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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4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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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현 목사 |
참고 : |
< Nov. 20, 2011 라스베가스 복된교회 / 성령강림 후 스므 세 번째 주일 / 추수감사주일 / 2부 예배 >
< Nov. 20, 2011 / This message is for twenty three Lord's Day after Pentecost. >
사 42:1-9, 『 상한 갈대의 감사 』
윈스턴 처칠이 어렸을 때, 어느 여름 날이었습니다. 여름 휴가를 맞아 그의 온 가족이 넓은 별장에 가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처칠이 강물에서 수영을 하다가 그만 깊은 곳에 빠져 익사직전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 별장 정원사의 아들이 허우적거리는 처칠을 발견하고는 강에 뛰어들어 그의 목숨을 건져주었습니다. 부자였던 처칠의 아버지는 사례의 뜻으로 정원사 아들의 학비를 대기로 하였고, 공부를 좋아하고 머리가 우수하였던 정원사의 아들은 후에 의과대학을 마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처칠은 영국 수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공무수행차 인도여행을 갔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급성폐렴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인도 국왕은 처칠 수상을 위해 친히 전문의 한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그가 바로 오래 전 처칠을 강물에서 구해준 정원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의학공부를 다 마치고 의료 선교사로 인도에 와서 평생을 헌신하며 의사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 박사의 이름은 플레밍(Fleming)이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그렇게 생명이 경각에 놓일 때마다 플레밍의 도움을 받곤 했습니다. 그래서 처칠은 평생 그 사람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 길에 있어서도 고비 때마다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주는 플레밍 박사 같은 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참으로 고맙고 마음 든든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플레밍 박사와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보호자가 있으니 그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시때때로 도우시며, 눈동자와 같이 지켜 보호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서에는 모두 4편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로 일컬어지는 시가 있습니다(42:1-9; 49:1-7; 50:4-9; 52:13-52:12). 이들 노래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특별히 보내실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이사야 42:1-9은 ‘여호와의 종의 노래’ 중 하나로서 오실 메시아의 성품과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으로 오시는 메시아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보증하고 있고,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봉독해 드린 본문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 중에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본문상의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와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백성, 성전에 모여 제사를 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비참한 백성, 함께 모여 민족애나 신앙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 현실. 그렇게 포로된 가운데서의 이스라엘의 운명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처지의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예언자 이사야는 “상한 갈대”요 “꺼져 가는 등불”이라 표현했습니다. 식민 치하에서 마음도 꺾이고, 몸도 꺾이고, 모든 것이 다 꺾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나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다.” 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갈대”(reed)는 습지나 물가에서 자라나며 유프라테스강 하류와 나일강 주변, 그리고 팔레스틴의 요단강가에서도 많이 자라나는 흔한 식물입니다. 고대 근동의 문학이나 성경에 상징적, 비유적 표현으로 자주 등장하는 식물입니다. 갈대는 연약하여 바람에 잘 흔들리고, 가지가 부러지기 쉬워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상한 갈대’(a bruised reed)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반쯤 부러진 상태의 갈대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이익이 될 때에는 이용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상처가 나서 흠이 있으면 내다 버립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그릇의 이가 나가면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어떤 분이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회사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해임되었습니다. 그 비정한 현실에 애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인정 사정 없습니다. 무자비합니다. 이 냉엄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외면당하고, 버림받고, 짓밟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우리는 세상에서 언제든지 ‘낙오자’가 될 수 있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강도는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다 빼앗아 가벼렸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세상은 상처난 사람을 그렇게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여러 모양으로 상처난 사람들을 찾아내시어 상한 갈대 같은 그들을 결코 꺽지 않으시고 돌보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불러 상처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위로하시며 함께 하십니다. 죄로 상한 심령을 꺽어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시키셔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바람이 불거나 물결이 치면 갈대는 꺽어지고 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연약하고 상한 갈대 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의 인생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고마는 안개요, 풀이요,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갈대같은 우리네 인생의 연약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인생의 폭풍우가 지나갈 때면 마음과 육체에 상처가 나고 깨어집니다. 우리는 때때로 병들어 아픈 몸을 갖거나 마음이 몹시 상하거나 걱정과 근심에 짓눌려 살아갑니다. 때때로 우리의 생에 아픔과 좌절과 고독 등의 먹구름이 드리워짐니다. 사람의 마음을 열어보면 슬픔과 탄식과 절망의 몸부림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상한 갈대입니다. 사랑의 주님은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상한 갈대 같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과 절망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시고 자유케하여 오히려 전혀 놀라운 일들을 행하게 하십니다.
갈대는 약하지만 특성을 지닌 식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흔한 것이지만 그 가치의 존귀성을 찾아내어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소금은 흔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에는 썩는 것을 방지하거나 치료제로서, 또 모든 음식을 맛나게 하는 존귀한 가치가 있습니다. 갈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갈대는 습지나 강변 등 어디를 가든지 흔하게 놓여져 있습니다. 갈대는 그저 바람에 이리 저리 휩쓸리거나 꺽여지며,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 같이 보여짐니다. 그러나 그러한 갈대가 성경을 기록하는 재료로 쓰여졌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종이가 ‘파피루스’라고 하는 갈대입니다. 이 갈대에 성경이 기록되어 전승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상한 갈대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갈대라는 사실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을 책에 기록하거나 남기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상한 갈대 같은 우리들 심령에 직접 그 진리를 새겨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새겨놓은 그 진리로서 오고 가는 무수한 인생들과 이 세상을 구원해 내지 않으셨습니까? 그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상한 갈대로서의 사람을 꺽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선택하시고, 사랑하시고, 세워주십니다. 그 상한 갈대 같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자유케 하여 놀랍게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 눈에 연약하기 짝이 없고, 별거 아닌 것 같은 상한 갈대처럼 보일지 몰라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강한 손으로 불들어 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강한 자로 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상한 갈대요, 바람에 쉽게 거꾸러지고마는 갈대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의 손에 붙들린 갈대임을 알았을 때, 결코 망할 수 없는, 오히려 하늘의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맛보고 누릴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희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상한 갈대입니다. 육신의 질병, 사업의 실패, 마음의 비애, 가정의 어려움, 죄로 얼룩진 심령, 모두가 상처 난 갈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손이 상한 갈대인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치유받고 진리로 자유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이 행사되는 그릇이요 도구란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대지라는 소설을 쓴 유명한 미국의 여류 소설가 펄 벅 여사가 있습니다. 한국 이름은 박진주입니다. 펄 벅(Pearl Comfort Buck, 1892.6.26∼1973.3.6, 한국 이름은 박진주) 여사가 한국에 관한 소설을 쓴 일이 있습니다. 그 소설 제목은 "The Living Reed"입니다. 살아있는 갈대, 곧 우리 민족을 갈대로 묘사했습니다. 소설은 우리 민족이 갈대처럼 약해 보이지만 그 속에 불굴의 생명력, 엄청난 생명력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사상가인 데카르트(René Descartes, Renatus Cartesius, Rene Descartes, 1596.3.31-1650.2.11)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대명제를 남겼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또 한 사람의 사상가인 파스칼(Blaise Pascal, 1623.6.19~1662.8.19) 역시 “사람은 연약한 갈대다. 한 줌의 바람이 한 방울의 물이 능히 그를 격멸시킬 수 있는 연약한 갈대지만,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대명제를 남겼습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갈대지만 “생각한다”고 하는 이 대 선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에 인간의 존귀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아픔, 좌절, 고독, 바로 그것들이 상한 갈대 같은 인간 자신의 현실이고, 한계가 분명하고 한계 많은 존재가 인간의 진면목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두 손 들고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상한 갈대인 우리네 인생들을 위해 스스로 상한 갈대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칭 하나님의 선민임을 내세우던 유대인들보다, 희망 없는 존재로 간주되던 이방인들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칭 의인보다 죄인이라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보다 병든 사람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운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는 명문대학 출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도시 사람보다 시골사람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족함이 없는 사람보다 연약하고 미련한 사람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예수님은 연약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게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무한한 능력으로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해결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물질의 문제이든, 마음의 문제이든, 사람과의 관계이든, 영적인 문제이든, 고치고 회복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부족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지금도 예수님의 사랑을 누리는 증인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증인들이 구름 같이 허다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현재도 진행중입니다. 세상에 사랑이 없다고 아우성쳐도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넉넉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상한 갈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님께서는 이 세상처럼 꺽어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강한 손으로 붙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상한 갈대인 우리를 완전하게 고쳐주셨고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더 이상 낙망하고 절망할 이유, 슬퍼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남은 생애 동안 주께서 상한 갈대 같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 감격하며, 우리 주님의 아름다운 파트너요 도구로 위대하게 쓰임받는 복되고 복된 생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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