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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에 나타난 기독교

사회역사경제 김영한 교수............... 조회 수 278 추천 수 0 2018.05.10 2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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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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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에 나타난 기독교 - 고통과 회개의 한계
 

문화 신학자 김영한 교수의 <밀양>에 나타난 기독교(1)


▲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장, 김영한 교수


영화 <밀양>에 나타난 고통의 개념과 회개의 한계
 
<밀양>(이창동 감독, 2007)이라는 영화가 2007년 칸느 영화제에서 이 영화의 주연 전도연(신애 역)이 여주연상을 받는 쾌거가 있었다. 남편을 잃고 외아들마저 잃은 소외 받은 서른 셋 젊은 여성의 한(恨)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편을 잃은 젊은 여성이 외아들과 같이 남편의 고향인 밀양(密陽, Secret Sunshine)에 내려와서 사는데 유괴범에 의하여 외아들을 잃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 이 여인(준이 엄마)은 기독교의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마음에 평안을 얻고 아들의 살해범을 용서하게 된다. 이 여인(준이 엄마)은 진정한 용서를 실천하기 위하여 교도소에서 복역 중에 있는 살해범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용서를 전하고자 한다.


그런데 살해범은 “나도 교도소에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용서를 이미 받았다. 내 마음도 평안하다”고 말한다. 여인은 용서는 피해자인 자기가 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였다는 사실에 아연(啞然)자실(自失)한다. 깊은 죄책에 빠져 절망 속에 있어야 할 가해자가 오히려 아무런 심리적 아픔 없이 자기의 죄책을 용서받았고 이제 평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피해자인 이 여인은 기독교의 용서에 대하여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결국 정신이상까지 일으켜 정신병원에 들어가서 치료를 받은 후에 비로소 퇴원하고 일상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여인이 자기 집 마당에서 자르는 머리카락 뭉치가 떨어져 바람에 나동그라지는 데 햇빛이 은밀히 쪼이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다.


이 작품의 작가(이창동 감독)는 현상적인 기독교의 일반적인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기독교 선교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 문제를 다루고 있다. 종교, 인간, 그리고 구원과 화해. 본질을 직시하게 만든다. 기독교 리얼리즘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한 많은 한국 여성을 배역으로 하여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외아들을 잃은 여성의 한과 그 심리적 갈등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작품은 현상적인 기독교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등장시킨 여인의 삶의 깊이 속에서 기독교를 독실하게 소화했다고 볼 수는 없다.


1. 고통의 개념


이 영화는 한국사회의 전형적인 문제인 여인의 고통과 한(恨)을 그리고 있다. 남편을 잃고 삶의 하나 남은 위안인 아들마저 유괴범의 손에 잃은 여인의 고통과 슬픔을 그려낸다. 남편을 잃은 도시를 뒤로 하고 돌아온 남편의 고향에서 아들마저 잃은 젊은 여인 신애는 약국 김 집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크다면, 왜 우리 준이는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야만 했을까요?” 이 질문은 여인의 실존에 받쳐 오르는 한(恨) 많은 질문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고통당하는 자들의 물음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이 작품의 주제가 되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린다. 고통당하는 신애의 심정은 그녀의 발작적인 울부짖음과 경련에 가까운 토해냄 등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조용히 성찰하면 신애라는 여성이 당하는 고통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자들의 질문과 고통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여인(신애)의 고통은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에 나가서 잠시간 잠재워진다. 표정에 화색이 돌고, 구역모임에서 간증도 하고, 동네 여인들에게 전도하며, 역전에서 노방 찬양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의 포커스는 여기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기 위해’ 유괴범을 면회하러 간 여인의 용서의 마음은 유괴범의 당당한 신앙고백에 무너져버린다: “저도 하나님을 가슴에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으니, 이제 편합니더.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더.” 이 장면이 영화의 반전(反轉) 장면이다. 그 후로 여인(신애)은 자기가 고백한 신앙에 대한 적대적인 일탈행위를 시작하게 된다. 그녀의 행위는 신앙에 대한 부인(否認)을 넘어서서 신(神)을 향한 억누를 길 없는 분노에 가까운 모습으로 이어진다. 심지어는 최후의 몸부림, 동맥을 끊는다.


이 영화는 기독교의 너무 싸구려 상품이 되어 버린 용서와 은혜의 개념을 소재로 함으로써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부분인 용서와 은혜를 가볍게 받아들이고 생활하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자성의 기회를 줄 수도 있으나 기독교를 모르는 일반 관객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왜곡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본고는 이 영화를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신학적으로 평가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문학적 평가이기보다는 신학적 평가이다.


2. 용서의 개념


1) 준이 엄마(신애)의 용서와 그 한계


영화의 주인공인 여인(신애)은 외아들마저 잃은 마음의 한을 교회에 나가서 소릴 지르는 기도로 털어낸다. 그 가운데 목사님의 기도로 기독교 신앙에서 임시적인 마음의 평정과 위로를 발견한다. 그녀는 신앙생활을 하고 자기가 발견한 마음의 평안을 간증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녀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했다. 만약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자신의 죄에 대한 문제가 해결이 됐어야 한다. 이 장면에 대한 방영이 전혀 없다. 복음의 진리가 그렇듯 진정한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에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는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애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성찰과 이에 따른 진정한 회개가 없다.


그렇다면 신애의 죄는 무엇인가? 이 영화에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열거해 본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바람핀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행복했었다고 믿는 것. 실제로 초라한 모습을 이웃에게 보이기 싫어서 땅 투자를 한다며 거짓말하는 것. 신애는 종찬(송강호)에게 속물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녀 자신도 속물이었다. 종찬이 만들어준 거짓 수상 액자를 떼어내지 않고 붙여두고, 아이가 유괴된 상황에서 신문지로 만든 가짜 돈을 준비했던 것. (결국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진짜 돈으로 바꾸어 넣지만...) 그리고 교회를 찾아가 하나님을 만나고 용서를 체험했으나,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고 했으나, 유괴범이 먼저 용서를 받았다는 말에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반항으로 일탈행위를 일삼는 것이다.


영화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초월적 체험의 용서’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 간단하게 묘사되어 있다. 외아들을 잃은 젊은 여인이 교회에 나가서 소리를 지르면서 한을 토하여 내는데 담임목사가 와서 안수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초월적 체험,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 부분이 보다 자세히 예술적으로 묘사되어야 했다. 그런데 안수 하나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체험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용서는 ‘심리적 치유 없는 용서’이다. 기독교의 용서에는 심리적인 깊은 자기반성과 과거에 대한 기억과 회상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심리적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에 대한 장면이 전혀 없다. 영화가 그려낸 여인의 용서 체험은 일반적으로 피상적인 기독교 신앙의 체험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진정한 용서,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나오는 신앙의 체험과 다르다.


2) 유괴살해범의 용서받은 경험


영화에는 수감되어 있는 유괴살해범이 “감옥에서 전도를 받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고 그 마음에 평안을 누렸다”는 발언과 표정이 아주 짧은 장면으로 가볍게 처리되어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인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싸구려 은혜’로서 오해받을 수 있는 소지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피의 공로로 죄인 괴수의 죄도 값없이 용서해 주신다’는 교리가 이 영화에서는 짧은 장면과 대사로 인해 마치 은혜의 기계처럼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요 목회자인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Nachfolge, The Cost of Discipleship)>에서 싸구려 은혜(cheap grace)와 고귀한 은혜(costly grace)를 구별한다. 그는 오늘날 독일 기독교인들이 죄를 짓고 난 후 죄책에 대한 깊은 반성과 뉘우침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의 기계처럼 사용하고 있는 사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신애의 용서받은 은혜의 경험이나 살인범이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은혜의 경험이 너무나도 자신의 죄책에 대한 깊은 반성과 뉘우침 없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은혜와 용서의 개념이 잘못 왜곡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싸구려 은혜(billige Gnade, cheap grace)는 동대문 시장에서 골라잡아 싸게 구입하는 상품(Schleuderware)으로 변질하는 은혜이다. 이에 대하여 고귀한 은혜(teuere Gnade, costly grace)란 은혜에 대한 제자됨의 대가를 지불하는 은혜이다. 예수님과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은혜란 싸구려 은혜가 아니라 고귀한 은혜다. 이 영화는 기독교의 은혜가 싸구려 은혜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싸구려 은혜란 기독교를 어설프게 이해하는 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독실한 자에게 기독교의 은혜는 고귀한 은혜이다. 칭의(稱義, justification)를 받은 신자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삶을 사는 것이다.


3. 회개의 개념


1) 피해자의 회개와 가해자의 회개의 공통점


피해자 여인(신애)도 아들을 유괴하도록 한 허영이라는 원죄가 있다. 돈이 없으면서 마치 재력가가 되는 것처럼 땅주인을 만나고 재력가처럼 행동한 것이 아들 유괴살해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자기성찰과 반성이 없다. 여인 자신도 속물이고 정신질환까지도 보인다. 이러한 피해자가 교회에서 이에 대해 회개하는 장면도 없다. 단지 한 많은 여인의 마음이 고통스러워 소리 지르다 목사의 안수를 받고 그 마음에 위안을 받는 장면이 나올 뿐이다. 그리고 큰 금액을 요구하는 유괴범의 협박에 “실은 가진 돈이 이 이상 없다”는 무력을 토로하는 것으로 처리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역 중인 유괴살해범의 회개 장면도 없다. 이 장면은 “나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마음이 평안하다”는 한 문장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러한 피해자와 가해자의 회개의 장면이 너무나 간단한 장면과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다. 영화는 기독교의 용서라는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그런데 이에 상응하는 회개의 장면이 너무나 가볍게 다루어져 있다. 그래서 기독교의 용서와 은혜는 왜곡될 여지가 많은 것이다.


<1> 기독교 용서 개념의 피상화


영화의 핵심 장면이라고 볼 수 있는 용서를 실천하러 간 여인이 살해범이 너무나 태연한 모습으로 ‘자기도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는 태도는 과연 타당한 것인가? 영화는 이를 여인의 울분을 그려내기 위한 문학적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기독교의 용서를 가장 잘 그리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함께 있던 두 강도가 묘사되어 있는데 한 강도는 자기의 죄를 회개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 강도의 신앙고백을 듣고 이 강도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다.


여인이 교회에서 가졌던 신앙 체험은 싸구려 은혜 체험이다. 목사의 안수 하나로 당장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버리는 식의 용서 개념은 전통적 기독교의 용서 개념이 아니다. 용서 받기 전에 자신의 죄책에 대한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하고 죄책감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의 용서가 따르는 것이다. 자신의 죄책에 대한 문제가 해결이 됐어야 한다. 복음의 진리가 그렇듯 진정한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에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는 진정한 회개가 있다. 그런데 신애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회개가 없다.


여인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녀는 자기에게 죄책을 고백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한 살해범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주기도문이 그대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2) 기독교의 회개 개념


<1>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바른 이해


죄의 용서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용서란 바로 하나님이 독생자를 죄인인 우리에게 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대속하셨다는 하나님의 용서의 사건에서 시작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 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따라서 우리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따르는 것뿐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여인(신애)은 살해범이 자기가 용서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한 데 대하여 충격을 받았고 기독교가 거짓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인(신애)은 피해자인 자기가 아직도 용서하지 않았는데 먼저 가해자를 용서하시는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하여 이럴 수 있느냐라는 반항을 하고 있다. 이러한 신애는 용서를 너무나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다.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용서는 당사자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당사자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가 중요하다. 기독교도 이러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상처 입힘과 상처 받음의 관계를 도외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관계를 일차적으로 설정한다. 만물의 주관자되시는 하나님은 신애의 아들 준이 유괴살해된 것에 관하여 가슴 아파하시며 살해범의 죄책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살인범이 복음을 듣고 자신의 허물을 뉘우칠 때 하나님은 용서해 주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하나님은 죄인이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그 돌아온 죄인에게 용서해 주신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관계의 회복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가서 용서를 빌고 그 피해를 최대한 보상해 줄 것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너무나 간략하게 다루어져서 마치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것으로 모든 죄책의 책임이 끝나는 것으로 오해되는 부분이 있다. 사회학적으로 가해자는 일생 동안 피해자인 신애에 대하여 잘못한 심정과 빚을 지고 사는 것이다. 가해자는 그리고 상하여 병든 신애의 마음이 회복되도록 하는 윤리적 책임을 부여받고 있다.


<2> 죄책을 엄격히 밝히시는 준엄하신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라도 용서해 주시나 그 죄책을 은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섭고 큰 지를 먼저 알게 하신다. 그리고 나서 항상 피해자에 대한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적인 보상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으니 인간적인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살인범 고재봉은 비록 감옥에서 전도 받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으나 국법이 그를 용서해 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를 용서해 주셨으나 국법은 그에게 사형을 집행하였다. 새 사람이 된 고재봉은 매일 그에게 희생당한 피해인들과 유족들에 대한 참회의 마음으로 살았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용서 개념이다. 그러나 영화는 기독교의 용서 개념을 하나님이 용서하면 인간적인 채무가 모두 벗어진다고 너무나 단편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복음주의 교회를 탄생하게 한 1907년 평양대각성운동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고 죄책의 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신자들은 그냥 하나님 앞에서만 회개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남에게 빚진 자는 그 빚을 갚고자 실천에 옮겼다. 죄책고백운동은 사회적으로 그 열매를 맺었다. 재정적으로 손해를 입히거나 신체적으로 상해를 입힌 사람들은 손해를 보상하고 사과하는 일이 생겨났다.


당시에는 아들을 낳기 위하여 축첩하고 노비를 가지는 것이 사회의 관행이었다. 그런데 이축첩자들이 예수를 믿고 영접한 후 회개한 후에 이에 대한 배상행위에 나섰다. 이들은 첩을 돌려보내었다. 그리고 천 냥이나 주고 노비를 부렸던 양반들은 노비가 보는 앞에서 노비문서를 태워 소각하고 노비를 수양딸로 삼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한국선교사 곽안전은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구별없이 자신이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손해배상을 해 주었기에 성 안에 소문이 자자했다.” 이 각성운동은 말씀을 통한 회개와 기도운동으로 실생활의 회심을 가져온 영적이며 도덕적 갱신운동이었다.


<3> 죄책에 깊이 통회하고 옛 사람과 투쟁하는 인간의 삶


유괴살해범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그래서 만약에 참 평안함을 찾았다고 한다면 물론 하나님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신애) 죄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의 표현이 있었어야 했다. 정신적 물적 배상도 뒤따랐어야 했다. 교도소 안에서라고 할지라도 회개한 살해범은 진지한 참회와 피해자가 입은 마음의 상처에 대한 값비싼 용서라도 먼저 구했어야 했다. 영화의 기독교에 대한 어설픈 이해는 이러한 중요한 부분을 너무 가볍게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영화는 살해범이 감옥에서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았으니 가해자에게는 단지 유감의 뜻을 전달하고 자신의 괴로움이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해결되었다는 식으로 줄거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은혜를 본회퍼가 말하는 바같이 싸구려 은혜로 만들어버리는 심각한 왜곡을 야기하고 있다.


4. 일반 대중에 비친 기독교 상


1) 소외된 자의 고통과 상처를 도외시하는 종교?


여인 신애는 고통당한 자의 상한 심정을 몰라 주고 피해 당사자인 자신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살해범을 용서해 주며 그에게 용서와 은혜의 평안을 준 신(神)에게 반항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의 기독교 이해를 반영한다. 기독교란 소외당한 자의 상처와 고통을 공명하기 보다는 용서와 은혜라는 기계 안에 융해시키는 종교라는 것이다. 용서해야 할 자는 바로 피해자인데 피해자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가해자에게 용서와 평안을 선사해 주는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저항이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작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절규에 대하여 침묵하시며 아들을 죽음에 내버려두심으로 당신의 뜻을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십자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다. 독일 신학자 몰트만은 그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Der gekreuzige Gott)>에서 당신의 아들의 죽음 속에서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은, 기독교의 신은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대하여 연민을 모르는 무감정적인 신이라는 항의무신론에 대한 응답이라고 해석한다.


2) 소란한 싸구려 은혜 종교?


영화에는 기독교가 겉으로는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종교이지만 그 내면은 이기적이고 왜곡된 종교라는 인상이 깔려 있다. 살인범의 ‘용서받고 평안하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그녀는 그처럼 일방적으로 용서와 은혜를 베푼 하나님에 대한 배신을 하나하나씩 실천한다. 그것은 어쩌면 종교에 대한 굴레를 푸는 행태이며, 지금까지 그녀를 억압했던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는 행태이다. 여인은 반항적 행태들을 행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에 저항한다. 야유회 집회에서 목사님의 대표 기도에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를 틀어 놓아 방해한다. 약국을 운영하는 장로를 유혹해 불륜을 저지르려다가 실패를 맛본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돌멩이를 던져 기도회를 무산시킨다. 그러한 그녀는 초라하고 힘도 없다. 그래서 죄의 과일로 상징되는 사과를 칼로 베어 물며 동맥을 끊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근 문을 어렵게 열며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이러한 여인 신애의 저항운동에는 정당성이 없다. 영화가 보여 주는 정당성이란 피해자인 자기 먼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용서를 해 주었다는 사실에 대한 실망과 반항이다. 신애는 회한과 절망 속에 있는 살해범이 자기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과 모습을 원했을 것이다. 그럴 때 신애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이 절망과 자책감에 시달리는 영혼에게 용서라는 선물을 주었을 것이며, 신애는 용서를 베푸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강력하게 비판한 인간 행위의 의(the righteousness of works)다. 기독교에서 용서는 우리의 은전이나 독선이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용서에 감사해서 행하는 2차적 일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인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았다는 살해범의 너무나 평온한 표정과 말에서 깊은 충격과 저항감을 느꼈던 것이다. 자기가 해야 할 용서를 하나님이 가로챘다는 마음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기독교에서 회심하고 용서받은 자의 태도는 아니다.


여기서 신애가 이해하는 기독교는 인간적인 원한을 풀어 주는 종교 외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의 하나님은 인간의 원한을 풀어 주는 출처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내가 너를 용서한다는 주권적 선언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모르고 있다. 그녀가 가진 종교적 체험 속에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용서라는 카타르시스를 단지 자기 위안(慰安)를 위해 심리적으로 체험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여기서 신애에게 이사야처럼 그의 거룩한 주권적 영광 속에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체험이 결여되고 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고 이 만남 속에서 그 자신의 죄책을 발견한 것이다: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3-5):


3) 인간의 용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기독교?


이 영화는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잃은 여인의 한 많은 마음을 극화(劇化)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줄거리의 배경으로 설정한 기독교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왜곡을 초래할 위험성을 동반하고 있다.

영화에 의하면 기독교는 용서를 말하나 피해자의 마음의 아픔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종교집단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것은 ‘피해 당사자인 인간이 용서해 주기 이전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용서를 하고 마음에 평안을 준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받는 용서라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함축은 신애가 살해범을 만난 후부터 하는 일탈행동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야유회에서 목사님의 설교 시에 몰래 음향실에 들어가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어 설교를 방해하는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가게에서 이 CD를 몰래 훔쳐 와서 음향실에서 설교 도중 튼 것은 의도적이며, 목사의 설교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애를 위하여 기도하는 신자들의 진지한 기도 시에 약국의 유리창을 깨뜨림으로 더욱더 드러나고 있다.


4) 일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오는 주인공


이 영화에는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처럼 해피엔딩이 없다. 영화에서 화해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애가 다시 돌아온 것 자체가 화해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신애는 그녀와 적든 크든 간에 갈등 관계에 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상담과 치료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료했다고는 하지만, 결코 입원 이전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지 않는다.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을 보면 피하거나 화내게 된다. 살인범 딸이 이발사 보조원이 되어 자기 머리를 잘라 주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신애는 중간에 뛰어 나오게 된다.


영화의 마무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줄거리가 전개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차라리,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후 신애가 그녀가 유혹한 장로를 찾아가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더라면, 그리고 그녀가 기도회를 방해한 신자들에게 찾아가 저들의 진심을 왜곡했던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했더라면. 목회자를 찾아가 야외설교를 방해했던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더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인간적인 차원에서 해석한 자신의 얕은 믿음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잘라 주는 살해범의 딸로 하여금 머리를 자르도록 허락했더라면. 그리고 그 딸을 받아줌으로써 그 아버지를 용서를 하는 것으로 끝났더라면 훨씬 영화는 깊이를 더하는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집 마당으로 되돌아와 거울로 자기가 스스로 자기 머리를 어설프게 자르는 것으로 이 영화는 끝나고 있다. 그녀는 기독교에서 용서와 구원을 찾지 못하고 다시 되풀이 되는 일상(日常)으로 되돌아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인이 자르는 머리카락 더미가 바람에 날아갈 때 비밀스러운 햇빛(밀양)이 그것을 비추고 있다. 여기에 밀양이라는 주제의 함축성이 있다. 여인의 머리카락을 비추는 비밀스러운 햇빛은 아마도 제도적 기독교 안에서 자기의 한을 풀지 못한 여인에게로 향하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이 창조세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다.


5) 상(傷)한 심리를 무시하는 기독교?


이 영화는 기독교가 심리치료를 무시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하나님은 죄인을 헐값으로 용서해 주시는 ‘용서의 기계’인 것처럼 기독교를 왜곡하고 있다. 하나님은 항의무신론자들(protestatheists)의 비난처럼 감정도 없고 상처받은 자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분으로 왜곡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알려 주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감정이 없으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슬퍼하시는 너무나 풍부한 감정을 지니신 분이시다. 범죄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슬퍼하시는 심정을 그의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 같이 전하고 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였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2-4)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파멸한 그의 백성과 예루살렘에 관하여 다음같이 애가를 부르고 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애2;11)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찌어다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찌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찌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와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찌어다 하였도다”(애2;18-19)


5. 미성숙한 기독교인, 우리의 자화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신자들에게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신자들에게는 우리들의 미성숙한 신자의 모습, 또는 믿다가 실망한 우리 자신의 자포자기한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1) 싸구려 은혜 신자 - 우리의 모습


기독교에 대한 피상적인 신앙과 이해에 갇혀 있는 주인공 신애는 다름 아닌 신자인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한 많은 우리 자신들이 교회에 나가서 무조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마음에 평화를 발견하고 기독교인이 된다. 그리하여 여러 모임에 나가서 간증도 하고 신앙생활에 열심이다. 그리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따라서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살해범을 만나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한다. 그런데 막상 원수를 만나 용서와 사랑을 전하고자 하면 이것이 나의 뜻대로 되질 않는다. 내 속에 치밀어 오르는 이 원망과 한의 적개심은 억누를 수가 없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자기 마음의 평안만을 구하는 기복적 신앙에 그칠 수 없다. 마음의 평안과 자기 구원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자기 행복과 구원과 평안은 저절로 따라 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번영과 축복과 자기 구원에만 전념한 나머지 신앙의 중요한 사명인 우리 주위의 이웃과 사회를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등한시하였다.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자기 권리와 이권을 추구하는 장으로 변모하면서 사회의 지탄거리가 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진정한 신앙이란 갖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며,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동 속에서 다시 얻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성숙한 차원은 이기주의적 삶의 방식, 자기 행복과 평안과 번영의 추구에서 머물지 않고 이제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이타주의적 삶을 영위하는 데 있다. 본회퍼가 말한 대로 기독교 신자는 타자를 위한 존재(the being for the Others)다. 타자를 위한 존재는 섬김과 나눔의 존재다.


2) 원수를 철저히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


신애처럼 우리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모순투성이이며, 우리에게 허물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다. 우리 신자들이 입으로는 원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처지에 이르면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아닌가? 우리에게 조그만 상처를 입힌 형제를 용서하지 못한 까닭에 오늘 한국 기독교는 백 개나 넘는 교파로 갈라져 있다. 그리고 옛보다는 많이 감정이 개신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장로교 장자교단이라는 예장 합동, 통합, 고신, 예장 교단과 기장 사이의 감정은 불신자에 대한 감정의 골보다 작다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다.


이러한 원수사랑은 인간적인 노력이나 애씀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깊은 은혜,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초월의 차원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초월의 차원에서 신자들은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관점을 볼 수 있게 된다. 자기의 두 아들을 살해한 좌익계 학생을 용서하고 자기의 아들로 삼았던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의 원자탄도 인간의 마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적 사랑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3) 하나님의 은밀한 은혜 햇볕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


마지막 장면에는 신애가 자르는 머리카락 더미가 바람에 휘날려 굴러가는 데 은밀한 햇볕이 비친다. 자기 외아들의 살해범의 딸이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 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애가 자기 마당에 돌아와 스스로 자르는 머리카락 더미에 은밀한 은총의 햇볕이 비추인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원망하고 낙심하는 우리 신자들, 또는 절반 신자인 우리들을 향하여 여전히 비추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햇볕을 상징한다.


우리는 이처럼 매일 아침과 저녁, 밤, 매 시간, 매 순간 우리에게 은밀한 은총으로 다가오시며 우리를 감싸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밀한 은혜를 모르고 지내고 있다. 밀양은 이러한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 주고 있다. 신애는 하나님에 대하여 반항하며 기독교 신앙에 저항하는 행동을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의 햇볕은 신애를 떠나지 않고 비추인다. 이것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총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은총 없이는 우리는 태어날 수도 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은 인간됨의 존재론적 가능성이요, 신비한 선물이다.


6. 성경적 기독교의 바른 상


우리는 성경적 기독교의 바른 상을 다음 같이 피력할 수 있다. 성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초월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구체적인 삶 가운데 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 우리의 고통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은 구약에서는 세키나(Schechina)의 하나님, 신약에서는 십자가의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다.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고난 받는 그의 백성이 받고 있는 고난의 현장에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러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개 하리라”(출 3:7-10)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당한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난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라 (…)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 15:34-39).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아들 안에서 인류의 고난의 현장에 참여하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 구절은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2)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의 용서


성경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설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이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단지 피상적으로 인간적인 견지에서 판단해서는 안된다. 은혜는 사람이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받을 자격이 안되는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은혜요, 선물이다. 그러므로 은혜와 용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다.


용서란 물론 피해를 입은 사람이 해야 성립한다. 그것은 심리적인 상대방에 대한 응어리를 푸는 것이다. 여인은 하나님이 살인범을 용서하셨다면 오히려 감사해야 했다. 이것이 기독교적 마음이요 용서이다. 그런데 피해자인 자기가 아직도 용서를 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자기는 거들어 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용서한 데 대하여 여인은 반항한다. 이것은 아직도 여인이 용서와 은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여인은 얼마나 결백한가? 신애도 자기가 돈 많은 재력가로 소문을 내었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유괴살해당하는 인간적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신애는 자기의 잘못을 참회하기보다는 유괴범이 엄청난 돈을 요구하여 오니까 비로소 자기는 실제로 돈이 없는 자라고 진실을 유괴범에게 전화로 실토한다. 그러나 그것은 통하지 않고 아들은 무참히 시신으로 변한다.


하나님이 값없이 용서를 베푸시는 것은 공연히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의 아들을 예수님을 우리 죄의 속죄 제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 같이 증언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 5:7-10).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당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이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3) 절대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기독교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무한한 용서를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원수를 미워하라’는 유대교나 ‘이교도와 원수를 칼로 응징하라’는 이슬람교와는 다른, 자기 없는 사랑, 아가페를 가르치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조건 없는 절대적 사랑의 계명이다.


따라서 가해자가 이미 피해자의 용서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말에 아연실색하여 자신이 받은 용서까지도 팽개쳐 버린 신애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초보자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의 보다 성숙한 단계는 내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것이고 상대방이 피해자인 나에게 심리적 보상을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용서할 뿐 아니라 원수에 대한 응징을 거두어 달라는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는 빈 마음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가르치신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사도 바울도 이 정신을 그대로 사랑의 계명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은즉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7-21).


4) 심리상담, 심리적 상처를 싸매고 회복과정을 중요시


인간의 아픔은 단지 신체적 상처나 아픔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은 마음의 상처와 아픔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고통 받은 자들에게 내면적 치유는 중요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 과정을 중요하게 취급한다. 단지 영적인 치유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적 치유가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 상담치유 내지 목회상담은 이러한 내적치유에 관하여 이전에 무시되었던 이 분야를 새로운 영역으로 주목하고 연구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2007년 국민소득 2만 불에 도달하면서 먹고 사는 기본 욕구가 해결된 다음에는 심리적 용서와 치유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분출되고 있다.


1974년 스위스 로잔 세계복음화 대회((Lausanne Movement for World Evangelization)에서 복음화와 인간화 내지 사회화란 분리될 수 없는 한 켤레를 형성하는 것으로 채택되었다. 이 대회는 영혼구원과 인간답게 사는 사회적 여건 형성이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복음의 두 가지 요소라고 보았다. 이것은 영혼구원에만 초점을 두었던 전통적인 복음주의 관점을 보완하는 것으로 영혼구원과 인간화 내지 사회화, 다시 말하면, 상처받은 자의 영혼 구원과 더불어 그의 사회적 삶으로 복귀를 중요시한다. 알콜 중독 환자의 영혼만을 회개시키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중독자가 중독습성에서 생리적으로 벗어나도록 하는 사회화과정을 도와 주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물질적 배상과 처벌과 용서라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심리적 상처의 치료와 회복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연구하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과정이 심리치료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신애가 나가는 교회에서 신애의 상처를 단지 믿음의 차원에서만 접근하고 상처 받은 그 마음의 치유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은 오늘날 상담과 심리치료를 중요시하는 기독교의 모습과는 다른 일부 은사 중심의 기독교만을 부각하는 면이 있다.


맺으며


영화 ‘밀양’은 기독교적 소재를 다루고 한 많은 여인의 심리적 갈등을 다루고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작품성이 그만큼의 수준에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영화는 종교적으로 깊은 감동을 일으키리만큼 종교예술적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그냥 일상적인 속물 여인의 한 많은 인생의 단면을 그려냈다. 기독교 역사가 120년 밖에 되지 않는 우리의 한국의 실정에서 물론 이 영화를 벤허나 쿠바디스 등 해외 기독교 명작과 비교할 처지는 못된다. 앞으로 한국 영화가 기독교적 소재를 가지고서 인간의 내면과 갈등과 죄성과 구원과 화해를 보다 극적으로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깊은 작가들 그리고 감독들의 종교적 체험이 요구된다. 이미 한국사회의 중요한 종교로서 자리잡은 기독교의 부정적 모습을 파헤치는 것은 기독교의 발전을 위하여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몇 가지 부정적인 요소를 소재로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인양 그리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기독교의 깊은 모습을 제대로 소화하여 이 영화를 보는 독실한 기독교인까지도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보다 깊은 기독교 이해와 체험에 뿌리를 가져야 할 것이다. 작품을 쓰는 자는 작가이다. 작품이 위대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위대한 체험과 세계관 속에 살아야 한다. 톨스토이가 그러했고 루이스가 그러했다. 이러한 위대한 정신적 세계에 사는 작가들이 요망된다. 이러한 위대한 작가들이 나오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목회자가 위대해야 하고 한국 기독교가 보다 깊은 영적이고 정신적 체험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신자인 우리들에게는 부정적 기독교 상 그리고 믿는 신자인 우리들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되돌아보게끔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신자들의 신앙을 성숙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김영한 교수 소개>


서울대 철학과
독일 하이델베르크대(Dr. phil. & Dr. theol.)

영국 케임브리지대 신학부 연구교수
미국 예일대 신학부 연구교수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소장
한국개혁신학회 회장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현재)
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장(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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