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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졸업을 하지 못하는 학교가 있다면 믿겠어요? 정말 그런 학교가 있어요. 나리 분교는 졸업식을 하지 않고 두 해를 넘겼어요. 그래도 올해는 한 명은 졸업을 할 수 있는데……. 그것도 모를 일이에요. 6학년 한 명이 훌쩍 전학을 가버리면 세 해째 졸업생이 없는 거지요.
아, 그런 걱정은 이제 필요없어요. 2학년이 셋, 3학년이 다섯, 5학년이 하나, 6학년이 하나, 도합 열 명에 선생님이 하나.
운동장에 놀러 오는 산비둘기 보다 적은 숫자예요. 그 때문인지 문을 닫아야 한데요. 모두가 30리 떨어진 읍내의 학교로 옮겨가는 거예요. 큰일이에요. 산비둘기라면 30리 쯤 단숨에 날아갈 수 있지만 만만한 거리가 아니거든요. 10리가 4㎞니까 합쳐서 12㎞예요. 아이들 걸음으로는 세 시간은 걸릴 거예요.
˝꾸루룩, 꾸루룩.˝
운동장에 산비둘기들이 놀러 왔어요. 산비둘기 들은 신이 났어요. 스무마리쯤 되는 것 같아요. 봄바람에 날려 온 씨앗들이 많은지 아주 운동장에서 살아요.
˝씨이, 저것들 때문이야.˝
빨간 우체통의 네 귀퉁이를 꽉 죄고 있는 나사가 투덜거렸어요. 나사들은 고집이 여간 아니에요. 빨간 우체통을 꼼짝 못하게 죄고 있어요.
˝뭐가 쟤네들 때문이라는 거지?˝
빨간 우체통은 모른 척하며 딴전을 부렸어요.
˝학교란 공부를 하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저것들만 떼로 몰려드니까 그렇지요.˝
˝쟤들도 공부를 하러 오는 게지. 허허허.˝
빨간 우체통은 크게 웃었어요.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요.
˝웃음이 나와요? 우리들은 속상해 죽겠는데.˝
˝맞아. 맞아.˝
나머지 세 개의 나사들도 맞장구를 쳤어요. 교실은 쥐죽은 듯 조용했어요. 오늘이 마지막 공부시간이거든요. 잠깐 교실을 엿보기로 해요.
#2
여자 아이 하나가 유리창 너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어요.
˝미란이는 쓸 것이 없니?˝
팔장을 끼고 서성 거리던 선생님이 3학년 다섯 명이 모둠을 이룬 곳으로 가시네요. 깜짝 놀란 여자 아이가 얼굴을 빨갛게 붉혔어요. 뒷 동산 가득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참꽃 같아요. 여자 아이는 얼른 머리를 숙였어요. 선생님은 여자 아이의 단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어요.
˝다시 말하지만 받을 사람이 없는 편지야. 아니지 받을 사람은 바로 너희들 자신이란다. 훗날 너희들은 이 편지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자기가 자기한테 쓰는 편지네요?˝
밤톨이라는 별명이 붙은 2학년 창우가 아는체를 했어요.
˝맞아. 창우는 역시 똑똑해. 나중에 정말 훌륭한 과학자가 될 거야.˝
선생님이 빙그레 웃어 주셨어요. 선생님이 옆에 서 있자 여자 아이는 어쩔 줄 몰라 했어요. 왼쪽 손을 활짝 펴 편지지를 가렸어요. 다섯 손가락이 산비둘기의 발처럼 빨갰어요. 선생님도 그것을 아셨는지 자리를 비켜 주셨어요.
˝정말 선생님은 우리와 같이 읍내 학교로 가시는 게 아니에요?˝
제일 높은 학년인 6학년 정배가 물었어요. 벌써 편지를 다 쓴 듯 해요. 편지 쓴 것을 보니까 머리글에 ´사랑하는 선생님께´라고 썼어요. 저런, 받을 사람이 없는 편지라고 선생님이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사람은 말이다. 만나면 헤어지고 또 헤어지면 만나게 되는 거란다. 정배는 맨날 선생님에게 야단만 맞았는데 시원하지 않니?˝
학년 낮은 동생들이 잘못을 해도 다 정배가 야단을 맞았어요. 교실 청소를 위해 개울에서 물을 길어 오는 것도 정배의 몫이었고요.
˝선생님, 형아는 선생님께 편지를 썼어요.˝
3학년인 정배의 동생인 정식이가 지우개를 집어 가며 고자질을 했어요.
˝이 자식이 정말?˝
정배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선생님이 정배의 어깨를 짚고 힘을 꾹 주셨어요. 정배는 정식이에게 눈을 부라렸어요.
˝선생님 받는 사람 쓰는 곳에 뭐라고 써요?˝
정식이는 혀를 낼름 내밀며 선생님께 물었어요.
˝우리 형아처럼 그렇게 쓰면 안되지요? 분명히 자기에게 쓰는 편지라고 했는데. 그럼 ´김정식에게´이렇게 써야 되겠네요.˝
정식이는 참새처럼 종알거렸어요.
˝선생님 우리 형아가 쓴 편지 안받으실 거죠?˝
정식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신나게 떠들었어요. 선생님이 정배의 곁에 버티고 계시기 망정이지……. 화가 난 정배가 가슴을 쾅쾅 두드렸어요.
˝이제 그만 해. 뭐가 그렇게 좋다고.˝
미란이가 정식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어요. 정식이는 미란이의 말에 입을 다물었어요.
슥슥 삭삭.
다시 교실은 쥐죽은 듯 조용해 졌어요. 편지지 위에 글씨 쓰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어요. 선생님은 팔짱을 끼고 창가로 다가가셨어요. 운동장 가에는 뾰족뾰족 새싹이 돋기 시작했어요. 휘늘어진 버들가지가 연두빛이에요. 바람이 버들가지를 잡고 그네를 타고 있어요. 배가 부른 비둘기들이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놀고 있어요. 선생님은 주머니를 뒤지시더니 담배 한 개비를 꺼내셨어요. 하얀 담배가 선생님의 입에 물렸어요.
˝찰칵!˝
라이터 불이 반짝 일었어요. 선생님은 깜짝 놀라셨어요. 선생님은 얼른 담배를 입에서 빼내 감추셨어요.
˝휘휴!˝
선생님이 드르륵 창문을 열며 한숨을 쉬셨어요.
˝선생님, 이 편지 부칠 거예요?˝
밤톨이 창우가 물었어요.
˝우표도 없는데 어떻게 부쳐.˝
˝받는 사람이 없는 편지라고 했잖아.˝
˝자기가 자기에게 쓰는 편지를 누가 부쳐.˝
˝맞아. 맞아.˝
아이들이 한 마디씩 했어요. 갑자기 교실이 소란스러워 졌어요.
˝짝! 짝! 자 조용히 하거라.˝
선생님이 손뼉을 두 번 치며 교탁 앞으로 나가셨어요. 3학년 미란이만 머리를 숙이고 있어요. 저런, 한 줄도 못 썼네요. 미란이가 편지를 다 쓸 때까지 운동장으로 나가 보기로 해요.
#3
작은 교문으로 누가 들어오고 있네요. 아, 집배원 아저씨예요. 아저씨는 커다란 자전거를 끌고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어요. 아저씨가 들어오자 산비둘기들이 푸드득 날아 올랐어요. 먼지가 뽀얗게 일었어요.
˝야! 아저씨다.˝
빨간 우체통을 죄고 있는 나사들이 반갑게 소리쳤어요.
˝끄응!˝
빨간 우체통이 앓는 소리를 냈어요.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제가 너무 꽉 죄었나요?˝
나사가 깜짝 놀라며 물었어요. 빨간 우체통 앞에서 오른쪽 귀퉁이를 죄고 있는 나사였어요. 땅이 꺼지는 바람에 콘크리트 기초가 기울어 항상 물기가 마르지 않는 쪽이에요. 네 개의 나사중 가장 녹이 슬었어요.
˝아, 아니야.˝
빨간 우체통은 얼른 도리질을 쳤어요.
˝집배원 아저씨가 참 오랜만에 오시네요.˝
나사들은 반가운지 다시 말했어요.
˝겨울 방학이었잖아.˝
빨간 우체통은 훨씬 지난 겨울 방학 때문이라고 했어요.
˝방학 때가 아니라도 헛탕치는 일이 많았잖아요.˝
뒤에 있는 나사가 눈치없이 말했어요. 집배원 아저씨는 학교에 오는 편지가 없으면 오지 않았어요. 어떤 때는 왔다가도 빨간 우체통을 그냥 지나쳤어요.
´저 우체통은 있으나 마나야. 치워 버리든지 해야지.´
빨간 우체통을 지나칠 때마다 집배원 아저씨는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사실은 집배원 아저씨의 말씀도 맞아요. 편지를 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집배원 아저씨의 자전거가 코 앞에 다가 왔어요. 집배원 아저씨는 빨간 우체통 앞에 자전거를 세웠어요.
˝끄응!˝
빨간 우체통은 다시 앓는 소리를 냈어요. 집배원 아저씨는 커다란 가방에서 몽키스패너를 꺼냈어요.
˝뭐야!˝
네 개의 나사들은 깜짝 놀랐어요.
˝어,어떻게 된 거죠?˝
앞쪽 왼쪽 귀퉁이를 죄고 있는 나사가 물었어요.
˝아마 나를 떼어 갈 모양이야.˝
빨간 우체통이 태연스럽게 대답했어요. 아마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냥 놔두면 어때서. 떼어가 봐야 쓸모가 없는 걸 괜히 고생을 시키고 난리야.´
집배원 아저씨가 몽키 스패너의 입을 벌리며 투덜댔어요. 몽키 스패너의 입이 딱 벌어졌어요. 네 개의 나사들은 몸을 움츠렸어요.
˝큰일 났어요. 어떻게 좀 해 줘요.˝
나사들은 겁이 나서 빨간 우체통에게 말했어요.
˝난들 어떻게 하겠니.˝
빨간 우체통은 힘없는 소리로 중얼거렸어요. 몽키 스패너가 왼쪽에 있는 나사를 꽉 물었어요.
˝살려줘요! 아파 죽겠어.˝
몽키 스패너에게 물린 나사가 소리를 쳤어요. 나머지 세 개의 나사들은 눈을 꼭 감았어요.
˝끄응, 끄응.˝
힘을 주는 집배원 아저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어요.
˝이런 아주 붙어 버렸네.˝
집배원 아저씨는 몽키 스패너를 떼었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오른쪽에 있는 나사에게 물렸어요.
˝끄응, 끄응.˝
다시 집배원 아저씨가 힘을 줬어요.
˝아얏! 아파요. 머리가 깨질 것 같다고요.˝
오른쪽 나사가 아픔을 참으며 소리를 질렀어요.
˝꽉 잡아. 힘을 줘. 버텨봐.˝
갑자기 빨간 우체통이 소리쳤어요.
˝그래, 버텨봐. 힘을 꼭 줘 봐.˝
나머지 세 개의 나사들도 거들었어요.
˝아파 죽겠어.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아. 차라리 놓아 버리고 싶어. 그냥 풀어지고 싶다고.˝
˝안돼. 조금만 참아 봐.˝
빨간 우체통도 힘을 주는 지 더 빨개졌어요.
´에이, 이것은 더 절어 버렸네. 녹이 슬어 풀지를 못하겠어.´
집배원 아저씨가 몸을 일으켰어요. 몽키 스태너의 입도 빨갛게 물들었어요. 집배원 아저씨는 몽키 스패너를 가방 속에 던졌어요. 집배원 아저씨는 손을 탈탈 떨었어요.
˝그냥 내버려 둬야 겠어. 가져가 봐야 쓸모가 없을 텐데 뭘. 안 가져 왔다고 야단을 치면 망가졌다고 하지 뭐.˝
집배원 아저씨는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어요. 집배원 아저씨가 자전거에 커다란 가방을 실었어요. 그리고 운동장을 지나 교문을 나갔어요.
˝휘휴!˝
뒤에 있는 나사들이 한숨을 쉬었어요. 무척 겁을 먹었던 모양이에요.
˝고생했어. 그리고 고맙고.˝
빨간 우체통이 나사들에게 인사를 했어요. 왼쪽 귀퉁이를 죄고 있는 나사는 아픔이 다 가셨는지 말짱해 졌어요.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요. 얼마나 아프던지.˝
오른쪽 귀퉁이를 죄고 있는 나사는 머리가 깨졌어요. 빨간 녹이 벗겨졌어요.
˝왜 힘을 주라고 했어요? 우리는 집배원 아저씨를 따라가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오른쪽 귀퉁이를 죄고 있는 나사가 힘겹게 물었어요.
˝나도 몰라. 갑자기 여기에 있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빨간 우체통이 빙그레 웃었어요.
#4
산비둘기들이 다시 운동장으로 날아 들었어요. 교실 문이 열렸어요.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밖으로 나왔어요. 다른 때 같으면 와아!하는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올텐데 말이에요. 아이들의 손에는 편지 봉투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어요.
˝자, 자. 우체통 앞에 한 줄로 서라.˝
맨 마지막으로 나온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아이들은 우체통 앞에 한 줄로 섰어요. 선생님은 우체통 위에 한 손을 올려 놓으셨어요.
˝선생님도 이렇게 편지를 썼다. 선생님이 말한대로 이 편지들은 받을 사람이 없다.˝
˝흑흑흑!˝
3학년 미란이가 울음을 터뜨렸어요. 미란이도 편지를 다 썼는지 하얀 봉투를 꼭 쥐고 있었어요.
˝자, 한 사람씩 이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라.˝
선생님이 먼저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셨어요.
˝텅!˝
빨간 우체통으로 편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텅! 텅! 텅!˝
아이들이 차례차례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어요.
˝선생님은 이 우체통을 꿈체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한꺼번에 모아놓은 꿈체통. 언제 어디를 가든 이 우체통을 잊지 말아라. 알았지?˝
선생님의 목소리가 떨렸어요. 아이들은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의 어깨가 물결치듯 흔들렸어요.
˝선생니임!˝
열 명의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달려들어 한덩이가 되었어요. 운동장에서 놀던 산비둘기들이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머리를 뾰족뾰족 들었어요. (끝)
졸업을 하지 못하는 학교가 있다면 믿겠어요? 정말 그런 학교가 있어요. 나리 분교는 졸업식을 하지 않고 두 해를 넘겼어요. 그래도 올해는 한 명은 졸업을 할 수 있는데……. 그것도 모를 일이에요. 6학년 한 명이 훌쩍 전학을 가버리면 세 해째 졸업생이 없는 거지요.
아, 그런 걱정은 이제 필요없어요. 2학년이 셋, 3학년이 다섯, 5학년이 하나, 6학년이 하나, 도합 열 명에 선생님이 하나.
운동장에 놀러 오는 산비둘기 보다 적은 숫자예요. 그 때문인지 문을 닫아야 한데요. 모두가 30리 떨어진 읍내의 학교로 옮겨가는 거예요. 큰일이에요. 산비둘기라면 30리 쯤 단숨에 날아갈 수 있지만 만만한 거리가 아니거든요. 10리가 4㎞니까 합쳐서 12㎞예요. 아이들 걸음으로는 세 시간은 걸릴 거예요.
˝꾸루룩, 꾸루룩.˝
운동장에 산비둘기들이 놀러 왔어요. 산비둘기 들은 신이 났어요. 스무마리쯤 되는 것 같아요. 봄바람에 날려 온 씨앗들이 많은지 아주 운동장에서 살아요.
˝씨이, 저것들 때문이야.˝
빨간 우체통의 네 귀퉁이를 꽉 죄고 있는 나사가 투덜거렸어요. 나사들은 고집이 여간 아니에요. 빨간 우체통을 꼼짝 못하게 죄고 있어요.
˝뭐가 쟤네들 때문이라는 거지?˝
빨간 우체통은 모른 척하며 딴전을 부렸어요.
˝학교란 공부를 하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저것들만 떼로 몰려드니까 그렇지요.˝
˝쟤들도 공부를 하러 오는 게지. 허허허.˝
빨간 우체통은 크게 웃었어요.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요.
˝웃음이 나와요? 우리들은 속상해 죽겠는데.˝
˝맞아. 맞아.˝
나머지 세 개의 나사들도 맞장구를 쳤어요. 교실은 쥐죽은 듯 조용했어요. 오늘이 마지막 공부시간이거든요. 잠깐 교실을 엿보기로 해요.
#2
여자 아이 하나가 유리창 너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어요.
˝미란이는 쓸 것이 없니?˝
팔장을 끼고 서성 거리던 선생님이 3학년 다섯 명이 모둠을 이룬 곳으로 가시네요. 깜짝 놀란 여자 아이가 얼굴을 빨갛게 붉혔어요. 뒷 동산 가득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참꽃 같아요. 여자 아이는 얼른 머리를 숙였어요. 선생님은 여자 아이의 단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어요.
˝다시 말하지만 받을 사람이 없는 편지야. 아니지 받을 사람은 바로 너희들 자신이란다. 훗날 너희들은 이 편지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자기가 자기한테 쓰는 편지네요?˝
밤톨이라는 별명이 붙은 2학년 창우가 아는체를 했어요.
˝맞아. 창우는 역시 똑똑해. 나중에 정말 훌륭한 과학자가 될 거야.˝
선생님이 빙그레 웃어 주셨어요. 선생님이 옆에 서 있자 여자 아이는 어쩔 줄 몰라 했어요. 왼쪽 손을 활짝 펴 편지지를 가렸어요. 다섯 손가락이 산비둘기의 발처럼 빨갰어요. 선생님도 그것을 아셨는지 자리를 비켜 주셨어요.
˝정말 선생님은 우리와 같이 읍내 학교로 가시는 게 아니에요?˝
제일 높은 학년인 6학년 정배가 물었어요. 벌써 편지를 다 쓴 듯 해요. 편지 쓴 것을 보니까 머리글에 ´사랑하는 선생님께´라고 썼어요. 저런, 받을 사람이 없는 편지라고 선생님이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사람은 말이다. 만나면 헤어지고 또 헤어지면 만나게 되는 거란다. 정배는 맨날 선생님에게 야단만 맞았는데 시원하지 않니?˝
학년 낮은 동생들이 잘못을 해도 다 정배가 야단을 맞았어요. 교실 청소를 위해 개울에서 물을 길어 오는 것도 정배의 몫이었고요.
˝선생님, 형아는 선생님께 편지를 썼어요.˝
3학년인 정배의 동생인 정식이가 지우개를 집어 가며 고자질을 했어요.
˝이 자식이 정말?˝
정배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선생님이 정배의 어깨를 짚고 힘을 꾹 주셨어요. 정배는 정식이에게 눈을 부라렸어요.
˝선생님 받는 사람 쓰는 곳에 뭐라고 써요?˝
정식이는 혀를 낼름 내밀며 선생님께 물었어요.
˝우리 형아처럼 그렇게 쓰면 안되지요? 분명히 자기에게 쓰는 편지라고 했는데. 그럼 ´김정식에게´이렇게 써야 되겠네요.˝
정식이는 참새처럼 종알거렸어요.
˝선생님 우리 형아가 쓴 편지 안받으실 거죠?˝
정식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신나게 떠들었어요. 선생님이 정배의 곁에 버티고 계시기 망정이지……. 화가 난 정배가 가슴을 쾅쾅 두드렸어요.
˝이제 그만 해. 뭐가 그렇게 좋다고.˝
미란이가 정식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어요. 정식이는 미란이의 말에 입을 다물었어요.
슥슥 삭삭.
다시 교실은 쥐죽은 듯 조용해 졌어요. 편지지 위에 글씨 쓰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어요. 선생님은 팔짱을 끼고 창가로 다가가셨어요. 운동장 가에는 뾰족뾰족 새싹이 돋기 시작했어요. 휘늘어진 버들가지가 연두빛이에요. 바람이 버들가지를 잡고 그네를 타고 있어요. 배가 부른 비둘기들이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놀고 있어요. 선생님은 주머니를 뒤지시더니 담배 한 개비를 꺼내셨어요. 하얀 담배가 선생님의 입에 물렸어요.
˝찰칵!˝
라이터 불이 반짝 일었어요. 선생님은 깜짝 놀라셨어요. 선생님은 얼른 담배를 입에서 빼내 감추셨어요.
˝휘휴!˝
선생님이 드르륵 창문을 열며 한숨을 쉬셨어요.
˝선생님, 이 편지 부칠 거예요?˝
밤톨이 창우가 물었어요.
˝우표도 없는데 어떻게 부쳐.˝
˝받는 사람이 없는 편지라고 했잖아.˝
˝자기가 자기에게 쓰는 편지를 누가 부쳐.˝
˝맞아. 맞아.˝
아이들이 한 마디씩 했어요. 갑자기 교실이 소란스러워 졌어요.
˝짝! 짝! 자 조용히 하거라.˝
선생님이 손뼉을 두 번 치며 교탁 앞으로 나가셨어요. 3학년 미란이만 머리를 숙이고 있어요. 저런, 한 줄도 못 썼네요. 미란이가 편지를 다 쓸 때까지 운동장으로 나가 보기로 해요.
#3
작은 교문으로 누가 들어오고 있네요. 아, 집배원 아저씨예요. 아저씨는 커다란 자전거를 끌고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어요. 아저씨가 들어오자 산비둘기들이 푸드득 날아 올랐어요. 먼지가 뽀얗게 일었어요.
˝야! 아저씨다.˝
빨간 우체통을 죄고 있는 나사들이 반갑게 소리쳤어요.
˝끄응!˝
빨간 우체통이 앓는 소리를 냈어요.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제가 너무 꽉 죄었나요?˝
나사가 깜짝 놀라며 물었어요. 빨간 우체통 앞에서 오른쪽 귀퉁이를 죄고 있는 나사였어요. 땅이 꺼지는 바람에 콘크리트 기초가 기울어 항상 물기가 마르지 않는 쪽이에요. 네 개의 나사중 가장 녹이 슬었어요.
˝아, 아니야.˝
빨간 우체통은 얼른 도리질을 쳤어요.
˝집배원 아저씨가 참 오랜만에 오시네요.˝
나사들은 반가운지 다시 말했어요.
˝겨울 방학이었잖아.˝
빨간 우체통은 훨씬 지난 겨울 방학 때문이라고 했어요.
˝방학 때가 아니라도 헛탕치는 일이 많았잖아요.˝
뒤에 있는 나사가 눈치없이 말했어요. 집배원 아저씨는 학교에 오는 편지가 없으면 오지 않았어요. 어떤 때는 왔다가도 빨간 우체통을 그냥 지나쳤어요.
´저 우체통은 있으나 마나야. 치워 버리든지 해야지.´
빨간 우체통을 지나칠 때마다 집배원 아저씨는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사실은 집배원 아저씨의 말씀도 맞아요. 편지를 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집배원 아저씨의 자전거가 코 앞에 다가 왔어요. 집배원 아저씨는 빨간 우체통 앞에 자전거를 세웠어요.
˝끄응!˝
빨간 우체통은 다시 앓는 소리를 냈어요. 집배원 아저씨는 커다란 가방에서 몽키스패너를 꺼냈어요.
˝뭐야!˝
네 개의 나사들은 깜짝 놀랐어요.
˝어,어떻게 된 거죠?˝
앞쪽 왼쪽 귀퉁이를 죄고 있는 나사가 물었어요.
˝아마 나를 떼어 갈 모양이야.˝
빨간 우체통이 태연스럽게 대답했어요. 아마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냥 놔두면 어때서. 떼어가 봐야 쓸모가 없는 걸 괜히 고생을 시키고 난리야.´
집배원 아저씨가 몽키 스패너의 입을 벌리며 투덜댔어요. 몽키 스패너의 입이 딱 벌어졌어요. 네 개의 나사들은 몸을 움츠렸어요.
˝큰일 났어요. 어떻게 좀 해 줘요.˝
나사들은 겁이 나서 빨간 우체통에게 말했어요.
˝난들 어떻게 하겠니.˝
빨간 우체통은 힘없는 소리로 중얼거렸어요. 몽키 스패너가 왼쪽에 있는 나사를 꽉 물었어요.
˝살려줘요! 아파 죽겠어.˝
몽키 스패너에게 물린 나사가 소리를 쳤어요. 나머지 세 개의 나사들은 눈을 꼭 감았어요.
˝끄응, 끄응.˝
힘을 주는 집배원 아저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어요.
˝이런 아주 붙어 버렸네.˝
집배원 아저씨는 몽키 스패너를 떼었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오른쪽에 있는 나사에게 물렸어요.
˝끄응, 끄응.˝
다시 집배원 아저씨가 힘을 줬어요.
˝아얏! 아파요. 머리가 깨질 것 같다고요.˝
오른쪽 나사가 아픔을 참으며 소리를 질렀어요.
˝꽉 잡아. 힘을 줘. 버텨봐.˝
갑자기 빨간 우체통이 소리쳤어요.
˝그래, 버텨봐. 힘을 꼭 줘 봐.˝
나머지 세 개의 나사들도 거들었어요.
˝아파 죽겠어.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아. 차라리 놓아 버리고 싶어. 그냥 풀어지고 싶다고.˝
˝안돼. 조금만 참아 봐.˝
빨간 우체통도 힘을 주는 지 더 빨개졌어요.
´에이, 이것은 더 절어 버렸네. 녹이 슬어 풀지를 못하겠어.´
집배원 아저씨가 몸을 일으켰어요. 몽키 스태너의 입도 빨갛게 물들었어요. 집배원 아저씨는 몽키 스패너를 가방 속에 던졌어요. 집배원 아저씨는 손을 탈탈 떨었어요.
˝그냥 내버려 둬야 겠어. 가져가 봐야 쓸모가 없을 텐데 뭘. 안 가져 왔다고 야단을 치면 망가졌다고 하지 뭐.˝
집배원 아저씨는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어요. 집배원 아저씨가 자전거에 커다란 가방을 실었어요. 그리고 운동장을 지나 교문을 나갔어요.
˝휘휴!˝
뒤에 있는 나사들이 한숨을 쉬었어요. 무척 겁을 먹었던 모양이에요.
˝고생했어. 그리고 고맙고.˝
빨간 우체통이 나사들에게 인사를 했어요. 왼쪽 귀퉁이를 죄고 있는 나사는 아픔이 다 가셨는지 말짱해 졌어요.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요. 얼마나 아프던지.˝
오른쪽 귀퉁이를 죄고 있는 나사는 머리가 깨졌어요. 빨간 녹이 벗겨졌어요.
˝왜 힘을 주라고 했어요? 우리는 집배원 아저씨를 따라가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오른쪽 귀퉁이를 죄고 있는 나사가 힘겹게 물었어요.
˝나도 몰라. 갑자기 여기에 있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빨간 우체통이 빙그레 웃었어요.
#4
산비둘기들이 다시 운동장으로 날아 들었어요. 교실 문이 열렸어요.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밖으로 나왔어요. 다른 때 같으면 와아!하는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올텐데 말이에요. 아이들의 손에는 편지 봉투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어요.
˝자, 자. 우체통 앞에 한 줄로 서라.˝
맨 마지막으로 나온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아이들은 우체통 앞에 한 줄로 섰어요. 선생님은 우체통 위에 한 손을 올려 놓으셨어요.
˝선생님도 이렇게 편지를 썼다. 선생님이 말한대로 이 편지들은 받을 사람이 없다.˝
˝흑흑흑!˝
3학년 미란이가 울음을 터뜨렸어요. 미란이도 편지를 다 썼는지 하얀 봉투를 꼭 쥐고 있었어요.
˝자, 한 사람씩 이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라.˝
선생님이 먼저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셨어요.
˝텅!˝
빨간 우체통으로 편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텅! 텅! 텅!˝
아이들이 차례차례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어요.
˝선생님은 이 우체통을 꿈체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한꺼번에 모아놓은 꿈체통. 언제 어디를 가든 이 우체통을 잊지 말아라. 알았지?˝
선생님의 목소리가 떨렸어요. 아이들은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의 어깨가 물결치듯 흔들렸어요.
˝선생니임!˝
열 명의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달려들어 한덩이가 되었어요. 운동장에서 놀던 산비둘기들이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머리를 뾰족뾰족 들었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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