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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속에서 그 분의 인격을 붙잡아야 신앙이 됩니다.

요나 궁극이............... 조회 수 726 추천 수 0 2014.10.24 09: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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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1:1-3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1절-3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인데,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분의 의사표시입니다.

 

자기의 의사를 자기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려면 말로써 나타내고 글로써 나타내고 권면이나 명령으로써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면 인간이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 활동은 진정한 의미에서 순종에서 활동이 나와야지 순종이 아닌 속에 대립성을 지닌 채로 한 활동은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말씀에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말씀에서 깨달아져가지고 마음에서부터 순종이 돼가지고 ‘아멘’이 되고, 그 다음에 기쁨으로 활동을 하게 되는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임했는데, ‘말씀’ 하는 이게 요1:1에 보면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헬라어 원어로는 로고스인데 사도요한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인격성으로 봅니다.

 

의사는 그 분의 인격에서 나오지요? 그 사람의 뜻, 의사, 하고 싶은 욕망, 소원 목적 그런 의사성은 그 분의 인격에서 나온다 그 말이요.

 

그 분의 인격에는 지혜가 있고 지식도 있고 선 사랑 거룩 진실 그리고 의로운 것 그리고 주권이 있습니다. 이게 전부 다 인격이란 말이요. 이걸 가지고 있는 분은 의사표시를 하게 되는 거지요.

 

그런고로 본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에서 온 말씀이다. 단순히 소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인격이다 그 말이요.

 

사람의 말은 사건을 말하고 있고 사역을 말하고 있어요. ‘어떤 일을 해라. 크게 이루라. 잘 해라. 왜 잘 못하느냐?’ 등등 어떤 일을 놓고 사람은 말을 한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여호와의 말씀도 일을 두고 하는 말씀이냐? ‘이 일을 네가 잘못했으니 벌을 받아라. 잘 했으니 상을 받아라’ 하고 일을 목적을 두고 말씀을 하시느냐? 그게 아니란 말이요. 인간은 보통 일을 두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 자체에 목적을 두고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이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 그곳을 쳐서 외쳐라. 복음을 전하라 그 말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그리고 전하라고 한 그 뒤로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악독이 너무 심하다’ 이렇게 돼 있지요? 그러니까 요나의 입장에서 ‘악독이 너무 심하니까, 악이 차올랐으니까 전하라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이건 사건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사건 때문에 요나를 부른 거냐, 아니면 그 사건을 이용물로 해서 요나에게 뭐가 두렵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냐? 요나는 천국에서 인격자로 능력자로 살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오셨다 그 말이요.

 

말씀으로 오시는 것도 여러 가지 측면이 있는데, 아버지가 자식을 누구 집에 심부름을 보내듯이 당신의 종을 보내주시는 것.

 

그러면 종을 보내신다는 게 ‘우리 아버지가 괭이 좀 빌려오랍디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 당신은 당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종을 보내는 것이냐? 그게 아니고 물론 종도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지만 종을 붙잡고 오셔서 종을 통해서 말씀을 하신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런 경우는 종을 붙잡고 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말씀을 하시는 거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격적으로 찾아오신 거다 그 말이요.

 

우리가 신앙 면에서 볼 때에 여러 가지 신앙이 있는데, 무조건적으로 나가는 그런 신앙이 있고, 또 목적만 딱 붙잡고 나가는 신앙도 있고 즉, ‘나는 천국 간다’ 딱 이 생각만 가지고 있으면서 현재적으로는 그 목적을 위해서는 살지를 않는 믿음이 있다 그 말이요.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습관적으로 믿어가는 신앙. 말씀을 들을 때나 예배를 올릴 때나 아무런 뜻도 없이 감화성도 없이 그저 주일이니 교회 나가고 하는 그런 신앙이 있는가 하면, 또 말씀만 붙잡고 나가는 신앙이 있어요. 이런 신앙이 있는가 하면 즉, 말씀도 붙잡았지만 말씀 속의 인격을 붙잡고 사랑으로 결합이 돼가지고 동행하는 신앙이 있다 그 말이요. 이게 참 높은 신앙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말씀만 온 것이 아니고 인격으로 찾아오셨는데 찾아오신 그 목적이 니느웨 성을 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셨느냐? 만일에 단순히 니느웨 성을 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셨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속 중심을 다 아신다 그 말이요. 이런 분이 요나의 중심을 몰라서 패역성이 강하고 주관성이 강하고 적개심이 강한 이 요나를 찾아 오셨겠느냐 그 말이요. 그 때 당시에 요나보다 훨씬 더 악독한 사람만 있었느냐 그 말이요. 요나보다 훨씬 더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니느웨 성을 구하기 위한 목적만 있다면 왜 이 요나를 찾아오셨느냐 그 말이요.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요나를 찾아와서 요나를 보냈다 그 말이요. 요나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입히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요나가 ‘아, 나에게 하나님 당신의 성품을 입히시기 위해서 나를 불렀구나’ 이렇게 알고 하나님이 ‘니느웨 성으로 가라’ 하는 첫 명령에 ‘예’ 하고 갔더라면 아마 요나의 패역성 주관성 변덕성 조급성 회의성 적개심 시기질투심 이런 것은 자멸했을 겁니다. 요나 속에서는 그런 것이 싹 물러갔을 것이고 하나님의 성품이 입혀졌을 것인데 그런데 요나가 ‘예’ 그랬습니까? 그러지 않았다 그 말이요.

 

여기 보면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 그랬단 말이요. ‘아밋대의 아들 요나.’ 즉 선지자 같은 요나, 목사 같은 요나, 집사 같은 요나. 이게 썩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지요. 아밋대의 아들 요나, 하나님의 종 요나. 이 참 뭔가 이상하게 들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찾아오시는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을 입혀주기 위해서 찾아오셨다 그 말이요. 찾아오시는 방편이 일을 잡고 찾아오시던, 사람을 잡고 찾아오시던, 미운 사람 고운 사람을 잡고 찾아오시던 전부는 목적은 하나. 일 크게 이루라는 그게 아니고 당신의 성품을 입혀주시기 위한 목적 그 하나 때문에 이 방편 저 방편 다각적인 면으로 잡고 오신다 그 말이요.

 

직접적으로 말씀으로 찾아오시기도 하고,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거. 아담에게도 말씀으로 찾아왔지요? 가인에게도 말씀으로 찾아왔고, 물론 노아에게도 말씀으로 찾아왔어요. 이 말씀으로 찾아오실 때 내가 그 인격과 결합이 되면 나는 명령에 움직이지 않고 자원적 능동적으로 움직여 나가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특별히 생각할 곳은 창5:에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간을 동행을 하면서 자녀를 낳았지요? 그래서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다고 그랬지요? 그러면 에녹이 하나님과 어떤 동행성인가?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형체로 물체로 나타나가지고 에녹과 함께 동행을 했다는 그 말씀인지, 아니면 형체는 없지만 인격적 결합으로 된 동행의 신앙생활인지?

 

또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말씀을 붙잡고 그 분의 인격과 결합이 된 동행성이냐, 아니면 말씀은 붙잡기는 붙잡았는데 말씀 속의 인격을 못 붙잡은 거냐? 이게 다릅니다. 똑같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형체이지만 자기와 인격적으로 결합이 되어가지고 동행이 되면 성도 자기는 혼자 있어도 심심한 게 없습니다. 절대로 심심한 게 없어요. 항상 자기 속에서 말씀으로 잔치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있고 하니까 하루 온 종일이 지나가도 심심한 게 없어. 오히려 그러한 시간이 없으면 ‘내가 오늘 뭘 했나’ 하며 더 허전해지는 그런 상태가 된다 그 말이요. 인격적 결합에는 심심한 게 없습니다. 주님과의 인격의 결합과 동행에는 그 속에는 모든 게 다 들어있다 그 말이요.

 

그리고 이 분과 끊어지면 어떤 상태가 되느냐? 주님과 끊어지면 세상이 그리워지고 쓸쓸해지고 고독해지고 그래요. ‘나 혼자서 어찌 살까’ 자꾸 이런 식으로 세상에 대한 걱정 근심이 자꾸 몰려오는 거지요. 그러나 주님과 동행이 되면, 하나님과 인격적 결합으로 동행이 되면 모든 것은 초월적 신앙이 돼버린다 그 말이요.

 

우리가 성경을 보면 사도바울은 주님과 동행을 하다 보니 세상이 다 초월이 돼버렸습니다. 몇 살에 장가를 가겠다는 그것도 그냥 없어져 버렸어요. 믿다 보니 나이가 들어버리고.

 

우리가 이런 거 경험 많이 하지요? 어떤 일을 신경을 써서 하나 보니 그만 하루가 언제 지나가 버렸는지 점심때가 저녁때가 지나가 버려. 우리가 그런 경험을 종종 합니다.

 

사도바울의 삶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면 전부는 주님과 인격적 결합으로 충만으로 돼 있어요. 에녹은 하나님과 인격적 결합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극복이 아니고 초월이더라. 이걸 어떻게 보면 자아도취같이 보이겠지요? 그러나 그게 아니고 인격적 결합이라 그 말이요.

 

어른들은 다 경험했을 거요. 마치 뭣과 같은가 하니 신랑 속에는 누가 들어있지요? 신부가 들어있고, 신부 속에는 누가 들어있어요? 신랑이 들어있어요. 쉬운 예를 든다면 그게 인격적 결합이라. 그러다 보니 하루가 지나가고 이틀이 지나가고 언제 다 지나가 버리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리는 것. 이렇게 서로의 속에 서로가 들어있듯이 그 말이요.

 

에녹은 자식을 낳으면서도 하나님과 동행이 됐다 그 말이요. 아이를 하나 낳을 적마다 그 아이에게 마음이 빼앗기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동행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에녹과 하나님과의 인격적 결합에 있어서 에녹의 마음속에서 자식이 나타나서 그 인격적 결합을 끊지를 못했어요. 진짜 자식이 와서 끊는다 그 말이 아니고 에녹의 마음속에 자식이 나와 가지고 자기 속의 그걸 못 끊어놓는다 그 말이요. 결합이라.

 

그런고로 우리는 사건을 물리치는 기도를 하지 말자. 인격적 결합이 되어있으면 그런 기도를 하지를 않고, 할 필요도 없다 그 말이요.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 섭리에 의해서 오게 되는 거니까요.

 

에녹은 장가가서 아이를 낳았지만 하나님과 인격적 결합은 떠나지를 아니했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는 행이든 불행이든 상관 말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 말이지요.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 보니 죽을 것이 없이 살았다 그 말이요. 살아온 그 자체가 전부는 천국이더라. 하루하루 살아오는 그 자체가 전부 다 천국에 소속으로 되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천국으로 갈 수밖에 더 있느냐 그 말이요. 이렇게 살게 해 주시려고 인격의 말씀이 찾아오시는 겁니다.

 

우리가 그 분과 동행을 하려면 의사단일이 안 되면 동행이 안 되는 거지요. 사람이 여행을 갈 때에 의사충돌 마찰이 자꾸 되면 고역이 돼버립니다. 의사불통이니까 동행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가만 보면 결혼해가지고 의사단일이란 말이 좀 어폐가 있습니다만 어쨌든 의사가 서로 통하지를 않아서 고통이 되니까 ‘아이고,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 큰일이다’ 하고 신혼여행 갔다 와서 그 날로 파혼하는 신랑 신부가 혹 있지요?

 

우리가 창2:24인가 보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여자와 합하여’ 그렇게 돼 있고, 엡5:31엔가 보면 ‘사람이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라고 돼 있단 말이요. 그러니까 모두가 자기의 주관 포기입니다. 완전히 자기 주관 포기요. 여자도 자기 주관을 포기하고, 남자도 자기 주관을 포기하고. 그러니까 ‘너도 나도 예수님의 의사대로 살자’ 그렇게 된단 말이요.

 

그러면 왜 우리 인간이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 왜 인간 고집대로 말고 하나님의 고집대로 살아야 하느냐? 사실 고집이란 말은 안 좋은 면에서 교만이 나가는 이게 고집이지 하나님은 고집이 아니지요.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만 되느냐? 인간 자기는 차원적으로 저질이요 저차원이요 하나님은 고차원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높으시기 때문에. 가치평가 판단적으로 인간 자기는 하나님보다도 훨씬 저차원이요 저질이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살아야 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나가야 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입혀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임시성적으로 잠깐 동행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영원적인 동행을 위해서 임시적인 동행을 하시는 거라 그 말이요.

 

오늘 이 물질계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행성은 수동적인 동행이지만 천국의 동행성은 능동적인 동행이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바로 모르면 순종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것을 그 후로 죽 나오는 장면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면 요나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요나에게 한 사건이 오니까 요나의 마음속에 들었던 것이 그게 신앙인지 신앙이 아닌지 드러나 버리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도 평소에 자기가 믿음이 있는 것처럼 혹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것이 자기 착각일 수가 있어요. 무슨 말인가 하니 평소에 말씀속의 인격과 결합이 되면, 하나님과 결합이 되면 그 성도는 항상 준비상태가 돼 있어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이 어떤 사건을 통해서 오더라도 그 사건과 접해질 때에 내 마음속에 신앙이 든 것이 그대로 나오게 돼 있어요. 그런데 평소에 그것이 아닌 신앙으로 돼 있으면 사건이 오면 말씀의 신앙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그 말이요. 인간 자기 속의 인간이 드러나 버린다.

 

노아는 120년 동안을 미리미리 움직여졌지요. 뭐하는데 미리미리 움직여졌지요? 뭐 짓는데? 방주를 짓는 데로 마음이 미리미리 움직여졌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홍수라는 심판이 왔을 때에 미리미리 만들어진 그 신앙은 물 위에 다 떴단 말이요. 말씀대로 됐으니까 심판 위로 다 떠버렸다 그 말이요. 심판을 안 받았다 그 말이요.

 

그러나 요나는 평소에 그게 없어서 말씀이 사건의 명령으로 왔을 때 그만 도망을 가버렸다 그 말이요. 평소에 요나가 성도로서 또는 선지자로서 또는 목사라면 목사로서 집사라면 집사로서 장로라면 장로로서 말씀으로 닦아놓은 신앙이 아니더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사건이 오면 그만 도망을 가버려.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들어가지를 못 해. 들어갔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성경에 말씀이 오는 걸 보면 어떤 때는 직접적으로 말씀이 오셨고,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면서 누가 말을 하는가 하니 천사가 말을 하더라 그 말이요. 천사가 말을 이어 나가. 그러니까 천사가 말을 하다가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런다 그 말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고, 또 이사야가 자기가 말을 계속 하면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런단 말이요. 사람을 보면 어디까지나 이사야 자신인데 말을 하면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라고 하니 이사야 자기가 여호와인가? 이런 경우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때로는 짐승을 통해서도 말씀을 하십니다. 발람선지자에게 나귀가 한 말이 있고, 때로는 마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는 뭐든지 잡고 쓰시기도 했고 말씀을 하기도 하셨는데, 그러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마귀가 예수님에게 한 그 말은 누구의 말이냐?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은 당신의 의사와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뭐든지 잡고 쓰신다 그 말이요. 짐승도 마귀도.

 

그러면 마귀가 예수님에게 한 말은 누구의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 마귀가 한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마귀를 상대해서 마귀의 그 말을 반박하는 예수님의 말은 누구의 말입니까? 마귀를 상대해서 반박하는 분은 예수님이신데 그러면 그 예수님의 말은 누구의 말이냐? 예수님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마귀의 말은 누구의 말이 되지요?

 

우리가 여기서 생각을 깊이 해야 합니다. 마귀의 말이 하나님의 말이라면 예수님께서 그 말에 순종을 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그 말에 순종을 안 했거든. 그러면 마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거지요?

 

우리가 여기서 계시성을 생각을 해야 됩니다. 계시성을 모르면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마귀의 말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하게 되고, 그러면 ‘그 마귀의 말에 반박을 한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의 말이냐?’ 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예수님의 그 말씀 역시도 성경이다’ 하게 되니 말이 참 이상하게 되지요? 마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예수님이 그 말에 순종을 해야 하는데 순종을 안 했으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성경의 계시성으로 보면 마귀가 성경구절을 인용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귀를 등용시켜서 보여준 것이지요. 그래서 마귀의 그 말도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 말이지.

 

하나님이 마귀를 왜 등용시켰지요? ‘마귀도 성경구절을 들고 이런 말을 한다. 이렇게 한다’ 하는 이것을 누가 보여줬다고? 마귀가 보여준 거요, 하나님이 보여준 거요? 하나님이 보여준 거지요. 마귀 자기는 ‘마귀도 성경구절을 이용한다고 하는 걸 알려줘야겠다’ 하고서 성경구절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등용시켜서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이요.

 

또 예수님께서 마귀의 말에 순종하지 않은 것은 ‘성도들아, 세상목적을 위해 성경구절을 아무리 인용해도 그것은 마귀의 말이니 너희들은 순종하지 말라’ 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니 이게 누구의 말?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 말이요.

 

그게 이제 성경의 계시성에서 나타나는 말인데, 그러면 또 하나, 발람선지는 나귀의 말을 거역했습니다. 사람의 말을 거역한 게 아니라 나귀 짐승의 말을 거역했어요. 물론 짐승이 말을 한다는 게 성경밖에 없는데, 그러면 나귀의 말을 발람선지자가 거역을 했는데 이건 누구의 말을 거역한 셈이지요? 나귀의 말을 거역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겁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성경의 계시성에서 첫째는 역사계시가 있는데 역사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또 형식계시가 있는데 제사나 예배의식 그런 게 다 형식계시이고, 또 상징계시가 있는데 사람이나 짐승을 들어서 말씀하시는 이게 상징계시란 말이요.

 

그 다음에 영적 계시가 있는데 우리의 영을 위해 주신 말씀. 여기에는 은밀계시가 있는데 성경구절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가 한 말이 나타내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은밀계시라 그 말이요. 그 다음에 의지계시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 의지가 있는데 우리가 이런 계시성을 모르면 하나님과 인격적 결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안 되는 겁니다. 옳은 신앙이 돼 나오지를 않는다 그 말이요. 결합이 안 되니까.

 

성경 66권 구구절절이 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우리가 이 말씀에 구구절절이 순종을 했어도 인격적 결합이 안 된 순종은 신앙이 아니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속의 인격을 찾아야 된다.

 

성경이 그냥 독자적으로 있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일단 어떤 자에게 건너서 나올 때는 그것이 마귀의 말이 될 수도 있다 그 말이요. 목적이 바꿔져서 나오면 그렇다 그 말이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좀 생각을 해야 되겠는데 아무리 교회의 일이라도 교역자가 자기의 어떤 세상적인 종교적인 목적달성을 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갖다 붙이게 되면 하고자 하는 그 일에 대한 목적은 빨리 될 수가 있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성경구절을 들어서 그렇게 하니까 교인들이 ‘아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고서 믿고 하는 거니까. 쉬운 예를 들어서 예배당을 짓는데 성결구절을 대서 강조해 나가면 예배당 건물을 빨리 지을 수 있다 그 말이요.

 

그러나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인용했다면 이건 하나님의 목적과 의사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사와 목적은 뭐요? 성도에게 구원을 입히는 것. 온전하게 만드는 것. 그런데 성경구절을 인용해서 사역에다 갖다 붙였다면, 또 그렇게 해서 그 일이 크게 됐더라도 그것은 마귀가 성경구절을 인용한 거나 다름이 없다 그 말이요. 마귀가 땅의 일이 잘 되라고 성경구절을 인용한 거니까. 우리가 그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목적이 비뚤어지면 목적이탈이 돼버립니다. 성경에 ‘제물을 바쳐라. 물질을 바쳐라. 기도를 해라. 전도를 해라. 성경을 봐라. 뭘 하라, 뭘 하라’ 하고 명령을 하는 것은 전부 다 우리에게 구원을 입혀주시려는 것이 목적이라 그 말이요.

 

복음서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도 있고 사도들의 편지라든지 그런 것도 있는데 그러나 그 권위성은 똑같아요. 왜 그러냐? 발설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또 왜 권위성이 동등이냐 하면 말씀 속에는 똑같은 한 분의 인격으로 돼 있기 때문에 그 권원성은 똑같다 그 말이요. 사도들의 편지나 역사서나 그 권위성은 다 똑같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그 분의 인격과 결합이 돼서 순종이 돼나가면 구원이 입혀지는데, 구원이 입혀지면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면 나에게로부터 사망성이 나가고, 또 하나님의 거룩성이 나에게 들어오면 나에게로부터 거짓 것이 나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어진다 그 말이요. 이래야 만이 신앙이 되는 겁니다.

 

그런고로 매사에 모든 사사건건이 교회생활도 그렇고 일생생활도 그렇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품을 입혀주시려는 역사를 하시는 것을 알고 우리는 요나가 이걸 알지를 못해서 패역을 부려나간 것처럼 그런 그 패역적인 신앙성을 가지면 안 되겠다 그 말입니다.

 

기도 올립시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신앙이 없습니다. 말씀은 들으나 잊어버리기를 잘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결심을 하고 각오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살 때는 그만 또 세상 것이 우리의 속에서 자리를 잡는 것을 저희들은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현재적으로 우리 각자 속에 믿음이 별로 없습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향하신 그 목적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성경에도 말씀을 하셨듯이 이 세상에 살면서도 눈에 보이는 모든 사사건건 모든 환경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우리 앞에 지나가게 하시고, 또 우리로 겪게 하시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입히시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저희들이 그러한 신앙을 잊지 말고 우리에게 사사건건이 모든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주실 적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입혀주시려고 하시는구나’ 하고 나갈 수 있게 해 주시고, 또한 이걸 깨닫지 못하고 나갈 때에는, 자기의 믿음이 연약해질 때에는, 담력이 없어질 때에는 하나님께 진리와 지혜지식을 구하고 믿음을 더욱 구하고 하나님을 바로 붙잡고 목숨을 내걸고 나가는 당신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사건을 갖고 와서 명령을 했을 때에 요나는 평소에 자기 속에 들었던 패역성이 적개심이 드러나 버렸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 앞에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이 왔을 때에 평소에 늘 닦았던 깨달았던 그 신앙의 마음으로 대립이 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 사건을 주셨구나’ 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아멘이 되고, 그 다음에 진리와 지혜지식을 구하면서 모든 사건을 믿음으로 지혜롭게 이겨나갈 수 있는 차원 높은 신앙을 저희들에게 허락해 주셔서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하게 입고 갈 수 있는 복된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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