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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

느헤미야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621 추천 수 0 2010.07.25 00: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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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느11:1-2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성남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미국의 문학가로 잘 알려진 '토마스 월트'의 소설 중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젊어서 꿈꾸던 모든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돈도 벌었고 명예도 얻었고 지식도 얻었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똑똑한 자녀도 골고루 두었습니다. 모든 소원하는 것들이 다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주인공은 오랫동안 그리던 고향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주인공은 기차를 타고 옛날에 자기가 살던 고향 땅에 갔습니다. 노오스 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애쉬빌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입니다. 역전에 내리는 순간 그는 몹시 당황하고 실망했습니다. 고향은 너무나 변해 있었습니다. 거리는 현대화되고 인심도 변해 있었습니다. 친구는 남이 되고, 고향 땅에 온 자기는 오히려 이방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자기가 꿈에 그리던 마음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은 돌아오는 기차에 다시 올라 슬프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제의 평화와 고요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 길이 있다면 앞으로 가는 길뿐이다. 뒤로 가는 길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추석 명절이 되어 고향에 다녀왔을 줄 압니다. 어떻습니까? 이 주인공처럼 “나는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없다. 길이 있다면 앞으로 가는 길 뿐이다. 뒤로 가는 길은 영원하 사라졌고 주일 날 갈 곳은 열린교회 뿐이다.”라고 돌아 왔습니까? 고향에 가보니 어릴 때 고향입니까? 시인 정지용이 "향수"에서 그렸듯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었습니까?
가고파의 노래처럼 잔잔한 고향 바다가 있고 어릴제 놀던 그 동물들이 있었습니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정말 살고 싶은 고향이었습니까? 아마 한 달만 살라고 해도 힘든 곳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동물들에게는 회귀본능,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강한 연어가 강에서 태어나 바다에 살다가 다시 자신이 태어난 고향 강으로 와서 마지막 생을 마감합니다. 코끼리도, 제비도, 벌도 이런 회귀본능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향에서 태어나 고향을 그리다가 고향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막상 고향에 가보면 평안과 안식이 있는 곳이 아니며 어릴 때 고향이 아닌 것을 발견합니다. 단지 마음의 고향일 뿐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오늘 현대인을 가리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실향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정 평안과 안식을 누릴 고향은 없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영원한 고향, 본향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본향을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6)”
그 한 성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영원한 본향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계시록 21장 2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우리의 영원한 본향은 새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곳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 사망이, 애통하는 것이 곡하는 것이 아픈 것이 없는 곳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만물을 새롭게 하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 살고 싶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들도 이런 곳에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고향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자기 나라가 아니라 타국에서 산 사람들입니다.

1. 새 예루살렘 성에서 거주하는 자의 자격/소속의 복
이제 바벨론 포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꿈에도 그리던 고향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성전도 완공했고 성벽도 재건하였습니다. 영적 부흥 운동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새로운 헌신 선약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막상 예루살렘 성에 살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고향이지 실상 살려고 보니 집도 과거에 살던 곳 보다 초라하지요. 생활도 불편한 것입니다. 그들은 화려한 바벨론 문화, 애굽 문화, 페르시아 문화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1차 포로 때 와서 정착한 사람들은 무너진 예루살렘보다는 농토가 있는 시골에 정착해 기반을 마련하고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도시 중심 사회가 아닙니다. 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경사회입니다. 그러니 새 예루살렘을 만들었다고 누가 이주의 고통을 겪으려 했겠습니까? 이미 정착하여 살고 있는 농경지를 버리고 이주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사귀며 살았던 사람들과 이별을 하여야 합니다. 정들었던 삶의 터전을 버려야 하고 익숙한 삶의 수단을 떠나야 합니다. 상실의 아픔 떠남의 아픔을 겪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는데는 자기 희생, 모험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적들이 노리는 도시입니다. 많은 대적들의 훼방과 공격의 목표가 되는 예루살렘 성에 거주한다는 것은 늘 그 두려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래가 불안합니다. 이것을 누가 감당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되었지만 정작 그 안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1차 귀환자들에 대한 인구 조사를 하였습니다(7장). 그리고 이제 부흥 운동과 헌신 선언식을 하고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 거주할 사람을 뽑아 거주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되었습니까?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첫째는 백성의 두목들입니다. 방백, 군대 장관, 다스리는 자, 민장 등으로 번역되는 지도자들입니다. 이미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행정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은 처음부터 이들의 거주지였습니다(느2:16)
둘째는 제비뽑아 선택된 자들입니다.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뜻을 가려내기 위해 구약시대에 흔히 사용한 방식입니다(민26:55,56 수15:1 삼상10:29,21 행1:24-26).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잠16:33). 전체 인구의 1/10에 해당하는 사람이 선택되어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자원하는 자들입니다. 백성들은 이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영적으로 새 예루살렘의 거주자가 됩니다. 구원받은 공동체가 우리가 다니고 있는 교회가 새 예루살렘이며 우리가 이 땅을 떠난 후에는 영원한 천국이 새 예루살렘입니다.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어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믿었던, 어느 날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교회에 나왔던, 스스로 자원하여 신앙 생활을 하였던 우리는 공통되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새 예루살렘 영원한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기까지는 이주의 고통, 불안의 고통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선택된 백성이 되어 새 예루살렘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영원한 본향이 있습니다. 마태복은 25:34을 보면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2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에비하러 가노니"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5:1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라고 했고,"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라고 했습니다. 이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이 영원한 본향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하자 쇼펜하우어가 공원 의자에 혼자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기울고 공원은 텅비었습니다. 공원을 청소하는 공원지기가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신사양반.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서 왔길래 해가 지는데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거요?" 이 퉁명스러운 질문에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바로 그것이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요." 자유를 부르짖었던 실존주의자 싸르트르도 마찬가지여요.
1980년 3월 불란서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하던 존경받는 한 지성인이 폐수종 때문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달 동안 이 병원에서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절규합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곁에 서 있는 자기 아내에게 묻지 못했답니다. 1980년 4월 16일 입원한 지 한 달만에 그는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불란서의 신문들은 싸르트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기사를 썼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말했답니다. 그때 어떤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를 해서 이런 기사가 실었다고 합니다. “싸르트로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싸르트르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본향, 참 안식의 본향, 죽음도 슬픔도 고통도 눈물도 아픔도 없는 영원한 본향이 있습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새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다시 계시록 21장 27절을 보십시오. 영원한 천국 새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입니다.
그 생명책이 기록된 자들은 누구이겠습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12-13)”
우리 성도님과 저를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선택하였습니다.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선택하여 새 예루살렘 시민, 영원한 천국 시민이 되게 하였습니다. 엡1:4절 이하를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았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이 땅에 사는 동안 다니는 교회 공동체는 바로 새 예루살렘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천국 생활을 누려야 합니다.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이주의 아픔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 속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며 큰 행복입니까?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의 사역/사역의 복
재건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은 무엇을 합니까?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에게는 각자의 일이 있었습니다.
지도자들(3-9) 제사장들(10-14) 레위인들(15-18) 성전봉사자들(19-24)의 명단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명단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지가 소개되었습니다.
지도자들은 무슨일을 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성읍을 다스렸다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 전에 일했습니다. 레위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전 바깥 일을 맡았고, 17절을 보십시오. 기도하는 일을 하였고 말씀으로 인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성전 봉사자들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성문을 지키는 자가 있었고 노래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찬양하는 사람들을 양식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왕의 수하에서 백성의 일을 다스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양하게 맡겨진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자신의 일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말하면 새예루살렘 공동체 교회 공동체에 속하여 사역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교회만 다니며 세상에 푹 빠져 죄만 짓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나에게 주어진 사역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예수님을 믿어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집사 직분도 받았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가 보니 집사님들이 목사님 욕하고, 일하면서 장로님 흉보고 남 비판하고 맨날 죄만 짓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자신은 교회 다니면서 죄짓는 것보다 교회 안나가면서 죄를 짓지 않아야하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렇게 의롭게 살지도 못했답니다. 결국 이 집사님이 세상에 푹 빠져 살다 교회에서 사역의 복, 봉사의 복을 누리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죽어 천국에 갔답니다. 그런데 천국 입구에 엄청나게 많은 시계가 걸려 있고 그 시계 밑에는 사람들의 명패가 일일이 붙어 있었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그 이유를 물었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하는 말 "여기에 걸려있는 시계는 자신이 세상에서 살 때 나쁜 일을 한 만큼 시계 바늘이 빠르게 돌고 있느니라." 그런데 자신의 시계를 아무리 찾아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물었답니다. "전 나쁜 일을 하나도 안해서 내 시계가 없나보죠?" 그러자 베드로가 "당신의 시계는 너무 빨리 돌고 있어서 모세 할아버지가 지금 선풍기로 쓰고 있소!" 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누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해도 죄를 짓습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등한히 하고 교회를 회피하는 것은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다 인간들이 살기 때문에 불완전합니다. 그럴수록 열심히 사역에 참여해야 합니다. 사역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교회에서 각각 은사에 따라 사역하게 하십니다.(고전 12:11)”
어떤 사람은 찬양으로 어떤 사람은 교회 청소로 어떤 사람은 주보 만드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구역장으로 어떤 사람은 밥봉사로 어떤 사람은 차량 봉사로 어떤 사람은 교회 관리로 각각 직분을 주어 봉사하게 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사랑, 섬김,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예언, 영들의 분별, 방언, 방언의 통역만과 같은 갖가지 은사를 주십니다. 왜 이런 은사를 주십니까? 엡4장 11-12절을 보십시오.

첫째 성도를 온전케 하여야 합니다.
온전케한다는 말은 완전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위골된 뼈를 맞춘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뼈가 위골되었을 때 그 뼈가 붙어 있는 수족은 온전치 못합니다. 그 뼈를 다시 맞추어야 온전해집니다. 우리가 사용 목적에 부합되도록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온전케 합니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둘째 봉사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 공동체인 교회에 참여하는 것은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러 가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주신 은사로 봉사해야 합니다.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고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찬양하는 자는 찬양으로 봉사합니다. 요즈음 노벨상 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노벨은 1833년 스웨덴에서 태어나 화학자와 발명가가 되었습니다. 1866년 그 유명한 다이나 마이트를 발명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노벨의 노년 때 조간 신문에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하다."라는 기사가 실렸답니다. 기사 읽어보니 "다이나 마이트의 왕이 죽었다.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라고 쓰여 있었답니다. 이 기사는 불란서의 한 기자가 동명 이인의 죽음을 잘못 보도한 것입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사람들이 자기의 발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결론짓겠는가? 그는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로 인생을 끝마치고 싶지 안았답니다. 그래서 자기의 거대한 재산을 바쳐 평화와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노벨 상 제도를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것 사용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다 없어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봉사하는 일에 쓰임받아야 합니다.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셋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내 몸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명예 내 이름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은사를 통해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일평생 보이는 교회 하나 세운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교회에 나가는 이유에 대하여 에머슨 파스틱 목사님은 “(1)생활 습성이나 관습 때문에 (2)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위해 (3)교회에가서 활동하면서 인정을 받기 위해 (4)일시적인 위안을 위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더 첨부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온전케 되기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이 땅의 새 예루살렘 공동체입니다.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작은 교회 다닌다고 초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시 16:3)" 우리는 존귀한 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주인이 되신 어떤 교회든 그 교회에서 사역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내게 맡겨준 것이 가르치는 것입니까? 섬기는 것입니까? 문지기입니까? 찬양하는 것입니까? 대접하는 것입니까? 청소하는 것입니까? 전도하는 것입니까? 예배하는 것입니까? 기도하는 것입니까?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충성을 다한 사람들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3)”라고 말씀하십니다.

2006. 10. 8/열린교회/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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