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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욘4: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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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하나님의 마음을 아세요?
2008년 2월 9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요나 4:5-11
우리 교회의 이름이 텔아비브 욥바 교회입니다. '텔아비브-욥바' 어찌보면 이곳의 지명을 따서 붙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이스라엘로 출장오거나 교회를 찾는 분들이 인터넷 검색을 할 때 '텔아비브 교회'라고 입력을 하면 쉽게 검색이 되고 오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함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교회의 위치가 욥바에 있어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 교회의 이름에 너무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아시는 것처럼 욥바하면 누가 생각나시나요? 욥바와 관련된 두 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요나, 신약성경에서는 베드로가 생각날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도 우리는 잘 압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했던 그 명령에 따르기가 싫어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해 요나가 배를 탄 곳이 바로 이곳 욥바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도 아십니다.
또한 베드로의 경우, 이곳 욥바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가이사랴가 있는데, 그곳에서 근무하던 로마 장교 고넬료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가다 들렸던 곳이 바로 욥바입니다. 피장 시몬의 집에서 이방인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확신을 갖고 가이사랴로 가서 세례를 줍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초대교회의 전도는 유대인들에게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욥바와 가이사랴를 이방인 선교가 시작된 곳으로 보는 것입니다.
요나와 베드로, 둘의 공통점은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욥바는 선교의 자리였습니다.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던 곳이었고, 선교의 출발점이었고, 지금은 선교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그런 곳에 우리 교회가 있고, 우리 교회는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의 이름을 그리 지은 것입니다.
오늘은 욥바와 관련된 인물 중에 요나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요나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많은 분들의 관심은 요나를 삼킨 물고기입니다. 도대체 어떤 물고기였길래 요나를 삼킬 수 있었으며, 또 요나는 어떻게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동안 죽지 않고 있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나름대로 설명을 합니다. 그 물고기는 고래였을 것이고, 실제로 고래 뱃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 별 것 아닌 것이에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까? 그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난 것, 굳이 증명해야 믿습니까?
그리고요,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그 물고기가 어떤 물고기냐가 아니에요. 아직도 물고기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면 죄송합니다만 초등학생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고기의 차원에서 뛰어 넘어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나서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사실 제가 요나서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깊게 알게 된 것은 일본단기선교를 통해서였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방문한 과천교회 청년들처럼 저도 한국에 있을 때 매년 여름 청년들과 함께 해외로 단기선교를 갔었습니다. 그중에 일본은 2번 갔었는데, 처음 갔던 때가 99년도였습니다.
그때 처음에는 인도네시아로 가려고 준비를 했었습니다. 그 전해에도 갔었고, 인도네시아에 협력 선교사님이 계셔서 그리 가려고 모집도 하고 준비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 인도네시아에 내전이 일어나면서 치안문제가 심각해졌고, 그로 인해 일본으로 선교지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청년들의 안전이 중요했기 때문이었고, 마침 교회에서 정식 파송한 선교사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있던 교회가 자칭 일본통이신 분들이 몇 있었거든요. 그분들이 일본에 자매교회도 있고하니 교류 차원에서 청년들을 일본에 보내자고 적극 추천을 했거든요. 그런 이유로 해서 인도네시아에서 방향을 바꾸어 일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단기선교 기간은 일주일 정도지만 그 일주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몇달이 걸립니다. 보통 5-6개월 동안 준비해서 가게 됩니다. 일본어도 배우고, 일본어 사영리도 연습하고, 일본어 찬양도 연습하고, 워십댄스와 전도용 드라마가 준비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는데 문제는 제 마음이었습니다.
도무지 일본에 대한 마음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어요. 제가 일본을 좋아했을까요? 아니요. 정말 싫어했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일본 선교에 대해 들리는 교인들의 말이 맥빠지게 하는 말들이었어요.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일본에 뭐하러 가냐? 다른 나라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일본이냐? 그 돈 가지고 동남아시아나 가서 선교하는 게 백번 났다. 일본에 선교가 되겠느냐? 일본 사람들은 전도가 안된다. 노방전도하는 것 싫어한다. 그런 전도는 효과 없다. 선교는 무슨 선교냐 젊은 것들이 놀러갔다 오는 것이지...”
가기 전에 얼마나 많은 말들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일본에 대해 좀 안다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것이었어요. 일본 선교가 힘든 것이 맞아요. 어려워요. 하지만 청년들이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돈 준비하고, 거의 날마다 모여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는데 그런 말들을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격려한답시고 그런 말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듣다가 참다못해 화가 났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다녀와서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일본 선교기간 동안 우리 청년들을 통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거든요.
그런데 보니까 요나가 그러했습니다. 선교하러 갈 나라들이 쌔고 쌨는데 왜 하필이면 원수의 나라 니느웨냐 하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을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침략한 대가로 멸망 받아야 마땅할 나라로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못마땅했습니다.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눈꼽 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와 반대편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하러 욥바로 내려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게 됩니다. 그러다가 큰 풍랑을 만나고, 그로 인해 바다에 던져지고, 큰 물고기 배속에서 죽을 고생을 하게 됩니다. 간신히 살아난 요나는 어쩔 수 없이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요나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솔직히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일본을 싫어했습니다.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일본을 싫어했습니다. 딱 요나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일본단기선교를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청년들을 데리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덤덤했습니다. 그런데 준비를 해나가다 보니까 점점 문제가 되는 겁니다. 제 마음 속에 있는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일본단기선교에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일본에 대해 기도를 해도 별로 좋게 기도가 않나오는 겁니다. 기도를 해도 마음은 여전히 “저, 쪽바리들”하는 겁니다. 이것이 큰 고민이 되었습니다. 지도자로 가는 것이기에 더욱 문제가 되었습니다. 방법이 있습니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을 향한 증오심으로 가득차 있는 저의 마음을 바꾸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에 준비한 것이 2월이었으니까 한 3월부터 이 기도를 했는데, 6월 달에 응답이 주어졌습니다. 금요기도회 때에 기도를 하는데, 그저 평상시에 기도했던 것처럼 일본에 대한 저의 마음을 바꾸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요나서가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요나서 전체가 하나의 그림처럼 전개가 되는데, 꼭 저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숨을 멈춘 말씀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읽은 4장 10-11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다가 죽을 고생을 한 요나는 마지못해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자 그 완악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요나는 화가 났습니다.
4장 1절에 보면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라고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니느웨 사람들을 보고 심히 싫어하고 화를 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성질을 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고 초막을 짓고 그 그늘에 앉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을 준비하셔서 뜨꺼운 태양빛으로부터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벌레를 준비하셔서 그 박넝쿨을 먹게 하셨습니다. 벌레로 인해 박넝쿨이 시들어버린 그 사이에 뜨거운 동풍이 불고 햇볕이 내리 쪼이자 요나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 성질을 냅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죽여달라고 성질을 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10절과 11절입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고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이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말씀에 제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요나는 바로 저였고, 니느웨는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4장 11절을 통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큰 성읍, 이 나라 일본에는 800만 귀신에 짓눌려 무엇이 생명의 길인지, 참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일억 이천만명이나 된다. 그들을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냐.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냐. 그들을 보는 내 마음이 어떤지 아느냐? 그들을 보며 아파하는 내 마음을 알아다오.”
이 말씀이 제 안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저의 눈에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날 기도회 시간 내내 펑펑 울었습니다. 일본을 그저 미워만했고 욕하기만 했던 저의 모습을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일본에 대해 미워만 했지, 한번도 일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고 기도해 본 적도 없었던 저의 완악함을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저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일본을 향한 저의 마음이 바뀌었고, 일본을 보는 저의 눈이 바뀌었습니다. 일본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정말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8백만 귀신의 영에 눌려서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일억 이천만 명의 영혼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바뀌니까 모든 단원들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더 이상 미워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고 긍휼히 여겨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구원받을 대상이며, 멸망당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처럼 구원받아 영생을 누려야 할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눈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바뀌니까 하나님의 마음 한 가운데 일본이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모든 청년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워져 일본에 갔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우리가 방문한 70년된 일본인교회, 교회가 세워진 후 한번도 전도를 해 본적이 없는 그 교회가 우리 청년들의 그 뜨거운 사랑과 열정에 감동해서 함께 축호전도(사람들의 집을 방문해서 직접 복음을 전하는 전도)를 했고, 그 결과 결신자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지금까지는 소극적이었던 신앙이 청년들을 통해 자기 동족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고, 일본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애쓰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거리에서 찬양하고 복음을 전할 때 그런 일에 무관심하다고 하는 일본인들이 관심을 갖고 우리를 대했고, 여러 사람들이 영접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청년들을 통해 그동안 무척이나 힘들어했던 선교사님이 영적으로 회복되었고, 우리 청년들의 마음 속에는 더욱 더 뜨거운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한 영혼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무엇보다 원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가 죄 가운데서 살다가 그렇게 멸망의 길, 지옥으로 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의 겉모양을 많이 봅니다. 혹은 그 사람이 나에게 행한 그 어떤 일들로 인해 평가를 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친절하고 잘 해주거나 그러면 상당히 호의적이지만, 반대로 나를 서운하게 하거나 해를 끼치거나 상처를 주면 그 사람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판단하거나 미워하게 됩니다.
그것은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나라와 민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일본을 미워하는 이유는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과거사를 사죄하지 않고 여전히 못된 짓을 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되면 일본이라는 나라에 우리의 눈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일본이라는 나라 안에서 좌우를 구별하지 못하고 죄와 죽음의 길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울게 되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가 만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그는 기꺼이 니느웨로 갔을 것이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렇질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났고 그것을 하나님께 불평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많은 분들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자리,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면 우리의 가정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족을 대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배우자를 대하고 자녀들을 대하고 부모를 대한다면 어떻게 달라질까요? 용서할 수 있고요, 사랑할 수 있고요, 가족을 위해 울 수 있게 됩니다. 허물을 덮을 수 있고요, 실수와 연약한 모습을 받아들이고 도와줄 수 있게 됩니다.
반면에 그저 인간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어떨까요? 뻔하지요. 매사에 못마땅하고 서운한 것만 생각나고 미워지고 나 역시 상처주는 말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보세요.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족을 품고 하나님의 눈으로 가족을 보세요. 그럼 사랑할 수 있고 용납할 수 있고, 그럼으로 인해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갈 수 있게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자녀들을 보세요. 그러면 우리 자녀들의 문제가 무엇인지가 보이고요,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무엇을 심어주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으로 키워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웃을 대할 때도, 교인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보십시오. 그럼 인간관계가 달라지고요, 풍성해집니다. 용납할 수 있고 사랑하며 섬길 수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일본에 대해서 말씀드렸고, 니느웨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이스라엘에 살고 있습니다. 기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스라엘에 살고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에 대한 편견과 좋지 않은 마음을 갖습니다. 그것이 바로 안티세미티즘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감정을 갖습니다. 아랍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또한 하나님의 눈으로 유대인들을 보고 아랍인들을 본다면 어떨까요? 달라지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이 있고, 그의 형제 이스마엘, 아랍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길 원하시고, 아랍인들 역시 참 하나님을 믿어 예수님 안에서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한 형제로 화해하고 회복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채 여전히 복음을 외면하고 거절하고 있는 이들을 보시며 하나님의 마음은 너무나 아프십니다. 지금도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을 본다면 우리는 절대로 미워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하게 되고, 이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게 되고,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을 향하신 우리 하나님의 마음으로 충만해지길 소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어제 과천교회 청년들이 십자가의 길을 순례를 했습니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십자가를 지고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며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그 길을 가면서 많은 청년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왤까요? 예수님의 고통이 너무나 슬퍼서일까요?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 나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나 감사해서 눈물을 흘린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내 마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한 영혼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영혼으로 보이게 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두번째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미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상처받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기도하십시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서운하게 한 사람, 해를 끼친 사람을 놓고 무릎을 꿇으십시오.
처음에는 기도조차도 잘 나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던 상처가 아물고 미움이 사라지게 되고, 나아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람을 위해 울며 기도하게 됩니다.
세번째는 복음 전도입니다. 전도 혹은 선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돈이 남아돌아서, 할 것이 없어서 그리 하는 것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그 사랑을 받았기에 그리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그 은혜를 아직도 모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그리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영혼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리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는 더욱 더 하나님의 마음이 임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받아들일 때는 천하를 얻은 기쁨으로 가득찹니다. 거절한 경우에는 그 사람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래서 더 사랑하게 되고 더 기도하게 되고, 더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워지면 모든 사람들을, 모든 민족과 나라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모합시다. 기도합시다. 우리의 좁은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워져 모든 영혼들을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의 메마르고 강퍅한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워져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위해 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일꾼을 찾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 땅에는 추수할 곡식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정작 추수할 일군이 없다는 겁니다. 할 일이 너무나 많은 데 일꾼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영혼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인데, 그 소원을 이루어드릴 일꾼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꾼을 찾으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지금도 복음을 듣지 못해서 죽어 가는 영혼들, 지금도 전할 자가 없어서 죽어 가는 영혼들을 보시며 안타까워 하시고 아파하시는 마음을 가지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마음을 우리 모두가 느끼고 깨달아 알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우리의 응답이 이사야와 같기를 바랍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의 대답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의 대답입니다. 우리 역시 이사야와 같은 응답이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일꾼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주님, 제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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