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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욘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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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장 1절-3절.
1절-3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임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방편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임하는 방편을 잘 알고 있어야 되겠어요.
첫째는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실 그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적으로 말씀으로 하신다 그 말이요. 우리는 이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과 인격적 결합을 해가지고 동행을 해야 합니다. 인격적 결합적 동행을 해야 한다 그 말이요.
성경에 보니까 에녹은 자녀를 낳으면서 300년간을 하나님과 동행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유형적 동행이 아니고 인격적 결합으로써 무형적 동행입니다. 인격자이신 하나님과 인격적 무형적 동행을 하게 되면 세상을 초월하는 초월적인 신앙을 갖게 됩니다.
말씀이 나에게 왔을 때 발설된 소리를 어떻게 듣고 사느냐? 무형적 인격적 결합을 하고 사는 신앙이 있고, 발설된 소리만 잡고 사는 신앙이 있어요. 예를 들면 ‘하라고 했으니까 해야지.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안 해야지’ 하는 그게 있단 말이요.
그런데 여기서 좀 더 들어가서 ‘왜 하지 말라고 했느냐? 왜 하라고 했느냐?’ 그걸 알아 들어가니까 ‘아, 그래서 하라고 했구나. 그래서 하지 말라고 했구나’ 이게 있단 말이요. 그러니까 ‘하라. 하지 말라’ 그 이유를 알고서 하고 안 하는 것.
그러니까 발설자의 그 말만 잡고 신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발설자의 그 인격과 결합을 해서 신앙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붙잡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신앙의 깊이가 달라져요.
우리가 기독교 안에서 여러 가지 신앙을 볼 수가 있는데, 1단계 신앙을 보면 교회 다니면서도 ‘교회 다녀도 별 볼일 없다’ 하며 별 볼일 없는 식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고, 이런 사람은 교회를 놀러 다니는 건지 정말 말씀을 깨닫고 신앙하고 싶어서 다니는 건지 그게 뚜렷한 표가 없이.
그 다음에 2단계 신앙은 교회 다니면서 ‘내가 복 받고 잘 살아야지’ 하는 그런 신앙이 있고, 그 다음에 3단계를 보면 ‘나는 천당만 가겠다’ 하는 신앙. 그러니까 목적만 그렇게 가지는 신앙이 있고, 그 다음에 4단계는 습관적으로 가지는 신앙. 5단계 신앙은 말씀만 생각하면서 말씀을 기억하면서 사는 신앙. 이거는 보통 보면 보수신앙에 많이 있습니다. 좀 율법적인 냄새가 나지요? 그 다음에 6단계 신앙은 무형적 인격적 동행생활을 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형적 인격적 동행생활로 나가는 신앙을 가져야지요?
우리가 발설하신 그 분을 만나기 전에는 다른 것을 사랑하고 사모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발설자의 그 인격을 만났을 때는 그 사람은 만족이고 냉철하고 명철해집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그래요. 진리이치가 들어가면 사람이 그렇게 됩니다. 맹목적이 되지를 않아요. 그리고 부모자식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특히 주의 종들은 전달자가 돼야지 발설자가 되면 안 된다. 무슨 말인가 하니 어려운 일이 올 때에 ‘참아라, 참아라’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참아라, 참아라’가 아니고 초월하게 만들어야 된다 그 말이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쓰리고 아픈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셨다고 하며 육체의 고난을 고조시키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자요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한 자라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보통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육신의 아픈 것을 꾹 참고 십자가의 고난으로 돌아가셨다’ 라고 하며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아픈 데에다 자꾸 신경을 쓰게 한다 그 말이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고통을 참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거는 아니다 그 말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아픔에게 삼키지를 아니했습니다. 아픔에게 삼켜버리면 그거는 쓴 잔을 마시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중보사역으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결합을 시키는 일을 하시는데 사단 마귀는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게 해서 순간적이라도 예수님의 마음을 빼앗아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떼려고 하는 거지요. 육신 쪽으로 마음을 뺏어가려고 하는 이거는 사단의 아주 교묘한 고차원적 수단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게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쓰라린 고통 때문에 죄에서 해방되는 성도의 구원을 잊어버린 것이냐? 즉 육체의 쓰라린 고통 쪽으로 그 마음이 순간적으로라도 갔을까, 아니면 십자가를 지심으로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는 순간에 성도를 향한 사랑이 극치에 있는 것이냐? 두 번째지요. 사랑의 극치.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음의 수지성은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는 그 순간이 극치에 있다 그 말이요.
애정성이 빈약하면 고통에게 삼킬 수밖에 없고, 사랑의 극치가 되면 고통도 초월해집니다. 방안에 불이 났는데 그 방에 어린아이가 누워있다. 그러면 어머니가 그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뜨거움을 못 느낄 정도로의 그 마음을 가지고 뛰어 들어가지 않아요? 아기를 앉고 나온 후에야 자신의 몸이 그슬리고 살이 불에 데이고 쓰리고 아픈 그걸 느낀다 그 말이요. 우리 사람의 정신이 그래요. 마음의 수지성이 어느 한 쪽으로 가서 있으면 그게 그만 초월이 돼버려요.
예수님께 도취된 자는 기도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기도가 달라진단 말이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다가 나중에는 천사를 통해서 또 말씀하시고, 또 처음에는 천사가 말하다가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도 있다 그 말이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인간을 통해서 말씀을 하기도 하시는데, 대부분 인간을 통해서 말씀을 하시는 방편을 가장 많이 쓰십니다. 선지사도들을 통해서 제사장들을 통해서. 성경에 보면 선지자가 말을 하면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런 말들이 있다 그 말이요.
네 번째는 동물들을 통해서. 다섯 번째는 마귀나 사단을 통해서. 욥기서에 보면 사단 마귀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도 있고, 또 예수님이 금식기도 하신 후에 마귀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도 있다 그 말이요.
이렇게 천사들로 통해서, 인간으로 통해서, 짐승을 통해서, 마귀와 사단을 통해서, 하나님 당신이 직접 말로 언어로 표현을 하시기도 하지만 또 언어나 서한 편지도 있고, 또 사건 활동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활동성, 인간의 활동성, 동물의 활동성, 어떤 사건, 또 우주의 창조, 자연만물 등등 모두는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전부는 우리의 구원목적을 위해서 계시하신 계시목적에 의한 활동영감의 감화에 의해서 된 것이기 때문에 존재나 사건 모든 활동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 말이요. 계시목적에 의한 활동영감의 감화에 의해서 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런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 언어로 표시하기도 했고, 사건이나 행동으로 표시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66권 성경을 문서계시 혹은 성문계시라 하는 겁니다. 성경의 역사적인 사건을 역사계시라 한다. 성경은 역사계시지요. 성경에 역사가 많지요? 전쟁 하는 역사, 왕들이 죽고 다른 사람이 왕이 되고 하는 그런 역사가 있거든요. 이건 역사계시. 또 인간의 생활 활동 이런 것은 형용계시 형식계시, 또 사자 염소 용 이런 게 나오거든요. 이런 거는 상징계시라 그러는 겁니다.
계시라고 하는 것은 숨겨져 있던 것을 열어서 보여준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존재나 사건이나 환경을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그걸 이용해서 보여주신다 그 말이요. 알려주신다 그 말이요. 이게 계시라 그 말이요.
이 여러 계시 안에 영적 계시가 들어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계시 형용계시 형식계시 상징계시 이런 여러 계시 중에 영적 계시가 들어있다.
이 성경은 문서계시요 성문계시인데 이 속에 보이지 아니하는 불문계시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문계시 문서계시를 다 읽고 그대로 순종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 것이냐? 그렇게 보기 어렵다 그 말이요. 더 나아가서 불문계시도 순종을 해야 한다 그 말이요.
이 불문계시는 다른 말로 또 은밀계시라고 그럽니다. 이걸 모르고서는 자기의 구원을 온전히 이룰 수가 없습니다. 또 은밀계시 위에는 신의 의지계시라. 이 의지계시는 자기가 은밀계시를 깨달아서 순종해 나갈 때에 하나님의 타의가 즉, 하나님의 뜻이 자기의 자의로 즉, 자기의 뜻으로 되어지는 것이니, 이때에 하나님의 최고의 계시인 은밀계시에 순종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진 것은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이라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서 깨닫고 내가 과거에 가졌던 인간 내 뜻은 아무리 좋아도 내어버리고 깨달은 그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고 살아갈 때에 이게 하나님의 의지대로 사는 거다. 또는 최고의 계시를 붙잡고 사는 것이다. 최고의 신앙생활이다.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의 신앙이라 그렇게 본다 그 말이요. 분명히 존재적으로는 그 사람이 개체로 있으면서, 또 실력적으로는 개별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의사는 하나님과 단일이라 그 말이요.
우리가 하나님과 의사단일의 신앙을 갖지 못하면 천국성과 자기는 상관이 없는 자가 돼버립니다. 이러면 그 자는 천국의 누림 면에 영원히 불행자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력이 없어진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우리 인간은 인격성을 가진 존재지요. 자유가 있고 평가성이 있고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존재입니다. 느낌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요? 청각의 청감성의 느낌성이 있고, 그러니까 소리만 들었다 그게 아니고 느껴지는 것. 또 시각의 시감성, 후각의 후감성, 미각의 미감성, 촉각의 촉감성. 또 인간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지각의 영감성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알아지면 자기에게 성령의 영감적으로 오는 게 있다 그 말이요. 이런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은 인격을 가진 존재다. 또 하나는 영원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선을 넘어가서 영원한 존재지요. 인간 앞에는 누구에게나 죽음의 선이 있는데 이 사선 너머의 세계를 우리 인간들은 무시할 수도 있고 긍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선 저 너머의 영원성을 무시한다고 해서 이 영원성이 없어지느냐? 또한 내가 긍정한다고 해서 없던 영원성이 또 있는 것이냐? 있는 것을 없다고 하면 없어지는 거냐? 또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이냐? 영원성은 신령계는 그런 게 아니지요.
영원의 세계라는 게 자기가 지금 간 것과 같은 경험적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있다고 믿는 지식뿐이냐? 없다고 믿는 지식을 가지면 없는 거냐? 경험을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냐 그 말이요. 아니지요.
우리가 가상적으로 생각할 때 영원이 분명히 있는데 내가 영원을 무시하고 살았다고 하면 죽은 후에 가서 보니 영원이 있다 그 말이요. 그러면 그동안 영원을 무시하고 산 나였는데 그 때 가서 영원이 있을 때 그 애통이 어떨까? 또 반대로 실제적으로는 영원이 없는데 내가 이 땅에서 영원이 있는 걸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 보니 영원이란 게 없다고 한다면 그 때 나에게 무슨 해가 될까? 즉 영원을 믿고 산 내가 죽음 저 너머에 가서 영원이 없다고 해서 나에게 무슨 손해가 되겠느냐 그 말이요. 그런데 대부분 영원을 무시하고 살고 있지요?
죽음 저 너머 상태는 무감각 상태가 아니고 감각상태의 세계입니다. 감각상태로서 영각성으로 사는 세계인데,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입은 자일수록 예민해지고 민감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안 하고 산 자는 활동적 둔감이요 느낌적 둔감이 돼버립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도 영각성에 둔감하면 사건적으로 말씀이 올 때는 둔감하기 때문에 사건을 주신 뜻을 알아차리지를 못하므로 순종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우리는 부지런히 말씀을 깨닫고 영감성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예민하게 민첩하게 입어나가야 되겠다 그 말이요.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이 있습니다. 신약 구약 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이 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짐승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들과 그 권위성을 어떻게 두느냐 그 말이요.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사도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을 그 권위성을 어떻게 두느냐 그 말이요.
시대적으로 순서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언제 어떻게 하신 말씀이던, 또 성전 안에서나 집안에서나 또는 허허벌판에서나 누구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간 그 발설자는 하나님이시라 그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 권위성은 동등하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또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인격성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기독자는 말씀 속에서 인격자 하나님을 찾아 이 말씀과 동행을 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그 인격성과 동행을 하면 그의 성품을 입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그의 성품을 입으면 성품을 입은 것만큼 활용적인 천국이 많아지고 천국에 대한 느낌이 커집니다. 중생된 영 자체의 실력이 더 장성이 되고, 부활해서는 육체가 신령체로 변화한 그 영체가 더욱 민첩해지고 민활해지고 광명해진다 그 말이요.
66권의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이 성경은 자체적인 가치성과 독자적인 권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만 인간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그래도 권위성을 갖고 있단 말이요. 그 말씀이 나중에 인간을 심판해 버린다 그 말이요.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누가 말을 하면 인간들이 그 말을 인정해줘야 만이 그 말에 권위가 서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은 그게 아니라 그 말이요.
인간의 권위성은 수동적 권위성입니다. 예를 들면 비가 온다고 다섯 번이나 말을 했다 그 말이요. 그런데 다섯 번 말한 그대로 비가 다 왔다 그 말이요. 그러면 다 맞으니까 그 말에 권위성이 있지요. 그러나 한 번이라도 틀리면 그 말의 권위성은 뚝 떨어지지요.
성문계시는 하나하나 전부는 은밀계시로 되어 있습니다. 성문계시의 껍데기를 까면 그 안에 불문계사가 들어있다 그 말이요. 이 불문계시가 곧 은밀계시라. 성경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하셨다면 ‘왜 하라고 했느냐?’ 하는 그 이유가 말씀 속에 들어있단 말이요. 그러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목적이 무엇이냐?
우리가 육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 이성이 작용이 되면 그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기도 한단 말이요. 이 때 이성이 말씀을 영접해서 그 말씀을 받아들여 중생된 영에다 접선을 시켜주면 순간적 찰나에 이성과 영은 접선이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들어갈 때는 귀로 소리로 들어갔지만 이 말씀이 나로 통해 나올 때는 몸을 통해서 활동이 나오는데 이 때 이성과 몸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살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기도 하고 또 덜 입기도 하는데 입은 그 양을 이 땅에서는 잘 모릅니다. 잘 못 느껴요. 그러나 부활 때에 하나님의 권능을 입고 나올 때에는, 부활의 권능을 입고 나올 때에는 많이 입은 자와 적게 입은 자와는 완전히 차별이 납니다. 또 부활체가 활동을 할 때도 외부적으로도 활동적으로도 차별이 난다 그 말이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걸 느낄 수가 있지요? 일반적으로 사람이 외모적으로 다르게 생겼다 할지라도 인간이라고 하는 그런 점에서는 다 똑같잖아요? 어떤 인간을 보고 ‘저 자는 우리 외모와 다르다. 그러니 저건 짐승이다’ 그렇게 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무엇을 많이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활동범위와 실력이 달라지지요.
따라서 자기가 일생동안 살면서 성문계시 속의 불문계시 은밀계시를 붙잡고, 이 은밀계시 속의 하나님의 의지계시를 자기의 것으로 삼고 나갈 때에 그 자는 하나님의 단일 의사성으로 되는 건데, 이렇게 살면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인데, 이렇게 살게 되면 후에 우리가 부활의 권능을 입고 나올 때는 그동안 하나님의 성품을 입은 그 양대로 부활의 영광성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자는 그 사는 삶이 이 세상에서 일생을 살면서 항상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먹든지 마시든지 일하든지 사는 모든 게 그렇다 그 말이요.
그런다고 해서 그렇게 살면 가난하게 산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 말이요. 부자로 살 수도 있고 가난하게도 살 수도 있고.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해서 다 부자로 삽니까? 그렇지도 않거든요.
믿는 내가 사망운동을 할 때는 중생된 영은 동참하지를 않습니다. 중생된 영은 성령과 함께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내가 예수는 믿지만 몰라가지고 못 깨달아서 사망운동을 한다 그 말이요. 쉽게 말해서 육신 제일주의로, 세상 소원 목적으로 사는 것은 그가 어떤 종교운동을 해도 일상생활 모든 것이 사망운동이란 말이요.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명적이 아니라 그 말이요.
내가 그런 사망운동을 할 때에 내 속의 중생된 영은 동참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 속에서 이 중생된 영이 한탄을 한다 그 말이요.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지를 못할 때에 내 속에서 ‘믿는 내가 이래서야 쓰나’ 하는 한탄의 소리를 자기가 들을 수 있습니까? 그런 때가 있지요? 그런 경험을 한다 그 말이요. 중생된 영의 그 소리를 자기가 스스로 발로 밟아서 눌러 죽이지를 말아야지요. 중생된 영의 그 소리를 살려야지요.
현재적으로 우리의 중생된 영은 내가 사망운동을 할 때에 함께 이 사망운동에 함께 동참하지를 않지만 내 속에 성분적으로 따로 있다 그 말이요. 존재적으로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내 속에서 성분적으로 따로 있어. 그러다가 내가 부활 때에는 육체와 중생된 영과 결합을 해서 신령체가 됩니다. 이때에는 성분적으로 성질적으로 영과 육이 하나가 돼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무형적 인격적 결합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암만해도 영능의 실력이 달라지는 거지요. 그럴 수밖에 없다. ‘행한 대로 갚으리라’ 그게 뭐요? 하나님의 공평하고 공정하신 대로 그렇게 한다 그 말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육체가 신령체로 결합이 된 것처럼 우리도 부활 때는 그렇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생활을 못했더라도 썩어질 육체가 아니고 부활할 육체입니다. 현재적으로 자기가 예수 믿으면서 믿음생활을 못했더라도 썩어질 육체지만 나중에 부활될 육체라 그 말이요.
로마서 8장 23절에 보면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는 말이 있지요? 그러니까 중생된 영이 몸에다 구속을 입혀나가야 한다 그 말입니다. 즉 중생된 영이, 다시 말하면 새사람이 나의 주격이 되어가지고 이성과 몸에 구속을 입혀나가야 된다. 성화구원을 입혀나가야 된다 그 말이요. 나의 재세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동화되어 가지고 우리의 육에 하나님의 성품을 입혀나가야 하는 겁니다. 이성과 몸에다 성화구원을 입혀나가야 된다.
나의 이성과 몸에 성화구원을 입혀나가려면 하나님의 의사를 내 의사로 삼고, 그 다음에 내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말씀의 생활이 되는 이것이 성화구원입니다. 이렇게 해야 입혀지는 거라 그 말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사대로 사는 것이요, 그 소원 목적을 가지고 생활을 하는 삶이 성화구원이 입혀지는 거다 그 말이요. 덧입는 생활이다. 그것이 나중에 자기의 영능의 실력이 되어서 나오는 겁니다.
우리의 영능의 실력은 이 세상에서는 정확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사용이 되어 나오는 겁니다. 많이 알면, 많이 깨달으면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활동이 나오니까요. 모르면 전혀 못하는 거지. 그런 것을 우리가 느낄 수가 있지요?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에게 이 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서 주시고, 말씀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불문계시 은밀계시를 깨달아서 그 은밀계시 속에 또 하나님의 의지계시를 나의 것으로 삼고서 즉,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고, 하나님의 의사성이 나의 의사성이 되어서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입혀진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고 산 것이 아니라 무형적 인격적 결합으로 그것이 내 사상화 되고 인격화 되고 내 삶이 되었으니 내가 사는 모든 것은 죽을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 아니고 생명적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성화구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부는 하나님의 것으로 영생적인 것으로 살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불신자들처럼 유행을 따라 세상 바람 부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지 말고 예수 믿는 이 속에는 세상에는 없는 제일 귀중한 천국의 보화가 들어있으니 그것을 내가 가지고 이 세상에서 보화처럼 잘 만들어져서 영원한 신렁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복된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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