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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을 인정하십니까?

요나 궁극이............... 조회 수 927 추천 수 0 2014.08.22 14:00:23
.........
성경본문 : 욘1:1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1 1.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 성경은 66권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이요. 66권의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주 절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이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인간의 그 어떤 말도 정확무오한 말은 절대로 없습니다.

 

천주교에 교황이 있지요? 천주교에서는 교황의 말을 절대로 잘못됨이 없는 정확무오한 말로 받아들이지요? 절대로 그건 잘못된 거요. 인간은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고, 자기가 자기 앞일도 모르는 거고, 자기 목숨 역시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거고, 또 세상 환경과 사건을 제 마음대로 못하는 거고, 세상을 주권적으로 섭리를 할 수 없고, 이 우주만물 자연계를 보존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교황의 말은 절대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잘못됨이 없다고 하는 이건 말이 안 돼요. 그건 몰라서 그런 거지요. 성경을 모르면 그래요.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이 얘기는 계시성에서의 얘기지 인쇄를 하다가 잘못돼서 빠지거나 틀린 곳도 있어요. 그런 걸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성경은 자체적인 가치성과 독자적인 권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온 세상 사람들이 이 성경을 가치가 없다고 발로 밟아버리면 성경이 가치가 없이 되느냐? 그렇지 않다 그 말이요. 성경은 독자적인 권위성을 가지고 있어.

 

하나의 예를 든다면 예수님을 전부 다 배반하고 예수님을 발로 밟아버리고 죽여 버렸어. 그러면 예수님이 예수님이 안 되고 하나의 볼품없는 인간이 돼버리는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독자적인 가치성과 권위성이 있는 겁니까? , 그래요. 성경도 같은 원리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나도 버리고 너도 버리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무시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무시한다고 해서 진리가 무시가 됩니까? 절대로 진리는 무시가 되지를 않아요. 왜 그러냐? 나중에 진리 앞에서 온 세상 사람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시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요. 가치 없이 여긴다고 해서 가치 없는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러나 인간의 말은 누가 권위성을 세워줘야 만이 그 권위가 생겨요. 그렇지요? 인간의 말은 인간이 권위성을 세워줘야 그 권위가 있게 된다.

 

테레비나 라디오에 옛날 사람들이 말한 게 많이 나오지요? ‘너 자신을 알라.’ 누가 이 말을 했지요? 소크라테스. 그래, 한 번 물어봅시다. 소크라테스 전의 사람들은 ‘너 자신을 알라’ 라는 그 말을 한 사람이 하나도 없겠지요? ‘네 분수를 알아라. 네 자신을 알아라’ 하는 그 말을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 전의 사람들은 전혀 없을까요? 우리는 안 보고 못 들었지만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분명히 있다 그 말이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너 자신을 알아라’ 라는 말을 하면 그 말을 누가 했다고 그러지? 누구든지 할 수 있고 한 말인데 소크라테스라는 사람만이 그 말을 한 걸로 자꾸 생각을 하는 거지. 그렇지 않아요?

 

심지어 오늘날 교회 교역자들이 그 말을 들어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그랬다고 말을 합니다. 아니, 성경을 읽어놓고 그 말을 하니 그런 경우 누구의 말이 더 권위가 있지요? 그래,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이 한 말과 그 권위성이 어떻게 되지요?

 

‘너 자신을 알아라’ 그 말을 누가 했다고요? 소크라테스. 그러면 소크라테스 전의 사람들은 그 말을 안 썼고? 시골사람도 쓸 수가 있고, 상인도 공인도 정치인도 얼마든지 쓸 수가 있지요? 이런 사람들이 그 말을 쓸 때에 소크라테스가 말할 때처럼 ‘와’ 그래줬을까? 그냥 ‘하나의 상인, 하나의 농사꾼, 무식한 사람의 말이거니’ 하고 봤을 거란 말이요. 그런데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사람이 너 자신을 알라’ 그러니까 그 말에는 ‘와’ 그러거든. 오늘날 누구까지 ‘와’ 그러지? 성경을 앞에 놓고서 목사들까지 ‘와’ 한단 말이요.

 

우리 기독자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어놓고 누구 앞에서 누구를 올리느냐 그 말이요.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아라’ 한 그 말이 어디다 뿌리를 박아놓고 한 말이지요? 말에도 뿌리가 있어요. 왜 그러냐? 말은 그 사람의 사상 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인격 속에서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의 사상과 인격을 어느 정도 파악을 하게 돼요.

 

사람의 인격도 다 같은 건 아닙니다. 그냥 ‘인격’ 하니까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인격적인 존재다’ 하고 같이 붙이지만 그러나 각 사람은 그 속에 다 사상들을 갖고 있는데 세상사상이 아니면 천국사상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 기독교회에서는 신앙적인 면에서 보게 되면 사상을 성분적으로 또 심사를 해야 돼요. 왜 심사를 해야 되느냐? 기독교인이라면 전부 다 그 사상성이 진리에 뿌리를 박아놓고 나옵니까, 안 그런 것도 있습니까? 안 그런 것도 있지요. 다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옛사람이 주격이 돼가지고 종교활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고, 또 새사람이 주격이 돼가지고 종교적인 활동을 할 수도 있고, 또는 못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안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환경에 의해서 못할 수도 있다 그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사상이 나오는 그 뿌리를 캐라 그 말이요.

 

이 성경은, 하나님은 죄를 볼 때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난 걸 가지고 심사하는 겁니까, 근원을 심사하는 겁니까? 근원. 그래서 중심을 본다 그 말이요. 무슨 중심? 일반사람들이 ‘난 중심으로 한다’ 하는 건 하나님의 기준을 모르는 인간 제 말이고,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고 하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신앙양심 그걸 보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진리를 안 따르는 양심도 있지요? 많이 있지요. 안 믿는 사람들이야 진리를 안 따르지요. 진리 따르는 양심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불신자가 ‘나는 ‘중심으로 말한다’ 그럽니까? 얼마든지 들을 수 있지. 그러니까 우리는 말에서 놀지 말고 말 속의 근원을 빨리 캐치를 하라. 그러면 그 말이 목적하는바 사상적 개념이 금방 파악이 돼버려요. 한 눈에 쫙 파악이 돼버려요. 알겠어요? 모르면 안 되지.

 

믿는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성경을 사상과 개념을 가지고 봐요. 그러나 일단 발성이 나올 때는 근원을 심사해애 돼요. ‘성경 구절적으로 해석을 어떻게 한다. 안 한다’ 그걸 보지 말고, 본론 서론 결론이 뒤바뀌는 한이 있더라도 그건 상관이 없고 문제는 ‘사상의 근원지가 어디냐? 저 사람의 말이 신령계에 속한 말이냐, 영적인 말이냐? 기본구원을 얻은 기독자로서 성화구원에 대한 말이냐, 아니면 기본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거냐?’ 그런 걸 구별하고 들어가야 됩니다.

 

인간의 말은 누가 권위성을 세워줘야 만이 권위가 서요. 이것은 수동적인 권위성입니다. 그러나 66권의 성경은 절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자체적인 권위성과 독자적인 권위성을 가지고 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달라붙어서 성경을 불에 집어넣고 발로 짓밟고 해봐야 결국에 가서는 이것 성경이 그 자를 심판하는 거지요.

 

권위가 있다고 하는 게 뭐냐? 예를 들어서 내일 비가 온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에 비가 안 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또 내일 비가 온다고 말을 했는데 또 비가 안 왔습니다. 이렇게 다섯 번이나 말을 하다가 한번쯤 맞혔습니다. 그러면 그 말에는 권위가 있지요? 그렇지요. 같은 이치로 점쟁이 말도 그렇지요? 그런데 좀 웃기는 얘기지만 언제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지나갔어요? 4 11일로 미뤘어? 그게 이를테면 권위가 있어요, 없어요?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지나갔어?

 

전 그래요. 언제 오신다고 말하는 그 사람들이 틀린 게 아니라 예수님이 계산을 조금 착오를 일으킨 거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참 웃기는 세상이야. 요지경 세상이야.

 

그 장난이 어디서 나왔어요? 어디서 나온 것 같아요? 다 원인이 있어요. 원인이 없는 건 없는 거니까. 원인에는 다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는 거고. 원인이 없는 결과가 있나? 그 사람들은 다 절간에서 공부해서 나온 사람들이지? 다 기독교회에서 성경 놓고 배운 겁니까? 그들이 목사님들이 하나도 안 가르쳐줬는데 뱃속에서 그걸 배워왔어요? 저는 생기기는 이렇게 생겼지만, 이름 없는 교역자지만 같은 교역자로서 책임을 느끼고 있어요. 함부로 말을 하서는 안 되겠다.

 

성경을 보고 세대주의적으로 따져나가는 것. 무오시대니 양심시대니 또 무슨 시대? 은혜시대는 구약성경이 필요가 없나? 그게 뭐요? 그게 날짜 계산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되면 뭐가 무너지는지 압니까? 이유야 어떻든 그런 식으로 주장을 하게 되면 현재적으로 입어질 성도의 성화구원이 싹 망가져 버려요.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성도의 성화구원, 하나님의 인격의 온전, 성품의 온전으로 향하는 그 면에 이놈의 사단 마귀가 완전히 손해 보게 만들어요. 알겠어요?

 

사단 마귀가 성도에게 뭘 얻어먹겠어요? 이익 볼 게 뭐요? 하나님은 왜 존재적으로 이런 존재들을 허용을 해 놨을까요? 하나님께서 그 본심이 아주 근본적으로 우리의 성화구원을 망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고 영적 신령한 면의 성화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이 성화구원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것이요, 영감에 민감성 민활성 민첩성을 가하기 위해서 그런 존재를 창조적으로 허용해 놨거든요.

 

그런데 이 사단의 방법이 여러 가지 측면이 있지요. 의사적 마찰적 충돌적으로 들어오는 것도 있고, 또 손해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호응적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도 있고. 그러니 우리가 잘 알아야지요.

 

성도들의 성화구원을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떠한 방편도 이거는 주님의 구원사역에 적입니다. 알겠어요? 또한 그거는 자기의 적이요 성도의 적입니다. 성경구절에도 있지요? 너희들은 형제들 앞에 뭘 뭘 조심하라고 그랬지? 형제들 앞에 걸려 넘어질 그런 걸 조심하라고 그랬지. 왜 그러지요? 형제의 성화구원에 망조가 들린단 말이요. 그게 큰 걸림돌이 되는 거라.

 

자기가 6, 70년 동안의 이 짧디 짧은 세상에서 진리지식을 받아가지고 성화구원을,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예수님으로 통해서 이뤄가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영원히 후회거리입니다. 이 후회성은 나중에 천국에 가서 울고불고 후회하고 가슴을 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현재적으로 성화구원의 중요성을 피부에 와 닿도록 느끼게 하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에게 이 성화구원에 자극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성화구원에 박차를 가하게 하기 위해서 지옥이라든지 매 맞는 거라든지 형벌이라든지 그런 걸 우리에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제가 볼 때는 그래요. 기독자들이 종교적인 세상을 돋보고 그걸 이루려고 쳐다보고 부러워하고 그걸 자랑하고 싶어서 자기의 인격적인 이치적인 구원도리적인 신령한 그 면에 대한, 진리지식적인 그 면에 대한, 자기가 자체화 되고 사상화 되고 실상화 되는 그 면에 대한 말씀은 내버렸어.

 

그리고 교회에 와야 신앙생활이고, 자기 개인적으로 일터에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안 듣고, 교회 와서 밤을 새가면서 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듣고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한단 말이요. 이게 뭐요? 자체화가 안 됐다는 증거지요.

 

사람이 말씀으로 자체화가 안 되면 자꾸 환경의 방편에서 자기 신앙을 찾으려고 그래요. 신앙을 몸 밖에서 찾으려고 그래요. 우리는 그게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신앙의 형성이 자기 속에서 돼야지요. 하나님의 인격의 형성이 자기 속에서 안 되고 어디서 뭘 어떻게 돼요?

 

내가 분명히 오늘 비가 안 온다고 그랬는데 정말로 비가 왔다면 비가 온 이것은 내가 그 말을 했기 때문에 비가 온 겁니까? 그 사건이 나의 말에 권위성을 세워준 겁니까? 어떤 겁니까? 가만히 파고 파고 들어가면 전혀 이치도 아닌 엉뚱한 걸 이치인 것처럼 진리인 것처럼 생각을 한단 말이요.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별 수가 없는 모양이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경은 인간들의 말처럼 ‘몇 천 년 전에 그 말을 하셨구나’ 그런 식으로 성경을 생각하면 안 돼요.

 

‘하나님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말씀이 임했다’ 했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 했으면 족할 텐데 왜 아밋대의 아들까지 붙인 것일까? 붙일 필요가 뭐였는지? 아밋대는 하나의 인간이지요. 그러니까 넘겨 집어 나쁘게 말한다면 ‘그 아비가 그 아들 교육을 더럽게 시켰다’ 그렇게 볼 수가 있고, 또 하나는 인간의 기존적 고집통 그걸 자식이 물려받는 게 있지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교만심 허영심 허욕심 그게 그대로 자식에게 넘어갔구나’ 하는 거. 즉 아버지가 나쁘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것이 그대로 내려왔구나.

 

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는 계속 진행입니다. 그러니까 요나에게 말씀하신 이것이 요나에게만 해당된 것입니까, 오늘날도 요나의 성분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도 계속적으로 이 말씀은 들리는 겁니까? 어때요? 후자. 틀림이 없습니까? 왜 그러냐? 당대의 요나는 갔지만 요나 속에 들었던 성분은 우리들 속에 얼마든지 들어있어. 그러니까 요나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계속적으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임하니라’ 해놓고 그 뒤를 보면 요나가 말씀을 내버리고 니느웨로 도망을 가는 게 나오지요? 또 박넝쿨 밑에서 하나님께 원망을 하는 거라든지. 우리가 성경을 보니까 그 사건들은 요나에게 닥쳐진 게 분명한데, 현실적으로 요나에게 이 말씀이 임했는데 현재의 내가 요나처럼 그렇게 살게 되면 요나 같은 사건은 나에게 오게 돼 있습니까? 오게 돼 있어요. 틀림이 없습니까? 틀림이 없어요. 분명한 사실입니다. 분명히 옵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로서 백성으로서, 신령계를 상속받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거스르고 가게 되면, 진리의 말씀을 구원도리적인 말씀을 버리고 가게 되면, 나에게 인격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되면 요나 같은 사건은 오게 돼 있어요.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을 못 갑니다. 가려야 갈 수가 없어요. 세상 모든 만물은, 시간 환경 물질 존재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고, 나도 그 가운데 있고, 이 나를 하나님께서 주물럭거리면서 만든다 그 말이요.

 

그 때 그 고기가 고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요나가 그 고기 뱃속에 갇혔었는데 지금 우리는 무형적인 물고기 즉, 어떤 창살이 없는 감옥을 느낄 수가 있지요? 이걸 인간이 볼 때는 어떤 환경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인간이 어떤 무형적인 환경에 폭 파묻혀가지고 못 나오는 그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말씀의 권위성에 있어서 성경에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과, 베드로나 또 다른 사도들이 말한 것이 있는데 권위성적인 면에서 다릅니까, 똑같습니까? 같습니다. 틀림이 없습니까?

 

어째서 똑같다고 봅니까? 요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빨간 색으로 인쇄를 하고, 베드로가 한 말은 검은 색으로 인쇄를 했지. 그런데 어째서 똑같다고 봅니까?

 

성경에는 마귀가 한 말도 있지요? 그러면 이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은 없는 거지? 분명히 있습니까? 그러면 발람이 타고 간 나귀가 말한 거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이 있지요. 틀림이 없습니까? 여러분들, 누가 말을 했던 성경에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은 똑같습니다.

 

아버지가 직접적으로 말한 건 권위성이 있고, 내 집 아들을 시켜서 아버지가 말을 줘서 보내면 그건 권위성이 없지요? 같습니까? 같이 봐야 됩니까?

 

이 자리에 목사님이 서서 말을 하면 권위성이 더 있고, 전도사님이 서서 말을 하면 권위성이 없지요? 오늘날 교회에서 그런 식으로 보지요. 그래서 목회자를 초청할 때 ‘우리교회는 전도사님은 안 되고 꼭 목사님이 와야 됩니다’ 하는 그게 뭐요?

 

세상적으로 말씀을 가르쳐도 목사 위에 박사 자격증 하나를 더 달고 오면 권위성이 더 크지? 그래요, 안 그래요? 키고 조그맣고 눈도 조그마한 이런 사람보다도 키도 크고 수염도 허옇고 허연 모시옷을 입고 큰 고무신을 신고 지팡이도 꼬불꼬불 한 걸 들고 있으면 보기만 해도 은혜가 100% 쏟아질 거야.

 

우리 기독자들이 어찌 그리 멍텅구리일까? 왜 머리를 달고 있으면서 생각을 안 하고 분위기에 놀아나고 무슨 옷 입는 것에 놀아나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하나님의 말씀의 근원을 심사하고 파고 들어가고 분별하고 구별하고 하지를 않는지 모르겠어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분별적인 면에 예민해져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펄펄 뛰지도 못하는데 무슨 성령이야? 펄펄 뛰는 그런 걸 돋본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문제가 돼 들어가는 겁니다. 알겠어요?

 

우리는 그런 걸 무시하지도 말고, 성령께서 하시는 거라면 성령님께서 하도록 내버려두는 거고 우리가 그걸 돋볼 필요는 없는 거지. 뭐하는데 그걸 돋봐요? 백만 마디의 방언보다도 진리의 말씀을 하나라도 깨달아서 내가 그렇게 살고, 남에게 인인관계적 연관성을 진리로 맺어가는 그 이상 좋은 게 어디 있어요? 이러면 온전하게 교회가 되어나가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전달자에 따라서 그 말씀의 권위가 가감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어떻게 지껄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은 그대로 있는 거요.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렇게 되고, 저렇게 말한다고 해서 저렇게 되고 그건 아니요.

 

우리 기독자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신령계에 계신 하나님의 그 본체를 그대로 묘사해서 말할 수 있습니까? 말할 수 있어요? 절대 불가능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저렇게 묘사해서 말한다고 해도 아예 하나님에 대해 말을 안 하느니 만도 못해요. 왜냐? 말을 하면 할수록 물론 하나님의 본체가 내가 말을 한다고 해서 쭈그러지는 건 아닌데 듣는 자 입장에서 보면 내가 말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깡통처럼 쭈그러뜨려 놔요. 그런 말이 돼버려요.

 

목사님이 비행기를 타고 오면 권위성이 있고, 리어카를 타고 오면 권위성이 없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예수님이 걸어오거나 나귀를 타고 오면 권위성이 없지? 예수님 당시에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이던,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통해서 전달되었던 말씀이던 그 누가 전달했던 간에 성경 66권 안에는 하나님의 인격이 있습니다.

 

말씀을 했기 때문에 사건이 오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들, 좀 심사해 보십시오. 내가 상대방에게 ‘너 밥 안 먹으면 죽는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밥을 안 먹고 죽었어요. , 그러면 그 사람이 내 예언 때문에 죽은 겁니까, 그 사람이 밥을 안 먹어서 죽은 겁니까? 어떤 거요? 밥을 안 먹어서. 그런데 교인들이 왜 그런 말에 속는지 모르겠어. 오늘날 우리 기독자들이 얼마나 불쌍하고 처절한지? 그 누가 아무리 저주를 해도 내가 저주 받을 짓을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요? 그래요, 안 그래요? 이치가 그렇지. 성경이 그렇지.

 

사람이 이치를 모르면 속아 넘어갑니다. 속아 넘어가고 이용당하고. 그러고서도 자기는 믿음이라고 그러는 거요. 알겠어요? 선악과 독성이 참으로 지독하지.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도 그런 거지만 장소에 따라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은 번하지를 않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시대적인 선후의 차이는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성은 똑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나 또는 행동이나 활동이나 말씀의 권위성은 변하지를 않아요. 그건 전부 다 형식계시고 형용계시지요.

 

말을 안 하고 말하는 거는 뭐지요? 행동이지. 행동으로써 말하는 거. 예수님이 산 위에 올라가셔서 ‘가라사대’ 하고 말씀을 선포하셨지요? 그런데 그렇게 직접 말씀을 하지를 않고 산 위로 올라가는 과정도 있지요. 올라가는 이 과정도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거기에 계시성이 있느냐 그 말이요. 있지요. 계시가 아닌 것은 없어.

 

그리고 자신을 권위 있는 자기로 만들려면 말씀화된 자기로 만들면 됩니다. 주님께서 기본구원의 사역을 해 놓으시고 그것으로 만족합니까, 그것으로 만족을 못하고 있습니까? 기본구원적으로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만족하고 있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명령이 있는데 그 명령을 왜 하는 거요? 성도가 성장하기를 바라고, 장성하기를 바라고, 말씀화 되기를 바라는 거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말씀이 자기 인격화, 자기 사상화, 자기 자체화, 자기 실상화가 돼야 되요. 자기를 그 자기로 만들면 그 세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효력적인 면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고의 그 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존재적으로는 하나님이 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성품적인 면에서 인격적인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야 돼요.

 

주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한 그 말씀의 뜻이 뭐지요? 왜 따라 오라고 그러는 거요? ‘내가 너를 나처럼 만들어 주겠다’ 하는 거지요. 일 부려먹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갖다 붙인다면 이 요나서도 그런 식으로 해석하기가 쉬운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가 안 되는 거요. 일할 곳은 많고 일손은 부족하고 당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내 일 좀 도와라’ 하는 의미에서 요나를 부른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이 들어가면 하나님을 인간 자기인 것처럼 끄집어 내리는 결과가 돼버려요.

 

그런데 오늘날 신앙 성분적으로 분석해 보면 기독교인들이 그런 신앙이 참 많아. 자기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 자인지 자기가 하나님을 도와준대요. 아니, 인간 제가 하나님을 어떻게 도와? 도운다고 하면서 협조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굳히지나 말지. 어그러뜨리지나 말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나 고스란히 받으면 천만다행이게? 도와준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이리 쑤셔놓고 저리 쑤셔놓고 전부 망조 들게 만들어 놓고.

 

여러분들, 하나님이 일손이 부족하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일을 도와드리는 겁니까, 인간이 보기는 그런데 그런 방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당신의 은혜를, 신령한 것을, 최고의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방편입니까? 어떻게 해석이 돼야 그게 신앙적인 해석이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가 말씀을 무시할 자유도 있고 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독자적인 권위성을 가졌기 때문에 인간에게 절대로 무시당하지 않고 인간 자기를 심판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권이 아니고 신권이요 영원한 권능으로 되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말씀이 임했을 때에 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입혀주게 되어 있습니다. 방편이 그래요. 아무나 끌어다가 하지를 않아요.

 

천하 못된 이 요나입니다. 그 시대에 이 요나보다 더 고분고분한 사람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없다고 말해서는 안 돼요. 그런데 교만하고 변덕성도 많고 한 이 요나를 불러다 왜 순종을 요구하지요? 하나님 당신이 이익을 보기 위한 겁니까, 요나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겁니까? 요나. 1차적으로 그렇다 그 말이요.

 

그리고 이 성경 성문계시 속에 불문계시가 있지요? , 문서화 된 이 성문계시 속에는 하나하나마다 전부의 속에는 은밀계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은밀계시 다음에 하나님의 의지계시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올라가야 만이 자기에게 성화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간단히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본질적 의사단일로 맞춰 들어가면 자기의 성화구원은 이루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닮기 쉽다 그 말이요. 신학적 용어로 말하면 성령님과 유기적 활동을 하면 성화가 된다 그 말이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 이성이 작용해서 그 말씀을 배척을 한다든지 아니면 받아들인다든지 하게 되는데 말씀을 받아들여서 영에다 결합을 시켜야 합니다. 이걸 영감의 감화성으로 말을 한다면 말씀이 나에게 올 때에 수락적 영감의 감화가 있어야 자기 속에 말씀이 잘 받아집니다.

 

그 다음에 무슨 감화지요? 각성적 영감의 감화. 받고 깨달아지고. 그 다음에 조명적 영감의 감화. 그 다음에 활동적 영감의 감화. 속에 든 게 있어야 그게 원동력이 돼서 영이 주격이 돼서 내 이성을 움직이고, 내 이성의 움직임에 따라 내 몸이 움직여 나가고. 이렇게 몸은 의의 병기로 쓰여 나가지요.

 

속에 든 것도 없이 어떻게 움직여요? 속에 든 것도 없이 움직여지는 것은 수상한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그래도 성경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 원칙적으로 자기가 수입을 봐야지. 하나님께서 수입 없이 시키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뭘 동원시켜서라도 당신의 일을 못 시키겠습니까? 뱀도 동원시켜서, 나귀도 동원시켜서, 별별 것을 다 동원시켜서 하는데. 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유기적 감화로써 수입을 주려고 그래요. 영원한 이익을 주려고 그래요. 이익이 있는 심부름을 시키려고 그런다 그 말이요. 그러니 심부름을 하려면 아무 것도 모르고서는 안 되는 거요.

 

사람이 만들어지려면 죽을 때까지 만들어져야 하는 건데 그렇지만 교회에서 일을 시키려면 어느 정도 성경을 깨닫고 어느 정도 사람이 만들어진 계도에 올라서야 직분도 주고 심부름도 시키고 하는 거지 교회에 생짜배기로 들어온 사람을 일을 시켜놓으면 오히려 그 사람이 못 쓰게 돼요.

 

그리고 교회에서 메시지 전달이 사람의 속을 바꿔놓는 게 없다면 그 목사는 일을 맡긴 생짜배기 그 교인에게 쫓겨나게 돼 있어요. 생짜배기 그 교인이 뿔이 돋아가지고 그 목사를 쫓아내게 돼 있어요.

 

그러면 교인들의 돋아나는 못된 뿔을 잘라주라고 그랬는데 그 교인을 누가 그렇게 키웠어? 목사. 그런데 원수는 누구라고 그러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워줬는데 네가 나를 이렇게 대하느냐’ 하고 원망을 하지. 그 참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때는 소리로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몸을 통해서 활동이 되어서 나옵니다. 이때에 우리의 영적인 면이 커지는 거지요. 그리고 이 말씀이 이성을 통해서 몸으로 나올 때는 이성과 몸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자는 예수 믿어갈수록 교회 나갈수록 설교를 들을수록 예수 믿기 전의 기존적인 소원 목적, 기존적인 지식, 기존적인 타락적 취미는 자꾸 바꾸어져야 돼요. 안 바꾸어지면 그건 뭐가 잘못됐어요.

 

오늘날 우리 기독교의 문제입니다만 성경을 읽어놓고 기준을 어디에 맞추는가 하니 일반적인 사람도 능히 할 수 있고 이해가 가는 일반 도덕성에 사람을 맞춰놓는단 말이요. 기준을 그렇게 세워놔요. 그렇게 세워놓고 성경에 보면 ‘너희들을 선한 일에 쓰려고 만들었다. 사랑하라. 착하라. 옳게 살아라’ 하는 이런 걸 갖다가 개념적으로 사회에서 쓰는 도덕성적인 개념으로 끌어다가 성경을 맞춘다 그 말이요.

 

이렇게 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춰져서 바로 섭니까? 사람이 안 고쳐져요. 타락적 기존지식에서 나온 그게 바꿔져야 되는데 안 바꿔져요.

 

여러분들, 기본구원을 받았어도 간혹 가다가 잘못될 수도 있어요. 유혹 받을 수도 있고 미혹 받을 수도 있고 시험에 넘어갈 때도 있고 그래요. 우리는 그게 문제가 아니고 기존적 사상 그것이 바뀌어 나가야 돼요. 그러면 행동 활동은 자동적으로 뒤따라가는 거요. 그걸 ‘하라 마라’ 할 것 없어요. 문제는 자꾸 바꿔.

 

오늘날 영적인 면에서 보면 사람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전부 다 불구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준 것처럼 그런 오만 잡병이 다 들어있어요. 육체는 눈에 보이니까 구태여 해석할 필요가 없는 거고.

 

그런데 성경의 기준이 누구지요? 기준이 누구요? 성경에 하나님께서 ‘하라 마라. 사랑하라. 어째라’ 하는 모든 명령이 일반 타락된 기존적 사회적 그 개념을 들고 와서 그 개념적으로 말한 겁니까, 하나님의 신적인 신령한 개념으로 말한 겁니까? 어느 거요? 후자. 하나님의 신적인 개념, 하나님의 신적인 도덕성.

 

아가페 이게 뭐요? 신적인 사랑 아니요? 진리가 들어있는 사랑, 의가 들어있는 사랑. 이 사랑은 임시적인 사랑이 아니고 영원한 사랑, 궁극적인 사랑. 이 사랑은 때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행동 면에서 활동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안 나타날 수도 있고.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회가 무엇 때문에 최고의 고상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 분이 그 기준이 아니요? 신적인 척도 아니요? 왜 이 표준만 하더라도 죽도록 이 표준에 맞춰서 바꿔가려고 그래도 못 다 하는 건데 무엇 때문에 그 기준은 다 내버리고 그 척도는 다 내버리고 타락된 일반적 도덕적 사회적 기준을 교회에 턱 세워놓고 그 기준에 맞춰서 ‘착하게 선하게 살아라’ 하느냔 말이요.

 

아따, 참 잘 가르쳐 주고 있다. 타락적 기준에 맞춰져 있는데 어떻게 그게 사람이 바로 돼.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성품이 그렇게 돼져 나가겠느냐 그 말이요. 그렇게 가르치는 건 거짓 선지자가 아닌가? 그렇게 가르치면 사기꾼이 아닌가?

 

여러분들, 요한계시록에서 보지요? 궁극적 결과에 가서 보면 신령계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대하는 천군천사라든지 스랍들이라든지 하나님을 대하는 그 전부가 뭐요? 예수님이 단순히 일반적 도덕적 차원에서 행하고 가서 그러한 대접을 받는 겁니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지.

 

예수님의 사역에는 중보적 사역이 들어있고, 하나하나 움직임 속에는 우리의 구원도리가 들어있고, 신적 성품의 신적 사역이 들어있고. 그런데 어떻게 심판을 받으려고 누구를 기준을 세워 놔.

 

우리에게는 주님이 기준이고. 그렇지요? 역사 속에서 활동 방편 속에서 생활 속에서 큰 사건 속에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은밀계시를 깨닫고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그 의지를 깨닫고 내가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 말이요. 이런 걸 인간 도덕적 차원에서 어떻게 깨달아.

 

선악과를 옛날 창세기 때만 따먹었어요? 지금도 영적 교훈적으로 선악과를 먹이고 있어. 어디서 그래? 교회에서 그래. 선악과를 따 먹여주는데도, 세상을 실컷 자랑을 해도 하나님의 종이라네. 유명한 사람이라네. 그게 세상이지 어떻게 천국이야? 참 기가 막힐 노릇이요.

 

제가 하는 말이 늘 그래요. 지금도 저는 그렇게 깨달아요. 육의 환난이 오기 전에 먼저 진리의 환난이 온다. 그러니까 진리환난이라고 하는 거는 육신이 잘 살고 못 살고와는 관계가 없어요. 자기가 아무리 잘 살아도,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아도 하나님 말씀, 진리지식의 말씀을 못 받는 그 자에게는 그건 벌써 앙화야. 벌써 하나님의 심판대에 놓여져 들어가는 거요.

 

그러나 아무리 자기 생활이 고달프고 인간 보기에 고난스럽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의 진리지식의 말씀을 바로 받아먹을 수 있고 영적인 면에 살이 쪄간다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재앙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거요. 현재적으로 성화구원을 이뤄나가고.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성화구원의 도는 현재를 놓치면 성화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니 일상생활 속에서 절대로 현재를 놓치지 말아라. 믿음으로 한다? 그런 의미가 아니고 사상이 그렇게 돼야 된다. 성화구원의 사상으로 하는 것은 믿음으로 하는 거지요.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보잘 것 없는 저희들을 영원 전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신의 의지세계에서부터 생각하시고 저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기본구원을 입혀놓으시고, 그것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당신처럼 온전자로 만들어져서 신령한 그 천국에서 하나님 당신처럼 그 하늘나라를 상속하여 마음 것 누리고 통치하고 사용하고 활용하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면에 막힘이 없이 하나님과 애적적 수수관계적으로 얼마든지 통할 수 있고, 도덕성적으로나 영적인 면에서나 능력적으로나 진리지식적인 면으로나 하나도 막힘이 없이 그 좋은 천국에서 효율적으로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그날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지 아니하시고 이 세상에서 크고 작은 사건 환경 속에 놓아두어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편으로 당신처럼 만들려고 하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로 감사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하나님의 그 속마음도 모르고 환경이 나한테 좋고 환경이 나한테 좋게 대해주면 나는 좋아하고 웃고, 이것이 천국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내 마음에 맞지 않고 싫은 환경이나 존재나 그런 사건이 오면 그만 싫다고 그러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그 사건 환경을 나에게 주셨건만, 최고의 좋은 것으로 나에게 주셨건만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무지몽매한 저희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어지간히 태워드린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부끄럽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더군다나 저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놓으시고 이렇게 저희들이 천국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저희들에게 주어서 천국에 대한 자세한 면을 저희들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이제 저희들이 이 세상을 쳐다보고 깨달을 때에 이 세상에서도 각자 실력적 차등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예수 믿는 자로서 너나 나나 다 같이 예수를 믿고 있지만 이제 영적인 면에서 실력적으로, 진리지식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성품적인 면에서, 지능과 기능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는 여기에 영적인 면에 믿음적으로 실력적으로 얼마든지 격차가 나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신령한 격차는 영원히 가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이 세상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다 자기 자식들을 세상에서 일등자로 만들어 놓기 위해서 여러 학원으로 보내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그런 것을 보고도 하나님의 뜻을 못 깨닫는 미련한 미련퉁이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성경을 깊이는 모르지만 눈에 나타나 보이는 그런 것을 볼지라도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 당신 옆에 누구든지 앉혀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이 세상에서도 주님과 멀리 떨어져서 인격적 결합이 없이 사는 신앙생활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이 분을 냅니다. 시기 질투를 합니다. 분을 내어서 심판을 합니다. 진노를 합니다. 그런 마음을 볼 때에 하나님의 속마음을 우리가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저희들이 살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살겠습니까? 잠깐 동안 나그네 생활하는 동안에 모든 사건 환경을 잘 이용하고 응용해서 그 사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잘 닮아나가는 면에 이익을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이익을 볼 수 있는 이 나그네 생활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당신의 온전한 성품을 닮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같이 할지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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