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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 예화 69편 모음
1.봉사
저녁을 가볍게 라면으로 떼운 어느 날 밤, 아무래도 배가 출출한지 아내가 밤늦게 "우리 라면 끓여 먹을까요?" 하고 저를 유혹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찬장과 냉장고를 열어보더니 "에이, 먹고싶기는 하지만 참지요. 마침 라면도, 김치도 다 떨어지고 없네요." 하면서 벌러덩 드러 누워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허전한 배를 무엇인가로 채우지 못한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래, 까짓거 오늘은 내가 당신을 위해서 '봉사'를 하지. 라면 사다가 끓여 줄게" 그리고 냄비에 물을 올려놓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 올라가 어부동상회 문을 두드려 라면을 사오고, 갈릴리마을 식당에 내려가 김치를 가져왔습니다. 오늘따라 가을비가 내리면서 기온이 뚝 떨어져 온몸을 움추리고 덜덜 떨면서 다녔습니다.
드디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을 마누라 앞에 대령하였습니다.
"미안해요. 날씨도 추운데 오늘 나를 위해서 밤길을 걷게 해서 미안해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밤길을 걸은 것도 당신을 위한 나의 '봉사'속에 포함된거야"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떠나 죄로 가득 찬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기까지 '봉사'하셨습니다.
"아이고, 예수님. 황송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봉사'를 감당하기엔 사실 좀 벅차네요. 어찌 저같은 것을 위해서 세상에까지 내려 오셨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다정하게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그 여행도 너를 위한 '봉사'속에 포함되어 있도다" ⓒ최용우
2.주님에 대한 봉사
론펠공은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찬식 때 썼던 금잔을 찾아내어 교회에 봉헌하기로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가 막 성문을 나서는데 한 문둥이가 달려나와 구걸을 하였다. 그는 기분이 상하여 "나는 하나님의 명으로 주님의 금잔을 찾으려고 길을 떠나는 사람이다. 너처럼 더러운 것이 어찌 나를 괴롭히느냐."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급히 지나쳤다. 그 후 그는 생사를 걸고 금잔을 찾아 헤맸으나 헛수고였다. 재산을 다 허비하고 백발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막 성에 들어서는데 또 문둥이가 달려와서 구걸하였다. 론펠공은 오랜 가난신고가 그를 부드럽게 만들어 긍휼의 정신이 그의 가슴속에 일어났다. 그는 그의 전 재산인 빵 한 조각을 주면서 말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빵밖에 없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걸 받게." 그리고 표주박으로 물을 떠다 그에게 주면서 말했다. "은혜로우신 주님의 이름으로 이걸 마시게."
이때 갑작스레 문둥이가 주님으로 바뀌면서 "보라, 나다. 그 빵은 찢기운 내 몸이며 그 물은 십자가에서 흘린 내 피다. 가난한 이와 함께 하는 식사야말로 참 성찬이다. 네가 찾던 잔은 네 손에 든 표주박이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이웃에 대한 봉사가 곧 주님에 대한 봉사임을 알자.
3.봉사의 사람
충실한 청지기는 주인의 소원과 뜻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다. 선교사의 4대손인 스티븐 린튼 박사는 최근 자기의 삶을 나귀의 삶에 비유했다. 그리고 모든 선교사의 삶은 주인이 실어주는 짐을 싣고, 주인이 원하는 곳으로 가서 그 짐을 그 곳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나귀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스티브 란튼 박사는 지난 수년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사랑의 구호품을 싣고 북한으로 가서 그 곳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나귀의 역할을 수행했다.
스티브가 오늘날 하나님이 쓰시는 충실한 나귀로 만들어지는 데에는 10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895년 4월, 스티브의 외고조부인 유진 벨 목사 부부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그들 부부는 평생을 목포, 광주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한국에 묻혔다. 벨 선교사부 부의 딸인 사로트는 월리암 란튼 선교사와 결혼하여 일생을 한국에서 보냈다. 그들 2세대 선교사 부부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스티브의 부친인 휴 린튼이었다. 스티브의 어머니 로이스는 순천 기독 결핵 재활원의 원장으로 평생 결핵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다. 로이스는 최근에 호암상을 수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결코 선교사가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다른 나라에 가서 일하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따른 것뿐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사랑을 담는 질그릇일 뿐입니다."
기도: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살기 원하시는 주님! 주님이 부르실 때에 즐거이 나 자신을 드리며, 주님가신 그 고난의 길을 나도 가게 하소서. 복음이 없어 곤고하며 갈망하며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소서.
4.서비스 정신
제임스 스미스는 오리건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류머티즘 치료제를 파는 제약회사의 세일즈맨으로 취직을 했다. 그러나 입사한 지 얼마 안되어 사표를 쓰겠다고 매니저에게 말했다. 1주일이 넘도록 열심히 뛰었지만 전혀 매상을 못 올렸기 때문이다. “저는 세일즈맨으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매니저는 그의 사의를 받아주지 않았다. 스미스는 입사할 때 이미 봉급과 영업비를 전액 가불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류머티즘으로 고생하고 있는 한 중년부인을 만나 상담을 해주었다. 그녀는 스미스와 한참 상담을 하고 나더니 약을 여섯병이나 매입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거액의 수표를 끊어주었다. 스미스는 그제서야 비로소 세일즈의 비결을 발견했다. “팔기 전에 먼저 서비스를 하자.” 그는 가장 매상을 많이 올리는 사원이 되었다. 25년 후에는 세계 굴지의 제약회사 경영인이 되었다. 성공하고 싶은가. 먼저 남을 위해 베풀라. 서비스 정신을 가지라. [국민일보]김학중 목사 (새안산교회)
5.제일 예쁜 손
어떤 가정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멀리 살던 아들딸들이 다 모여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던 끝에 누구 손이 제일 예쁘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며느리와 딸들은 저마다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결국 투표로 결정하자고 하였습니다. 누구의 손이 제일 예뻤을까요? 결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주름살이 많이 잡힌 어머니의 손이었습니다. 사랑과 봉사의 수고를 많이 한 손이야말로 제일 예쁜 손인 것입니다.
6.남을 위해 봉사하라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한 어린이의 상처를 지극한 정성으로 치료해주고 있을 때 이웃 주민이 물었다.“수녀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시나요. 당신은 평생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십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허리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테레사 수녀는 젊은 시절 캘커타의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녀는 창문 너머로 거리의 한센병 환자들을 계속해서 주시했다.“나는 그들의 눈에서 두려움을 보았습니다. 적절한 의료 혜택을 받아본 적이 없는 두려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두려움을 보았습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그러한 두려움을 마음속으로부터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침내 결심했고 수녀원이라는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평화의 집을 지었다. 그녀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약 15만 명의 한센병 환자들에게 의료혜택을 주고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다. 그녀는 이제 하나님 품에 안겼지만 온 세계 사람들이 종교를 초월해서 그녀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 남을 위해 봉사하라. 삶을 의미 있게 만들 것이다.
7.작은 봉사
호화로운 배를 타고 여행하던 한 승객의 이야기입니다. 배가 심한 폭풍 속의 새까만 어둠 속을 질주하는 동안 그는 배멀미를 하여 선실의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놀라운 외마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이 갑판에서 떨어졌다.!" "참 불쌍한 사람이군."하며 이 사람은 혀를 끌끌 찼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있다면 도울 수 있을 텐데. 아무 것도 할게 없잖은가?" 그때 그는 어떤 작은 음성을 마음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선창에서 조명등을 비춰주면 불빛을 보고 배로 돌아오는 방향을 알지도 몰라" 이 사람은 곧 행동에 옮겼습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물에 빠진 사람이 구출되었습니다. 선장이 이 사람의 방에 들어와서 감사하다고 전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빠졌을 때 조명등의 불빛이 선창으로부터 비춰 캄캄한 바다에서 그를 발견하고 구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학생여러분,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큰 일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작은 봉사활동이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봉사의 씨앗을 뿌리자
8. 美 명문대 입학조건
미국에 이민해서 살고 있는 한인 2세가 명문 컬럼비아대 의과대학에 지원했다. 공부도 잘해서 SAT 시험에 만점을 받았다. 집안 형편도 부유해서 무난히 합격되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불합격 통지서가 날라왔다. 불합격 사유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귀하의 성적은 아주 우수합니다. 가정형편이나 여러 조건들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귀하의 서류 어디를 보아도 헌혈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헌혈한 경험도 없는 귀하가 어떻게 환자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귀하는 의사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교육제도와는 너무나 상이하다. 우리는 오직 공부만 잘하면 합격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 사회는 이기주의자들만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9. 김기창 화백의 봉사
제 5회 인존상 공공봉사 수상자는 78세의 운보 김기창 화백이었다. 그는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인데 궁극적인 아름다움은 남을 위한 봉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작업을 통해서는 정적(靜的)인 기쁨을 얻을 수 있고, 봉사에서는 동적(動的)인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4세 때 홍역을 심하게 앓고 난 뒤, 후유증으로 7세 때 청각장애 증세가 나타나자 그림 그리기를 시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70년간 그림을 그린 그는 돈을 벌어서 청읍 회관을 설립하고, 한국농아복지회 회장이 되어서 매년 1억 원이 넘는 돈을 기부했다. 그래서 불행한 청소년들을 위해서 그 돈을 기부했다.
10.봉사와 건강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암 부스는 매우 병약한 사람이었다. 청년기에 그가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이런 몸상태로 계속 과로하면 1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휴식이 최고의 묘약입니다."
윌리암 부스는 그 말에 크게 위축되지 않았다. 그대신 규칙적인 생활과 사회의 약자들을 돕는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주위의 우려를 말끔히 씻고 83세까지 장수했다.
그의 아들 브람웰 부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계단을 오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스무살을 넘기기도 어려울 것이라며 혀를 찼다. 그러나 브람웰 부스도 73세까지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온통 '봉사'와 '사랑실천'으로 채워져 있었다. 노동은 '장수'와 '건강'을 선물한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누린다.
11.돌을 치워보니까
옛날 한 부자가 살았다. 그 부자는 평생을 자신만 알고 살아왔기에 자신의 인생에서 한번쯤은 남을 위해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자는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큰길가에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엄청나게 큰 돌을 올려놓았다. 그 돌을 본 사람들은 "에이, 어떤 놈이..." "어머. 위험하다. 돌아가야겠네." 라고 중얼거리며 치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돌을 본 한 젊은이가 돌을 끙끙거리며 옮기기 시작했다. 꼬박 두 시간이 걸려서 옮긴 돌 밑 구덩이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의아하게 여긴 젊은이가 구덩이에 뭐가 있나 보려고 다가가보니 자루 하나가 있었다. 그 자루를 열어보니 휘황찬란한 보석과 엄청난 양의 금화와 은화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쪽지 하나.
"남을 위해 큰 돌을 치운 사람에게 주는 상이니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때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 수도, 행복이 될 수도 있겠지요. 내가 하는 일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 박 계 영 -
내가 하는 좋은 일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고 값비싼 보상도 따르지 않으며, 곧 잊혀져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누군가가 편안해지고 행복해진다면 그 자체가 보상이 아닐까요?
12.주님께 대한 봉사
론펠공은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찬식 때 썼던 금잔을 찾아내어 교회에 봉헌하기로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가 막 성문을 나서는데 한 문둥이가 달려나와 구걸을 하였다. 그는 기분이 상하여 "나는 하나님의 명으로 주님의 금잔을 찾으려고 길을 떠나는 사람이다. 너처럼 더러운 것이 어찌 나를 괴롭히느냐."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급히 지나쳤다. 그 후 그는 생사를 걸고 금잔을 찾아 헤맸으나 헛수고였다. 재산을 다 허비하고 백발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막 성에 들어서는데 또 문둥이가 달려와서 구걸하였다. 론펠공은 오랜 가난신고가 그를 부드럽게 만들어 긍휼의 정신이 그의 가슴속에 일어났다. 그는 그의 전 재산인 빵 한 조각을 주면서 말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빵밖에 없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걸 받게." 그리고 표주박으로 물을 떠다 그에게 주면서 말했다. "은혜로우신 주님의 이름으로 이걸 마시게."
이때 갑작스레 문둥이가 주님으로 바뀌면서 "보라, 나다. 그 빵은 찢기운 내 몸이며 그 물은 십자가에서 흘린 내 피다. 가난한 이와 함께 하는 식사야말로 참 성찬이다. 네가 찾던 잔은 네 손에 든 표주박이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이웃에 대한 봉사가 곧 주님에 대한 봉사임을 알자.
13.봉사하는 대통령
세계 제2차 대전때의 일입니다.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군대로부터 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영장을 받은 젊은이들은 큰 도시로 집결하여 기차를 타고 훈련소로 갔습니다. 워싱턴 기차 정거장에도 수백명의 장정들이 몰려들었고 시민들은 기차역에 나와서 그들의 편의를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 시민들 가운데 다리를 절면서 뜨거운 코코아 잔을 쟁반에 들고 늦은 밤까지 봉사를 하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친히 코코아를 끓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장정 하나가 그 노인을 자세히 보니 그는 다름 아닌 루즈벨트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육체의 불편을 무릅쓰고 밤마다 기차 정거장에 나와 훈련소로 떠나는 청년들에게 뜨거운 코코아를 나르며 봉사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말로만 외치는 선행보다는 말없이 행하는 행동 하나가 더욱 귀감이 됩니다. http://je333.com(한태완 목사 설교 예화 자료집)
14. 퍼스트 레이디로의 행진
"여러분이 빌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뽑으면 힐러리라는 똑똑한 여성 한명을 덤으로 얻게 됩니다." 지난 92년 미국 대선 유세 중 힐러리 클린턴이 대중연설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
실제로 힐러리는 명문 예일대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두 차례나 '미국의 변호사 1백인'중 한사람으로 뽑힌 능력있는 여성이다. 미국 역사상 전문직을 가진 첫번째 퍼스트 레이디인 힐러리는 교육.아동.법률구조.여성문제 등에 폭넓은 관심과 이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93년 클린턴대통령이 힐러리를 의료보험개혁특별위원장에 임명하자 반대여론이 들끓어 힐러리는 결국 그 자리를 포기했다. 퍼스트 레이디의 바람직한 역할에 대한 논란이 다시 제기되었고..최근에는 제2차 세계대전후 재임한 10명의 미국 대통령과 퍼스트 레이디간의 권력공유의 역사를 밝힌 책 '국사'가 역사학자인 길 트로이에 의해 출간돼 관심을 모은다.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에 관한 이런 논란이 남의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한국에서도 벌써부터 대선주자 부인들이 각광받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자들의 면모를 제대로 알기 위해'안팎'을 검증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런 현상은 바람직하다.
아쉬운 것은 아직까지 부인을 대상으로 한 토론회나 인터뷰가 대부분'가정적이다''청렴하다'식의 그렇고 그런 남편자랑 차원에서 끝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들 부인들의 역할은 표밭 뛰기,여성유권자 접촉,남편의 건강관리나 옷차림 돌보기 등 이른바'내조'가 주인 것같다. 이제는 9명이 된 대선후보및 주자 부인중 전문직업인은 의사인 김덕룡의원의 부인 한사람 뿐이다.
최근 리서치 앤 리서치가 한국여성정치연구소의 의뢰로 전국 1천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전화설문조사를 한 결과 절반이 넘는 54.7%가 '대선후보 부인이 선거결과에 영향을 끼친다'고 답해 당사자들을 긴장시켰다.
바람직한 영부인상은 '정치에 관여말고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하는 것'이 47.3%, '내조에만 전념하는 현모양처형'이 29%, '자기영역을 갖는 전문가'는 23.2%였다.
역대 대통령부인중 좋아하는 사람은 육영수 여사가 압도적이었다(76.2%). 대통령제를 실시한지 2백년이 넘는 미국은 대통령과 그 부인의 평가도 활발하고 방법도 세련됐다.
80년대 후반 시에나대의 토머스 캘리교수팀은 역대 퍼스트 레이디에 대한평가작업을 했다. 이때 기준은 국가에 대한 기여도, 지도력, 성취력, 그리고 여성다움, 공적 이미지, 지적수준, 대통령에 대한 헌신 등이었다.
이에 앞서 80년대 초에는 미국 뉴욕에서'퍼스트 레이디'를 주제로 한 회의도 열렸다. 역사학자.작가.언론인 등 1백여명이 참가해 역대 42명의 퍼스트 레이디를 평가했다. 작가인 애비게일 매카시는 퍼스트 레이디의 적절한 역할을' 잠정적(임기가있는) 여왕'으로 규정하고 작고한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와 재클린케네디를 바람직한 모델로 꼽았다.
반면 전직 백악관 공보비서는 '비전통적인 활동가'를 강조했다.
위의 두 평가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퍼스트 레이디로 뽑힌 사람은 36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으로 헌신적인 사회운동가였던 엘리너루스벨트였다.
반면 한국 유권자들은 부인들이'나대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 한때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그림자 내조'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러나 '그림자 내조'를 내세운 그 당사자야말로 대통령을 통해 각종 이권과 인사에 관여했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우아한 한복맵시로 유명했고'청와대의 야당'으로 자처하면서 남편에게 정치측근들도 할 수 없는 고언(苦言)을 자주 하고 어린이 문제에도 관심이 높았던 고(故) 육영수여사를 바람직한 퍼스트 레이디로 뽑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유권자들은 대통령후보 부인도 독자적 인격체로 보고 인간성. 지도력. 대통령에게 미칠 영향등을 고려해 표를 던져야 한다.
15「큰 사랑」이 있는 작은 공간
"일반 목욕탕에서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오세요. 무료로 목욕과 이발, 세탁을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일 서울역 부근 동자동 11번지에 이색적인 목욕탕이 문을 열었다.
"나사로의 집"이라는 현판이 내걸린 이곳은 일반 목욕탕에서 푸대접을 받는 행려자들이 마음놓고 드나들 수 있는 "자유공간"이다.
규모라야 15평 남짓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10명이 이용할 수 있는 샤워시설과 이발실,1시간 안에 건조까지 마칠 수 있는 현대식 빨래방 시설이 갖춰져 있다.
행려자들은 목욕을 끝낸 후에는 말끔하게 손질된 의류 5백여점 중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을 수도 있다.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오후 2~5시에 문을 여는 이 목욕탕은 매월 마지막 목요일에는 외국인 부랑자와 여성 행려자들을 위해 개방된다.
이곳의 설립자는 33년째 만성 신장 결석증을 앓고 있는 김흥용 목사(58).그는 오래 전에 한쪽 콩팥을 떼냈고 86년 나머지 한쪽마저 3분의2를 잘라낸데다 고혈압과 협심증까지 겹쳐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불릴 정도였지만 이웃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한국은행 사서로 일하던 김목사는 93년부터 모 선교회가 서울역에서 매주 목요일 개최하던 철야예배에서 "행려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곳은 있지만 마음놓고 씻을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말을 듣고 나사로의 집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95년 퇴직한 김목사는 서울역과 남대문을 중심으로 행려자들을 뒷바라지하며 목욕탕 건립에 본격 착수했고 2년간의 준비 끝에 마침내 1일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영등포시장에서 청과상을 하는 부인의 도움도 컸다.
목욕탕은 문을 열자마자 소문이 전해져 문전성시를 이뤘고 한국은행 노동조합과 남대문경찰서는 김씨의 일을 돕겠다며 헌옷 수거에 나서 적지 않은 힘이 되어주고 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장40절을 즐겨 암송한다는 김목사는 "혈압이 2백70~2백80을 오르내리는 위험한 상황인데도 하루하루 생명이 연장되고 있는 것은 욕심을 버리고 나눔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환하게 웃었다.
16. 사회복지시설 '찬바람만 찾아와요'
"좋은 후원자님이 나타나서 내년에는 유치원에 다니게 해주세요."
경기도 고양시 `천사의 집'(02-3158-6501)에 살고 있는 예윤(4)이는 벌써 반년째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하지만 기다리는 후원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인 12월 한 달에만 10여차례 후원자들이 이곳을 찾았지만, 올해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같이 사는 형. 누나들이 직접 사다가 달아준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없었다면 예윤이의 크리스마스는 그냥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천사의 집에선 예윤이 처럼 낳자마자 부모가 버린 두살바기 아기부터 뇌성마비. 다운증후군.자폐아 등 장애인들과 치매에 걸린 87살 할머니까지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이 살아간다. 이들의 엄마노릇을 하는 장순옥(46) 원장도 척추이상으로 등이 굽은 장애인이고, 장 원장의 외동딸도 정신지체장애인이다.
"다들 힘드니까 어디 이런데 찾아오나요. 정을 조금만 더해줘도 살아가는 희망이 생길텐데요." 5년째 혼자서 온 식구들의 빨래를 하고 밥을 해먹이고 있는 장씨의 한숨 섞인 말이다.
"해마다 도움도 줄어들어요. 후원금이 들어오는 대로 방을 따뜻하게 하고 사람 사는 곳처럼 보이도록 만드는데 썼어요. 그런데 `살만큼 해놓고 사니 안 도와줘도 되겠네'하는 거예요."
지지난해 텔레비전에 천사의 집이 소개된 것도 소용없었다. 후원자는커녕 몸이 불편한 사람을 맡기고 싶다는 문의전화만 빗발쳤다.
올 연말 장애자.노인.어린이 등 오갈데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디나 형편이 비슷하다. 특히 규모가 작고 개인이 운영하는 휴식처들은 예외 없이 더욱 추운 겨울을 지내고 있다. `올해처럼 찾는 이 없는 연말은 난생 처음'이라는 말이 자연스럽다.
부모 없는 여자아이들과 여학생 21명이 살아가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김효주 아녜스의 집'(02-690-8461).
"3년전부터 도움도 줄고 찾아오는 사람이 뜸해지더니 올해는 완전히끊겼어요. 와서 돕지는 못할 망정 복지시설 관련 비리가 터질 때면 `돈많이 벌겠네'라고 비꼬지나 않았으면 좋겠어요" 강경숙(37) 원장의 원망 섞인 말이다.
`아녜스집'의 1년 예산은 5천만~6천만원. 이중 2천여만원은 연말 연시두 달간 모금한 돈으로 충당했다. 하지만 이젠 옛말이다. 지금까지 걷힌 돈은 예년의 10분의 1도 채 안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집주인이 바뀌면서 당장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한다.
그래도 규모가 크고 이름이 알려진 복지기관들은 그나마 평년수준을 유지한다. 고정적으로 후원하는 회원들 중심으로 운영하기 때문이다. 홀트아동복지회는 장기후원자가 많아 큰 타격은 없다. 유니세프(국제연합 아동기금)도 올 모금액이 지난해 수준인 27억원 정도는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오래된 기관이나 단체들도 그때그때 부정기적으로 돕는후원자의 숫자는 역시 눈에 띄게 줄었다.
음성 꽃동네 사무장 정광열 신부는 "전체 운영비의 70%를 회원들의 고정후원금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별다른 영향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회원 76만명 가운데 꾸준히 성금을 보내는 이가 3분의 1로 줄었다고 귀띔했다.
나환자 4백명이 살고 있는 경남 산청의 성심원(0596-73-2053)도 후원이 줄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1년 예산 15억원의 절반 가량을 독지가들의 후원금으로 꾸려나가는데, 올해처럼 썰렁해서는 앞으로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한다. 관리를 맡고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박재홍 수사는"생활에 여유가 생겨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 보다는 아무래도 자기복지를 더 챙기는 것 같다"고 말한다.
올해 유난히 후원이 저조한 데는 불경기에다 소쩍새마을 사건이 잊혀질 만 한 때에 터져 나온 뽀빠이 사건의 영향이 컸다.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복지시설을 믿지 않는 분위기가 퍼지면서, 이미 그전부터 줄어들던 도움이 격감했다는 지적이다.
부모 없는 청소년들을 돌보고 있는 부스러기 선교회(02-365-1265)의 경우, 올해 줄어든 1백97건의 후원자 가운데 개인회원은 1백43건이었다. 후원금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천여만원이 줄었다. 때문에 이달 말까지 대주기로 약속한 57명의 학생에 대한 장학 지원금 7백만원을 못 주고 있으며 연료비 2백만원도 밀려있는 형편이다.
이런 추세는 해마다 12월과 1월 두 달 동안 전국 언론사를 통한 이웃돕기운동추진협의회의 모금액에서도 잘 드러난다(그래픽 참조). 93년 1백84억원에 이르던 모금액이 해마다 10억원씩 줄어들어 지난 겨울엔 1백64억원으로 줄었고, 올해는 1백40억여원에 그칠 전망이다. 그나마도 대기업의 성금액수가 많아져 개인 성금의 감소를 상쇄한 탓에 가능하다.
서울방송 모금 관계자는 "매년 각 학교들이 방학 전에 모금액을 보내오는데 올해는 전화도 뜸하고 오는 사람도 없어 모금창구가 썰렁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모은 총액도 지난해 이맘때와 비교해 10분의1 정도로 저조한 수준이다. 한국방송공사 역시 지난해에 비해 성금 총액이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이웃을 돕는 사회의 손길이 줄어드는 이유는 불황 탓도 크겠지만 남에게 무관심한 사회풍조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몇년전만 해도 신문이나 방송에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 이야기가 나가기만 해도 도움을 주겠다는 전화가 불티나게 쏟아졌었는데 요즘은 달라요. 매스컴을 타도 전화 한통 걸려오지 않을 때가 많아요." 부스러기선교회 강명순 총무의 말이다.
# 유명 정치인 후원회는 '호황'
불황에 밀린 세밑 인심은 꽁꽁 얼어붙었지만 정치인에 대한 후원만큼은 여전히 넉넉하다.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는 지난 10월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국회의원 후원행사가 열리고 있다. 내로라 하는 후원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기부금 불황의 유일한 사각지대다.
신한국당의 한 중진의원 보좌관은 "잘 나가는 의원들이라면 많이 걷히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며 "의원들의 절반 정도가 1억원 정도는 건진다"고 말했다. 야당의 경우에도 실력자들의 후원회는 성황이다.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 야당의원의 보좌관은 올 후원행사에서 2억원 넘게 후원금을 모았다고 밝혔다. 같은 급의 다른 중진의원들도 대부분 "남들 하는 만큼은 모았다"고 밝히고 있다.
보통 경비를 빼고 5천만원 남짓 건지면 `괜찮은 장사'로 치는 통념에 비춰보면 성황이라고 할만하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당에 따라, 국회의원 개인의 정치적 영향력에 따라 행사 규모와 기부금 액수는 천차만별이다.`끗발 있는' 정치인들의 후원행사에는 천명이 넘는 참석자들로 붐비고 몇 억원의 성금이 걷히지만 어떤 후원회장은 파리만 날린다. 50여명만 찾아온 후원회도 있었다고 한다.
17.국경없는 의사들
지난 9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지구환경회의는 비정부기구(NGO)의 위력을 과시한 회의였다. 1백71개국에서 온 9천여NGO들은 리우회의가 채택한 "의제(의제)21"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21세기는 NGO의 세기가
되리라는 전망도 있다. 빈곤·기아·환경·난민 등 지구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활약하는 NGO는 지구촌 어두운 구석을 비추는 빛과 같은 존재다.
NGO의 출발은 1948년 유엔에 의해서다. 당시 유엔은 후진국 경제개발을 지원하면서 개발이익이 일반국민에게 고루 돌아가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민간 기구에 맡겼다. 그후 NGO는 그 개념이 확대돼 비단 유엔이 인정한 민간 기구뿐 아니라 국 제협력사업에 참여하는 민간단체들을 총칭하는 용어가 됐다.
지난 71년 프랑스에서 시작한 "국경없는 의사들"(MSF)은 세계 최대 민간 의료봉사단으로 세계적인 NGO로 손꼽힌다. 1백만명 이상이 사망한 비아프라 내전에 참가, 의료봉사활동을 벌이면서 전쟁의 야만성을 체험한 젊은 의사들은 국제의료봉사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MSF를 설립했다. "국경없는"이란 이름은 전쟁 또는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MSF는 정치적으로 피해국가의 영토. 주권을 무시하는 일이 있더라도 인도주의라는 대의(大義)에서 인명구출을 우선으로 한다는 활동목표에서 나왔다.
현재 MSF는 유럽에 6개 지부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 13개 사무국을 두고 있다.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내는 후원자가 약70만명, 연간 5억프랑의 예산을 쓰고 있다.
MSF는 재해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달려간다.88년 이라크가 이란에 대해 화학무기를 썼을 때 가장 먼저 현장에 들어가 이 사실을 전했고, 91년 걸프전 때는 60여대의 전세기를 동원해 난민 7만여명을 구출했다. 94년 르완다 내전에선 구호활동을 벌이는 한편, 투치족의 후투족 양민학살을 폭로해 국제 사회의 여론을 환기시켰다. 지난해엔 북한 홍수피해지역에도 의료진을 파견했다.
서울평화상문화재단은 11일 제3회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MSF를 선정했다. MSF는 이를 반기면서 상금 20만달러를 자신들의 봉사활동에 쓸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수상 결정은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던 서울평화상이 앞으로 제자리를 찾는데 도 크게 기여하리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신문
18.농촌봉사활동의 허와 실
한때 학생들의 농촌봉사활동은 여름 방학을 맞아 농민을 의식화시키는 민주화 투쟁의 일환으로 정부의 탄압을 받았던 때가 있다. 어떤 농촌에서는 제대로 일손도 못도와주고 쫓겨나는가 하면 어떤 곳은 민주화의 기지로 마을을 변화시키는 승리의 활동도 있었다. 비록 정부의 탄압이 집요하였지만 그만큼 학생들의 농활은 위력도 켰고 학생운동의 열정도 뜨거웠다. 그리고 농활은 정부를 반농업적 정권으로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농민운동을 지원하는 학생운동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1978년경 아카데미 농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농촌의 사회구조적 모순을 깨달은 젊은 기독교 농민운동 활동가들은 농촌이 가난한 것은 농민의 잘못이 10%라면 90%는 우리나라의 반민주적 사회구조에서 나온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벌써 기독학생운동 출신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특별히 이들과 기독학생들은 민주화운동에 상호 공감대와 연대를 형성하며 기독학생들의 농활을 주도해왔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기독교농민회가 생기고 전국적 농민운동 단체들이 생겨나며 민주화의 길에 매진하는 열정이 1987년 6.10민주화대투쟁을 기점으로 농민운동 과정에도 형성되면서 학생들의 농활도 아마 폭발적으로 이루어졌고 이 시기가 되면 정부와 학생들이 농촌현장에서 재격돌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민시대가 되었다고 하는 지금, 농민운동도 새로운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다. 학생들의 농촌봉사활동도 예전에 비하면 참여가 줄어들고 있을 뿐 아니라 가기를 두려워하는 회피지역처럼 여기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요즈음 농촌에 가면 여기 저기 빈 농가를 볼 수 있고 젊은 농촌 청년들을 보기는 하늘에 벌따기 보다 힘들다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일손이 모자라는 농촌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일손을 도우려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면서도 왜 학생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농촌으로 변하였는지 궁금하다. 이것은 반농업적이요 반농민적인 소위 신농정으로 부터 오는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농촌을 살리는 대안적 운동에 대한 학생들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가 약해지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학생들의 고민은 21세기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의 시점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의 비전을 어떻게 그리느냐가 여전히 명확하게 그들의 손에 잡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대학 기독학생회는 이런 고민 끝에 농활 대신 「전국순례」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면서 여기저기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는 지역을 돌아볼 계획을 세웠다.
지금 대학생들은 운동이나 봉사에 앞서서 자신의 진로도 명확히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촌봉사를 가서 농민들의 희망없는 한맺힘과 고달픈 노동의 현실을 바라볼때 자기 자신에게도 아직 대책이 없는 젊은 기독대학생이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보고 외면하려는 도피의식 마져 생길 수 있다.
그리하여 어떤 기독학생회는 이제 거창한 농촌봉사 또는 농촌선교 활동이라는 이름보다는 농민들과 함께 어려움을 함께 느끼고 함께 고민하며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선 배움의 현장이라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농촌으로 가려고 하고 있다. 기독학생들이 그들의 활동방향을 「여름생명학교」라고 붙여놓고도 『웬 「여름생명학교」?』라고 부제를 걸고 이 어색한 이름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 기독학생회의 전문성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생명의 삶을 살아가신 그길을 따르는 운동과 실천으로서 환경오염의 현장을 돌아보고 새로운 생명의 삶을 실천하는 공동체나 시민운동들로 부터 먼저 배우고 그 다음 돕는 활동을 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제 농촌봉사활동은 민주화 투쟁의 일환이 아니라 학생들의 꿈과 비전을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모색하는 「열린 현장교육체험활동」이며 그 가운데 농민과 함께 하는 봉사정신,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활동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는 모토로 새로운 미래를 위한 대안 모색을 위해 여름봉사활동이 기독학생들 가운데 꿈틀거리고 있다고 확신한다.
한국교회가 이런 기독학생들에게 애정과 사랑을 아끼지 말고 물질적인 도움과 정신적 지지를 보내주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함께 변화를 모색하며 21세기의 예수 사랑의 실천운동이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19.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박사
"죽기전에 이북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 두손 붙들고 예수님 믿고, 예수님 따라가야 한다고 전해야 되는데...그래도 두 어깨가 너무 아파 저녁에 잠이 통안오면 그냥 영원히 눈을 감고 싶어지기도 해."
지난 95년 1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장기려박사의 소망은 단하나, 북녘에 두고온 가족을 전도하여 천국에서라도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었다.
"저녁에 가서 우리 가족들을 만나면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살건데 그리 안타까울 것도 없지..."
남쪽에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사랑을 몸소 실천한 장박사는 자신이 남을 도우면 누군가도 북쪽에 있는 자기 가족을 돌봐주리라는 믿음으로 늘 기도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끝내 가족과의 만남을 이루지 못한채 세상을 떠난것은 지난 12월 25일 아기예수 탄생의 기쁨으로 온세상이 들떠있을 때였다.
"나의 비문에 `주를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85세의 나이로 타계한 장박사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라는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 예수의 참 제자였다.
의술이 아닌 인술을 베풀며 살아온 장박사가 가족과 헤어져 차남 가용(61. 서울대 의대교수)씨만 데리고 월남한 것은 지난 51년 1.4후퇴때다
잠깐 헤어지는 줄로만 알았던 이 이별이 40여년이 넘도록 계속될 줄 그는 꿈에도 생각못했다. 그래서 눈만 감아도 자신이 살던 이북의 고향마을이 눈앞에 아른거린다고 장박사는 밝힌바 있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의 차남으로 장기려박사가 태어났을때 환갑을 맞은 그의 할머니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당시는 이북교회에 부흥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장박사가 살던 입암동중앙에도 교회가 들어서 있었고 할머니는 어린 장박사를 등에 업고 교회에 다녔다. 장박사의 믿음은 이렇게 시작됐다.
독실한 신앙과 사랑실천으로 일관해온 그도 삶속에서 잘못을 범한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의 팽이를 훔친일, 송도고보시절 화투놀이에 빠져지내던 일, 일본인 간호원의 빰을 때린일 등 그도 한때 말씀에 어긋나는 행동을 더러 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는 곧 회개했고 기도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의사의 진료를 한번도 못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장박사는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하던 해에 김봉숙씨와 결혼했다.
경성의전 수석졸업생답게 장기려박사는 첫수술때 맹장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후 맹장염을 4년간 실험연구, 나고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3년뒤인 1943년 간암수술을 최초로 성공시키는 등 의학계에 명성을 쌓아갔다.
그의 명성은 두갈래로 갈라지는 조국의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놀아만 갔고 김일성대 의과대학에서 강의를 요청받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박해가 심해지고 끝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아 공산당의 감시를 받던 장박사는 "서울대에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백인제교수의 편지를 기억, 월남을 결심하게 됐고 안타깝게도 뒤따라 올 것이라 믿었던 가족들과는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은 월남후 더욱 빛을 발한다. 부산에 도착한 장박사는 영도제3교회 창고를 얻어 피난민의 무료진료를 위해 복음병원을 개설했다. 그는 "치료는 의사가 하고 병은 하나님께서 낫게 하신다"는 신념으로 환자를 진료하여 악조건속에서도 매일 2백여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순회진료를 다니는 등 의사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던중 장박사는 1956년 더이상 천막병원이 아닌 2백50평규모의 새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게 됐다.
치료비가 없는 입원환자에겐 주머니를 털어 퇴원시켜주고 그도 않되면 "오늘밤 몰래 뒷문으로 도망치게"라며 넌지시 일러주던 장박사의 모습은 의술을 지닌 사람들에게 두고 두고 기억될 모범이 아닐 수 없다.
의료보험의 시초인 `청십자운동'을 벌이며 빈민의 의료구호만을 위해 60여년간 외길을 걸어온 장기려 박사.
지난 91년 미국에 사는 조카를 통해 이북에 있는 부인과 두딸의 사진, 부인의 육성녹음 등을 알아보고 통일될 날만 기다리며 기도하던 장박사는 이제 이땅이 아닌 하늘에서 가족을 기다리게 됐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약속을 위해 혼자살아온 장박사를 두고 세간에서는 "아무리 독실한 기독교신앙인이라도 인간적인 외로움은 마음에 한으로 남았을 것"이라며 섣부른 예측을 한다.
그러나 참신앙으로 예수의 삶을 실천한 장기려박사야말로 주님과 평생 동거하며 누구보다 다복한 삶을 누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환자들을 가족삼아, 환자들을 이웃삼아 살아간 장기려박사에게 위안과 힘이되어 주신 주님이 있었기에 그는 인간적인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저 뒷산의 바위들 처럼 환자들을 위해 항상 서있을 의사가 되겠습니다."
이제 하나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누릴 장박사의 생전의 삶에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많은 사람들이 또 그의 뒤를 이어 참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길 기대해 본다.
20.크리스마스 씰
한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개발하고 이를 보급, 판매하기 시작한 이는 누구일까? 해마다 12월이면 접하는 이 의문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1890년에 내한한 캐나다 출신 여의사 로세타 셔우드(Rosetta Sherwood)는 한국 최초의 여성을 위한 병원인 보구녀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국 도착 즉시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으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여성을 위한 의료교육을 시작하였다.
1891년에는 역시 캐나다 출신 의시이자 목사인 홀(William J.Hall)이 내한 하였고, 그는 평양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하였다. 그후 그는 앞서 내한한 셔우드 와 서울에서 결혼하였다. 홀 의사는 청일전쟁 당시 만연하던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 전염병 치료에 몰두하다가 과로에 학질이 겹쳐 1894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관 34세였다. 한국에 온지 꼭 3년만이었다.
미망인 로세타 셔우드에게는 겨우 돌을 지낸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셔우드 홀이었다. 이때 그녀는 또 임신 7개월째였으므로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1897년 그녀는 아들 셔우드와 딸 에디스를 데리고 다시 한국 선교사로 나왔고 남편을 기념하여 평양에 병원을 설립하였다. 이것이 기홀병원(The Hall Memorial Hospital)이다.
어머니와 함께 평양에서 살던 셔우드는 그의 나이 18세 때인 1911년 미국으로 건너가 마운트 유니온대학을 거쳐 토론토 의과대학에서 의학교육을 받고 의사가 되었다. 역시 의사였던 마리안 버텀리(Marian Bottomly)와 결혼한 그는 아버지를 이어 선교사의 신분으로 1926년 내한하였다.
처음에는 해주 구세병원에서 일하면서 해주 의창학교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그후 그는 조선에서 수많은 사람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결핵의 퇴치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당시 폐결핵은 사형선고와도 같은 것이었기에 결핵퇴치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조선에서는 최초로 결핵요양원인 구세요양원을 1928년 해주 교외 왕신리에 설립하게 된 것이다.
그뒤 결핵협회(The Tuberculosis Association)를 조직하고 1932년 12월부터 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크리스마스 씰의 기원이 되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씰, 그것은 홀 의사의 한국인 사라의 씰이었다. 그는 선교사로 내한한 이래로 1940년까지 14년간 한국에서 값진 봉사를 하였다. 일제에 의해 마지 못해 한국을 떠났던 그는 인도로 가서 23년간 선교사로 봉사한 뒤 1963년 은퇴하였다.
본국에서 노후를 보내던 홀 의사는 여러 사람들의 권유로 1978년 『With Stethoscope in Asia, Korea』라는 자서전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이란 제목으로 역간되었다. 그는 1992년 9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 유해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21.성숙한 사회와 봉사활동
그리스도 교회는 봉사를 생명으로 가르치고 실천해 왔다. 신약성서에서 `디아코니아'(Diakonia)란 낱말은 봉사하는 것, 또는 사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하는 사역을 `미니스트리'라 하고,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디아코네인"(diakonein)에서 "디아코노스"(diakonos)란 명사가 나왔고 사역자를 "미니스터"(minister)라고 부른다.
"봉사하는 일"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부분은 예수님께서 봉사 하는 일에 분주하여 염려하는 마르다에게 "혹 한가지 만이라도 족하다"(눅10장40절)는 말씀으로 교훈 하신일이며, 또한 봉사의 직무에 대해서도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썩는 삶의 자세(요12:24)를 스스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교훈은 2000년을 지나오면서 봉사를 생명으로 삼고 사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천하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의 활동에 큰 빛이 되어왔다.
이런 봉사활동이 교회 만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던 종교적 영역을 넘어 이제는 사회의 영역으로 확대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정부가 지난 5월31일 "세계화"와 무한경쟁시대를 맞으면서 교육개혁의 목표를 열린사회에서 교육의 목표를 자아실현에 두고 대학입시에도 인성교육을 중시하고 지식중심의 도덕, 윤리교과 교육에서 벗어나 대화, 토론, 수련활동, 특별활동, 자원봉사 활동등 실천적 활동을 강화하여 `종합생활기록부'에 기록하여 입시에 반영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교육개혁에 대하여 우리가 환영하는 것은 단순히 `입시위주의 경쟁교육'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안도감에서라기 보다는 이제 우리사회가 성숙한 사회로 갈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열린 사회를 만들어 가고 그 사회의 일원인 성숙한 민주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평생교육이나 사회교육의 차원에서 볼 때, 인간교육의 목표인 자아실현으로 가능한 것이다. 차제에 우리는 성숙한 사회와 봉사활동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인간은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여러가지 생활과업을 갖는다. 인간의 생활은 고금을 막론하고 사회생활을 통하여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서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가정과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대부분의 필요한 자원과 서비스와 기회를 개발하고 공급하는 것이 자연적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생활과업의 달성을 통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러나 행복한 삶은 나 혼자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가정과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와의 공동참여 노력으로 조화롭고,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선진제국의 경우를 볼 때,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은 성숙한 사회형성을 통해서 이룩되며, 성숙한 사회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봉사활동의 노력이 기본적이고 필수적이다. 따라서 성숙한 사회와 봉사활동은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적 사회형성의 요체이기도 하다. 또한 봉사활동은 자원봉사 정신을 고취하고, 자아실현을 하고자 하는 사회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실천과정으로 가능한 것이다.
성숙한 사회형성을 위해서는 개인과 공동체가 다음의 구성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성숙한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 성숙이란 낱말은 사전적 의미로 볼때, "충분하게 발전된 완전의 상태 또는 완전성"을 말한다. 성숙이란 인간이 완전하게 성취해 보지 못했던 이상적인 정신상태를 말한다. 성숙이란 성숙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정신은 육체와 함께 성숙해가고 있으나, 때로는 개인에 따라서 신체적으로는 성숙했으나 정신적으로는 미숙한 사람들이 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성숙이란 말은 정신적 성숙을 향해서 성장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매슬로(Abraham Maslaw)의 표현 처럼 `자아실현의 정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둘째, 유치증을 극복해야 한다. 유치증(infantaiism)이란 치기, 발육 부진을 말하며, 그 특징으로는 (1) 기본적 충동과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예: 유아나 치기가 있는 어른들의 여러가 행위, (2) 새로운 여건과 변화에 대하여 적응하지 못하는 것(융통성, 상상력 부족) 완고성과 독단적 태도 (3)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에 머물면서 자기 이익과 편의, 기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함 자기중심주의(이기주의)는 미성숙의 표시이다.
세째, 섬기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남을 돌보고, 관심을 갖고, 섬기는 삶의 자세는 성숙의 표시이다. 성숙한 사회는 섬기는 삶의 자세를 갖춘 사람들의 구성을 통해서 이룩된다.
하나의 예화가 있다. 정신병원을 방문한 사람이 정신과 의사에게 물었다. "여기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정신나간 사람)이 있군요." 정신과 의삭: "아니예요, 모두 정신이 말끔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든 관심이 자기에게만 집중된 사람들이지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저사람들 (정신병 환자들)이 여기에 (병원)와 있지요."
넷째, 디아코니아를 실천해야 한다. 디아코니아란 종교적 봉사를 의미한다. 봉사는 궁극적으로 봉사자의 관심이 종교적 영역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봉사활동은 그 의미가 "주는자와 받은자"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일방적이고 자비심, 감상주의 영웅주의에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타인과 더불어 선한 활동을 하는 것을 통하여 자기실현을 위한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으며 자아초월을 지향하는 것이다.
봉사의 정신이 백화점이나 식당에서 처럼 상호간에 이해를 전제로 하여 서비스가 자기 이외의 다른 이웃들에게 봉사 한다든지, 유교의 봉건윤리개념에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 남편-아내, 며느리-시어머니의 관계등 상하, 주종의 관계로서가 아니다. 또는 시간이 있고, 동정심이 많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서비스하는 행위는 자원봉사이다. 진정한 봉사의 의미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인자의 온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눅10장43-45절)는 예수님의 교훈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제 되어야 한다. /한겨레신문
22. [노인문제] 혼자 사는 노인 요구르트 배달원이 살핀다
요구르트 배달원들이 혼자서 쓸쓸히 살아가는 노인들의 안부와 건강상태를 점검하게 된다.
서울 성북구는 거택보호자 가운데 혼자 사는 65살 이상 노인 6백5명에게 요구르트를 무료로 제공하면서 배달원들이 이들의 안부를 매일 확인하는 방안을 마련해 추진중이다. 배달원들에게 대상 노인들의 집을 미리 알게 한 뒤 전날 배달한 요구르트병이 그대로 놓여 있거나 다른 이상이 있을 때 이들의 안부를 확인해 동사무소로 연락을 취한다는 것이다.
구는 이 사업을 주민들의 자발적인 후원사업으로 만들기 위해 노인들에게 요구르트 비용을 대줄 후원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후원자들이 생산 업체에 돈을 내면 이 업체가 요구르트를 배달하면서 배달원으로 하여금 노인들의 건강을 점검하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후원자들은 노인들의 1달 먹는 값인 3천원을 기본 단위로 해서 몇 개 계좌든지 가입할 수 있다.
구 관계자는 "혼자서 어렵게 생활해가는 노인들은 건강이 악화돼 쓰러져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며칠이고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며 "지역 사정을 잘아는 배달원들이 매일 안부를 점검해주면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는 이달 말까지 관내 30개 동별로 대상 노인과 배달업소를 결정하고
배달원들에 대한 교육을 마친 뒤 다음달 말까지 후원자 모집을 끝내 10월초부터 이 사업을 시행할 예정이다.
23.미전도종족 이렇게 접근하라
미전도종족을 향한 선교관심과 전략은 금세기 선교에 핵심이다. 이를 위한 여러형태의 전략들이 동원되기도 했지만 효과적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들 지역에 대한 올바른 상황인식과 적절한 전략설정이 필요하다.
이번호에는 미전도종족에 관한 이해와 효과적인 접근방법에 대해 살표보고자 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땅의 모든 종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신다.
1. 미전도종족에 대한 지리적 이해
현재 진행중인 미전도종족 입양운동본부에 따르면 오늘날 전세계에 12,00개의 종족집단이 존재하며 그중 5,310개의 집단이 미전도종족이라 칭하고 있다. "어느 종족이 복음으로 접근되었는가"라고 말할때 접근되었다고 말하려면 그곳에 "외부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도 자기종족을 전도할 수 있는 충분한 인원과 재원을 가진 "가시적인 토착교회를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그렇지 못한 집단을 "미전도집단" 혹은 "미전도 종족집단"이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그룹들의 그룹"이므로 실제 총수는 수록된 5,310집단의 거의 두 배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한다.
옆에 게재된 지도에 나타난 흑점들은 10/40창 국가들의 지도와 목록이다. 지도에서 보면 10/40창은서아프리카부터 중동을 지나 아시아까지 뻗어있는 북위10도에서 40도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이들은 또한 모두 최소 5,000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국가이다)
2. 10/40창의 특수성
이 창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복음에 저항적인 세력을 포함하고 있다.
회교권, 불교권, 힌두교권의 대부분이 이 창 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선교사 입국 비자로 접근하기 어려운, 새로운 선교전략이 필요한 지역이다. 또한 바렛과 존슨이 "미복음화"된 국가로 구분한 30개 국가중 23개국(약77%)을 포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10/40창은 전세계 빈민의 82%와 전세계 40개 저개발국가중 18개국을 포함하고 있다. 10/40창은 복음도 없고 물질적 빈곤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종족집단을 표적으로 하여 이 두가지 기아를 전문적으로 채우는 사역이 필요하다. 랄프 위터의 말처럼 선교는 진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종족으로 가는것을 의미하기에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이 요청된다.
3. 미전도종족을 향한 접근전략
이러한 특수성을 지닌 지역에 대한 접근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존의 전략이 아닌 새로운 전략을 세워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선 이들 나라들 중 선교사라는 비자를 통해서 입국이 불가능한 지역에 대한 접근이다. 세상의 어떤 나라와 종교, 정치상황하에서도 사랑많으신 하나님의 출입을 제한할 수 없다. 수년전 서구 선교사의 손련입국이 금지되었을 때, 아프리카출신의 그리스도인은 그곳 대학에서 유학하며 동시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회교원리주의 국가인 파키스탄에서는 자선병원을 설립하여 자선 진료를 통한 복음전파를 행하고 있다. 전통적인 선교사로서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을 때 직업이나 학업을 통해 접근이 가능하며 사회봉사요원이나 외교등 접촉가능한 경로를 통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구호와 개발사역과 연계된 전도는 이런 물질적인 궁핍에 처해있는 지역에 가장 효과적인 사역방법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의무로서 궁핍한 자를 도와야 된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지상사역 가운데 이를 손수 실천해 보이셨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계명과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대명령을 내리셨다. 이 계명과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적절한 반을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매우 중요한 의무라 생각한다. 이제 우리앞에 놓여진 마지막 불신의 장벽을 허물고 말씀에 기갈되고 육적으로 굶주린 지역이 영적, 육적인 기아의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24.자원사회봉사 25명중 1명꼴
우리나라의 직장인들은 10명중 6~7명이 직장생활에서 육체,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밝혀졌다.
자원사회봉사활동을 하는 국민은 25명중 1명에 불과해 불우이웃이나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에 매우 인색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말 전국 99개 표본조사구내 2천9벡명을 대상으로 사회적 환경과 가족생활의 관계에 대한 실태조사결과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남성의 경우 일을 마치고 귀가했을 때 63.1는 육체적 피로를 59.9%는 정신적 피로를 느끼고 있다고 응답했다.
여성은 육체적으로 73.9%, 정신적으로가 66.6%였다.
취미생활이나 체력단련 등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사용하는 시간은 남성의 경우 하루 41분, 여성은 29분 정도였다.
그나마 비공식적은 직장생활의 연속 등으로 이 시간마저 빼앗기기 일쑤여서 이런 상태에서 원만한 부부관계나 끈끈한 부모, 자식관계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분석됐다.
한편 통계청의 「한국의 사회지표」에 나타난 91년 현재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4.1%. 이는 성인 25명 가운데 1명꼴로 성인 2명중 1명이 자원활동을 하는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턱없이 낮다.
우리나라의 가족들은 지역사회속에 살면서 지역공동체에서 고립된 채 지내고 있는 셈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70년대의 새마을운동과 80년대의 반상회가 지역공동체의 기능을 성공적으로 감당했으나 현재 거의 그 기능을 상실한 실정으로 각 자치단체 차원의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겨레신문
25.부실사회 위로하는 자원봉사자
참극의 와중에서 아름다운 사연들이 전해지고 있다. 매몰현장으로 뛰어들어가 생명을 걸고 구조작업을 벌이는 자원봉사자들의 활약이 벼랑끝 같은 절망속의 우리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생길 것 없는 일에 목숨을 걸고 뛰어든 이들은 수모까지 받아가며 그 일을 하고 있다. 값비싼 물건들이 널려있는 참사현장에서 `견물생심'을 이기지 못한 좀도둑들 때문에 오해를 받고 주머니 뒤짐까지 당해야 한다. 이런 일은 초기 단계에서 현장장악에 실패한 당국이 단체나 기업 등 조직을 통하지 않은 개인적 차원의 자원봉사자들을 도매금으로 의심하게 되면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은 생존자의 위치를 확인하고 구조대에 시급한 출동을 요청하거나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 지점을 제시해도 늑장을 부리거나 묵살당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충분히 구할 수 있던 생존자들이 당국의 무성의와 늑장대처로 상당수 숨졌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이들의 동기도 사뭇 눈길을 끈다.
현장 취재기자들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3분의 1정도는 사고 초기 구조대원들이 모자라자 선뜻 나선 실종자 가족이다. 공조직의 구조대가 투입된 뒤에도 자신들의 손으로 핏줄을 구하거나 하다못해 주검이라도 직접 거두고 싶어 자원봉사를 계속하고 있다. 한 자원봉사자는 여동생이 일하던 지상 1층 중앙통로 근처의 화장품 코너를 집중적으로 수색하고 싶지만 동료들에게 미안해 배당받은 곳을 떠나지 못한다고 했다. 손은 엉뚱하다 싶은 곳의 콘크리트를 긁어내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중앙통로 쪽에 가 있다는 것이다.
가족 중의 한 사람을 교통사고 등으로 잃은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의
간단한 응급조치 만이라도 있었다면 목숨을 건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그런 사람이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대개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억울하게 죽어갈 생명에 대해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한 생명이 우주보다 귀하다는 종교적 신념이나 남과 다른 독특한 철학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에 위험이 닥쳤을 때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처럼 현장으로 뛰어나온 사람들이다. 하루만 자원봉사를 하려고 나왔는데 도저히 발길이 안떨어져 못간다는 사람들이다. "피투성이인 채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을 구해본 사람이면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막노동꾼, 용접공, 휴가중인 군인, 외판원 등이 대부분인 이들은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기 일쑤라고 한다. 귀찮아 죽겠다는 듯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싸늘한(?) 대답을 남기고 피해 버린다. 의협심 이외에 다른 이유나 목적이 없는 것이다. 혹 인터뷰에 응하더라도 생명찾기에 대한 열정만 곳곳에 묻어날 뿐 품위있는 어휘로 자신을 포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원봉사자들은 이들에 그치지 않는다. 집안일도 젖혀둔 채 구조대원들을 위해 밤새도록 김밥을 마는 주부들, 약국 문을 닫고 대책본부 안에 무료약국을 개업한 약사들, 휴가를 내고 막장으로 달려온 군의관, 쌀 한가마분의 밥을 지어 현장으로 날라온 포장마차 주인, 각종 장비와 소모품.음식 등을 제공하는 기업들, 장사를 포기하고 가게를 아예 또다른 구조본부로 내놓은 주변 상인들.
고급취미나 즐기는 것같던 아마추어 무선 햄들의 활약은 어떠했던가. 소방대가 무전기 출력을 높이기 전인 사고발생 초기, 모든 통신수단이 끊긴 지하3~4층에서 물.산소.공구 등 비상물품 공급을 긴급요청할 수 있는 방법은 이들이 지닌 무선장비가 유일한 것이었다.
이들 다양한 자원봉사자들은 `부실공화국' `비리공무원 천국' 등의 자기비하와 집단우울증에 빠진 우리 사회를 위로하고 있다. 외국언론의 비웃음이나 사고 있는 이 나라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각박한 세태만 한탄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이들은 더러운 자본주의의 탐욕이 저지른 악을 정화하고 대속해주고 있다. 많은 선의의 사람들에게 그래도 이땅이 `사람이 사는 곳'임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대규모 `살인행위'에 차마 눈을 감을 수 없는 넋들과 그 가족이 이들의 노고에 작지만 큰 위로를 받게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26. "장애아 돌보며 `나'를 반성했어요"
{교복을 입고,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이제 조금 알겠어요.}.
경기도 성남 분당구 계원예고 2학년 김모(16)양은 최근 3일간 서울연세의료원 재활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오전 9시면 어김없이 병원으로 나와 8시간 동안 입원중인 장애인 환자들을 보살폈다.
김양이 생각도 못한 봉사활동을 하게 된 것은 후배를 폭행했기 때문. 김양과 친구들은 지난 5월 1학년 후배 7명을 불러다 머리를 쥐어박으며 [군기]를 잡았다. 김양은 {나도 선배들한테 맞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줄 알았다}고 말했지만, 학교 생각은 달랐다.{더큰 사건이 불거지기 전에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가담 정도가 가벼운 김양에게는 근신이나 유기정학 정도의 처벌이 예상됐다. 그러나 학교측은 뜻밖에 자원봉사활동을 권유했다. {처음엔 싫었어요. 차라리 학교에서 화장실 청소나 하는게 낫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난생 처음하는 자원봉사는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장애아들에게 산수를 가르치고, 공놀이를 하면서 쉽게 가까워졌다. 아이들도 김양을 친언니처럼 따랐다. {30분만 놀아줘도, 아이들과 그 부모님들은 말로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고마워해요. 헤어질 때 울면서 [다시 올거냐]고매달리는 아이들도 있었죠.}.
김양은 전신마비로 항상 누워 있어야 하는 한 아주머니를 위해 성경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좋은 이야기 상대가 되기도 했다. 반대로 환자와 간호사 언니들로부터 [상담]을 받기도 했다.
{연필도 제대로 못쥐면서 열심히 공부하려는 어린이들이 너무나 기특 했어요. 건강한 육체를 갖고 있으면서 불만에 차 있는 내 모습을 되돌아 봤죠.}.
계원예고가 병원봉사활동을 학생선도 프로그램으로 마련한 것은 지난 5월23일 연세의료원 재활병원 전도사 김복남(55)씨가 학교를 방문한 것이 인연이 됐다. 그동안 가출, 폭행 등으로 말썽을 빚은 학생 19명을 연세 의료원과 성남시 소망재활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게했다.
예상대로 처벌위주의 지도보다는 훨씬 효과적이었다. 계원예고 강병철 교사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대학 진학 후에도 병원봉사활동을 계속 하겠다고 말하는 학생들도 많았다}고 말했다. 김전도사도 {비행 청소년 들을 [일진회], [공주파] 등으로 부르며 몰아세우는 것 보다는 착한 학생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27.한 경찰관의 신문지. 헌책수집 (불우학생돕기 24년)
서울 청량리경찰서 김광호 (금광호.52.사진) 경사는 틈만 나면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신문지를 모은다. 벌써 24년째다.
각종 종합일간지와 스포츠신문. 벼룩시장 신문까지 모으다 보면 손바닥이 새까매진다.
수사과 사무실 한 켠에는 매일 한아름씩의 폐 신문지가 쌓이고 1주일이면제법 캐비닛 높이까지 올라간다. 매주 금요일은 폐신문지를 처분하는 날. 어김없이 찾아오는 고지 수집상은 저울눈금에 따라 4천~5천원씩 내놓는다. Kg당 50원 정도니 2백Kg 을 모아야 겨우 1만원을 채운다.
이렇게 해서 한달간 모은 기금은 3만원 안팎. 금경사는 월말이면 꼬박꼬박 천주교 봉사단체인 '작은 예수회' 를 찾아가 적지만 정성 담긴, 그리고 박봉을 쪼갠 성금을 합쳐 전달한다. 금경사의 '넝마주이' 생활이 시작된 것은 지난 74년 순경채용시험에 합격해 강원도춘천시 서면지서에 배치되면서부터다.
"글쎄요. 그동안 모은 신문지를 쌓는다면 고층아파트 높이는 되지 않겠습니까. 어림잡아도 트럭 수 십대 분량은 될 것 같아요. " 금경사는 순경시절 글을 모르는 주민 20여명에게 한글을 가르치다 '장학금' 의 필요성을 느껴 신문지 수집을 통한 이웃돕기를 착안했다.
불우한 가정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중학생들에게 박봉을 털어 등록금을 지원하다 한계에 부닥치자 생각해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폐지는 제법 돈이 됐어요. 요즘이야 폐지마저도 수입한다느니 해서 팔기도 어렵지만.. " 한때 그의 넝마주이 행각은 주위의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청량리경찰서 김성광 (50) 경장은 "처음에는 사무실 곳곳이 지저분해져 불평도 많았지만 금경사의 뜻을 알고부터는 동료들이 오히려 폐지수집을 도와주고 있다" 고 말했다.
그동안 '폐지 장학금' 을 받은 학생은 12명이다. 한번 인연을 맺게 되면 고교졸업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지만 도움을 준 학생들에 대해 금경사는 입도 벙긋한 적이 없다.
금경사의 부인 박옥자 (박옥자.50) 씨도 남편 뜻에 따라 맞벌이 부부 아이들을 맡아 기르며 92년부터는 음성 꽃동네에 매달 후원금을 보내고있다. 금경사는 "그저 주어진 여건에서 작은 이웃돕기를 실천할 뿐인데 세상에 알려지면 쑥스럽다" 며 끝내 말을 흐린다. 다만 최근들어 계속 폐지 값이 폭락하는 것만 걱정한다.
사무실 한쪽을 가득 채워봐야 1만원 남짓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커다란 사랑도 작은 이웃돕기가 모인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아직은 그렇게 각박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금경사는 매일 퇴근 때마다 '어이, 넝마주이 - ' 하며 신문지. 헌책등을 한아름씩 들고 웃으며 찾아오는 동료들을 보면서 요즈음은 더 없는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28. 음성 꽃동네서 "봉사 새 삶" [삼풍 두돌] 유족 이원걸씨,
사고후 술로 지새며 입원까지...보상금 나눠준 후 혼자 떠나
"아내-아들 떠난 자리에 불우 노인들 맞았어요"
{아내와 아들을 먼저 보낸 대신 이젠 노인들이 제 가족이 됐습니다. 그분들은 제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지난해 6월부터 충북 음성군 꽃동네에서 노인들의 수발을 들고 있는 이원걸(42)씨.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졸지에 부인과 외아들을 잃고 꽃동네 노인들의 수발을 들고 있는 그는 아직 그늘이 가시지 않은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족을 잃고 알콜 중독자로 전락했던 지난해봄까지의 고통스런 기억이 가끔 마음 한구석에 아리게 떠오르지만 그때마다 노인들의 등을 밀고 머리를 감기며 잊으려고 한다고 했다.
{오후 6시쯤인가, 처형이 가게로 전화를 해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고 하더군요. 앞이 캄캄했습니다. 청심환을 한 알 먹고 현장으로 달려갔지요.} 그 날 아내 김명순(당시 37세)씨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러 아들 승진(당시 12세)이를 데리고 백화점을 찾았다가 참변을 당했다. 부동산 중개인인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늘 적자였기 때문이다.
7월초의 폭염과 우울한 분위기가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사고현장을 정신 없이 뒤졌다. 이씨가 가족의 죽음을 확인한 것은 그로부터 18일 뒤였다. 산산 조각난 시신들.. 시신을 화장한 뒤 화장터 뒷산에 뿌리고 돌아섰다. 그 날 이후 {술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어서} 먼지 덮인 텅 빈 방에서 아내와 아들의 활짝 웃는 영정을 보며 매일을 술로 지샜다.
보다못한 아버지는 경기도 오산의 한 신경외과에 아들을 입원시켰다.
이씨가 알콜중독 치료를 마치고 나온 것이 지난해 6월. 보상금으로 받은 6억원 중 5억원을 본가와 처가 식구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1억원은 은행의 신탁 상품에 넣어 최소한의 생활비로 삼은 뒤 첫 달치 이자 76만원을 들고 꽃동네를 찾았다. 이씨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내 고통도 사그라들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꽃동네 인근 마을에 월세 10만원짜리 사글세방을 구한 뒤, 거동이 불편한 무연고 노인과 임종을 앞둔 노인환자 4백명이 수용돼 있는 [구원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노인들의 식사와 목욕을 돕고 똥-오줌을 받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중노동에 가까운 봉사활동이 몸에 배면서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노인들이 삶은 계란을 하나씩 받아들고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노인네의 때묻지 않은 미소에서 제가 살아야할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28일 2주기를 맞아 삼풍희생자 분향소를 찾은 이씨는 {노인들 덕분에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라며 아내와 아들의 위패에 성모마리아상을 선물하고 돌아섰다.
29. 낮엔 교도관 밤엔 야학선생
3주에 한 번씩이지만 내용과 시험에 얽매이기보다는 실제 생활에 보탬이 되는 법률 수업이 되도록 할 생각입니다."
낮에는 교도관, 밤에는 야학교사로 나선 수원 교도소 보안과 직원 안용선(33)씨는 야학 후원자에서 이제 '생활 법률'을 강의 할 교사가 된 것이 왠지 쑥스럽고 걱정부터 앞선다고 말했다.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탄동 '샘터 야학' (교장 김수근. 아주대 경제과 교수)과 안씨가 인연을 맺은 것은 4년전의 일이었다.
동료들과 호프 집에 갔다 때마침 지하에 있던 샘터야학에서 교사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했다 퇴짜(?)를 맞고 후원 회원으로 가입하면서였다.
매월 2만원의 후원비와 자원 봉사원으로 활동하다 올해 초 생활 법률을 강의해 달라는 야학쪽 제안에 떠밀려 교사를 맡게 됐다고 한다.
생물 교사가 꿈이던 안씨는 빈농의 가정 형편상 84년 고교를 졸업하고 봉제 공장과 음식점, 목욕탕 종업원으로 고생하다 91년 교정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한씨는 "팔 없는 장애인들의 목욕을 도와주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안씨는 올해부터 교도소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재소자들의 생물 교사를 맡고 있기도 하다.
30. 한국농촌에 심은 `인술 30년'
올 한미우호상 수상..."전주는 내고향" 한국이름 설대위
{제 인생의 절반을 한국에서 보냈습니다. 미국에 돌아간 뒤에도 1년에 한 두번씩 한국을 찾지만 그때마다 고향에 온 것 같은 푸근함을 느껴요.}.
미국 이름 데이비드 실(David Seel)보다 우리 이름 설대위를 더 사랑하는 벽안의 [한국인]. 한국전쟁 직후인 54년 의료 선교사로 아내 설매이(70)씨와 함께 들어와 가난과 전화로 무너진 농촌에서36년간 인술을 폈던 그다. 90년 정년퇴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72세의 설박사는 아직도 [전주 예수병원 명예원장]의 직함을 갖고 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직접 피고름을 짜가며 만난 환자들을 하나하나 기억했다.
{6.25때 인민군 죽창에 어깨를 깊이 찔렸다가 치료를 게을리해 종양으로 팔을 자를 뻔한 농부였죠. 6시간 긴 수술 끝에 힘겹게 나마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제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더군요. 퇴원한 뒤에는 찐 감자를 한아름 안고 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난 90년 전주예수병원 원장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쉬빌의 재향군인병원에서 여전히 의료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설박사는 {아직도 전주예수병원에는 내가 일하는 줄 알고 먼 곳에서 환자들이 찾아간다고 하더라}며 즐거워 했다. 며칠 전 전주에 들렀을 때는 40년 전 깜박깜박 하는 전등아래서 밤을 새운 수술 끝에 살려냈던 환자를 우연히 만나기도 했다.
{저에게 훌륭한 이름을 붙여줬고 전주비빔밥과 순두부찌개 맛을 가르쳐준 한국은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7년전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비빔밥을 먹기 힘들게 됐다며 아내가 얼마나 서운해 했는지 모릅니다.}.
그가 54년 병원에 처음 왔을 때 데이비드라는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다며 동료 의사들이 붙여준 것이 대위라는 이름이다. 이름에 손색없게 설박사는 한국에서의 36년 동안 단순한 신앙적 봉사를 넘어 우리나라 암연구수준을 높이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50~60년대 농촌에는 왜 그렇게 암환자들이 많았는지 몰라요. 무당을 찾아가고 시골 떠도는 돌팔이를 만나고 이런저런 민간요법으로 몸을 다 망친 환자들이 뒤늦게 찾아왔을 땐 너무나 안타까웠죠.}.
이런 참상을 지켜본 설박사는 [대한 두경부종양학회]를 처음으로 설립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암환자 등록사업을 시작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토록 희생적인 한국에서의 봉사에 대해 한미우호협회(회장 김상철)는 올해 [한미우호상] 수상자로 설박사를 선정했다. 이 자리에는 한국전에서 전사한 부친에 이어 자신과 아들까지 3대째 한국에서 근무한 리처드티몬스 미8군사령관도 함께 상을 받는다. 94년10월부터 미국에서도 한국관련 뉴스는 빠지지 않고 챙겨본다는 설박사는 {`물질적 풍요로 인해 지나간 시절의 고통을 잊어버린 한국젊은이들이 너무 많아진 점이 안타깝다}고 했다.
31. 사랑을 심는 주부 「戰士들」
"자원봉사로 이웃사랑 실천하는 수원의 주부군단"
경기도여성회관의 여성자원봉사자들은 외롭고 헐벗고 병든 불우이웃을 찾아가 정성으로 도와주는 것은 물론 궂은 일이라도 지역사회를 위하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는 "사랑실천의 첨병"들이다.
청소 세탁 취사 심부름 말벗돼주기와 같이 단순한 노력봉사에서부터 상담치료 간병 등 전문적인 분야에까지 자원봉사로 보람을 느끼며 더불어 살아간다.
경기도 여성회관 자원봉사활동 시범센터에는 주부회원 3백여명이 있으며 이들은 13~15명씩 20조로 편성돼 조별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84년 출범했으며 20대 주부에서부터 70대 할머니까지 회원들의 연령층이 폭넓어 봉사내용도 다양하다.
이들은 여성회관에서 실시하는 조리 급식 청소 등공예 서예 레크리에이션지도봉사 등 여성사회교육프로그램을 수료했다. 주부봉사자들은 재활원 보육원 양로원 등 사회복지시설을 정기적으로 찾아가 빨래, 아이 돌보기 등 부족한 일손을 거든다.
또 병원 등을 찾아가서 환자들에게 이야기 상대가 돼주고 행사안내, 김치담가 나눠주기, 우편물 분류 지원 등도 한다. 혼자 사는 노인과 소년소녀가장들을 위해 밑반찬을 만들어주고 도배봉사도 한다.
봉사회 회장 강연옥씨(46^수원시 매탄4동 한국2차아파트)는 "틈틈이 시간을 내 남을 돕는다는 일이 이처럼 재미있고 보람스러울 줄 몰랐다"며 "이웃을 사랑해야 내 가정도 행복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다른 단체와 연계해 자원봉사를 하기도 하고 방학기간에는 자녀와 께 하는 봉사활동시간을 가져 자녀들에게 이웃사랑을 심어준다.
여성회관 홍수자관장은 "봉사자들 모두 가정 일이 바쁜데도 기쁜 마음으로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다"며 "이같은 자원봉사활동이 국민들 사이에 보다 넓게 확산돼 우리사회에서 이웃에 무관심하거나 남을 헐뜯는 풍조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32.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올해 스물일곱 살인 찬우 씨는 늦깎이 대학 초년생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해 돈을 벌었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과 군대 때문에 좀 늦긴 했지만 틈틈이 입시 학원을 다니며 공부해서 올해 당당히 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일류 대학은 아니지만 자신의 성적에 만족해하며 한 학기를 넘긴 어느 날이었다. 그에게는 평소 잘 따르는 몇몇 나이 어린 동기생들이 있었다. 지난 학기만 해도 그들은 함께 어울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이 일과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언젠가 부터 그가 자리를 비우는 날이 늘어났다. 이를 이상히 여긴 동기생들은 분명 그에게 애인이 생긴 거라고 단정지었다.
"형, 우리한테도 좀 소개 시켜주라. 그 공주님이 누군지 궁금해 죽겠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무슨 얘긴지 알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다음 주 화요일은 어때?" 모두들 좋아라 박수를 쳤다.
드디어 기다리던 화요일이 되었다. "버스 타고 한참 가야 돼" 하는 그의 말에 '뭐 그렇게 비싸게 구나' 싶어 모두들 입을 비죽거렸다. 그렇게 40분쯤 달려 도착한 곳은 천사원이란 푯말이 붙은 공공 기관이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그곳에 있는 지체 장애인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왔던 것이다. 하던 아르바이트까지 그만두고 시작한 것이 아무 대가도 없는 야학 선생이란 걸 안 그들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공부를 가르치고 돌아오면서 그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 그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막상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너무 힘에 부치는 거야. 그래서 결심했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기로, 아르바이트는 돈만 돌려주면 그만이지만 처음 야학에 나가서 받은 가슴 뿌듯함은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더라구."
33.남을 돕는 다는 것
며칠 전 가까운 후배로부터 갑자기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 는 질문을 받았다. 무엇이라고 얘기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지만 문득 내 방 칠판에 써 놓은 단어가 생각나서 대답할 수 있었다. 'helper(돕는 자)' 라고.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일년 간 생활 한 적이 있다. 여러 가지 일이 많았으나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아주 작고 평범한 경험 한 가지이다.
어느 여름날 자동차를 몰고 시골길을 가다가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공원에서 자동차의 본네트를 열어 놓은 채 쉬고 있었다. 엔진 과열을 막기 위해서였다. 주위에 인가도 없고 지나가는 차량이 거의 없는 한적한 곳이었는데 큰 차 한 대가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혹시 라도 나쁜 사람들이 아닌가 해서 긴장하였으나 차에서 내린 사람은 나이 많은 노부부였다.
지나가다 보니까 엔진 뚜껑을 열고 있는 낡은 차가 보이기에 고장이 난 것 같아 일부러 찾아 왔다는 것이다. 자신이 자동차 엔지니어 출신이어서 원만한 고장은 고쳐 줄 수 있다고 말하며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들을 의심한 내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고, 이들의 돕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에 가슴이 뭉클했다.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사람들의 갖가지 삶을 보면 사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을 생각하고 도울 줄 아는 사람과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 이는 환경이나 배움, 신분에 관계가 없는 것 같다. 남을 돕고자 할 때 오히려 나 자신이 큰 도움을 받기도 한다. 재판 사건이 많아서 야근할 때 피곤하고 지치기도 하지만, 사건 하나 하나가 당사자들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하며 내가 하는 일이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돕는 일이라 해서 반드시 사회적으로 중요하거나 큰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현재 처한 위치에서 진실로 따뜻한 마음과 관심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 돕는 자가 되는 것은 능력과 힘의 문제 가 아니라 마음과 태도의 문제인 것이다. 또한 돕는 다는 것은 결코 도움을 받는 자보다 우월한 위치에서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가 한없이 부족한 존재이지만, 순간 당신을 도울 수 있어서 기쁘다 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행할 때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 모두가 진정한 사람의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땅의 삶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내가 어떤 큰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도왔는가 하는 그 진실이리라.
34.사랑을 지닌 사람들
초여름 땡볕이 주차장 마당 위로 뜨겁게 쏟아지고 있었다. 거무죽한 아스팔트 바닥위에서 화사한 파란색의 드레스를 입은 삼십대의 아름다운 여자가 금빛 플루트로 '아베마리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맑고 투명한 소리가 뜨거워지는 공기를 타고 인근으로 퍼져 나간다. 잠시 사이에 그 여인의 이마에서 송글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관객도 없는 상태에서 다음 출연자가 나왔다. 옥색 두루마기에 갓을 쓴 오십대 남자가 나와 아리랑을 구성지게 부르면서 학춤을 추기 시작했다. 열심히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을 보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주차장 모퉁이의 단풍나무 뒤로 두 노인이 스며들 듯 다가와 남이 자신들의 모습을 볼까 두려워하며 한오백년을 열창하는 옥색 두루마기의 남자를 보고 있다. 허름한 비들기색 점퍼를 입은 한 오인은 손가락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발가락도 없는지 목발을 짚고 있었다.
이어서 지열이 뿜어 나오는 아스팔트 위에 비닐로 만든 휴대용 돗자리가 깔고 그 위로 한복에 가야금을 든 세명의 여자드링 나와 앉는다. 그들은 깊은 산속 폭포수가 떨어지듯 가야금을 타면서 구성진 가락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 한과 정서가 담긴 소리가 퍼져 나가면서 주차장 구석으로 소리 없이 한 때의 노인들이 살며시 접근하고 있었다. 고동색 한복 치마저고리를 통일해서 입은 할머니들이 소리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않게 이 그늘 저 그늘에 숨듯이 가서 몰래 구경한다. 어떤 이는 코가 떨어진 자리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흉칙했다. 그 뒤로 남자 노인들이 다가와 여기저기 소리 없이 앉았다. 말기 암환자 모양으로 머리털 없는 사람이며 눈이 빠져 달아난 사람등 여러 가지 모습이었다. 어떤 노인은 손가락 흔적만 있는 사이로 간신히 담배를 끼워 피우고 있었다.
1997년 오월의 마지막 일요일. 나는 안양의 나환자촌인 나자로 마을에 갔던 것이다. 평소에 안면이 있는 아나운서 한 분이 몇몇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봉사활동을 다니는 현장이었다. 그들 중에는 밤무대에서 일하는 무명가수도 있었고 예전에 플루트를 분 현역 중령부인도 있었다. 또 호텔에서 힘들게 일하는 소리꾼들도 있었다. 학춤을 추는 아버지, 가야금을 하는 엄마, 그리고 제일 막내로는 예술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모두 함께 온 가족도 있었다. 아나운서 출신의 E씨에 의해 우연히 연결된 이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조그만 재주로 세상에 봉사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찾아가는 곳의 사람들에게 조금의 부담도 주지 않기 위해 심지어 물 한잔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타고 갈 봉고차 한 대와 공연할 장소만 있으면 그만이다.
점차 소리가 흥겹게 고조되고 있었다.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플루트로 연주하던 파란 드레스의 아가씨가 구석으로 다가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아주머니의 양손을 덥썩 잡고 그를 끌어낸다. 그는 몹시 수줍어 하면서 플루트연주자가 자신의 손을 잡는 것이 고마워 어쩔 줄 모르며 따라 나섰다. 옥색 두루마기를 곱게 차려 입고 학춤을 추던 오십대 남자가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이 문드러진 사람을 안고 아스팔트 무대의 중앙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둘이서 얼싸안고 춤을 춘다.
그 다음으로 가야금 병창을 하던 여인들이 나환자들을 데리러 가고 그렇게 하나 둘 무대 아닌 무대로 끌고 나가 손을 마주 잡고 춤을 추었다. 이어서 구석에 숨어 가장 수줍어하던 남자 노인도 앞으로 나가라고 등을 떠밀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모두 무대로 나가 출연진들과 손에 손을 잡고 한바탕 춤사위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맨 뒤에 숨어 수줍어하던 노인은 한 중앙에서 하늘을 향해 몸을 흔둘고 있었다. 항상 문둥이라고 피해 다니던 버릇이 유전처럼 가슴속에 새겨 있던 나환자 노인들의 마음이 활짝 열린 것이었다.
나는 뜨겁게 울려퍼지는 대중음악 속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영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속에서 흘러 나오는 생명수를 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짧았던 위로 공연이 끝났다. 출연진이 마당 한구석에 세워 놓았던 봉고차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누구 한 사람 물 한잔 가져다 주는 사람이 없었다.
공연후 그들은 자기들이 낸 자장면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운 채 각자 제 갈 길로 가기에 바빴다. 그중 가야금병창을 하던 한 여인과 애기를 나누었다. 명인들에게서 그리고 대학에서 이십년간 소리만을 공부해 온 사십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그는 지금도 매일 워커힐 가야금 식당에서 하루에 두 차례씩 공연한다고 했다.
"내가 가진 재주로 남을 즐겁게 해주는게 제일 행북합니다. 돈을 받고 출연할 경우 이 정도면 꼼짝 못하고 집에 가서 드러누워야 해요. 그런데 봉사활동을 한 날은 다시 공연을 나가도 몸이 끄떡 없거든요."
그녀는 나이답지 않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부지런히 전철역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워커힐에서 오후 공연이 두 차례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차고 남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통위에서 하는 것임을 다시 느낀 하루였다.
35. 최선의 삶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채플이라는 교회당의 천정 벽화를 손수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천정은 까마득히 높았기 때문에 그 아래에서는 사실 천정의 모습이 한 눈에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이 천정의 벽에 가까이 붙어서 선 하나 하나를 정성을 다해서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친구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 했습니다.
"여보게, 여기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네, 그냥 적당히 해두고 내려오게나."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천정에서 그 친구를 향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보게, 이 그림을 다 그린 후에 이 그림의 성과가 어느 정도인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야 자네겠지." "맞네.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한 나는 최선 이하로 일할 수는 없네."
자기의 삶은 자기가 제일 잘 압니다. 자기의 삶에 얼마만큼 최선을 다했는지, 주어진 시간 속에서 주어진 과제를 위해 얼마만큼 최선을 다했는지 자신이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십니다. 나를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내 양심 앞에서 내게 주어진 이 삶의 과제를 위해서 당신은 얼마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읍니까?
36. 소년의 병 간호
다음은 에드몬드 데 아미치스가 쓴 '사랑의 학교'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부슬비가 내리는 날, 한 소년이 나폴리에 있는 자선병원을 찾아왔다. 일자리를 구하러 떠난 아버지가 나폴리에서 갑자기 병에 걸려 입원해 있다는 편지를 받고 병 간호를 하기 위해 온 것이다. 간호가는 아버지가 닷새 전쯤 외국에서 돌아온 노동자란 말을 듣고 소년을 4호실 환자에게로 안내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얼굴이 퉁퉁부은 채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본 소년은 깜짝 놀랐다. 예전의 아버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소년은 자신도 몰라보는 아버지를 정성껏 간호했지만 마버지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닷새째 되는 날 오후, 소년이 아버지 곁에서 병 간호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간호사 아가씨,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문 쪽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소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바로 아버지의 낯익은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저 분이 바로 당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간호사의 설명을 들으며 병실로 들어서던 아버지는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아들을 보고 깜짝 몰랐다. 소년은 그동안 간호사의 잘못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아버지로 알고 간호해 온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만난 소년은 곁에 있는 환자를 두고 차마 발걸음을 떼 놓을 수 없었다.
"아버지, 먼저 집으로 돌아가세요. 저는 하루만 더 이분을 간호해 드릴게요."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소년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환자를 간호했다. 소년의 아버지가 병원을 떤 지 이틀째 되는 날, 밤새 몹시 괴로워하던 환자는 마지막 순간 소년을 향해 힘없이 미소짓고는 눈을 감았다. 소년은 쓸쓸한 마음으로 창가에 꽂혀 있던 제비꽃 한다발을 환자의 손에 쥐어 준 뒤 병원 문을 나섰다.
소년의 등 뒤로 새벽 별들이 마지막 빛을 내뿜고 있었다.
37.서비스 맨과 거지의 차이
미국의 유명한 실업가이자 자선 사업가인 록펠러가 한 호텔에 묵었을 때의 일이다. 호텔측은 이름난 부자로 알려진 그를 맞이하여 작은 실수라도 없게 하려고 무척 신중을 기했다. 록펠러가 머무는 동안 그의 시중을 들게 된 젊은 종업원은 지배인으로부터 세심하게 신경을 쓰라는 특별 당부를 받고, 혹시라도 록펠러가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눈치 있게 알아서 척척 해내는 종업원의 태도에 록펠러는 매우 만족해 하면서 속으로 쓸 만한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호텔을 떠나게 된 록펠러는 그 동안 자신을 돌봐 준 종업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호텔의 규정대로 숙박료의 일부에 해당하는 만큼의 서비스료를 주었다. 그리고 돌아서 호텔을 나오다가 등 뒤에서 종업원이 혼잣말로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쳇, 미국의 대부호가 겨우 요만큼의 팁을 주네."
록펠러는 호텔 문을 나서다 말고 돌아서서 그 종업원을 불러 말했다.
"젊은이, 자네 말대로 나는 지금 당장 자네에게 많은 액수의 팁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미국 최고 부자임에 틀림없네. 그러나 내가 자네에게 규정이상의 팁을 주는 순간 자네는 호텔 서비스맨이라는 당당한 지위에서 적선 받는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위치로 전락하고 마는 거라네. 왜 스스로 그 같은 위치로 전락하려 하는가?"
말을 마친 록펠러는 걸음을 옮기려다 다시 멈춰 한마디 덧붙였다.
"사실 나는 그동안 자네를 눈여겨보면서 성실한 태도에 호감이 가 우리회사에 특채를 할 까 생각했는데 자네 스스로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군."
록펠러의 충고를 들은 종업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38.놋 비문의 교훈
프랑스의 어느 마을에 있는 낡은 교회 마당에 두 손을 활짝 편 예수님의 대리석 조상이 있었습니다.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폭탄이 그 마을 가까이에 떨어져서 그 조상은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적군이 물러가자,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아끼던 그 조상의 조각들을 찾아서 다시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 조상은 마을 사람들의 삶의 일부였고 그들은 몹시도 아꼈습니다. 다시 붙여 만든 상처투성이의 몸체는 여전히 아름다울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조상의 양 손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손이 없는 그리스도는 더 이상 그리스도라고 할 수 없다” 누군가가 그렇게 한탄했습니다. “상처투성이 손이라도 괜찮다. 하지만 손이 없어서야 어떻게 주님이라고 하겠는가? 결국 새로 조상을 세우는 도리밖에 없다.”그때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제안을 했는데 그 제안이 기꺼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조상의 받침대에 “나에겐 손이 없지만 당신들에게는 손이 있도다”라고 쓰여진 놋쇠판을 붙인 것이었습니다. 수년 후 어떤 사람이 놋 비문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짧은 시가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내겐 손이 없으나 오늘 내 일을 행할 너희의 손이 있도다. 내겐 발이 없으나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너희의 발이 있도다. 내겐 입이 없으나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줄 수 있는 너희의 입이 있도다. 내겐 아무런 도움이 없으나 사람들을 하나님 편으로 이끌 수 있도록 돕는 너희의 도움이 있도다.”
39 무한한 가치
"10원짜리로 뭘 하겠느냐고요?』
부산 남구청(청장 이영근)직원ㄴ 7백여명이 2년2개월동안 모은 10원짜리 동전 1백여만개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온정을 베풀었다. 날로 치솟고 있는 물가에 비하면 하잘 것 없다시피한 10원짜리 동전을 모아 『무한한 가치 창조』을 이룬 셈.
남구청은 93년 11월 5일부터 지난 1월 18일까지 구청 직원과 민원인들로 부터 10원짜리 동전을 모금, 모두 1천5만7천2백10원을 모았다.
이구청장은 이 가운데 쓰고 남은 3백62만9천9백70원으로 지난 23일 우암동 성프란치스코의 집에 50만원, 용당동 소화 영아재활원에 1백만원, 대연동 새빛 기독보육원에 70만원, 현대정신요양원에 1백43만원등 관내 복지기관에 각각 전달했다.
남구청은 이에 앞서 94년 2원 용호1동 백은태씨(33.여)의 화상 수술비로 3백76만원을, 지난해 5월엔 용호2동 정두호씨(40)에게 발목골절상 치료비로 2백32만원, 주경숙씨(39.여)에게 무릎관절 치료비 35만원을 지원했다.
이구청장은 『어렵게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 여러 사람들의 `정성'을 모아 준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며 `천덕꾸러기'취급을 당했던 10원짜리 동전의 `작지만 큰 역할'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40. 봄은 반드시 옵니다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여행용 가방 외에
또 하나의 가방에 꽃씨를 가득 담아 여행지에서 그 꽃씨를 뿌리고 다녔다. 이 사람은 특히 기차를 탈 때 달리면서 철도 주변에 꽃씨를 뿌렸는데 이런 모습을 본 사람들이 "당신은 이 길로 두 번 다시 오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데 왜 꽃씨를 뿌립니까?"라고 물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다시
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봄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될 것입니다"
41. 봉사료는 필요없습니다
서비스 세계 제일의 기업으로 평가받은 일본 교토MK택시 창업주 유봉식님의 성공이야기이다. 석유 회사 `니가이 석유'를 그가 인수한 것은 첫번째 사업이 실패한 지 3개월 만이었다. 다시 잘해 보자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도매상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해도 석유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알아보니 그 동안 니가이 석유의 신용도가 땅에 떨어진 걸 몰랐던 것이다. 당장 급한 것은 신용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는 급한 대로 형에게 돈 1백만엔을 빌렸다.
그리고 그는 도매상에 현금을 당장 지급할 테니 석유를 보내 달라고 전화했다. 예상대로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트럭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그는 석유를 그냥 내리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돈부터 먼저 받고 내려 주게나" "아닙니다. 먼저 내리겠습니다."
그의 엉뚱한 제안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도매상 인부들이었다. 그 소문이 퍼지자 여기저기서 석유를 팔겠다고 업자들이 모여들었다. 얼마 후 니가이 석유 회사는 `24시간, 연중 무휴'라는 광고를 냈다. 더 이상 니가이 석유 배달 사전에 `잠시 후에', `내일'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밤 누군가 가게문을 두드렸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휘발유가 떨어져 차가 멈추어 있는데 휘발유 5겔런만 파실 수 없을까요?"
중년의 신사였다. 그는 흔쾌히 휘발유 초롱을 자전거 뒤에 싣고 차가 멈추어 있는 그곳까지 배달해 주었다. 그 신사는 기름값으로 1천엔을 내놓았다. 거스름 돈은 봉사료로 받으라는 것이었다.
"손님 봉사료는 필요 없습니다. 기름값에 봉사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잔돈이 없으시다면 다음에 주십시오"
그 신사는 그러자하고 명함 한 장을 건넸다. 가게로 돌아와 명함을 확인한 그는 깜짝 놀랐다. 신사는 바로 재계를 대표하는 교토 물산의 고이케 사장이었 다. 신사는 그의 친절에 감탄했다면서 앞으로 회사에서 사용하는 모든 기름을 니가이 석유에서 구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일이 있을 후 그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서비스를 파는 거야."
42. 정신지체아 돌보는 고교생 아홉명
"벌써 3개월이 됐어요"
서울강동구 장애인 재활시설인 `암사재활원'에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는 서울 동북고 2년 이승현군.
이군은 친구 8명과 함께 매주 토요일 11시 특별활동 시간이 되면 곧바로 이곳을 찾는다.
암사재활원에 수용중인 49명중 30여명은 신생아를 비롯한 여섯살 이하의 아동. 전원 정신지체. 죄성마비등 두가지 이상 장애가 겹친 중증 환자. 이들은 모두 부모가 버린 고아다.
이군은 이들을 안아주며 서로 정을 느끼는 것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함께 어울려 흙장난을 하거나 방 안에서 블록쌓기를 한다.
"아이들은 안아주면 그렇게 좋아해요. 사랑에 굶주렸었나봐요."
이군등은 양파다듬기. 걸레질. 빨래널기. 설거지등 재활원의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군은 1학년때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급우들과 교내 동아리인 `로타렉트'에 가입,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어느새 2년 가까이 각종 봉사활동을 폈다.
그러나 지난 7월중순부터 시작한 이 암사재활원 봉사에서 가장 보람을 느꼈다고 말한다.
반에서 5등밖을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공부에도 열심인 이군은 2일 풍납적십자봉사회에서 실시하는 자원봉사 교육에도 참가, 자원봉사 활동의 전문성도 키워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43.예수 이름으로
미국의 「헨리 누엔(Henri Nouwen)」박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이자 교수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명문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메사추세츠」에 있는 작은 정신 박약자 수용소인 <데이 브레이크(Day Break)>학원의 직원으로 자청해 가서 봉사했다. 여기서 그는 정신박약자들 에게 용변 보는 법을 가르치고, 식사와 세수를 돕고 옷을 갈아 입히는 일을 하며 지냈던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서 신동이란 별명을 들었던 사람이고, 「하버드」대학 교수가 된 후 책도 20여 권을 집필했으며, 그 책 모두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누구나 그의 얼굴을 한 번 보기를 원할만큼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그 길을 포기한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그는 <예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의 요지는 ‘예수를 진정으로 알려면 내리막길을 체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님이 말씀하고 몸소 행했던 복음의 교훈은 내리막길에서만 체험된다는 것이다.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로만 전진하다 보니 예수는 안보이더라’는 것이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높은 곳으로 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가장 낮은 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44. 바로 이거다
어느날 쉴라 할머니는 TV뉴스를 보게 되었다.
소말리아 내전이 치열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기아로 죽어다던 92년의 어느날이었다.
"그것은 내 삶에 하나의 대충격이었어요. 지금가지 내가 주위에서 보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전혀 다른 세계였죠. 나는 속으로 `바로 이거다'라고 외쳤어요. 그리곤 짐을 꾸렸죠."
쉴라 할머니는 캐나다에서 태어나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의대를 졸업하고 중산층이 사는 도시의 종합병원에 자리를 구해 넉넉한 생활을 했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할머니는 삼십대에 남자아이 하나를 양자로 들여 아들로 키웠다. 그 아들도 이제는 커서 어머니처럼 의사가 되었다고 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평탄한 삶이 계속되었어요. 좋은 집에 가끔씩 외식도 하구요. 아들은 이제 레지던트가 되었고, 나는 이제 여생을 즐기는 일만 하면 되었죠."
하지만 환갑이 훨씬 넘은 쉴라 할머니는 그날로 병원일을 정리하고 소말리아행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 일주일만에 아프리카에 도착했다.
45. 하나의 꿈이 또 하나의 꿈으로
첫번째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스위스의 헨리 듀넌트는 `적십자사'의 창립자이다. 그가 은행장으로 있을때는 나폴레옹 황제를 만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파리에서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전쟁터에 가서 나폴레옹을 만나야겠다는 신념속에서 포탄이 날아오고 수많은 시체를 보았으며 피투성이된 환자를 보면서 인간 생명의 허무함을 느꼈다. 그는 부상자들을 돕고 거기서 한가지의 사실을 깨달았다. 황제를 만나 경제적인 부를 획득하겠다는 꿈은 사라졌지만 그는 고향에 돌아오면서 한가지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땅에 폭력과 전쟁이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부상당한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돕는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한가지 운동을 전개했다. 그것이 이 유명한 `적십자사'이다
하나의 꿈이 좌절 되었다할찌라도 듀넌트는 그것으로 포기하지 않고 다른 것에 더 큰 가치를 발견하여 또 하나의 꿈을 이룬 것이다.
46. 서비스
영어 단어 가운데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아마 `서비스(Service)'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잘하면 흔히 서비스가 좋다고 말한다. 이 서비스라는 말은 `봉사'라든가 `섬김'이라는 뜻이 있는데 교회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서비스'라고 한다. 참으로 좋은 의미를 가진 말이다.
런데 이토록 좋은 의미를 가진 말 앞에 거추장스러운 어귀가 붙으면 완전히 이상한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가령 `립(lip)'이라는 말을 붙여서 `립 서비스(lip-service)'라고 하면 `말 뿐인 호의, 공치사, 혹은 말뿐인 신앙인' 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눈이라고 하는 `아이(eye)'를 붙여서 `아이 서비스(eye-service)' 라고 하면 `주인이 볼 때만 일하는 체하는 것이 된다. 성경을 보는 것이 고작이요 실천이 없는 신자들'을 말한다.
다음으로 `귀'라는 `이어(ear)'를 붙여서 `이어 서비스(ear-service)라고 하면 `윗사람이나 나라의 명령을 들어준다는 것, 신자가 목사의 설교를 그저 들어준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즉 "목사님, 실컷 떠들어대슈. 나는 그저 귀나 빌려 드릴게요"하는 식이다.
요한 웨슬리 목사가 "천국에는 목사의 입과 신자들의 귀만 외 있더라"는 말은 목사가 `립 서비스'만 했다는 말이요, 신자들은 `이어 서비스'만 했다는 말이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국가나 백성들에게 `립 서비스'나 하고 국민들이 정부에 `이어 서비스'나 한다면 그 나라가 어찌 될 것인가, 거기에는 수확하는 것은 위정자들의 입과 백성들의 귀밖에 더 있겠는가!
정부나 백성들이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누가 보거나 말거나 충성스럽게 봉사할 때 뜨거운 `하트 핸드 서비스(heart-hand-service)가 되리라고 본다.
47.장애아들의 어머니의 죽음
"하나님이 내게 보내 주신 버려진 이 아이들과 영원히 같이 살기로 했어요"
39년 동안, 병들어 버려진 아이들 속에서 대리 엄마로 살아온 김정순보모 (59. 시립아동병원 근무)가 지난달 29일 오전 6시50분쯤 출근길에 근무처인 아동병원앞 횡단보도에서 뺑소리 승용차에 치여 홀연히 장애아들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매일 출근과 함께 25몇의 소아정신과 환자들을 목욕시키면서 "사타구니를 깨끗이 씻어줘야 냄새가 안난다"고 후배 보모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을 기억하는 병동 사람들은 어이없는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욕창이 걸리지 않도록 아이들을 안아 자세를 바꾸어주다 보면 찾아오는 어깨결림 등 육체적 고통으로 보모들이 3년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바꾸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김씨는 한사코 아동병원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밥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질 때까지 밥을 먹였고 운동시간에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병든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고 끝까지 웃음으로 대하며 보모의 자리를 지켜왔다.
병동 사람들은 그녀가 경련이나 발작이 찾아오기 전의 환자를 누구보다 먼저 발견해냈다고 말했다.
김씨는 57년 서울시 임시직원으로 채용돼 63년에 아동병원의 전신인 시립영아원에서 보모가 된뒤 이듬해 정식 행정직 공무원이 됐으나 병동 근무를 자원해 지금까지 행정직이면서도 병든 아이들의 병상을 지켰다.
행정직의 경우 밤 근무가 없는 데도 밤 근무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장애아들에게 정성을 기울였다. 병동의 어린이들은 부모가 치료를 포기해 버려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장애아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발작을 일으키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해온 셈이다.
이 병원 최등자간호과장(53)은 "영아원 당시 해외입양 간 아이가 처녀가 돼 찾아오고, 질병이 호전돼 재활원 등으로 떠난 아이들이 찾아오면 언제나 이들을 껴안아주곤 했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31일 시어미니(90)와 남편 김홍식(63), 대학을 졸업한 두 아들 등 가족이 다니는 서울 신사동 소망교회에서 교회장으로 영결식을 갖고 화장됐다. 그녀는 평소 집사 직분과 구역장을 맡는 등 신앙심도 깊었다. 서울시는 1일 무연고 장앵환자 관리업무를 헌신적으로 펼쳐온 김씨의 공로를 인정, 지방 행정주사보(7급)에서 행정6급으로 1계급을 추서하고 표창장과 위로금 5백만원을 유족에게 전달했다.
48. 호세의 발
추운 겨울날, 캘리포니아의 한 부랑아 수용소인 마린카운티에는 여느 때보다 많은 걸인, 부랑아들로 부적거렸다. 간이침대와 담요가 턱없이 부족하여 흑인, 라틴아메리카인, 백인들이 서로 달라고 아우성을 치자 자원봉사자인 로드니는 난감하기만 했다. 몇몇 부랑인들은 다른 사람의 담요를 빼앗기까지 했고 한 흑인여성은 자신에게 담요가 돌아오지 않자 인종차별이라고 큰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이런 혼란 중에 마지막 남은 담요 한 장은 라틴아메리카인인 호세라는 사람에게 돌아갔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호세는 담요를 수용소 한가운데에 펼치더니 금새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그 때 어딘선가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호세의 발냄새였다. 악취가 온 수용소 안에 가득 차오르자 부랑아들이 발을 씻기려 했지만 91kg이 넘는 거구의 호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냄새를 견디지 못한 누군가가 호세를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고 하자 같은 라틴아메리카인들이 폭발할 것 같은 노한 표정으로 주위를 노려보았다. 실내는 금새 험악해셔 싸움이라도 한 판 벌어질 분위기였다.
그때 로드니는 말없이 밖으로 나가 따뜻한 물을 담은 세숫대야와 비누, 수건을 챙겨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호세의 발앞에 무릎을 꿇고 양말을 벗겼다. 그리고 호세의 발을 대야에 담그고 씻기기 시작했다. 발바닥, 발목, 발등, 발가락까지 로드니는 아주 정성스럽게 발을 닦았다. 어느새 로드니 주위로 부랑아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로드니는 난폭한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할 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손가락이 떨리기까지 했다. 얼마 후 로드니가 수건으로 호세의 발을 닦아주고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묵 속에서 모두가 그녀의 아름다운 손길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 수용소에는 더 이상의 고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호세의 머리맡에는 부랑아들 중 한 명이 가져다 놓은 새양말이 얌전히 포개져 있었다.
49. 하나님의 영광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은 사역의 “성공”을 교인수, 성전건축, 새로운 프로그램, 전국적인 명성과 위신, 혹은 교회 좌석수 등으로 평가하려 한다. 결국 사업이 번창할 때는“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시다”는 것이고 반대로, 일이 잘 안되거나 활발치 못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지 않거나 그 일은 대수롭지 않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신앙에 관계된 문제이며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성공”의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기준은 뭔가 유형적이고 보다 매혹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지침을 우리가 얼마나 순종하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마7:23―24에서 자기 평가를 확신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시는데, 이는 외관상 “선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주님의 뜻의 과녁을 완전히 빗나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과녁이란 “성공”이 아니다. 그것은 충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에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 신뢰와 봉사에로 부르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적인 방식으로 우리 사역의 공적을 측정하지 말라고 분부하신다. 우리는 씨를 뿌려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거두실 것이다.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권면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기독교인의 “성공”의 기준이 되게 하자.
50.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카터
카터 전 미국대통령은 현직에 있을 때보다 퇴임후 국민으로부터 더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그는 지금도 망치를 들고다니며 집 없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운동을 벌이고 있다.
먼지와 땀에 찌든 옷과 거ㅋ게 그은 피부는 그가 `세계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미국의 최고 권력자였다는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게 보인다.
카터는 지금도 주일이면 교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와 자신이 가장 보람있게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다.
51. 젊은 목사의 애절한 죽음
광주지역의 꼬방동네인 하남공단 인근에 개척교회를 열고 장애인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민중사랑을 실천해온 이경로(39) 목사가 지난 27일 선교사업 도중 교통사고로 숨져 주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이 목사는 87년 호남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담양주산교회 농성중앙교회에서 교역해오다 92년부터 광산구 월곡동에 광주 이웃교회를 열었다.
이웃교회는 작업 도중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어도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하남공단 산재 노동자들과 사회적 무관심 속에 소외된 생활을 이어가는 장애인들 속에서 꿋꿋하게 희망을 일구는 활동을 펼쳐왔다.
이 목사는 또 산재노동자, 도시빈민 자녀를 위한 `이웃 공부방', 장애인 선교와 자활을 돕는 `시인의 마을', 산업재해 노동자를 위한 `노동상담소', 소년소녀가장돕기사업 등을 벌이며 헌신적인 지역운동을 펼쳐왔다.
이 가운데 이 목사가 지난 7월초 보금자리인 아파트를 팔아 마련한 `시인의 마을'은 광산구 신가동에 있는 대지 40평 건평 26평짜리 아담한 주택으로 장애인 15명이 숙식할 수 있는 장애인 복지시설이다.
이 목사는 `시인의 마을'에서 장애인의 손으로 장애인의 희망과 고통을 실은 잡지와 재활 의지를 다지는 문집을 발간하는 것을 비롯해 전국적인 장애인정보센터를 운용한다는 계획을 추진해왔다.
이곳에서 생활해온 김윤섭(36.뇌성마비 1급)씨는 "이 목사는 남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장애인과 함께 웃고 함께 울던 우리들의 진정한 형제였다."고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주민들은 `작은 예수'로 불리던 이 목사의 돌연한 죽음이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시인의 마을'.운영에 차질을 빚은 것을 걱정하며 고인이 씨앗을 뿌린 사업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52.행복의 비결
한 소녀가 산길을 가다가 예쁜 나비 한 마리가 가시덤불에 걸려 바둥대는 모습을 보고 가시를 헤치고 들어가 구해 주었다.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 구해낸 나비가 훨훨 날아가다가 돌연 천사로 변한다. 소녀에게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 소녀의 소원은 "행복하고 싶은것"이었다. 천사는 귀에다 몇 마디 말을 속삭여 주고 간다. 소녀는 자라서 주부가 되고 할머니로 변해 가면서 행복하고 생기있는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부러워했고, 존경했다. 마침내 죽음이 임박했어도 전혀 후회없는 기쁜 얼굴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는가 묻자 그때야 속삭이던 천사의 말을 공개한다. 천사는 "누구든지 아무리 완전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당신을 필요로 할 것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 그들에게 언제나 필요한 존재가 되라. 그러면 당신은 언제나 행복하게 살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사람만 찾지말고,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자.
53.예배를 드리는 기쁨
음악가 곽상수 씨는 금년에 성가대 지휘 50주년을 맞는다. 22세부터 72세까지 교회 성가대를 지휘했다. 이런 일은 억지로 안된다. 예배드리는 기쁨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연세대 송자 총장은 박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총장이 되었으나 여전히 성가대 말석에 앉아서 봉사하고 있다. 이런 일도 예배의 기쁨을 스스로 체험하는 자가 아니면 힘든 일이다.
54.기적 뒤엔 일가친척의 정성이 있었다
"아저씨, 아드님 이름이 최명석이라고 했죠. 살아있어요. 지금 구조되고 있다고요."
한 구조대원이 달려와 외쳤다. 삼풍백화점앞 주유소옆에 돗자리를 깔고 차려놓은 임시거처에서 실의에 빠져 쓰러져 있던 아버지 최봉열씨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순간 최씨는 두손을 마주잡고 무릎을 꿇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지성이면 감천' -. 9일 오전 온국민의 환호속에 이뤄진 최명석군의 기적의 생환 뒤에는 일가친척의 정성이 있었다.
아버지 최씨는 29일 오후 삼풍백화점 붕괴소식을 듣자마자 현장으로 달려갔고 제지하는 경찰을 뚫고 무작정 지하로 내려갔다.
생지옥--. "내 아들이 저 속에 있다. 얘야 제발 살아만다오."
최씨는 곧바로 직장에 휴직계를 내고 서초구 자원봉사대원으로 등록한 뒤 무너진 건물더미 속으로 아들을 찾아나섰다. 부인 전인자씨와 딸 은지양 등 전국에 흩어져 살던 최씨의 6남1녀 형제들도 가족들과 함께 모두 현장으로 달려왔다.
사고 이틀뒤인 1일에는 경남창원에서 현대정공 용접기술자로 있는 외삼촌 전충갑씨 등 외사촌 3명도 달려와 가족구조팀은 20명으로 불어났다.
명석군의 아버지와 삼촌.외삼촌들은 이때부터 11일간 B동 지하 1,2층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구조대에 삽과 절단기 등 필요한 최명석의 소식을 못들었느냐"고 묻고 다녔다.
그러나 구조 하루전날인 8일밤, 장대같은 폭우가 쏟아졌고 붕괴위험 때문에 구조대원들이 모두 철수했다.
실의에 찬 아버지 최씨는 주위의 만류를 뚫고 붕괴된 지하건물로 내려갔다.
"명석아 어디 있니. 살아있으면 대답하라"고 몸부림치기도 했다.
55.손
맹인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자원 봉사자 모임이 있었다. 방송국 성우, 국어 선생님, 감정이 풍부한 연극배우 등 다들 재미있게 책을 읽어주었다.
하지만 맹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봉사자는 안경할머니였다. "발음이 정확하질 않는데..." "눈이 어두워 더듬거릴텐데..." "입에서 냄새도 날텐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수군대던 봉사자들은 맹인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꼭 내 손을 잡고 읽어 주시거든요"
56.주는 사람
미국의 성공한 식품회사인 프리토에 관해 놀랄만한 것은 견고하게 짜여진
훌륭한 경영조직이 아니며 잘 행해지고 있는 광고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거의 만명에 이르는 세일즈의 힘이며 그것의 99.5%가 봉사의 정신이라는 점입니다. 프리토는 우리의 짧은 안목으로 볼 때 분명히 비경제적인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30불 짜리 포테토칩 상자 두 개를 상회에 배달하기 위해 프리토 회사는 몇백 달러를 소비하며 트럭을 보냅니다. 그것은 돈을 벌지 못할 조치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회사는 포테토칩 한 상자를 배달하기 위해, 또는 허리케인이나 어떤 사고로 인해 어지러진 상점을 깨끗이 청소해주기 위해 모진 날씨도 무릅쓰고 달려가는 세일즈맨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한 감사의 편지가 본사에 쇄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봉사를 심은 결과 프리토 레이 회사는 많은 판매량을 내고 있으며 매년 포테토칩과 프레츨 판매가 20억불 이상에 이르렀으며 미국시장의 60-70%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는 정신과 다른 사람을 돕기 원하는 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으십시오. 이것은 봉사를 실행하는 것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입니다. 주는 사람은 투자의 원리를 실행합니다. 받는 사람은 주는 것을 투자로 보지 않고 그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쌓아 두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궁극적으로 주는 사람은 승리하며 받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57.조연과 악역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연도 필요한데 사람들은 서로 주연만 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런가 하면 노를 저을 사공이 없어 난처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나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색이 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에는 사람들이 언제나 북적기리지만 그렇지 않은 일에는 발걸음이 끊어집니다. 충북 음성의 꽃동네라는 곳에는 몸과 마음이 병들어 오갈 곳 없는 이들 1천2백여 명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가족마저 외면한 이들을 누가 돌보는지 아십니까? 1백50명의 자원봉사자들이랍니다. 환자들에게 주연을 맡기고 자신들은 조연에 만족해 하는 것입니다. 스타플레이어의 영광 뒤에는 그늘에 가린 조연의 눈물겨운 봉사가 있습니다. 복서의 금메달은 무명의 스파링 파트너와 코치가 만들고, 축구의 골게터는 조연의 헌신적인 어시스트로 탄생됩니다. 뭔가를 이루자면 악역도 필요합니다. 서로 나서기를 꺼리는 역을 누군가 맡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좋은 역만 맡으려 하고 악역은 맡기를를 꺼려 합니다. 그런 악역을 서로가 회피하려고만 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조연도 필요하고 악역도 필요합니다. 그러니 조연도 악역도 나누어 맡아야 합니다. 조연과 악역에게도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줘야 합니다.
58.한 여인의 이야기
한 순간에 자신의 안락한 세계가 무너져 내린 여인이 있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녀는 남은 여생을 어두운 방안에 숨어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더욱 드러내주는 찬란한 햇볕 아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쪽 눈이 없어지고, 코가 비뚤어졌으며, 몸이 상처투성이고, 한쪽 팔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끔찍한 사고를 다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녀의 내부에서 뿜어나오는 광채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었다. 1982년 어느 아침 만취한 운전수가 몰던 차와 충돌하여 그녀의 차가 고속도로 중앙선을 넘어가폭발했을 때, 그녀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다. 차에 타고 있던 모든 가족들은즉사하였고, 그녀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무서운 날이 있기 전에는 행복하게 살았다. 그녀는 능력있고 자상한 남편 밑에서 소녀들이 꿈꾸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 악몽의 날에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으나 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녀는 6주 동안 혼수상태에 있었다. 자신의 흉칙한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는 아무에게도 자기를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이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데 70번이 넘는 수술기간 중에 단 한 번 우리의 전도집회를 시청하고 그녀는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렸다. 7년 동안의 은둔생활 끝에 그녀는 더이상 숨어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데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무능력하지만 다른사람들을 돕기 위해 재활센터에서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서 그 어느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가 가장 기쁜 순간이다”라고 말했다.
59.혼자만의 시간
몇년 전에 나의 아내가 그녀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원했다. 그래서 어느 날 내가 휴무일 때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오늘은 내가 아론을 돌볼테니 차를 타고 나가서 가고 싶은 데 가서 하고 싶었던 일을 하다가 돌아오구려. 쇼핑을 하든지 아니면 해변가로 가든지 또는 친구를 방문하러 가든지 당신 마음대로 하구려.” 아내는 '지금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내는 곧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아내는 혼자 외출했다. 아론과 내가 집에서 30. 반경 이내에 있는 어린이 공원을 찾아다니며 노는 동안 아내는 산장에 있는 호수를 향하여 갔다. 그녀는 나무 아래에 있는 아늑한 장소를 찾아서 그동안 읽고 싶었던 소설책을 꺼내어 읽으며 6시간 동안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전화벨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칭얼거리는 아이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난장판이나 소란도 없었다. 그저 찬란한 햇빛과 푸른 하늘. 반짝이는 물결 그리고 이따금씩 보이는 배가 전부였다. 아내는 잠깐 낮잠까지 즐기고 난 후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가까운 시내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나중에 아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알다시피 그때 난 생전 처음으로 혼자 식당에 들어가보았어요.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우리는 거의 20년 동안이나 함께 살아왔지만 아내가 잠시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까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자상한 아버지는 모든 가족들이 각각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막6:31)
60.섬김의 향기
테레사 수녀를 가까이 하는 사람마다 그녀의 인격에 순결한 감동을 받습니다. 특별히 그녀가 질투없이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이 테레사와 함께 살고 있었던 한 분이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마침 테레사는 한 어린이의 고름을 만지면서 치료를 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이 분이 그녀 곁에 다가서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시기심이 안 생깁니까? 이런 삶으로 만족하십니까? 이 질문을 받았을때 테레사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섬김의 지혜를 터득한, 섬김의 자부심을 터득한 여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스타는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섬기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앞에 서는 날 주님은 “네가 몇 사람을 밟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너는 얼마나 어깨에 폼을 재면서 삶을 살았는가.”라는 질문이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께서 물으실 질문을 생각하십시오. “너는 몇 사람을 섬겼느냐?” 당신의 삶은 얼마나 이 섬김의 향기와 섬김의 자질로 가득차 있읍니까?
61.봉사의 동기
몸도 좋지않고 학벌도 좋지 않고 어느모로 봐도 자랑할 것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축복 속에 살고 있는 한 성도가 가만히 자신이 왜 축복을 받고 사는지 생각하다가 갑자기 자기의 머리에 떠오르는 사건이 있었다.
옛날 시골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기도하러 교회를 가는데 비가 오고 벼락치는 소리가 나고 천둥이 치는데 이왕 나온 김에 잠간이라 들러서 가자 하고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벼락치는 소리가 나며 천장의 기와 이은 진흙덩이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이를 본 그는 갑자기 하나님의 교회가 이렇게 더럽혀져서야 되겠는가 하고 떨어지는 진흙을 등으로 받아 계속 교회 밖으로 내다버리기를 수없이 하였고 그는 거기에서 교회를 사랑하는 깊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느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아무도 나를 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확신을 나름대로 가지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된 그는 늘 "나는 자격이 없진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살게 되었다" 고 고백하곤 하였다.
62.투병기
우리나라의 유명한 목사님 중에 모 신학대학장을 지낸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마산 결핵 요양소에서 결핵과 싸울때의 상황을 기록한 투병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목사님이 마산 요양소에 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앞으로 석달밖에 살지 못할것이라는 사망선고와 같은 엄청난 말을 의사로 부터 들었다.
"의사가 석달만 산다고 하였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
이렇게 마음을 먹고 하나님께 기도한 대목이 있다.
또 석달을 살더라도 죽을때까지 목사로서, 신앙인으로서 할일을 다하자고 하여, 어린 소녀 환자의 대소변을 받아주고, 다른 환자를 위로하고 , 죽은 환자의 장례도 치르고, 설교도 하고 찬송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 나중에 의사가 찬송을 부르면 환자가 빨리 죽는다고 엄업금하자 시를 쓰거나 감상문을 써서 환자에게 쪽지를 돌리고 용기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의사와 간호원이 오지않는 새벽에 숨어서 예배를 보았다는 눈물겨운 신앙의 활동이 그 책에 있었다.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 목사님을 하나님이 언제 데려갔는가? 석달?, 삼년?, 아니다. 삼십년을 더 살게 하셨다.
63. 테레사 수녀
테레사 수녀를 가까이 하는 사람마다 그녀의 인격에 순결한 감동을 받습니다.
특별히 질투 없이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테레사와 함께 살고 있었던 한 분이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마침 테레사는 한 어린이의 고름을 만지면서 치료를 하고 있었을 때 입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 평안하게 사는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시기심이 안 생깁니까? 이런 삶으로 만족하십니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테레사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64. 죠지 물러
이 두가지는(영적/ 사회적) 건전한 영적 삶에 있어서 병행한다. 죠지 물러는 기도의 위인이었지만 동시에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있어서도 위대하였다.
챨스 스펄젼은 군중 앞에서 설교하였지만 여러 양로원과 고아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구세군 대장인 부드는 타락한 자들을 위한 복음전도자였지만 또한 실업 구제사업과 부녀자들을 위한 제반 사업을 대규모로 조직한사람이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내세는 물론 현세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관심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가장
깊은 관심을 보이는 자들은 대체로, 현세에서 사람들을 위해 최대의 것을 하는 자들이다. 영혼의 가치에 대해 깨달으면 영혼을 간직한 몸을 점점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 우리는 사람의 전체를 돌보아야 한다.
65.그리스도인이 참여할 봉사의 목록
1. 숨겨진 봉사 - 일반적으로 알려지니 않은 채 숨겨진 봉사의 일을 하도록 할 것이다.
2. 작은 일의 봉사 - 우리들은 도움이 되는 외면적인 행위를 위한 시간을 기꺼이 바쳐야할 것이다.
3. 다른 사람의 명예를 지키는 봉사 - 우리는 결코 한담이나 험담에 가담해서도, 다른 사람에 관한 중상에도 가담되어서는 안 된다.
4. 섬김을 받는 봉사 -이것은 우리를 섬기도록 다른 사람을 허용하는 순종과 봉사의 행위이다. 교만 때문에 섬김 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 모른다 하실 것이다.
5. 통상적인 예의의 봉사 - 예절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방법이다.
6. 환대의 봉사 - 오늘날 서로서로 가정을 개방할 필요가 있다. 환대는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필요한 것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기회의 제공이다.
7. 듣는 봉사-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그들에게서 듣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8. 서로의 짐을 지는 봉사 - ........... 갈 6:2
9. 생명의 말씀을 나누는 봉사 - 오늘날 가장 시급히 요청되는 이 봉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66. 봉사의 낱말뜻
1. 히브리어
아바드 - 섬기다, 시키다, 갈다, 처리하다, 행하다,부리다, 경배하다, 봉사하다, 수고하다.
아보다 - 봉사, 역사, 노역, 일, 예식, 예물, 노동, 시무, 직무.
폴-한 - 봉사, 봉직, 예배(식), 보급, 공로.
스라드 - 봉사, 복무, 예배(식), 공로.
2. 헬라어
디아코니아 - 섬기는 일, 준비, 직무, 구제, 부조,봉사, 일, 직분, 직임.
데라퓨오오 - 봉사하다, 고치다(병을), (귀탔)내어쫓다, 섬김.
라트류온테스 - 봉사하며 섬긴다, 예배하다, (현재분사로서)계속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3. 한문 - 받들어 일하다, 남을 위하여 일하다.
67.봉사에 대한 성구
1. 왜 봉사해야 하는가?
요13:14 - 예수님께서 봉사하셨기 때문에
요13:15 - 예수님이 본을 보이셨기 때문에
고후9:12 - 봉사의 직무가 있기 때문에
빌2:17 - 옛날 성도들이 봉사하므로
시22:30 - 후손들에게 봉사를황구孔위하여
2. 누구에게 어디에서 봉사할 것인가?
출30:16 - 회막에서
민1- 장막에서
민4:12 - 성소에서
행21:19 - 하나님께
엡4:12 - 성도들에게
3.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
고후9:12-13 - 연보로
빌3:3 - 하나님의 성령으로
벧전4:10 - 선한 청지기같이
롬12:11 - 열심을 품고
벧전4:11 -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68.성자라는 것
주후1334년으로부터 1345년 간에 영국의 성자라는 이름을 얻고 또한 당시의 가장 박학가였던 떨한 감독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외우면서 자기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를 힘썼으며 또한 무엇으로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이 감독의 그와 같은 태도와 열성에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감독의 지도하에 하나님과 교직에 열심으로 봉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성자란 별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고 매사에 감사하며,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자이다.
69 어느 아버지의 유언
1997년 2월 25일 밤 11시 이후에 SBS에서 황수관 박사(연대 건강진료 센터)를 모시고 신바람 나는 건간법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는 중에 박사님의 아버님이 과거 위장에 커다란 덩어리가 두 개가 들어있어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자녀들이 아버지의 수술을 간곡히 부탁을 드렸으나 아버지는 이에 대하여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의사인 본인은 아버지께 '아버님 자식들에게 있어서 행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어머니, 아버님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입니다.
아버님의 의견에는 수술을 원치 않으시더라도 마지막으로 자식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뜻에서라도 수술을 한 번만 받아보십시요'라며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고 한다.
결국 허락을 받아낸 황 박사님은 수술날짜를 받아놓고 아버님의 병환이 중하심으로 7남매를 모아놓고 아버님의 수술전에 보이기를 원하여 자녀들을 불렀다.
그리고 막 수술실에 아버님을 모시고 들어가려는 순간 아버님이 큰아들인 본을을 부르시더니 손을 꼭 잡으시고 한참을 바라보시더니 아무말없이 다른 한 손에 쥐고 계시던 종이 한 장을 아들의 손에 쥐어 주시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곧 아버님의 유언이었다.
종이를 펼쳐보니 그 종이에는 단 두글자 곧 奉事(봉사)라는 말이었다. 이 유언의 말씀을 받아든 황 박사님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서 하는 말이 아버님이 자식들에게 남기실 만한 유언들은 이 말 말고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님이 진정으로 원하셨던 것은 남을 섬기는 삶을 살으라는 것이었다.
그 후 우리 가정에는 봉사라는 말이 가훈이 되었다." 라고 말을 하였다.
다행이도 아버님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고 그분은 현재 8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의 소원, 행복을 위해 정정하게 살아 계시다는 것이다.
황박사님은 그리스도인이다.
그의 아버님도 그리스도인이다.
이 유언의 속에는 먼저 주님을 위한 봉사의 의미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이웃에 대한 봉사의 의미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빛의 역할 그리고 소금의 역할은 곧 봉사의 삶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해야할 말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자녀에게 남길 수 있는 말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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