐만 아니라 고통 당하는 아내들의 고통에 조금이라도 참여하십시오. 여성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남성이 되는 길이고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 주님의 어머니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아드님의 잉태 소식을 듣고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눅 1:47-48)

우리와 함께 사는 우리의 여성들이 언제쯤 이러한 환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는지는 남성들이 얼마나 빨리 하나님의 뜻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곧 주님께서는 그의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것이 바로 남녀가 함께 어우러지는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입니다. 남녀가 함께 기쁨과 고통을 나누기 위해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실 것을 기도한다면, 마리아의 노래를 우리 남성들도 함께 합창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남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 여성들을 위로해 주시고, 비록 불행이 위협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들이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댓글 '1'

권세현

2011.10.03 10:53:18

퍼갈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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