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벗들에게 보내는 편지
하나님의
경륜을 펼치려 합니다 2
주님 사랑하는 자매,
형제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주에 이어 피정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보겠습니다.
사역자에게 영적 피정은
필수 요소입니다. 이는 선택할 사항이 아니지요. 주님과 주기적인 교제를
위해서 시간을 내어 조용한 곳에서 주님을 깊이 묵상하는 것은 목회
사역자의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역자를 강제로 은둔으로
불러내십니다. 이 영적 피정을 겪는 까닭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중대한 의무와 사명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일을 주시기
위해서 사역자를 은둔으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이 피정은 성공한 사역자에게는 매우 힘든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잘 나가던 일을 그만 두고 은둔하게 하실 때 이를 선뜻 따를 용기를
낼 수 있는 사역자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잘 나가는 사역을 접고 은둔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실
때는 그만한 이유와 까닭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사역자가 아니라 해도 주님은 새로운 사역으로 지경을
넓히고자 할 때 은둔으로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의 방법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겠지만 우선 일을 한가하게 하십니다. 일이 제대로 풀려지지
않고 꼬이게 된다든지 어려움을 만나게 되지요. 평상시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마음 속에 일을 놓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주의 음성을 잘 듣는 사람인 경우 주님은 직접 은둔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영적 피정은 일을 손에서 떼고
완전히 은둔하는 완전 피정이 있고, 일을 계속하면서 주님과 깊은 피정으로
들어가는 부분 피정이 있습니다. 사역의 중대한 변화나 새로운 능력으로
채워지기를 원하는 경우 완전 피정으로 부르시며, 사역의 지경을 넓히거나
부분적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정도라면 부분 피정으로 부르십니다.
은둔의 자리로 나가게 되면 새로운 일을 위한 몸가짐에 필요한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둔이란 고통스런 일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의 환상을 경험한 후 14년의 긴 은둔으로 이끌려 광야의
학습을 거쳤고, 그 이후 전도 사역에서 수시로 은둔의 자리에 불려 나갔습니다.
에베소에서 여러 해를 머물렀고 두란노 서원에서 역시 은둔을 해야만
했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여러 해 동안 은둔하면서 죽음을 준비하여야 했습니다.
이런 은둔을 통해서 자신의 선교사역을 돌아보게 되었고 주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편지를 써 보내게 되었으며 이런 일이 후에 성경을 우리에게
전하는 중대한 일로 쓰임을 받는 시간이었음을 당시 바울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은둔으로 부르심을 입게 되면 당시는 그 까닭을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훗날에 그 의미를 알게 되는 데 이처럼 주님의 일은
오묘하며 신비한 것입니다. 주께서 사역자를 일정한 기간동안 은둔으로
부르심은 그 분의 주권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해야
하는데 이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활동하고 싶어하는 본능적 욕구가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실패를 의미하며 낭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앞섭니다. 이런 생각은 때로는 주님을
앞서서 행동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으로 주의 일을 한다면
이는 엄격히 주의 일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빌려 하는 우리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주께
어떻게 드려지는 것인지를 되돌아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한적한 곳에 나아가 깊은 기도를 했던 주님의 피정하는 태도를
본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기적인 피정과, 단기적인 피정을 할 수 있는 기독교
피정의 집이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영적 피정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향하신 주의 부르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사역이 주님의 뜻으로
복귀하게 되며 주의 새로운 비전과 능력을 덧입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활을 교제로 사용하시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생활을 통해서 주제의 의미를 파악하고 공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공부(工夫)란
몸으로 익혀서 깨닫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머리 만으로 배우는
것은 공부가 아니고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역자에게는 가르침을
받기를 원치 않으며 공부하기를 바랍니다.
몸으로 겪어서 배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부하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선택된 소수의 지도자만이
공부하게 됩니다.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게 하는 것입니다.
영적 피정은 새로운 사역을
위해서 주님이 배려하시는 공부 기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만 성숙한 사역자는 기쁨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은둔은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집에서
은둔하는 동안 그가 겪었던 심리적 갈등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과부에게 빌붙어 지내는 건강한 남자를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엘리야에 대해서 과부마저도 원망했습니다. 한 두 달은 손님 대접을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곁을 떠나지 않는 엘리야에 대해서
과부는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이 선지자지 자신에게는 달갑지
않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원망하는 과부를 위해서 주님은 엄청난
일을 준비했습니다.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은 과부의 분노를 폭발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하신 주님은 엘리야로 하여금 아들을
살리게 하심으로써 과부의 원망을 잠재웠습니다. 이는 과부 뿐만 아니라
엘리야도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친 주의 종을 위로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영적 피정은 하나님의 사역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자신의 사역의 지경이 넓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강제적인 은둔이든 자발적인 은둔이든 우리는 여러 차례 이 과정을 통해서
사역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영적 피정은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입니다.
아아 그런데 어디로 가서 쉬나요? 우리는 그 쉼터를 만들고 오시는 분들이
잘 쉬실 수 있도록 정성껏 섬기려고 합니다.
'쉼'은 숨을 고른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지으시기를 마치고 7일째 '안식'하셨다고
했습니다. 7일째 되는 날 하루 쉬는 안식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에 초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은 그 이후에
제정된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안식을 '피정'이라 합니다. 불교에도
안식과 같은 행사가 있는데 겨울과 봄에 모든 하는 일을 쉬고(말하는
것까지) 수도정진 하는 '동안거, 하안거'가 있습니다.
'쉼'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에는 '쉼'이
없습니다. 주일은 쉬는날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욱 바쁘게 주님의
일(?)을 해야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인정이 됩니다. 목회자들에게 '안식년'이라는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안식년 잘못했다간
영원히 쉴 수가 있기에 불안한 목회자들이 지쳐서 나가 떨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자리를 지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쉴'줄을 모릅니다. 고작 밀린 잠이나 자고
텔레비전이나 보며 빈둥거리는 것이 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육체를 쉬게 하는 것에 불과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이 쉼을 얻어야
하는데, 그런 '쉼'이 없습니다. '쉼'이 없으니 '숨'이 고르지 못하고
'숨'이 고르지 못하니 정서적으로 불안정하여 끊임없이 '안정'을 찾습니다.
그 찾아 헤매는 안정이란 것이 '내 소유'의 집, 땅, 가게 같은 것입니다.
그로 인해 생기는 사람들과의 갈등은 나라적으로 얼마나 큰 손실인지.
잘 쉬기만 해도 숨쉬기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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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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