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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할 이유](시편 6편)
1. 사무친 울화
원수들이 미친듯 달려들어 괴롭히는 통에
억울하고 분하고 두렵고 슬픈 날들을
다윗은 보내고 있었다.
그때 다윗은 사무친 울화가 있었다.
사무친 울화로, 내 눈은 시력까지 흐려지고, 대적들 등쌀에 하도 울어서 눈이 침침합니다. (시6:7)
다윗이 위대한 신앙인인 이유는
거룩한 척 하거나 아프지 않은 척 하거나
화가 나지 않은 척 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고 드러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다윗어게 글과 시와 노래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좋은 도구들이었다.
심지어 사무친 울화와 울어서 눈이 침침한 것까지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드러내었는데,
이 모든 것이 다읫에게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과정이었다.
사무친 울화가 없어야 한다는 건,
또는 그걸 숨기고 억눌러야 한다는 건
신앙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건 외식에 빠지게 하고
회칠한 무덤이 되게 할 뿐이다.
속에 있는 사무친 울화까지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면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져 간다.
2. 뼈가 떨림
다윗은 뼈까지 떨려왔다.
자신이 아프고 병이 든 이유,
이렇게 슬픔과 고난 당하는 이유,
계속 원수에게 쫓기는 이유가
하나님이 버리심 때문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으리라.
주님, 내 기력이 쇠하였으니,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내 뼈가 마디마다 떨립니다. 주님, 나를 고쳐 주십시오. (시6:2)
진짜 두려움은 환경적인 아픔과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단순한 병 나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간절히 바라며 기도했다.
무엇이 진짜 두려운가가
그 사람의 신앙의 상태를 말해준다.
단순히 가난해지고 몸이 아프고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 같고
성공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건
신자의 두려움일 수 없다.
신자는 그 모든 고통의 때에
그 고통이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는 아닌지,
하나님이 자신을 외면해서 생긴 결과는 아닌지
돌아보며 하나님과 소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외면하실까봐
뻐까지 떨리는 자세가
신자의 참된 자세이리라.
3. 살아야 할 이유
죽을 것 같은 고통의 때를 보내면서도
다윗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죽어서는, 아무도 주님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스올에서, 누가 주님께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시6:5)
다윗은 죽고 싶지 않고 살고 싶었다.
그 이유는 하나넘을 찬양하고 싶어서였다.
죽으면 주를 찬양할 수가 없으므로
살아서 주의 영광을 노래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윗은 죽을 것 같고
죽는 게 더 편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서 버틸 수 있었다.
원수들의 괴롭힘으로 사무친 울화가 있고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하나님의 외면의 결과가 아닌가 두려워
뼈까지 떨럴 정도였으나,
다윗은 죽지 않고 버티고 견뎠다.
그 시간들이 지나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가 오길
너무나 기다리고 사모했기 때문이다.
살아서 하나님을 찬양할 날을 기다리기에
죽지 않고 버티고 견디는 것이
고통의 때에 신자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야 할 것이다.
4. 결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죽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견디며
주님과의 소통을 멈추지 않을 때
그 삶에는 어떤 결과가 주어질까?
악한 일을 하는 자들아, 모두 다 내게서 물러가거라. 주님께서 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 주셨다. (시6:8)/주님께서 내 탄원을 들어 주셨다. 주님께서 내 기도를 받아 주셨다. (시6:9)/내 원수가 모두 수치를 당하고, 벌벌 떠는구나. 낙담하며, 황급히 물러가는구나. (시6:10)/
주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탄원을 들어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원수가 수치를 당하고
벌벌 떨게 되는 것이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의 때에
다시 주를 찬양하는 삶이 되길 소망하며
버티고 견디며 하나님과의 소통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회복을 누리게 된다.
고통에 무너지는 이유는
고통의 때에 하나님과의 소통을 멈추기 때문이요,
주님을 다시 찬양하고자 하는 열망을 버리기 때문이다.
고통과 아픔의 때를 버리고 견디며
다시 회복을 누릴 비결은,
살아나야 할 이유를 올바르게 설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다시 기쁨으로 찬양하는 것이
신자가 살아나야 할,
이대로 죽을 수 없는 이유다.
5. 나는?
남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죄인이어서 괴로운데,
그래서 내가 당하고 있는 아픔과 슬픔과
끝없이 지치기만 하는 삶이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 아닐지 너무 두려운데,
나보다 더 죄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양심조차 없는 듯
대놓고 죄를 지으면서도 당당한 사람들을 보면서
한 가지 소원이 생겼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고
살아서 주를 찬양하고 싶었다.
'유별나게 예수 믿더니 완전히 망했구나'
라는 소리는 안 듣길,
살아나서 기쁘게 주를 찬양하는 삶이 되길 원했다.
그러나 살아나고 회복되는 삶이 무엇일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목사님들에게 묻고 싶었으나
그런 진지한 고민에 대해
진지하게 대답해줄 것 같은 목사님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교회는 어느새
그런 종류의 고민을 말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곳이 되어있었고,
그저 열심히 일하고 봉사만 해야 할 것 같은 곳이 되어 있었다.
사람에게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말씀 속으로 들어갔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기도 즉 하나님과의 소통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많은 시간을
그저 울고 또 울었다.
온 맘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고통스럽고 절망스런 나의 모습이 서러워서 울었고,
그런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말씀 속에서 발견하고
감사하고 기뻐서 울었다.
가족을 건사하며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선하지 않고 거룩하지 않고
그래서 하기 싫은 일이지만
할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너무 싫어서
서러워서 울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그 와중에 예수 믿는 것을 티낸다고
나를 타락시키려는 시도까지 만나서
억울하고 서럽고 울화가 치밀어
하나님께 그를 저주하는 말을 쏟아놓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서 주를 찬양하는 날,
다시 회복해서 마음껏 주를 전할 수 있는 날이
나의 인생에 오리라고는 사실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살고만 싶었다.
그대로 억울함과 두려움과 슬픔과
울화와 분노 속에서 죽어가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 상태에서는 벗어나
조금이라도 신자답게 살다 가고 싶었다.
그저 살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과 소통하는 것에 삶을 걸었을 뿐인데,
나는 지금 말도 안 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가슴이 터질 듯 온 맘으로 주를 찬송하고
매일 묵상하며 심장에 새겨진 은혜를
매주 설교를 통해 나누고 살아가고 있다.
매일 주님과 소통하는 기쁨과 감격을
놓치지 않는 삶을 복되게 살아갈 뿐 아니라
그 소통이 찬송이 되어,
나는 지금 살아서 주를 찬송하고 있다.
분명 죽어가던 나였다.
분명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던 삶이었다.
그대로 죽은 듯 먹고 살기 위해서만 살다가,
괴로움과 죄책감 속에서 먹고만 살아가다가
의미없어 죽어갈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살기 위해 말씀을 묵상했고
말씀이 이끄는대로 걸었을 뿐인데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었다.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기에
사역할 곳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운영하던 학원 교실에서
나를 따르는 학생들 몇명 모아놓고
예배할 수만 있어도 감사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지금 말쓰믈 사랑하는 분들이 모인
말씀의빛교회를 설교자로 섬기는 삶을,
그리고 말씀묵상 세미나를 통해
말씀의 사람을 세워가는 삶을
과분할 정도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내가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주님과 소통하는 것,
말씀을 통해 기쁨과 소망을 누려가는 것,
살아나고 회복되는 갈망을 가진 분들을
말씀으로 돕는 것,
그분들과 내가 함께 말씀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
그래서 함께 주를 온 맘으로 찬양하는 것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다.
살기 위해 말씀에 삶을 걸었을 뿐인데,
이런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이렇게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놀랍고 기쁘고 감격스런 아침이다.
윤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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