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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오래 참고

요나 한완상............... 조회 수 2064 추천 수 0 2009.07.19 08: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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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4:2 
설교자 : 한완상 교수 
참고 : 2009.01.11새길교회 주일설교 

sgsermon.jpg[고린도전서 13 : 7, 요나서 4 : 2]

 2009년은 어느 해보다 힘들고 암울한 해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의 끝없는 탐욕은 미래에 대한 20세기적 낙관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시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인간은 단순한 물질적 안정과 풍요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잃게 되지 않을까 불안해합니다. 시장을 마땅히 올곧게 관리해야 할 정부도 신뢰를 잃고 있습니다. 시장의 탐욕을 생산력의 원천으로 우러러 보면서, 시장을 통제하지 않는 정부, 곧 작은 정부일수록 민주적인 정부라고 믿었던 낙관론도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자본주의 시장과 민주적 정부의 결합은 역사발전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자축했지요. 그 정점으로 인류를 인도했기에, 이제 더 역사발전은 없다고 장엄하게 선포했던 <역사종언> 낙관론은 이제 허무하게 헛말처럼 인식되고 그 효력은 끝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현대인들은 일찍 이와 같은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불안을 겪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카이로스적 위기에서 우리가 절박하게 목말라하는 것이 바로 사랑에 기초한 참된 새 희망입니다. 시장이, 국가가 이 같은 새 희망을 담보해주지 못할 때 사랑의 가치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종교가 참된 희망의 빛을 환히 비춰준다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종교 가운데도 기독교가 그와 같은 새 질서의 비전을 감동적으로 실효성 있게 보여준다면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 되겠습니까. 헌데 종교제도, 또는 제도종교 역시 시장과 국가처럼 그 탐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더욱 우울해지고 더욱 처참하게 절망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때 갈릴리 예수님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갈릴리 예수께서는 날로 포악스러워지던 로마제국의 식민지에서 사셨습니다. 변방 식민지의 땅 팔레스타인에서 억압과 수탈, 차별과 소외의 구조 속에서 신음했던 민중들에게 사랑과 공의, 용서와 평화의 새 질서를 온몸으로 제시했습니다. 예수의 사랑공동체는 당시 로마 제국의 그 벌거벗은 힘의 지배와 예루살렘성전 세력의 독선적 권력에 대한 종말론적 대안공동체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운동의 동력이었던 사랑의 힘을 우리는 21세기 문턱에서 다시 타는 목마름으로 소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은 단순한 개인윤리적 덕목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역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역동적 힘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의 내용이며, 그 질서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의 종말론적 공동체는 결코 초자연적, 관념적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 대안 공동체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의 사랑 실천은 역사적 예수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그의 하나님다움 곧 그의 신성(神性)을 드러낸다는 진리입니다. 예수에게 하나님은 다정다감한 사랑의 아빠(Abba)였지요. 그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역사적 예수의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되지요. 그러기에 역사의 예수를 탐구하고 실존적으로 그를 만나려는 노력은 바로 그 사랑의 하나님을 체험코자 하는 신앙적, 신학적 헌신이라 하겠습니다. 참 인간 예수 속에서 우리는 역동적으로 참 하나님, 곧 아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고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우리처럼 갈릴리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그는 21세기를 사는 오늘 우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2000년의 시차는 있지만, 바울과 우리는 직접 육신의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역사의 예수를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요. 그는 부활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난 존재였기에 역사의 예수에 무관심했다고 알려지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사도 바울이 역사의 예수의 삶, 특히 그 사랑 실천의 삶을 무시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심각한 오래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삶 그 자체가 예수의 사랑 실천의 삶을 온갖 어려운 악조건 속에서도 충실하게 따랐던 삶이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바울서신에서 갈릴리 예수 삶의 흔적, 그 말씀의 울림 그리고 그 예수의 체취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바울의 사랑예찬에서 역사의 예수님의 그 음성을 새삼 듣고 싶습니다. 그 음성을 바로 오늘 세계 경제공황에서 떨고 있는 우리들은 희망의 나팔소리처럼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저는 사랑이 갖는 인내의 힘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라고 했습니다. 이 짧은 메시지에서 오늘 우리 상황에 던져주는 희망의 빛을 보게 됩니다. 사랑은 인내를 동반해야 비로소 그 사랑의 힘이 계속 유지됩니다. 인내 없는 사랑은 대번에 증오로 돌변됩니다. 불같이 뜨겁던 사랑도 인내 없이는 한 순간에 얼음장같이 차갑게 변질됩니다. 하기야 희망도 마찬가지지요. 인내 없는 희망은 바로 절망으로 떨어지게 되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인내 간의 관계를 좀 더 깊이 성찰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바람직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힘입니다. 사랑은 관계이며, 그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입니다. 사랑은 자기비움으로 그 힘을 드러냅니다. <자기비움>은 물 흐르듯 <남채움>으로 이어집니다. 그 흐름은 남채움에서 결코 정지되지 않습니다. 채움 받은 남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기채움으로 되돌아옵니다. 여기서 아주 새로운 멋진 관계가 형성되는 아름다운 선순환과정을 뚜렷하게 볼 수 있지요. 사랑은 항상 이 같은 선순환을 작동시켜, 관계를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비움에서 남채움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대번에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자기비움이 고통스러운 일인 만큼, 결코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남채움까지 가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남채움에서 자기채움으로 한 바퀴 되돌아오는 데는 더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것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남이 스스로 해내는 결단이기에 재촉한다고 해서 빨리 이뤄질 그러한 성격의 흐름이 아닙니다. 마치 김장김치가 땅에서 익는데 시간이 걸리듯,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선순환에는 그러기에 언제나 인내의 힘이 필요한 법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선순환이 대체로 악순환보다 느리게 진행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선순환과는 정반대로 악순환은 <남비워냄>에서 시작됩니다. <자기채움>을 거쳐 <더욱 더 남비워냄>에 이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불신, 증오, 독선, 탐욕, 폭력, 죽임, 죽음이 터져 나오게 되지요. 그런데 이 같은 악순환은 선순환에 견주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이뤄집니다. 그 순환의 속도가 빠른 만큼 인간 고통은 커지고 공포는 확산됩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에 있던 세계 가장 큰 두 건물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그 허망한 광경에서 우리는 악순환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를 실감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충격과 공포>의 이라크 공격 역시 전광석화처럼 개시되었지요. 바그다드 하늘을 최신 무기로 무섭게 뒤흔들었습니다. 그 충격 속에서 악순환의 속력을 실감했지요. 최근 우리는 이스라엘과 가자지역의 하마스세력 간의 무력충돌에서 증오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또 그 빠른 만큼 억울한 죽음이 처참하다는 사실을 또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원래 증오의 속도는 사랑의 속도보다 빠른 법. 그러나 사랑이 그 인내로 인해 느린 만큼 그 감동의 파장은 더 커지는 법이지요. 인고(忍苦) 뒤에 함께 느끼는 사랑의 감동과 기쁨은 우리의 가슴을 떨리게 하고, 뜨거운 사랑의 눈물을 흘리게 하지요.

 인내를 동반하는 사랑은 항상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이것은 empowering의 사랑이지요. 선순환은 항상 힘을 불어넣어 주는 과정입니다. 허나 악순환은 항상 남의 힘을 빼앗아 가는 과정이지요. 우리의 비극은 이 두 순환이 달리기 시합한다면 항상 선순환이 패배한다는 데 있습니다. 증오의 속도는 사랑의 속도보다 빠르고, 파괴의 속도는 세움의 속도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러기에 사랑의 세력은 증오의 세력처럼 빼앗는 힘으로 이기려해서도 안 되고 또 그렇게 이길 수도, 이겨서도 안 됩니다. 다만 사랑은 멋지고 우아하게 패배할 수 있는 힘을 그 인내 속에 품고 있어 패배해도 결코 영원히 지는 것이 아니어서, 그 패배가 마침내 기쁨을 선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패배는 궁극적으로 함께 이길 수 있는 영원한 비결, 그 감동적인 비결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예수의 골고다가 마침내 ‘긴 사흘 후’ 부활로 이어지는 진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선순환 과정에서 <자기채워짐>이 갖는 보다 깊은 뜻을 성찰해 봅시다. <남채움>이 가져다주는 <자기채워짐>에서 자기는 참으로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자기입니다. 멋진 자아입니다. 자아실현이 이뤄진 바로 그 멋진 자아입니다. 자기를 비워 남을 채워줌으로써 자기에게 찾아오는 자아실현입니다. 이 같은 자아는 얼마든지 자랑해도 그것은 결코 이기적 자기자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 소중히 여겨야 할 멋진 자아입니다. 그러기에 이 같은 자존심은 빛나는 덕목이 됩니다. 이런 자아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멋진 자아이지요. 이런 자기 자신은 참으로 소중히 여기고 아껴야 합니다. 결코 자고(自高)로 나아가지 않을 자신이기에 힘껏 자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런 자존심 갖고 값지게 살아가야 합니다.

 역사의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이미 있다고 선포했을 때 그 하나님나라는 바로 채워지는 남과 채워지는 나간에 뜨겁게 작동하는 새로운 관계를 뜻합니다. 곧 새로운 사랑의 관계, 사랑의 질서를 뜻합니다. 갈릴리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친히 이룩하시려 했던 하나님나라는 그러기에 철저하게 타계적인 초자연적인 질서가 아니었습니다. 역사의 예수가 무상의 치유행위에서, 그리고 열린 밥상공동체에서 이미 선을 보여주셨던 바로 그 새 질서의 감동이었습니다. 죄의 족쇄에 묶여 억울하게 질병을 앓고 있던 씨알들을 그 족쇄에서 풀어주시면서 보여주셨던 그 온전해진 환자의 모습이 바로 그 하늘나라의 모습이었지요. 온갖 차별과 억압을 받았던 잡것들을 열린 잔치공동체로 초청해주셨던 예수의 그 실천에서 우리는 이미 와 있는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확실하게 뜨겁게 느낄 수 있지요. 비록 그것이 완벽한 최후의 모습은 아니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결국 누룩처럼 조용히 그러나 실효성 있게 번지면서 나와 남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힘이라 하겠습니다. 인내는 바로 이 누룩의 힘이기도 하지요. 사랑은 오래 참는 그 인내의 힘으로 아름다운 감동의 선순환을 작동시키지요. 그래서 멋진 새 질서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사랑이 으뜸이라고 사도 바울이 강조했는지 새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과 항상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셋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한다면, 제2, 제3은 무엇인가 하고 묻게 됩니다. 이 질문은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틀린 질문입니다. 사랑은 금메달이요 믿음은 은메달이며, 소망은 동메달이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 없는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믿음이 산을 옮길 만한 엄청난 괴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사랑 없는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것은 무섭고 해로운 악마적 괴력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 없는 확신이 얼마나 위험하고 소름 끼치는 것인지는 20세기 두 전체주의 괴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의 확신과 스탈린의 확신이 마침내 수천만 명의 목숨을 그 확신의 제물로 삼았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 없는 소망도 인류에게 지극히 해로운 것임을 우리는 역사에서 분명히 배울 수 있습니다. 계급 없는 사회에 대한 거짓 희망이 폭력혁명의 종말론적 희망으로 둔갑 될 때 억울한 인간의 피는 쉼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우생학적 우수성을 지녔다고 확신된 아리안종의 절대적 지배에 대한 희망은 수백만 유대인을 참살했던 잔인한 거짓 희망이었습니다. 사랑 없는 거짓 희망은 비극을 생산하는 괴력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사랑만이 제일입니다. 사랑만이 믿음을 믿음답게 만들어주며, 사랑만이 소망을 소망답게 빛나게 해줍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예찬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전 13:7)

 사랑 속에 믿음과 소망의 모든 것이 다 녹아있습니다. 용서와 관용과 인내도 그 속에 다 한 가족처럼 다정하게 모여 있습니다. 그리하여 견디는 새 질서, 하나님의 지배가 작동되기 시작하지요.

 이제 사랑과 인내의 하나님을 보다 폭넓게 보다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 요나의 얘기를 잠시해보겠습니다. 요나는 정말 성깔 마른 예언자였습니다. 유대 선민의식에 투철했던 사람이었고, 정의의 심판을 높이 우러러 보는 예언자였습니다. 선민의식이 너무나 강했기에 그에게 하나님은 철저한 부족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만을 이룩하시는 부족신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을 가차 없이 죄인들에게 내림으로써 정의를 세우는 무서운 보복의 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요나에게 큰 성읍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요나는 분개했습니다. 불복했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 사람들은 그 죄악으로 인해 마땅히 하나님의 천벌을 받아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랑 없는 확신의 본보기였습니다. 그래서 불복하여 스페인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고래뱃속에서 사흘간의 고통을 겪게 되면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정했지요.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기는 했으나 속으로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분을 이기지 못해 죽고 싶다고 하나님께 대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당장 니느웨 성을 징벌하시지 않고 오래 참으신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가슴으로는 그것을 도무지 받아드릴 수 없었습니다.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어서 좀처럼 진노하시지 않는 인내의 하나님에 대해 심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요나 4:2-3). 그래서 그는 성읍 밖 뜨거운 햇빛 아래서 죽치고 앉아 성읍이 과연 어찌 되나 구경하고 있었지요. 그때 주님께서는 박 넝쿨을 마련하여 그를 잠시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벌레들이 이 넝쿨을 갈아먹어 넝쿨이 시들어 죽어버리게 되자 요나는 화가 치밀어 또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요나 4:10-11).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 없이 많은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여기서 요나의 배타적 부족신과 보복적 정의의 신은 사랑과 인내의 신 앞에서 허물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요나의 배타적 신앙과 정의로 포장된 독선적 신앙을 흔들어 깨뜨리시는 인내의 신, 자비의 신의 모습을 뚜렷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아빠 엄마가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수고하며 인내하며 그들을 정성껏 키워내는 그러한 어버이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루 살다가 시들어 버린 식물을 이기적으로 아쉬워했던 요나를 부드럽게 타일러 깨우치시는 아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식물의 생명이 그토록 아쉽다면, 하물며 십이만 명의 인간들의 생명은 더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 인간들이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생명이 그토록 소중하기에 그 생명을 그토록 사랑하기에 그들을 올곧게 인도하시는 인내의 하나님을 여기서 새삼 다시 보게 됩니다. 바로 갈릴리 예수의 삶에 나타나신 사랑과 인내의 하나님 모습이 바로 요나가 만났던 하나님이었습니다. 심지어 짐승들도 구원의 대상으로 크고 넓게 보시는 하나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그러기에 오래 참는 분이십니다.

 이제 다시 오늘의 엄혹한 현실을 생각해 봅니다. 뉴욕의 월가의 금융위기가 전세계의 경제적 공황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비극적 상황에서, 우리는 시장과 정부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끝없는 탐욕과 독선이 <남의 비움>을 더욱 무자비하게 비워내면서 <자기채움>을 거침없이 탐욕스럽게 이룩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 역사를 낙관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이기에 역사의 예수님을 타는 목마름으로 그리워하고 새로운 눈으로 쳐다보아야 합니다. 갈릴리 예수의 삶, 그의 말씀과 행적, 그의 고난과 죽음에서 모든 시대의 탐욕과 독선의 권력에 대한 근본적 대안을 우리는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진솔하게 감동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갈릴리에서 골고다까지의 여정에 나타난 그분의 비전과 실천은 우아하게 패배를 선택하심으로써 우리 모두 함께 이기는 새 길을 우리에게 밝게 비춰주고 있습니다. 골고다의 패배가 감동적인 것은 그것 속에 사랑의 인내가 있어 그것이 마침내 부활로 폭발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지속시키는 힘은 결코 그 달콤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고(忍苦)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아무리 믿음이 깊고 뜨거워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희망이 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더 심각한 절망의 전주곡일 따름이지요. 그래서 모든 가치가 시들해져도 사랑만이 영원한 가치로 남습니다. 사랑은 영원과 시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참 기쁨을 우리에게 안겨다 줍니다. 바로 그 배를 타셨기에 갈릴리 예수는 골고다의 그 참혹한 형장에서 증오와 폭력을 향해 용서의 마음을 펼쳐보여 주셨지요. 바로 그 사랑의 배를 탔기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새길공동체도 올해 모두 이 사랑의 배를 타고 시간 속에서 영원을 체험하는 영적 공동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변혁의 공동체로,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기다리고 인내하는 사랑의 힘으로 서로 채워주는 선순환의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진리를 갈릴리 예수께서 친히 가르쳐 주셨고, 몸소 실천하셨으며, 사도 바울도 그 발자취를 따라갔습니다. 우리도 그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예수공동체가 더 아름답게 빛나게 되길 기원합니다. 이 기원으로 우리 모두 오래 참을 수 있기 바랍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를 우리 삶 속에서 육화(肉化)해내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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