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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욥3: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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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604) 2015.4.27 |
운명을 사명화하십시오
(욥기 3장 1-26절)
< 삶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
삶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매일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며 삽니다. 좋은
선택이 좋은 인생을 만듭니다. 누구에게든지 복의 가능성과 저주의 가능성은 함께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창조적인 소수의 길을 가면 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축복은 대개 바른
선택의 ‘산물’입니다.
사람은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이 아닙니다. 운명은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사주팔자나 관상은 미신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란 없습니다. 운명론은 진취성과 창조성을 빼앗아 사람을 나약하게 만듭니다.
성도는 자기 삶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때로 힘들고 어려워도 찬란한 꿈과 비전을 품고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찬란한 꿈과 비전이 없으면 두목이나 부자는 될 수 있어도 복된 리더나 인물은 될 수 없습니다. 비전은 남을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기에 리더십의 핵심적인 요인입니다. 비전은 방향과 질서를 찾게 하고 헌신을 낳게 하면서 두려움과 불신과 혼란을 극복하게
만듭니다. 비전이 있어야 복의 가능성도 커집니다. 그러나 비전을 가지기만 하면 안 됩니다. 참된 비전에는 비전성취를 위한 최선의 땀과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때 비전은 사명이 됩니다. 그 사명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사명이라고 여기면 소명이 됩니다.
< 고통에
매몰되지 않는 길 >
가끔 어려운 일을 당하면 팔자소관이란 말을 합니다. 그런 운명론에 빠지지 마십시오. 사람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운명은 현저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운명을
사명화하는 것입니다. 운명을 사명화하려면 특히 고통의 순간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고통의 순간에 매몰되지 않고 고통을 잘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사람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어느 날, 동방의 의인이자 거부였던 욥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 사탄의 시험을
받아 큰 고난을 당했습니다. 10자녀는 한꺼번에 죽었고 자신은 극심한 피부병에 걸렸고 아내의 마음까지 떠났습니다. 그래도 그에게는 마지막까지
자신과 함께 해줄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의 기대대로 욥의 세 친구가 멀리서 위로하러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들은 욥의 참상을 보고 7일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장면은 위로하는 삶의 본보기가 됩니다.
무거운 고난의 짐을 진 자에게 가벼운 말과 충고는 고난을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그때는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처럼 욥의 세 친구는 처음에는 잘 침묵해서 욥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욥기 2장에서 믿음으로 반응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면서 입을 열어 심하게 자기 생일을 저주했습니다(1절). 왜 갑자기 그런
변화가 생겼을까요? 아마 친구들의 은근한 정죄가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찾아온 세 친구는 7일 동안 욥을 지켜보면서
상상을 초월한 참상에 동정심과 함께 일말의 의심도 생겼을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무슨 숨은 큰 죄를 범한 것은 아닐까?” 그런 친구들의
의심과 정죄의 눈빛을 감지하고 욥의 마음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고백이 갑자기 터져 나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상황이
없었다면 욥기 2장과는 전혀 다른 본문의 분위기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한 번 친구로 삼았으면 그가 특별한 잘못이 없으면
변함없이 신뢰해주십시오. 시련의 날에도 함께 해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입니다. 중상모략과 거짓말로 나쁜 영향력을 끼치는 친구는 단호히 끊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친구가 큰 잘못을 반복해도 최대한 용납해야 합니다. 다만 아무리 좋은 친구도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믿고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기대합니다. “내 친구는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때로 친구는 부모나 형제보다 더 자기 마음을
알아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주고 마음이 통한다고 해서 너무 친구를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친구를 의지했다가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진실하신 친구인 예수님께 나온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이 통하면서도 바른 길로 가게 하는 친구가 진짜 친구입니다.
어떤
자녀는 생각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꽉 막혔어! 마음이 안 통해!” 그러나 마음은 안 통해도 자녀를 진정으로 생각해주는 사람은 부모입니다.
부모는 늘 자녀를 위하는 길을 선택하는 본능이 있기에 자녀의 마음을 얻는 길보다는 자녀가 바른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친구는 바른 길로
가는 것보다 마음이 통하는 것을 우선하기에 때로는 바른 길에서 이탈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마음이 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마음이 안 통하는 부모보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더 귀한 줄 압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마음이 안
통하는 부모는 여전히 자기편이 되어주지만 마음이 통하는 친구는 언제든지 남의 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사람은 철이 듭니다.
열린 길보다 바른 길을 따라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최고의 친구는 부모의 마음을 가진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친구를 믿어주되 친구조차도 너무
믿지 마십시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큽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2. 자신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할 때 어떻게 저주했습니까? 본문 1-10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라면’이란 가정법
단어입니다. 즉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을 동원해 자기 출생을
저주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본문 11-26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어찌하여’란 단어입니다. 그 부분에서는 자신이 이 땅에 왜 태어나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한탄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고백을 보면 고통 중의 욥의 반응은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절망의 반응
사람이 자기 생일과 생명을 저주하는 것만큼 큰 절망이 있겠습니까? 본문 17-19절에
4번 나오는 ‘거기서는’이란 말은 그가 이 땅의 현실에 얼마나 크게 절망했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했던 욥이 절망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처럼 성도는 성도이기 전에 가냘픈 풀잎과 같은 존재입니다. 믿음이 좋으면 결코 절망이 없다고 큰 소리를 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도
얼마든지 절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절망하는 시간이 얼마나 길고 짧은 것의 차이가 바로 믿음의 차이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갑자기 잃었다면 어느 부모가 통곡과 절망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땀과 기도로 키운 사업이 부도가 나면 낙심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인생고의 거센 바람 앞에서는 잠시 흔들리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넓은 이해심은 성도의
삶에서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믿음이 좋다고 마치 하나님이 된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면서 고통 중에 절망하는 성도에게 “왜 절망합니까? 그렇게
믿음이 없어요.”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이 무자비하고 강퍅한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은 다
연약합니다. 자신을 자신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을 당해도 자신은 절망하지 않는다고 떠버리는 것은 교만한 것이든지 아니면 아마추어 인생이든지
아니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이든지 아니면 감정도 없는 무자비한 것입니다.
2) 분노의 반응
본문에
나오는 욥의 저주를 보면 마치 무신론자의 고백처럼 느껴질 정도로 큰 분노가 담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분노도 때로는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욥은 자기가 왜 비참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전혀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에 잠깐 반항적인 분노를 표출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믿음이 없는
행위라고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 믿으려고 노력한 사람 중에는 극심한 고난 중에 그런 분노의 감정을 더 심하게 표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참다못해서 한 번 터뜨린 것을 보고 믿음과 인격을 비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40대 후반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아들은 신실하게 살던 아버지가 마음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자 분노하며 말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뭘 잘못했나요?
지금까지 고생만 했어요. 식사로 잘 못하시면서 시골 교회를 돌보고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나요?”
그렇게 분노하며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자기도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 하나님도 이해해주시고 때가 되면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때로는 신실한 성도조차 심하게 분노를 표출할 때가 있습니다. 대한항공 회항 사태를 지켜보면서 아마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경각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자신도 어느 순간에 그렇게 분노를 표출할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잠깐 감정이 통제의
선을 넘을 때도 있습니다. 욥처럼 동방의 의인조차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처럼 믿음이 있어도 분노할 수 있고 심지어는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3) 침체의 반응
성도가 절망하고 분노하면 영적인 침체도 따라옵니다. 그때는 예배할 가분도 안 나고 기도할
의욕도 안 납니다. 자기처럼 불행하고 무가치한 사람은 살 가치도 없다고 자학합니다. 또한 옛날을 그리워하면서 그때보다 크게 후퇴한 자신을
생각하며 심적 고통에 시달려 불면증과 식욕부진에도 빠지고 간간히 죽고 싶다는 생각도 납니다. 그와 같은 심리적인 우울증을 동반한 신앙침체에
빠져서 욥도 자기 생일과 생명을 저주한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져 자학하는 것은 악에 바쳐 자기를 변호하는 것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이 세 친구와 심하게 변론하는 상황을 허락하셨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믿었던 친구로부터 정죄를 받으면서
큰 상처를 받고 욥은 악바리처럼 세 친구와 무섭게 변론을 했습니다. 그런 변론을 통해 고통의 극 지점을 통과한 후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우울증에 빠지기보다는 차라리 악바리가 되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욥도 절망하고 분노하고 침체에 빠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 친구와 상처를 주고받는 변론 후에 다시 새롭게 일어서서 이전보다 더욱 복된 존재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결국 엄청난 시련과 정죄와 판단과
상처도 다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허용하신 것입니다. 극심한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을 믿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은 후 자신에
대한 절망의 극 지점을 통과하면 결국 인생의 위기는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3. 하나님을 중심에 두십시오
본문에서
욥이 자제력을 잃고 저주의 말을 할 때 그는 하나님을 직접 저주하기보다 자기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무서운 불평이지만 그래도 직접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고난이 극심하면 어떤 교인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신앙을 버립니다.
또한 사회를 저주하고 앞선 자를 저주하고 심지어는 조상까지 저주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나 남을 저주하지 않고 자기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의 내면에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과 책임의식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욥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노출했을 때 누군가
수군거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성도가 저런 말을 하나? 저런 사람이 무슨 동방의 의인인가?” 그러나 사람은 사실상 모두 죄인입니다. 성도도 다
죄인입니다. 다만 ‘사함 받은 죄인’이란 사실만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의인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마음속의 분노를 쏟아낸 것으로 인해
너무 상심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진실한 속마음입니다.
어떤 학자는 본문에서 욥이 너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서 잠깐 신앙을 잃고 회의에 빠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4장부터 벌어지는 친구들과의 변론을 살펴보면 그는 하나님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표현은 많이 했지만 그 원망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결국 욥의 위대한 점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마음속의 중심에 모시고 있었던 점이었습니다.
참고 인내하십시오.
그러나 인내심이 폭발해서 섭섭함을 노출했다면 그 상황도 하나님이 허용하신 상황이라고 여기십시오. 섭섭함은 썰물의 극 지점을 통과해야 비로소
밀물의 때가 오면서 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부 싸움에서도 적당히 덮어두고 분노를 품으면 부부관계는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한 번 터뜨리고
나서 서로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진 후에 미움을 털고 새롭게 화해의 길로 들어설 때도 많습니다.
살다 보면 감정이 자기도 모르게
표출될 때도 있습니다. 그때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본문에 나오는 욥의 심한 저주를 보고 욥을 정신병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욥의 기본적인 마음의 바탕이 어떤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믿음의 바탕이 좋다면 잠시 치부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너무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평소에 누가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 운명을 사명화하십시오
>
성자도 부부싸움은 합니다. 오히려 성자이기에 소리 없는 내적인 부부싸움이 더 치열할 수도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로서
수많은 영혼을 구했던 요한 웨슬레의 아내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3대 악처로 소문났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깊이 분석해보면 사실상 요한
웨슬레에게도 가정적으로 뭔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사람은 누구나 일시적으로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부족한 모습을 표출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에게도 비인격적인 갑질과 을질의 행위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즉 될 수 없는데 막무가내로 힘을 써서 되게
하려는 갑질의 행위나 막무가내로 떼를 써서 되게 하려는 을질의 행위가 자신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인정받고 심지어는
하나님도 인정하고 사탄도 인정하던 욥도 극심한 시련을 통해 본문처럼 치부를 드러내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욥의 마음속 바탕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십니다.
본문에서 욥이 하나님을 직접 원망하지 않고 자기
생일을 저주한 것도 일종의 믿음의 표출입니다. 그는 도저히 하나님을 직접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전까지 하나님을 믿고 산 날들이
얼마나 비극적인 날들이 됩니까? 그처럼 기본적인 신앙 양심을 가지고 도저히 하나님을 저주할 수 없었기에 읍은 공격의 화살을 하나님 대신 자기에게
돌리면서 자기 삶의 출발점이었던 생일을 저주한 것입니다. 그처럼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몸부림을 치는 욥의 모습을 보면 그는 확실히 믿음의 기본
바탕이 분명한 성도였습니다.
성도는 성도의 몸부림을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성도의 몸부림을 이해해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모든 상황에 하나님이 선하신 손길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스런 상황도 결국은 최종적인
선을 위해 하나님이 허용하신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넉넉한 믿음과 마음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늘
기억하며 사십시오.
삶은 어떤 측면을 선택해서 보느냐에 따라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때로는 다수의 대중보다 소수의 인물이 더욱
큰일을 합니다. 우리는 소수의 숫자로도 한국교회를 위해 월새기(월간 새벽기도)를 발행하고 있고 여러 선교사님들을 돕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가 됩니다.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사람은 사명이 있는 만큼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한 최후의 순간까지 늘 자기
사명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를 기억해주십니다.
살다 보면 때로 알 수 없는 고통이 다가옵니다.
그때는 실패와 고통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집니다. 그때 운명론에 빠지면 삶은 저주가 되지만 반대로 “거기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분명히
있다.”고 하면서 운명을 사명화시키면 삶은 축복이 됩니다. 욥은 고통 중에 신음하면서도 운명을 사명화함으로 결국 후일에 2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처럼 운명을 사명화해서 삶의 위기를 비전 성취를 더 빨리 이루는 기회로 삼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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