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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젤린 이야기를 아십니까?
지금 미국이 아직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 아카지아 지방의 원시 숲을 등지고 프랑스 사람의 식민의 한 평화로운 농촌이 있었다. 그들은 거기서 평온과 만족 속에 크리스찬다운 살림을 짓고 있었다. 그 중에 에반젤린이라는 꽃다운 아가씨가 있어서 그 생김새로나 마음씨로나 마을에서 으뜸이요, 사람들로부터 마을의 자랑이라고 칭찬을 듣고 있었다. 그리하여 제각기 신랑이 되겠다는 많은 젊은이가 있는 중에서 특별히 튼튼하고 힘 있고 씩씩하고 대 곧은 대장장이 아들 가브리엘을 택해 약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즐거운 결혼식을 하려는 바로 전날 그 그랜드프레의 평화촌에는 갑자기 대낮에 벼락이 떨어졌다. 갑자기 난데없는 영국 군대가 항구로 올라와 마을 백성들을 모아 놓더니 하는 말이, 모든 가족을 다 데리고 이 촌으로부터 떠나가라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은 분개하여 겨뤄대려는 기세를 보였다. 노한 욕지거...리가 나오고 저주의 부르짖음이 일어났다. 그럴 때에 이것을 본 늙은 신부 펠리샨은 일어서서 마을 사람들을 보고 타일렀다. “40년 동안이나 자기가 하루같이 가르쳐 온 것을 돌이켜 생각해 보라.” 하면서 믿음으로 참고 순종할 것과,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아 위로를 얻을 것을 권면했다. 그 말에 감동하여 이 불행한 농민들은 도리어 눈물로 회개하고 대적을 위하여 그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비는 기도로 그리운 고향을 등지고 정처 없이 제각기 헤매임의 길을 떠났다. 에반젤린의 늙은 아버지는 떠날 때, 바닷가에서 기가 막혀서 아주 가버리고, 에발젤린 혼자 늙은 신부를 따라 배를 타고 떠났다. 어지러운 중에 서로 정신을 못 차리고 눈물로 갈라지니 가브리엘이 어디로 갔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그 사람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리 묻고 저리 물었으나 종시 알 길이 없었다. 가브리엘 편에서도 일단 남부 지방에 자리를 잡은 다음에 에반젤린을 찾으러 떠났으나 몇 해를 두고 찾아도 만나지 못했다. 서로서로 찾는 중에 한번은 제각기 탄 배가 서로 올라가거니 내려가거니 스치고 지나가면서도 그런 줄을 모르고 지나간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웬일인지 종내 만나지 못했다. 가브리엘의 집을 찾아갔더니 그는 또 자기를 찾으러 떠났다고 하므로 다시 길을 돌려 풍문에 들리는 대로 혹은 프레이리로 혹은 루이지에나로, 굶으며 헐벗으며 더듬으며 넘어지며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고 또 헤매었다. 그리 갔다 해서 일껏 찾아가면 바로 어제 떠났다 하고, 옴직 하다고 해서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못해 떠나면 바로 그 뒤로 오게 되고, 이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 마음속에 못 잊고 찾고 찾으면서 종시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한 때는 따를 사람이 없이 아름다웠던 에반젤린의 얼굴에도 한 오리 두 오리 그만 주름살이 생기고 늙음이 찾아오게 되니 일생을 두고 찾던 것도 이제 절망이 되고 말았다. 의탁할 곳도 없고 믿을 이도 없고 헤매어 다니다 못해 나중에는 델타웨어에 있는 퀘이커 교도의 촌 중에 가서 주저앉게 되었다. 절망으로 인하여 잠가지고 닫혔던 그의 마음도 이 믿음 깊고 서로 간격 없이 ‘너’ ‘나’로 부르는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 위로를 얻어 차차 빛을 보게 되었다. 땅 위에서 실패한 사랑은 비로소 저 세상을 봄으로 인하여 정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남은 생애를 자선에 쓰게 되었다. 그 때 마침 그 지방에 심한 열병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 에반젤린은 날마다 날마다 수용소에 메워 오는 그 환자를 간호하고 그 마지막 가는 눈을 감겨 주기에 바빴다. 그러던 중 하루 아침은 아침 햇빛에 빛나는 꽃이 하도 아름다움을 보고 불쌍한 사람의 마지막 눈에 그 아름다운 것으로 위로를 주자는 생각에 그것을 한 아름 꺾어 안고 병실을 들어섰다. 그때 문득 아침 광선에 비치어 바로 숨을 넘기려는 한 백발이 성성한 노인 환자의 얼굴에서 젊었을 때의 가브리엘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에반젤린은 꽃이 자기 손에서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달려가 “오, 사랑하는 가브리엘!” 하고 끌어안았다. 가브리엘은 떠돌아다니다가 사랑하는 사람은 종내 못 찾고 결국 거기까지 왔다가 열병에 걸렸던 것이다. 에반젤린을 보고 그는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이미 그럴 힘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려고 혀는 공연히 움직일 뿐이었지 소리를 내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가브리엘은 처음으로 또 마지막으로 숨이 넘어가는 그 입술에 사랑하는 사람의 키스를 받고 그 가슴에서 운명하였다. 모든 것이 끝났다. 모든 희망, 모든 기쁨, 슬픔, 고통이 다 끝이 났다. 에반젤린은 다시 한 번 더 죽은 애인의 얼굴을 가슴에 안으며 “아버지여, 감사하옵니다!” 하였다.
- 함석헌은 인류의 역사를 롱펠로우의 ‘에반젤린’과 같다고 하면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그 이야기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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