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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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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서에 나타난 일과 노동
한동구 교수(평택대학교 신학과)
인간에게 시간을 준 것은 노동에 사용하라고 준 것이다. 물론 일에만 매달린 사람에 대하여 전도서는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으며, 건설할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며, 웃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며, 포옹할 때가 있고 춤 출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노동은 우리 삶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1. 창조의 동참으로서의 노동
창세기 2 - 3장에서 창조자가 자기의 피조물에게 준 위탁의 근본적 내용은 노동이다. 창세기 2장 5절에서는 창조 이전의 시간을 묘사한다. 이 때에는 초원의 식물과 경작지의 채소가 없었지만, 동시에 비 ( 雨 )와 사람도 없었다. 초원의 초목은 비만 오면 충분하지만, 경작지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과제는 밭을 경작해야 한다 ( 아바드 = 섬기다 ).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서 자신의 자리매김 (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 )을 하게 된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 歷史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 창 1 : 26, 27 ), 인간 창조 이후에 여러 가지 형태로 인간을 축복하셨다. 인간에게 동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 ( 라다 )을 허락하셨고 ( 창 1 : 26, 28 ), 인간을 축복하시어 생육하고 ( 파라 ), 번성하고 ( 라바 ), 땅에 충만하여 ( 말레 ) 땅을 재배 ( 카베쉬 )하도록 축복하셨다 ( 창 1 : 28 ). 이 축복은 인간의 능력이며 과제이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동산을 건설하자마자 곧바로 인간을 동산안에 데려가시고 에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창조와 선물은 인간 활동의 전제가 된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시고, 이 선물을 돌보고 지키는 것을 인간의 과제로 주셨다.
창 3장 23절에서도 인간은 밭을 경작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인간 창조의 의미나 목적으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주를 불신한 결과 처벌로서 인간에게 내려준 것이다. 이제부터는 노동의 수고와 밭의 가시덤불과 엉컹퀴를 내는 재앙이 저주에 속한다. 인간에게 맡겨진 피조물의 위탁사항 ( 인간의 노동 )은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진보는 항상 축복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런데 교만은 어디에서나 가시 덤불을 만나게 된다. 축복을 교만으로 바꿀 때, '가시덤불과 엉컹퀴'를 만나게 된다.
2. 잠언의 지혜가 본 근면과 태만
이스라엘의 지혜교사들은 솔로몬 시대에서부터 학문적 연구를 발전시켰다. 인간의 생활 영역 전체를 위한 교육학을 포함하여, 왕자의 교육과 관리들의 교육, 법률적인 지혜와 자연과학적인 지혜에 속한 정치학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노동과 그 결과의 문제를 연구한 자들은 지혜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상세한 규칙을 확립했다. 즉, 근면한 사람은 성공하고, 게으른 사람은 빈궁해진다는 철칙이다.
"게으른 손은 가난하게 만들지만,
부지런한 손은 부유하게 만든다." ( 잠 10 : 4 )
지혜문학에서는 부 ( 富 )를 주어지는 것으로 보지 않고, 책임을 가진 인간의 손에서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빈자와 부자의 사회적 대립을 근면과 태만의 결과로 보려고 하였다.
"게으른 자는 원하여도 헛일이나,
근면한 자의 노력은 만족함을 얻는다." ( 잠 13 : 4 )
자유와 예속, 지배와 압제도 노동의 경주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지배하게 되어도,
태만은 강제노동을 당한다." ( 잠 12 : 24 )
수많은 다른 잠언도 이와 비슷한 규칙을 확언하고 있다 ( 잠 11 : 16; 12 : 27; 14 : 23; 21 : 5 ). 그리고 전도서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절을 볼 수 있다.
"태만한 경우에는 석가래가 무너지고,
손이 게으른 경우에는 집이 샌다." ( 전 10 : 18 )
이스라엘의 교사들은 인간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게으름을 막아보려 하였다. 게으름의 결과를 개인의 체험과 관련하여 교훈으로 나타낸다.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각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완전히 잡초에 뒤덮였으며,
그 지면에는 야생초로 꽉 덮였으며,
농장의 돌담이 무너져 있었다.
좀 더 자자, 좀더 졸자,
좀 더 팔짱을 끼고 쉬자,
그러면 너의 가난은 복병처럼 달려 들고,
네 곤경이 거지처럼 몰려올 것이다." ( 잠 24 : 30 - 34 )
여기에서 시사하는 교훈은, 태만이란 야웨의 선물을 인간이 죽이는 행동이다. 이 죄악의 근원은 적절한 때에 일을 시작하려고 작정하지 않는 게으름에 있다. 태만의 한 유형은 수면벽이다.
"태만이 깊은 잠에 빠지게 하고,
게으른 사람은 굶주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잠 19, 15 )
"너 게으른 자야, 개미에게로 가서,
개미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슬기롭게 되어라!
게미에겐 전혀 감독도 없고, 통치자도 없다.
그래도 개미는 여름에 양식을 마련하고,
추수 때에 자기들의 먹이를 모아 들인다.
게으른 자야, 네가 얼마나 더 오래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언제 네 침상에서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좀 더 팔짱을 끼고 쉬자!
그러면, 네 빈궁이 복병처럼 달려 들고,
네 곤경이 거지처럼 몰려올 것이다." ( 잠 19, 15 )
슬기롭게 일한다는 말은 좋은 때를 알아낸다, 즉 적절한 때를 놓치지 않는다는 뜻을 의미한다. 건전한 사람은 자발적으로 때를 맞추어 일터에 나간다. 현인들은 태만의 특징들을 열거한다 ( 참조 잠 26 : 13 16 ). 얼빠진 구실, 거짓 핑계에 지나친 잠, 식사중에까지도 게으름을 피우고 꿈틀거림, 자기 과대 평가, 게으른 자가 순간적인 자기의 정욕에 몰두하는 것 등은 자기의 파멸을 재촉한다. 게으른 자는 적절한 시간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깨닫지 못한다. 노동이란 창조주가 마련해 주신 축복을 가쳐오는 행동이다 ( 잠 14 : 23 ). 그러므로 인간은 두 가지 가능성 앞에 서있다. 얻느냐 잃느냐! 대지가 제공하는 것을 받아들이느냐 그냥 놓아두느냐 ( 잠 20, 4 ). 지혜교사는 성공과 실패의 노동의 결과임을 주장한다.
3. 노동의 결과
노력으로써만 억척스럽게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자신만만한 사고에 또 다른 견해를 보여준다. 즉, 노력은 인간이 하나, 결과는 야웨의 자유로운 축복이다.
"야웨의 축복만이 부유하게 만든며,
자신의 수고는 하나도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 ( 잠 10 : 22 )
일을 하면 돈을 번다는 일반적인 기대는 야웨의 축복의 결단을 떠나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인간의 의지와 성취 사이에도 야웨가 개입하여 차질이 생기게 한신다.
"의지의 시도는 인간에게 있으나,
혀의 대답은 야웨에게서 온다" ( 잠 16 : 1 )
자기의 힘으로 성취하겠다고 과도하게 열심을 내는 행위는 냉엄한 허사를 가져 온다.
"야웨가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건축하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파수꾼의 경성이 헛되다.
헛되이 너희는 세벽에 일어나며,
밤 늦게까지 수고하고,
수고의 떡을 먹고 있다.
야웨가 자기의 친구에게는 그것을 주시는도다" ( 시 127 : 1 )
여기에서도 경험 지혜가 말하는 것은 인간의 자립과 자유 의지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야웨의 축복이 없을 때에는 열심을 내어도 소용이 없듯이, 야웨를 신뢰하고 순종하려는 각오가 없이는 재물과 부는 허무한 것이 된다 ( 잠 11 : 4 ). 즉, 재산으로 인하여 허위 ( 잠 19 : 1 )나 분쟁 ( 잠 17 : 1 )이 생기기 쉽다. 그리고 성공은 특히 잘못된 확신을 가져 온다 ( 잠 11 : 28 ).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지혜는 노동을 올바로 이해시켜 준다. 인간은 규칙을 알아야 한다. 특히 규칙의 주인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게으름을 피우면 동물 ( 개미 ) 이하로 전락하게 되며, 자기 기만에 빠져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길을 걷지 않도록 경고를 받는다.
4. 노동과 휴식
노동과 함께 휴식도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로 여겨지고 있다.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서에서는 휴식 ( 메뉴하 )의 근본 사상을 위대한 구원의 선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한 구원의 선물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끊임없이 여행하는 편력의 시대 후에 쉬는 휴식을 의미하지만, 사면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원수들 앞에서 태연히 쉬는 휴식도 의미한다 ( 신 12 : 9f.; 25 : 19; 수 21 : 43f.; 삼하 7 : 1, 11; 왕하 8 : 56 ).
시편에서도 잠을 통한 휴식을 높이 칭찬한다. 과도하게 열심을 내는 자도 기껏해야 근심 중에 먹을 수 있는 떡을, 자기를 괴롭히며 시간이 지나도록 여분의 노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겨우 먹는 떡을 야웨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가 잠자고 있는 동안에 주신다는 것이다 ( 시 127 : 1 - 2 ). 시 95 : 7 - 11은 개인에게 주어진 휴식의 선물은 야웨의 음성을 듣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잠언의 시는 생활에 나타난 지혜의 가치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것은 평안한 잠 속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네가 앉을 때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네가 누울 때에, 평안히 쉴 것이다." ( 잠 3 : 24 )
전도서는 인간이 노동과 적절한 관계를 맺을 때에 평안히 잠을 잘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노동하는 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가 불러서
잠을 자지 못한다." ( 전 5 : 11 )
지나친 열심이 휴식을 박탈하였던 것처럼, 과잉이 휴식을 빼앗아간다 ( 전 2 : 23 ). 잠을 잘 잔다는 것은 야웨의 선물과 부르심에 응하는 삶의 표징이다. 휴식 속에 생활의 예술이 나타나며, 현인의 슬기, 즉 야웨의 경외가 나타난다. 전도서에서는 열광적으로 일만하는 사람의 헛된 수고와 그 무이성을 깨달아 알고 있다. 인간의 휴식은 야웨의 귀중한 선물이며, 야웨의 신뢰와 깊이 결부되어 있다.
휴식이 야웨의 귀중한 선물이기에, 구약성서에서는 휴일을 제도로 고정시킨 안식일 계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안식일 계명의 중요한 내용은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도 함께 쉴 수 있게 했다. 이러한 휴식의 근거는 야웨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켰다는 데 있다 ( 신 5 : 15 ). 휴일의 근본적 의미는 선물로 받은 해방을 기억하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을 기억하는 데 있다.
5. 노동과 사회
노동에는 개인적 차원 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도 있다. 애굽의 왕은 이스라엘 백성의 성장을 시기하며 이를 막기 위해 부역 감독관들을 이스라엘인에게 세우고, 무거운 짐 ( 부담 )을 지워 억압하였다. 그의 억압의 의도는 실패했다 :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 이방인의 악한 의도는 야웨로 하여금 그의 보호와 축복을 이스라엘에게 내리게 한다.
애굽의 억압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혹독한 강제 노동의 간역을 겪는다. 그러나 야웨께서는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으시고 선조와 맺은 계약을 기억하시고 ( 출 2, 23 - 25 ), 해방을 약속한다 :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령이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으로 인도하리라." 강한 자들의 지배의 또다른 형태는 억압적 노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노동은 인간에게 성취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자라는 왜소감을 줄 뿐이다.
이사야 65장 17 - 25절에서는 새 창조, 즉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창조의 사상을 담고 있다. 여기서는 포로 후기에 새롭게 출발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새 공동체의 이상과 지표가 담겨져 있다. 새 창조에 의해 탄생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새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평화의 공동체를 지향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추구하고 있는 "평화"는 "정의", 특히 "경제적 정의"의 실현을 통하여 실현되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 사 65장 21 - 22절 ).
여기에서는 노동의 결과가 정당하게 누려지고 분배되는 사회를 추구한다. 이러한 사상은 포로 후기에 양분화된 사회 질서 - 소수의 부유한 지배 계급과 다수의 가난한, 피지배 계층 - 속에서 배태되었다. 이와 같은 양분화된 사회 질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악화되어졌다. 따라서 "정의의 실현을 통해 평화를 이룩하려는 평화 운동"은 신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고, 그 사상은 종말론적으로, 또 묵시문학적으로 더욱 심화되어졌다.
서울시 괸악구 봉천 1 동 674 - 7
신학 박사 한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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