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짧을수록 좋다
헤라는 남편 제우스에게서
아름다운 암소 한 마리를 빼앗아
눈이 100개인
포악한 아르고스에게 철저히 잘 지키라고
명령했다,
남편의 거듭된 외도로 화가 난
헤라는 그 암소가
남편과 밀회를 즐기던 연인임을
직감했다.
아르고스는 헤라 명령대로
암소가 된 이오를 정말로 소처럼 다루었다.
이오는
너무 괴로워 아르고스에게 애원하려 해도
팔이 없어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를 찾는 아버지를 만났음에도
말할 수 없었던 것은
그녀는 더 이상 이오가 아닌 그냥
한 마리 암소였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암소가 된 이오’ 이야기는
사람만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임을 교훈하고 있다.
다른 의미론
인간이 말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
큰 재앙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 많이 있지만
가장 확연한 것은
사람만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일이다.
개가 사람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든지,
용맹스러운 사자가 말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생긴다.
도대체 조물주는 왜
동물들은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을까.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언어를 구사하는 유일한
종이다.
물론 앵무새나 구관조같은
몇몇 새들이
말을 따라 할 줄 아는 것은
구조적으로
두꺼운 혀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의 말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그 새들이 어찌
단어의 뜻을 알고 따라 했겠는가.
현대는 자기표현 시대다.
자기 생각과 감정 그리고 욕구를 전달하고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옛날에야
적당히 자기 의사를 못 전해도 생활에는
별 무리가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심지어 국어 영역에
‘언어와 매체’가 추가된 것을 보라.
‘매체’란 현대사회에서
언어활동이 다양한 매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요구되어
신설된 과목이다.
그만큼 건강한 사회 구원성이
되려면
알아야 할 지식들이 많아진 셈이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전달력과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못한다.’에서 끝나지 않고
개인의 역량을 평가할 때
매우 불리하게 작용 되고 있다.
어느 지인은
필리핀에서 벌써 15년이 되었지만
커피 한잔하며
깊이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고
어느 날 내게 토로했다.
필리핀 아내와
수많은 직원들이 있음에도
가끔 혼자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다고 한다.
코로나19보다
빙하기 가속화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의 외로움이다.
의식주가 해결되고
안전의 욕구가 가능해지자 이제
사회적 욕구가 늘어나면서
개인주의의 광기가
곳곳에 나타나며 날마다 새 뉴스를 만들고 있다.
관계 맺음의 부재로
외로움은 더욱 극대화를 이루고 있다.
외로움과 쓸쓸함이 충족되지 못하자
본능적으로
더욱 스마트폰에 매달리면서
온갖 정보의 바다에서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은 먼저
불특정 다수에게 SNS를 통해 뜻을 전하고
또한 만나 대화를 한다.
결국
워낙 기계에 파묻혀 있다 보니
실제로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일에 대해 심적 부담이 커지고 있는 것도
이 시대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성격상 아니면 여러 이유로
말만 하려면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한번 말을 시작하면
마치 폭탄이 터지듯 멈출 줄 모르고
마이웨이 화자가 있다.
마치 ‘때는 이때다’ 하는 식으로
특유의 접속사를 통해
묻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 부분까지
너무 상세하게 말을 이어간다.
자신은 할 말 다 했다고 자위할지
모르겠지만,
혼자 많은 말을 하면 할수록
뒷감당은 어찌하리요.
‘말’이라는 것은
전할 내용이 10%라고 하면
나머지 90%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진정한 대화라
할 수 있다.
물론 투 머치 토커(TMT)는 이런 배경도 모르기에
악순환은 계속된다.
현대인의 이러한 모습은
더욱 극과 극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구온난화 현상처럼
내 생각을 드러내야만 하는
말 홍수 속에서 살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는 타인의 말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21C를 네트워크 시대라는 것은
확산과 전염이라는
두 얼굴의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케 한다.
내가 말할 기회
곧 마이크를 받는 순간에
다른 이들이 내게 쏠린 눈의 의미는
좋은 의미의 확산과
나쁜 의미의 전염이 될 수 있다.
아무리 할 말이 많아도
적절한 시간을 넘겨버리면 소탐대실이
되어버린다.
세상이 바뀌었다.
말을 독점하는 사람은
내용이 아무리 중요해도 결코
용서받지 못하기에
말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수위 조절을
계산하고 있어야
미움받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
현대인에게 견디기 어려운 점은
기다려 주는 일이다.
그래서 말이 많아질수록
공공의 적이 된다.
이전엔
과욕이란 돈과 관련이 있었지만,
지금은
자기 말만 줄기차게 하는 사람을
과욕의 극치로 보는 것은
많은 말을 하다 보니
자랑거리가
대부분임을 바보라도 알게 된다.
현대사회는
에티켓 중 하나가 말의 준법성이다.
방송에서
어느 누구라도 시간을 독점하면
스탭은 프로그램을 위해
계속 신호를 보낸다.
생방송이 아니라면 나중에
통편집해 버린다.
어찌된 세상인지 어느 때부터인가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말을 하는 일이
중용의 최고 도요
최고 스피지가 되었단 말인가.
자존감이 높은 이와 대화하다 보면
내 가치도 높아지고
신뢰와 사랑이 더 쌓여감을
느끼지만,
자존감이 낮은 사람 말은
들을수록
화가 나는 것은
자기 것만 생각하느라
상대에 대한 배려는 1도 없기 때문이다.
평소 공허하게 여긴 것들을
말을 독점하므로
자신을 어필한 도구로 사용하면서
불상사가 생겨난다.
물론 본인은
이런 과정을 모르지만 알아도 무시한다
올리버 웬델 홈스는
“..가장 좋은 대화란 영감을 주며,
이에 상응해
'맞장구'라는 신성한 요소를 필요로 하는데,
이 요소를 여성이 아니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라고 했다.
지루함을 참고 들어주는 일도
대단하지만,
적절하게 리액션 해 주는 사람과의
대화는
천국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렇게 말은
독과 약이 될 수 있기에
날마다 심호흡하듯
말에 대한 지혜가 요구된다.
2021년 7월 29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드립니다.
사진작가:피러한님, 이요셉님, 우기자님^경포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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