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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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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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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찾는 예배인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인가!》
고은교회 황부일목사
기독교의 공예배는 교파를 초월해서 모두가 같은 것같습니다.
예배의식이나 순서, 분위기 차이는 다소 여러 모양을 가지는 것 같으나 대체적으로 하나님 이름으로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 듣고 하는 예배 의식 상태로 볼 때 어디 가나 큰 차이 없이 비슷하고 대체적으로 같은 기독교로서 공통적인 예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드물게 영상예배니 열린 예배니 하는 것들 빼고는 보통 예배라 할 수 있는 모습을 가지고 모여서 합니다.
그러나 예배의 중심을 들어가 보면 사람 중심의 예배가 있고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따로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이것이 구분 됩니다.
<우리가 원하고 찾는 예배>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의 종파가 있습니다.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 신을 찾아 각자 정해진 의식이나 행위를 통해 신을 부르고 열정으로 신을 감동시켜 자기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나 어떤 문제나 형편을 얻고 해결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종교의 의식이나 행위가 각 종파별로 다를지라도 그들이 구하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인간 소원 기대에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도 그러함이 많습니다.
교파도 많고 지교회도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지만 예배가 자기들의 기대하는 바를 얻는 축복의 매체나 인본적 의의 추구로 알고 찾는 경우가 대체적으로 많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6:14-15와 25-27을 보면 예수님 당시 유대 무리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역사를 체험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 했고 예수님은 그걸 아시고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은 예수를 찾으러 배를 타고 열심히 찾아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향해 ,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 6:27)고 말씀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열심히 썩을 것의 해결을 위해 나를 찾지 말고
영생을 위해 나를 찾으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는 왜 찾는 거고 왜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고 예수를 찾는 것은 예수님 당시 무리들 처럼 각자 자기 기대의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것을 두 부류로 볼 수있는데 하나는 개인적인 기대 실현과 현 형편의 문제해결을위함으로 모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 기대 구원입니다.
지상천국을 이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중심의 사람들이 모여 하는 예배는 결국 기대실현의 능력자를 찾는 주문의식이고 인본적
중심이 담긴 의식 예배입니다. 때문에 이들의 예배는 저들 형편 중심으로 바뀌고 그들 중심으로 맞춰져 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맞는 예배를 찾아갑니다.
자기 기호에 기대어 분위기에 적절히 예배하는 교회로 모입니다.
대체적으로 연세많은 분들은 기복적인 예배를 찾고,
젊고 지식자들은 이성적 문화적 감성적 그리고 박애적인 공감의 예배를 찾습니다.
이들의 특성은 하나님이 제일 될 수 없고 하나님을 통해 자기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이 제일인지라 언제든지
하나님을 뒤로 할 수 있고 예배도 사정에 따라 외면 하기도 하고 자기들 형편의 편한대로 예배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이런 경우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찾으시는 예배>
요한복음 4:20-24에 보면 우물가에서 찾아가신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를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볼 때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혼합주의 신앙에 따라 산신당에서 이방신을 숭배하거나 여호와와 혼합해서 숭배하는 전례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잘못됨은 북왕국 초대왕인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단에 두고 백성들에게 그것이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신이라 하고 (왕상 12:26-31) 섬기게 했고 그 신앙이 전통이 되어 전해져 내려가는 가운데 앗수르가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지배하면서 그들이 지배하는 여러 민족들은 사마리아로 이전시키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 시키면서 사마리아로 이전해온 여러 민족들이 자기들이 섬기던 각자 신과 또한 여호와를 혼합해서 각자의 신상들을 산당에 두고 섬기며 예배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왕하 17:32-33)
그러니까 저들 좋은대로 형편에 따라 필요에 따라 산당으로 찾아가서 저들 나름대로의 정해진 의식을 따라 예배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도 많은 교회들이 자기들 좋은대로 크게 예배당을 짓고 성전이라고 부르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필요한 대로 부르면서 각자 기대 실현을 위해 만든 예배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벌써 교회들이 다원주의 사상으로 물들고 저들 좋은 대로 맞게 꾸미고 예배를사람들 원하는 대로 인본중심으로 만들고 실행해 온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시대는 교회에 세상 사조나 철학이나 이념사상 따위가 들어와 교회를 인본적으로 변질 시켜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5:8~9절에 보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면서 예수님은 이러한 예배는 잘못된 예배로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교통하심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어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하는 예배가 아니라, 우리가 필요해서 찾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로 택하시고 불러내사 그 분이 원하시는 합당한 예배로 성령의 교통하심을 입고 예배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예배는 교회구원으로 주어진 하나님 나라된 영화로운 성역>
가인의 예배가 하나님께 외면당한 것은 예배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가인은 하나님께 나갈 수 없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악한자에게 속하여 (뱀의 후손) 의를 미워하는 원수된 자로서 의로운 아벨을 죽인 자였습니다. (요일 3:12)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라도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예배가 안되고 할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택자를 불러 하나님 아버지께 나와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예배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예배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원한 특혜입니다.
창세기 4:20-22에 보면 뱀의 후손인 가인과 가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은 세상 문화를 주도하는 기업을 주시고 반면에 순교당한 아벨 대신에 주신 셋과 셋의 아들 에노스에게는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거룩한 기업을 주셨습니다. (창 4:25-26)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후손들에게는 세상 그 어떤 것도 기업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나라에 자녀된 권세와 여호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고백하며 예배로 하나님의 성호를 영광으로 부르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라는 것은 요즘처럼 하나님을 필요로 열심히 주여 주여 하다가 필요가 없거나 바쁜 다른 사정이 생기면 주를 부름은 뒤로 하고 딴 짓하는 것과는 본질이 다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별된 기업으로 주신 여호와 이름을 부르게 한 것은 성령에 의해서 하는 믿음의 고백적 부름과(고전12:3) 그 다음은 믿음의 생활, 즉 구원을 사는 삶의 전부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모여 함께 예배하게 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또한 로마서 12:1-2처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예배를 드림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이사다닐 때 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 이름을 불렀더라고 한 것입니다.
이사야 43:21에보면,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분명히 증거하심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어진 예배는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으로 주심이요 영원한 선물로서 구원의 삶의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1:4~6절을 보면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에 하나님의 구원의 기쁘신 목적이 교회로 영원히 구원의 하나님의 나라된 거룩한 삶으로 예배하게 하신 겁니다.
예배를 우리가 맘대로 형편 따라 바꾸고 문제가 생겼다고, 사정이 생겼다고 안하고 쉬고 해서 되겠습니까?
예배는 하고 안하고 우리의 권한이 아닙니다. 목사도 당회도 성도 전부가 원해도 예배는 고유의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의 영역이요 그 분께만 돌려지는 그 분이 찾으시는 영화로운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2:8에 보면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과 구주예수 그리스도는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말씀했습니다. (계4:11,5:12)
누가 주께서 받으시는 존귀하고 합당한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예배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시50:5)
우리가 분명 교회된 성도라면 이 말씀앞에 굴복하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의 도리와 예배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구원의 증거로 감사예배하게 부르신
그은혜의 영광을 져버려서는 안됩니다.
시편 100:2~4절에 보면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공예배가 무엇인지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밝혀 줍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하나님을 영화롭게 옳게 하는
예배는 하나님 찾으시는 존귀한 예배로서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구원을 사는 회복의 은혜를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린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분이 찾으시는 존귀하고 신령한 은혜의 공예배로 모임이 혹시 전염병이 옮는 해를 입는 것으로
여겨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이나 혹은 하나님제일 주권중심이 안되는 다수의 교회들의 말에 따라 구원의 영생을 사는 은혜의 예배를 경시하고 형편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들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질 구원의 예배를 어렵다고, 전염병이 돈다고, 주변에서 떠들고 비방한다고, 그것이 무서워서인지 그 방법이 옳다고 생각해서인지 주일 공예배를 폐하고 예배당 문닫고 현대 시스템의 편리함을 이용하여 온라인으로 예배관전한다고 자랑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 권면의 말씀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성일에 교회됨으로(건물이 아닌) 성령의 교통하심을 따라 예배의 부름에 한몸됨으로 모인 예배가 분명 공예배이고 가정예배는 공예배로 모였던 성도가 믿음의 생활로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사는 집에서 하는 가족예배인 것입니다.
그리고 병상에 있거나 어디에 갇혀있거나 도저히 불가능한 타처에 있거나 핍박이나 박해로 숨아 있는 극한의 상황이 아닌 편리위주의 그 어떤 방식의 예배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제일 중심이 아니라 어떤 이유가 되었던 우리 사정이나 형편중심으로 의도된 것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닝이 찾으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로서 성령이
진리가운대로 인도하시는 은혜가 있는 반면에 사람이 찾는 예배는
각자 기대하고 원하고 형편 사정따라
변동시켜 가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때론 어렵고 좀 힘들어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화롭고 경건한 예배로 돌아 갑시다!
거기에 구원을 믿음의 능력으로 그의 나라를 살아 가는 은혜와 평강이 살아 있습니다!
" 아멘"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인가!》
고은교회 황부일목사
기독교의 공예배는 교파를 초월해서 모두가 같은 것같습니다.
예배의식이나 순서, 분위기 차이는 다소 여러 모양을 가지는 것 같으나 대체적으로 하나님 이름으로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 듣고 하는 예배 의식 상태로 볼 때 어디 가나 큰 차이 없이 비슷하고 대체적으로 같은 기독교로서 공통적인 예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드물게 영상예배니 열린 예배니 하는 것들 빼고는 보통 예배라 할 수 있는 모습을 가지고 모여서 합니다.
그러나 예배의 중심을 들어가 보면 사람 중심의 예배가 있고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따로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이것이 구분 됩니다.
<우리가 원하고 찾는 예배>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의 종파가 있습니다.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 신을 찾아 각자 정해진 의식이나 행위를 통해 신을 부르고 열정으로 신을 감동시켜 자기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나 어떤 문제나 형편을 얻고 해결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종교의 의식이나 행위가 각 종파별로 다를지라도 그들이 구하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인간 소원 기대에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도 그러함이 많습니다.
교파도 많고 지교회도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지만 예배가 자기들의 기대하는 바를 얻는 축복의 매체나 인본적 의의 추구로 알고 찾는 경우가 대체적으로 많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6:14-15와 25-27을 보면 예수님 당시 유대 무리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역사를 체험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 했고 예수님은 그걸 아시고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은 예수를 찾으러 배를 타고 열심히 찾아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향해 ,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 6:27)고 말씀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열심히 썩을 것의 해결을 위해 나를 찾지 말고
영생을 위해 나를 찾으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는 왜 찾는 거고 왜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고 예수를 찾는 것은 예수님 당시 무리들 처럼 각자 자기 기대의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것을 두 부류로 볼 수있는데 하나는 개인적인 기대 실현과 현 형편의 문제해결을위함으로 모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 기대 구원입니다.
지상천국을 이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중심의 사람들이 모여 하는 예배는 결국 기대실현의 능력자를 찾는 주문의식이고 인본적
중심이 담긴 의식 예배입니다. 때문에 이들의 예배는 저들 형편 중심으로 바뀌고 그들 중심으로 맞춰져 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맞는 예배를 찾아갑니다.
자기 기호에 기대어 분위기에 적절히 예배하는 교회로 모입니다.
대체적으로 연세많은 분들은 기복적인 예배를 찾고,
젊고 지식자들은 이성적 문화적 감성적 그리고 박애적인 공감의 예배를 찾습니다.
이들의 특성은 하나님이 제일 될 수 없고 하나님을 통해 자기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이 제일인지라 언제든지
하나님을 뒤로 할 수 있고 예배도 사정에 따라 외면 하기도 하고 자기들 형편의 편한대로 예배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이런 경우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찾으시는 예배>
요한복음 4:20-24에 보면 우물가에서 찾아가신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를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볼 때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혼합주의 신앙에 따라 산신당에서 이방신을 숭배하거나 여호와와 혼합해서 숭배하는 전례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잘못됨은 북왕국 초대왕인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단에 두고 백성들에게 그것이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신이라 하고 (왕상 12:26-31) 섬기게 했고 그 신앙이 전통이 되어 전해져 내려가는 가운데 앗수르가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지배하면서 그들이 지배하는 여러 민족들은 사마리아로 이전시키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 시키면서 사마리아로 이전해온 여러 민족들이 자기들이 섬기던 각자 신과 또한 여호와를 혼합해서 각자의 신상들을 산당에 두고 섬기며 예배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왕하 17:32-33)
그러니까 저들 좋은대로 형편에 따라 필요에 따라 산당으로 찾아가서 저들 나름대로의 정해진 의식을 따라 예배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도 많은 교회들이 자기들 좋은대로 크게 예배당을 짓고 성전이라고 부르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필요한 대로 부르면서 각자 기대 실현을 위해 만든 예배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벌써 교회들이 다원주의 사상으로 물들고 저들 좋은 대로 맞게 꾸미고 예배를사람들 원하는 대로 인본중심으로 만들고 실행해 온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시대는 교회에 세상 사조나 철학이나 이념사상 따위가 들어와 교회를 인본적으로 변질 시켜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5:8~9절에 보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면서 예수님은 이러한 예배는 잘못된 예배로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교통하심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어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하는 예배가 아니라, 우리가 필요해서 찾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로 택하시고 불러내사 그 분이 원하시는 합당한 예배로 성령의 교통하심을 입고 예배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예배는 교회구원으로 주어진 하나님 나라된 영화로운 성역>
가인의 예배가 하나님께 외면당한 것은 예배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가인은 하나님께 나갈 수 없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악한자에게 속하여 (뱀의 후손) 의를 미워하는 원수된 자로서 의로운 아벨을 죽인 자였습니다. (요일 3:12)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라도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예배가 안되고 할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택자를 불러 하나님 아버지께 나와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예배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예배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원한 특혜입니다.
창세기 4:20-22에 보면 뱀의 후손인 가인과 가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은 세상 문화를 주도하는 기업을 주시고 반면에 순교당한 아벨 대신에 주신 셋과 셋의 아들 에노스에게는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거룩한 기업을 주셨습니다. (창 4:25-26)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후손들에게는 세상 그 어떤 것도 기업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나라에 자녀된 권세와 여호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고백하며 예배로 하나님의 성호를 영광으로 부르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라는 것은 요즘처럼 하나님을 필요로 열심히 주여 주여 하다가 필요가 없거나 바쁜 다른 사정이 생기면 주를 부름은 뒤로 하고 딴 짓하는 것과는 본질이 다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별된 기업으로 주신 여호와 이름을 부르게 한 것은 성령에 의해서 하는 믿음의 고백적 부름과(고전12:3) 그 다음은 믿음의 생활, 즉 구원을 사는 삶의 전부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모여 함께 예배하게 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또한 로마서 12:1-2처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예배를 드림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이사다닐 때 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 이름을 불렀더라고 한 것입니다.
이사야 43:21에보면,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분명히 증거하심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어진 예배는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으로 주심이요 영원한 선물로서 구원의 삶의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1:4~6절을 보면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에 하나님의 구원의 기쁘신 목적이 교회로 영원히 구원의 하나님의 나라된 거룩한 삶으로 예배하게 하신 겁니다.
예배를 우리가 맘대로 형편 따라 바꾸고 문제가 생겼다고, 사정이 생겼다고 안하고 쉬고 해서 되겠습니까?
예배는 하고 안하고 우리의 권한이 아닙니다. 목사도 당회도 성도 전부가 원해도 예배는 고유의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의 영역이요 그 분께만 돌려지는 그 분이 찾으시는 영화로운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2:8에 보면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과 구주예수 그리스도는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말씀했습니다. (계4:11,5:12)
누가 주께서 받으시는 존귀하고 합당한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예배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시50:5)
우리가 분명 교회된 성도라면 이 말씀앞에 굴복하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의 도리와 예배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구원의 증거로 감사예배하게 부르신
그은혜의 영광을 져버려서는 안됩니다.
시편 100:2~4절에 보면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공예배가 무엇인지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밝혀 줍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하나님을 영화롭게 옳게 하는
예배는 하나님 찾으시는 존귀한 예배로서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구원을 사는 회복의 은혜를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린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분이 찾으시는 존귀하고 신령한 은혜의 공예배로 모임이 혹시 전염병이 옮는 해를 입는 것으로
여겨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이나 혹은 하나님제일 주권중심이 안되는 다수의 교회들의 말에 따라 구원의 영생을 사는 은혜의 예배를 경시하고 형편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들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질 구원의 예배를 어렵다고, 전염병이 돈다고, 주변에서 떠들고 비방한다고, 그것이 무서워서인지 그 방법이 옳다고 생각해서인지 주일 공예배를 폐하고 예배당 문닫고 현대 시스템의 편리함을 이용하여 온라인으로 예배관전한다고 자랑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 권면의 말씀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성일에 교회됨으로(건물이 아닌) 성령의 교통하심을 따라 예배의 부름에 한몸됨으로 모인 예배가 분명 공예배이고 가정예배는 공예배로 모였던 성도가 믿음의 생활로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사는 집에서 하는 가족예배인 것입니다.
그리고 병상에 있거나 어디에 갇혀있거나 도저히 불가능한 타처에 있거나 핍박이나 박해로 숨아 있는 극한의 상황이 아닌 편리위주의 그 어떤 방식의 예배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제일 중심이 아니라 어떤 이유가 되었던 우리 사정이나 형편중심으로 의도된 것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닝이 찾으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로서 성령이
진리가운대로 인도하시는 은혜가 있는 반면에 사람이 찾는 예배는
각자 기대하고 원하고 형편 사정따라
변동시켜 가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때론 어렵고 좀 힘들어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화롭고 경건한 예배로 돌아 갑시다!
거기에 구원을 믿음의 능력으로 그의 나라를 살아 가는 은혜와 평강이 살아 있습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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