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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7: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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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9절-14절.
9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뒤따르던 무리 중에는 제자들도 있는데 이 말씀을 주님으로부터 들을 때에 제자들이 부끄럽지 않았을까? 이만한 믿음? 얼마만한 믿음? 이만한 믿음. 그 각자 해봐요. 어디 얼마만큼이 이만한 믿음인지? 그 자기 믿음이 돼요. 예, 이만한 믿음은 오래 되고 크고 강한 믿음이라는 말인데 이 믿음은 하루아침에 된 믿음은 아니더라. 하루아침에 된 믿음하고요 본질적으로 오래된 사건과 환경을 많이 겪은 그 믿음하고는 요건 천지차이가 돼요. 일을 충성봉사를 많이 했다. 그래서 이만한 믿음?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예, 이거를 거기다가 말을 하게 되면 주격, 믿음이라고 하는 다림줄이 달라져버려요. 기준이 달라져버려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인격적으로 믿어졌던 것이 틀림이 없다 그 말이요. 누가요? 본문에 누구요? 백부장.
6장에서도 예수님께서 가치판단 평가를 할 수 있는 은밀계시가 들어있는 자연계시를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뭔가 하니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부터 빼어라. 남의 눈 속의 티를 빼기 전에 그 말이요.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마음에 들어있는 것은 입으로 나온다.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집과 흙 위에 놓은 집의 그 결과를 말씀해 주셨어요.
그리고 이만한 믿음이란 겸손한 태도보다 자기의 종을 낫게 해주실 것을 믿는 것도 믿는 것이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영적 이치가 잘 들어맞는 예수님을 잘 아는 신의적 믿음에서 나온 신뢰적 믿음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이만한 믿음이라 그 말이요. 주님을 잘 알지 못하면 신뢰를 할 수가 없어요. ‘어떤 주님이냐’ 하는 것을 이제 그 6장에서 쭉 이치를 말씀해줬단 말이요. 그러니까 ‘이 백부장이 그 자리에 있었다. 없었다’ 그게 아니라 이게 계시적으로 백부장의 마음속에 이렇게 차곡 차곡 들어간 거라 그 말이요. 그걸 아시는 우리 주님이시더라 그 말이요.
그래서 우리 주님은 오늘 여기 오신 우리 교인들에게도 이만한 믿음. ‘너는 믿음이 요만큼밖에 안 되는구나. 너는 믿음이 더 크구나.’ ‘이만큼 더 크다’ 이렇게 보시는 우리 주님이시다 그 말이요. 그냥 하나님 앞에 주일날 예배하러 온다고 털래 털래 그런 마음을 갖지 마라. 주님은 자기를 판단하고 계신다. 그거 아마 잘 못 느낄 걸요? ‘오늘 주일이다. 교회 가자.’ ‘에이, 주일은 왜 이리 빨리 다가 오냐? 오늘 낮잠 자려고 했더니’ 뭐 이런 거.
주일날 되면 큰 걱정거리가 있는 사람이 있는데 무슨 말이냐? 다리가 아픈 사람은 전철계단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보통 걱정이 아니야. 교회 간다 그러면 그것부터 마음속에 덜커덕 들어오지요. 맞지요? 여기 이렇게 타고 올라가는 거 있어요? 여기는 그거 엘리베이터 없지요? 어떻게 좀 넣어 봐요. 엘리베이터. 아니면 ‘우리 궁극교인들이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보탤 테니까 같이 합시다’ 한 번 그래 봐요. 엘리베이터 하는데 그 얼마요? 얼마나 들어요? 유OO목사, 얼마나 들어? 몰라? 얼마 안 들 걸? 돈 만원이나 드나? 허허허. 어쨌든 참 돈이 있으면. 그런 것도 누구 일이냐? 우리 일이요. ‘시의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알겠어요? 그걸 우리가 해야 돼. 다 우리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이요. 그럼 이게 사회 무슨 복지개념이냐? 아니란 말이요. 어떤 면으로서든지 우리가 영원 궁극적인 신앙사상을 접목을 해야 돼. 그게 들어있다. 생각을 해봐요. 우리교인이 오는데 다리가 아프다면 그 뭐 시에다 대고 자꾸 말하면 해주면 고맙지만 안 해준다고 데모를 할 거요? 어쩔 거요? 그거 안 될 일이지.
겉으로 보기에는 이방인처럼 보이나. 누가요? 백부장이 겉으로 보기에는 이방인처럼 보인다. 신분적으로는 백부장이다. 백 명을 거느리는 군대장관이다. 사실은 영의 눈을 가지고 영적 면을 보았을 때에는 참 이스라엘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이 벌써 말씀을 뒤에 보면 하고 계셔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보다 이방인 믿음이 더 좋다는 말씀이 아니라 영적 참 이스라엘임을 전제로 한 말씀이더라. 이해가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여 회당도 지어주고 하나님 앞에 죄인 된 자신을 인정하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말씀을 믿는 신의적 믿음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사람을 직분만 보고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이방인으로서 군인으로서 군인월급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가만 보면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해서 회당도 지어주고 도와주고 여러 가지 면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 그 말이요. 그리고 백부장으로서 껄렁껄렁한 그런 사람을 자기 친구로 삼은 것이 아니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사귀었고 장로들을 사귀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신앙적인 어떤 그런 인격적인 면을 우리가 많이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교인이면서 군대월급보다도 충분하게 더 많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일이 무엇이 있나 한 번 생각해봐라 그 말이요. 물질이 있든 없든 언행심사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우리 주님이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예, 그런 걸 가만히 생각해봐요. 그게 다 우리의 이룰구원 면이다. 그게 다 자기의 의가 뿌려지고 선이 뿌려지고. 이것은 믿음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이 기억을 하고 계시는구나. 기억을 하고 계시는구나.
10절: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본문을 보면 나았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없습니다. 그렇지요? 언제 종이 고쳐졌을까? 그러면? 대화중에 아마도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을 때에 종이 건강하여지지 않았을까? 이것을 보면 꼭 선언을 해야 만이 낫는 것도 아니고, 주님과의 대화중에서나 또는 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또는 멀리서도 주님 당신이 알아서 고쳐주시고 알아서 찾아가시고 하시는구나. 이해갑니까? 이만한 믿음을 가졌다면.
그 가만 생각해봐요. 예, 이 사건에서 종은 주인의 믿음 때문에 나음을 받았으니 주인을 더 받들고, 주인은 또 종을 더 사랑하고. 왜? 모두 다 주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지요. 종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를 살려주려고 군인 백부장이 동원되었고 장로들이 동원되었고 백부장의 벗들이 동원되었고 신인양성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천국복음 인간구원 운동에 모두 하나로 수종이 들었구나. 종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 전부 동원을 시키셨구나.
이 일이 어찌 또 하루아침에 갑자기 된 일이더냐?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늘로부터 도성인신하신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고쳐주고 사람을 살리시는 그 마음이 어찌 세상 일반의사의 정신 마음을 가지고 하시는 마음이더냐? 천국의 뜻을 가지신 그 마음으로 하셨다 그 말이요. 예수 믿고 각종 병 고침을 받은 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늘의 뜻이 들어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병자뿐만 아니고 주님께서 자기를 예수 믿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너에게, 무슨 뜻? 세상 뜻이 들어있는 게 아니라 하늘의 뜻이 들어있다 그 말이요.
오늘날 이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주 정말 어떻게 욕심이 많고 자기 위주 자기 주관으로 되어있는지? 뭐든지 자기에게 달라는 거요. 뭐든지. 그럼 자기는 남에게 얼마나 줬나?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행했느냐 그 말이요.
문제. 백부장이라고 하는 사람의 뜻대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거냐? 또 하나, 종의 소원대로 병을 고쳐주신 거냐? 또 하나, 구원의 뜻대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거냐? 다르지요? 달라요. 어느 거요? 3번이요? 나열을 하니까 3번인지 알지 보통 보면 자기 쪽으로 자기 뜻에 맞춰서 자꾸 그러지 않던가? 이 성경대로 좀 해봐라. 성경대로.
병을 고쳐주신 뜻은? 첫째, 하나님의 온전한 인격과 성품과 영능의 실력으로 성장하라는 뜻이다? 두 번째, 병 고침을 받았으면 시간도 물질도 몸도 다 교회에 받치면서 충성봉사하면서 예수 믿어야 한다. 안 그러면 괘씸죄에 걸려 죽는다? 그 다음 세 번째, 병 고침을 받았으면 교회마다 간증하고 다니라는 말이다? 네 번째, 목사가 되어서, 의례히 병에서 나으면 목사가 거의 되더라고요. 어째 목사는 그런가 몰라. 어떻게. 목사가 되어서 병든 사람 고쳐주라는 뜻이다? 자, 정답은? 1번. 항상 정답은 끝에 있다고 내가 그랬는데? 허허허. 그러면 네 가지 쭉 나열해서 들어보니까 첫 번째로 간 겁니까, 첫 번째 듣자마자 다음 거는 들을 것 없이 들어간 겁니까?
그러면 자, 여기서 이 네 가지 문제 중에서 거짓종과 귀신의 집과 사단 마귀의 말은 몇 번입니까? 요거는 모를 거다. 이거. 몇 번? 몇 번? 예, 우리는 정답도 알아야 되지만 ‘엉터리 답을 어떤 사람이 가르쳐주고 있나’ 하는 그것도, 물론 정답을 바로 알고 있으면 그건 당장 분별이 돼요.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이용만 당하고 예수 헛 믿고 그냥 죽는 거냐? 아니요. 심판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
11절-12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지금 상여 메고 나오는 거지요? 이 11절과 12절의 내용을 보면 살리고 고치고 하는 예수님의 뒤를 제자들이 따르고, 무리들도 따르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 하늘나라 천국복음운동 영운동 생명운동 하는 제자들과 무리들, 생명 길 영생 길 좁은 길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 영능의 실력과 신령천국을 상속받는 제자들과 무리들, 만능의 능력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 그런 내용이 알차게 들어있는 예수님을 따르는 그 제자들과 무리들. 그 한 무리들이 쭉 가고 있단 말이요.
그런데 반대편에서는 어떤 무리들이 무엇을 따르고 있었지요? 모두 화장터 공동묘지로 가는 무리들이다. 맞잖아요? 과부의 아들 독자가 죽은 뒤를 따르는. 독자가 죽었단 말이요. 그러니까 상여가 앞에 나가고 부양꾼들은 뒤에서 따라오는 거거든. 부양꾼 알지요? 뒤를 따르는 무리들. 남편 죽은 과부의 뒤를 따르는 무리들. 남편도 죽고 독자도 죽고 울부짖는 과부의 뒤를 따르는 무리들. 맞지요? 과부는 자기의 기둥처럼 의지하고 기대하고 믿었던 남편이 죽었으니 의지도 죽었고, 남편을 의지했는데 의지도 죽었고 그 말이요. 건설도 죽었고 확장도 죽었고 행복도 죽은 셈이다. 누가? 알아서 생각해요?
하나밖에 없는 외독자 아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잔뜩 걸었는데, 성경에 보면 외독자가 많이 나와요. 외독자 가지신 분들 정신 바짝 차려. 자식이 많으면 하나쯤 죽어도 괜찮겠지? 그런 건 없나? 외독자 아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잔뜩 걸었는데 그 아들도 죽어버렸으니 생의 보람도 없고 앞으로 살아나갈 아무 건더기가 없어요. 생각을 해봐요. 무슨 희망이 있다고 살아갈 그럴 의욕이 있겠느냐? 눈물과 고통과 슬픔과 한숨만 남았습니다. 누구에게? 그 어느 누가 과부에게 희망과 소망을 안겨주고 그 통곡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어느 누가 할 수 있겠느냐? 과부의 일가친척들이? 벗들이? 인정정실에 이리저리 얽힌 사람들이?
죽은 남편을 내다버렸고, 이제 아들이 죽었는데 위로 한다고 몇 마디 하더니 죽은 아들을 공동묘지로 메고 가는구나. 버려. 버리려고. 죽은 아들은 키워준 정도 모르는지,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을 모르는지 성한 사람들에게 떠받들려서 이 죽은 송장이 죽은 자가 떠받들려서 묘지로 가고 있다. 이게 지금 우리 신앙의 이치를 가르쳐주고 있어요.
그런데 울부짖는 과부도 어느 날엔가 죽어 남편이 묻힌 곳 아들이 묻힌 그곳에 묻힐 것이다. 맞지요? 시체를 버린 그들도 그 이웃사람들 그들도 어느 날엔가 죽어 또 공동묘지로 가서 묻힐 것이다. 그들의 부귀와 명예와 존귀영광과 행복도 모든 삶의 활동은 묘지에 묻힐 죽음으로 가고 있구나. 전부는 죽음으로 가고 있구나. 이것이 한 인생의 한 폭의 그림이요, 이것이 해 아래서의 다 한 순간의 인생의 풍경인 겁니다. 세상의 것은 모두 다 해 아래의 것이요, 해 아래의 것은 모두 다 임시적이요 순간적인 것임을 알 수 있겠는가?
제발 살아있을 때에 선행과 의행을 뿌려놓고 죽어. 그게 인생 사는 보람이 나는 거요. 긁어모으기만 하고 차곡차곡 쌓아놓으면 더러운 소리 듣고 저주소리 듣고, 그럼 자식이 그게 행복한가? 아니요. 그 물질 때문에 망가질 수가 있어. 그 분명히 알아요. 사람답게 참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도록 이걸 가르쳐야지.
해 아래의 것은 다만 각자의 시간적인 차이일 뿐입니다. 세상의 영웅호걸 열사들 위인들도 다 한 순간이요. 다 한 순간이요. 마음 심성이 고와야 그게 참 살아갈수록 아름다움이 이렇게 감화성을 갖게 되지 모양 껍데기에다가 가치를 두면 갈수록 미워지는 거다. 미움을 받는단 말이요. 죽음 앞에서는 모두 버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불쌍하고 가련한 과부요 과부의 독자라도 죽음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구나.
지금 우리는 여기서 영적 면을 영원히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의 대열이 있고, 이 대열은 진리생명운동 천국복음운동 영원히 사람을 살리는 운동, 그 다음에 죽은 시체를 떠받들고 통곡을 하고 애곡을 하며 공동묘지로 가는 대열이 있다. 맞지요? 두 대열이 우리 앞에 지금 보이는 거요. 과부 쪽에는 한숨이요 고통이요 ‘앞날에 어떻게 살까’ 근심걱정이요, 지금 이 자리도 예수 믿고 있다면 ‘아, 이 사람은 과부의 대열, 죽은 아들의 대열 쪽을 마음을 갖고 있구나. 예수 믿어도.’ 이해 가요? 지금?
죽은 것을 따르는 그 대열은 예수님의 그 대열과는 정반대다. 근데 이것을 오늘날 자기는 아느냐, 모르느냐? 자기가 지금 어느 대열을 가고 있는지 자기가 아느냐, 모르느냐? 예수 믿는다고 그냥 ‘나도 예수 따르자’ 그게 아니요. 예수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갖고 있어. 그 예수님 따르는 거요. 세상을 따르면 늘 마음이 흔들리고 눈도 흔들리고 시간 따라 흔들리고 자기의 소원 목적도 자꾸 흔들리고.
자기들이 ‘지금 죽은 것을 따르고 있구나’ 하는 걸 이 과부의 대열 쪽에서는 알까요, 모를까요? 과부의 대열 쪽에서 ‘아, 우리들이 지금 죽은 것을 따르고 있구나’ 하는 그걸 알까요, 모를까요? 몰라요. 모르지. 그럼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과 이 무리들의 대열은 ‘아이고, 우리는 사는 쪽 대열을 따르고 있구나’ 그거 알아요, 몰라요? 모르지요? 모르지.
근데 우리가 보니까 사망과 생명 길이 있구나. 생명 쪽으로 사는 길이 있고 사망 쪽으로 사는 길이 있구나. 보입니까? 우리는 지금 볼 줄 알아야 돼요. 판단만 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느 쪽 대열에 가서 같이 가느냐? 이게 나와야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내가 지금 살리고 살리는 운동에 행진을 하고 있는 것을 잘 모른다. 가르쳐주면 이제 아는 거지. 산 대열과 죽은 대열을 알까? 교회도 마찬가지. 사는 살리는 교회가 있고 죽이는 교회가 있다.
세상 쪽으로 가게 되면 여기는 통곡이요, 이것은 죽은 대열이요. 선악과 먹으면 죽어요. 세상은 죽은 대열이고 죽는 대열이고 여기는 죽어가는 대열이다. 노선이란 말이요. 길이라 그 말이요. 예수님은 산 대열이고 살리는 행진이고. 만일 세상소원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는 죽은 대열이고 죽이는 행진이다. 그걸 알아야 된다. 여기서 살리는 대열과 죽은 대열을 자기는 알고 가야 돼요.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면을 보시고 불쌍히 여겼다 그 말이냐? 이 불쌍히 여긴다는 이것도 우리는 구별 분별을 해야 돼요. 자 첫째, 과부가 워낙 구성지게 슬피 우니까? 그 슬피 우는 사람의 우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 덩달아서 자기도 훌쩍훌쩍 그래요? 두 번째, 첫째는 뭐라고? 워낙 구성지게 슬피 우니까. 우는 것도 슬피 우는 게 있어요? 기쁘게 우는 것도 있나? 그것은 말이 안 되지. 슬피 우는 흉내 내보일 사람? ‘앙앙앙’ 하면 되나?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코를 훌쩍훌쩍 하면서? 눈물 날 때는 왜 콧물까지 나지? 그러니까 그 울 때 콧물까지 나니까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날려버려야지. 어떻게 하겠어. 남의 옷에 슬쩍 닦겠어? 그건 안 되잖아.
두 번째, 남편도 죽고 아이도 죽고 혼자서 살아갈 것을 생각을 하니 너무 불쌍해서? 예수님이 보실 때에 그런 생각으로 보셨느냐 그 말이요. 예수님이 보시는 불쌍한 게 뭐냐? 세 번째, 바람이 나서 돌아다닐 신세가 너무 불쌍할 것 같아서? 이제 뭐 바람이 나도 누가 걸릴게 없잖아요? 맞지요? 과부된 거 뭐 바람이 나서 제 멋대로 돌아다녀도 걸릴게 없잖아. 그래서 자식들 다 키워놓고 늙은 영감 죽고 그래놓으니 만고 심심하거든? 그러니까 묻지 마 관광을 가는 거요. 묻지 마 관광이 그렇게 좋은가 봐요. ‘누굴 잡고 춤을 추든 묻지 마라’ 그런 식. 묻지 마 관광은 하여튼 좋은 모양이요. 허허. ‘진짜인가’ 하고 실험을 할라. 네 번째, 사랑의 대상도 다 죽었고 의지의 대상도 다 죽었고 미래의 소망도 다 죽었기 때문에, 그리고 여자도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자, 여기서 예수님이 보시는 불쌍함은 어떤 건가요? 죽은 아이가 불쌍한 거요, 과부가 불쌍한 거요? 그것도 몰라? 그런데 이 과부입장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영적 면에서 사망 길로 가면 다 죽는 거요. 그 길로 가면 살아나오는 게 없어요. 전부는 공동묘지에 묻히는 거고 화장터로 들어가는 거요.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죽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 상여를 동원시키는 거요. 이 과부가 뭘 알겠느냐? 눈에 그저 보이는 현실적인 그것만 알 뿐이지. 영적 차원에서는 모른다.
그래서 가만 보면 아무리 아내와 남편이 있어도요 ‘저 사람 홀아비구나.’ 아내가 있어요. 남편이 있어도 ‘저 사람 과부구나’ 그렇게 산다 그 말이요. 말하자면 혼자 산다는 말의 의미보다도 이게 희망과 소망과 의지, 사람이 있는데도. 이건 일반적으로도 안 돼. 눈에 안 보이면 아예 모르겠지만 눈에 보이는 상태에서 그렇게 사니 이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안 그래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예, 부부도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식도 부모의 교육 없이 산다면 이건 고아와 같다. 그런 면도 볼 줄 알아야 돼요. 집에서 살고 있지만 애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자식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14절: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묘지로 관을 메고 가는 발길을 멈추게 하시고 죽은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하시는 분이 누구냐? 완전히 다 끊어진, ‘죽었다’ 그러면 이제 끝난 거요. 그런데 그 발길을 멈추게 하는, 그 대열의 길을 멈추게 하는 그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 맞습니까? 예수는 뭐요? 구원이요. 구원은 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역사가 자기에게 임한다고 하는 것은 이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의미요. 이제부터는 죽이는 일이 아니고 살리는 면으로 들어간다 그 말이요. 그게 예수 믿는 거다 그 말이요. ‘그냥 교회 나간다. 그냥 시간 땜 한다’ 그게 아니고. 교회의 무슨 프로그램, 뭐 찬양대회고 뭐 누구 사람 구경 오나?‘ 그런 게 아니란 말이요. 한 이치라도 자기가 깨달아가지고 자기가 생명 신앙의 노선으로 가는 사람이 돼야지.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거지.
예수님을 여기서 ‘주께서’ 라고 하시는 것은 주권을 말하는 겁니다. 살리고 죽이고 하는 그 주권을 말을 하는 거요. 얼마든지 죽은 것을 살리는 그 주권을 가지신 분이요, 그것을 성도에게 활용을 하시는 분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주시요 인간의 생명과 만물들의 생명의 창조자십니다. 우리 인간은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선악과를 먹은 후 사망 길 죽은 길 고통의 길 멸망의 길 심판의 길로 가는 우리 인간들이더라.
생명 길로 가는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후에 한 사람도 없어요. 전부는 사망 길. 사는 게 전부 다 죽는 거요. 하는 것마다 죽는 거요. 하늘나라 올라갈 쪽으로는 이건 아무 것도 없다 그 말이요. 그런데 왜 멸망을 받고 심판을 받는지? 왜 고통이 오는지? 왜 눈물이 오는지? 왜 그렇게 됐는지 원인도 알지 못한 채 ‘부귀와 명예와 존귀영광으로 고생 없이 살다가 가자’ 하는 그 차원으로 그냥 살고 있구나. 깨닫지 못하는 교인들도 전부 다 그렇게 살아가더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다 거짓이 아니고 참이라. 인류 역사 속에 오셔서 인간을 창조하신 원인 동기 목적을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게 예수님 당신으로 보여줬단 말이요. 당신으로 보여주면서 ‘너 인간을 이렇게 이런 목적으로 내가 지었다’ 하는 것을 당신이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었단 말이요. 역사적으로 보여주었고 부활승천으로 보여주었단 말이요. 그 놀라운 부활 승천을 보고 그 사실을 감격적으로 간직을 못 해.
죽음을 메고 가는 발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상여를 메고 공동묘지로 가고 있는데 이 발길을 멈추게 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을까? 부흥강사?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헤라클레스? 또 뭐요? 죄다 주워대 봐요. 인간 자기가 할 수 있지요? 할 수 있어서 그런 염려 걱정 안 해도 되지?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도 그렇게 살고 있는 거지?
오늘 날씨 따뜻하지요? 나가면 바람 불어도 창문 안에 있으면 햇살이 뜨거워가지고 더워요. 이 안에도 더운지 좀 졸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날씨 오늘 보니까 춘분이네. 맞아요? 달력 보니까 춘분이요. 이제 봄이라 그 말이지요. 그래, 인간 자기가 봄을 부른 거요? 무슨 말이냐? 내가 하는 말이? 어떤 사람이 상여 멘 발길을 멈추게 하느냐? 예, 임시성적이지만 가만히 보면 상여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어요. 어떤 사람이요? 돈 뜯어먹는 사람. 그 상여 앞에 종 가지고 ‘어허야.’ 동네사람들이 초상났다고 그럴라. 허허. 종 흔들면서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나는 가네. 나는 가네. 북망산천 나는 가네.’ 뒤에서 과부가 이제 훌쩍 훌쩍 우는 거지. ‘아이고 아이고’ 허허허.
예, 메고 가는 사람이 가려고 하는데 그거 하는 사람이 자꾸 돈 뜯으려고 다리 하나 건너가기 전에 다리 위에서 안 간다고 버티고 있어. 자기가 돈 뜯으려고 그러고 있거든. 가려고 하는 거 자꾸 이렇게 무마시켜요. 그래가지고 ‘다리가 아파서 못 가겠네’ 하면서. 자기는 상여 위에 들려 가는데 무슨 다리가 아프긴 다리가 아파. 돈 뜯을 작전이야. ‘동네어귀로 돌라. 그러면 이제 이제는 끝이다’ 하면서 거기 멈춰서 안 가려고 그래요. 죽었으면 빨리 빨리 갈 일이지 뭘 어디 가다 구멍가게 가서 뭐 사 먹으려고 그러나? 시체가?
요즘은 영구차 그거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몰라도 이게 도로에서 순경들이 붙잡는다며? 난 못 봤지만 그 소리는 들었어. 왜 붙잡느냐? 돈 뜯는 거야. 그리고 운전수도 ‘힘들어서 못 가겠다.’ 힘들어서 못 가겠대요. ‘그래? 나와라. 내가 운전하고 가자.’ 순경이 딱 붙잡으면 안 줘버려. 못 가게 하면 ‘관 내려놔. 거기다가 당신이 좀 치우시오.’ 사진 다 찍어놓고.
그 이제 공동묘지 가면 옛날에는 삽을 가지고 다 팠어요. 지금은 웬만하면 포크레인 가지고 다 퍼버려. 금방 돼. 그 파다말고 또 힘들어서 못 파겠다. 아니, 파는 건 포크레인이 파지. 포크레인이 말하나? 인간 지가 말하는 거지. 힘들어서 못 파겠다. 그 가만 내버려둬. 차에 싣고 그냥 내려버려. 포크레인한테 ‘송장 내려놓고 당신이 알아서 묻어라.’ 정말 참 그 또 뭐요? 공원묘지 같은데 송장 하나 들어오면 삽하고 괭이하고 갖고 가서 이제 일하는 사람 대여섯 명이 있어. 파가지고 끌어 묻는다. 끌어 묻고 가운데다 나무 하나 세워가지고 거기다가 줄을 대여섯 개 매가지고 흙 부어가지고 이제 돌고 한단 말이요. 돈 안 주면 힘들어서 그것도 안 한다고 그래요. 돈 달라 그 말이지.
참말로 더러워요. 더러운 세상이요. 죽은 마당에 죽은 것도 원통한데 그것까지 뜯어먹는 이게 참 더러운 놈들이요. 정말 이게 세상은 그래요. 상여 앞에서 소리치는 사람이 다리 하나 건널 때마다 죽은 송장이 다리 아파 못 가겠다는 식으로 하면 또 상여 줄에 돈을 매달아주고, 운구차도 힘들어서 못 가겠다고 돈을 뜯어먹어야 차도 잘 굴러가는 모양이야.
그럼 예수님도 돈 뜯어먹으려고 상여 앞에서 상여를 세웠지요? 예수께서 상여를 멈추게 할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까? 그 어떤 이방종교나 도인이 상여를 멈추게 할 자격이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멈추게 할 수도 있고 가게도 할 수도 있고 있으시지만 다른 사람은 그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할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고 주권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이 예수님은 그런 권이 있고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구약성경에도 법궤를 메고 요단강물에 들어섰을 때에, 요단강물이 어디로 흘러요? 헐몬산에서 아마 흐르지? 갈릴리로 해서 이렇게 쭉 흘러가면 헐몬산에 눈이 있으니까 눈이 녹아서 갈릴리 호수로 들어와서 갈릴리 호수에서 소금을 받아 염해로 들어간단 말이요. 그러니까 그 안에 들어가면 다 죽는 거요. 그 참 하나님께서 어찌 그리 참 이치를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는지? 요단강물에 씻겨 내려가면 다 죽는 거요. 근데 법궤를 메고 딱 들어서니까 요단강물이 딱 정지가 됩니까? 죽음을 멈추는구나. 그런 의미가 들어있어.
그리고 우리 목사님들도 앞으로 교회하실 때에 설교 속에 죽음을 멈추는 이치를 가르쳐줘야지. 그 생명이 있어. ‘예수 믿어 복 받아라’ 절대로 그런 짓 하지 마. 죽을 복이요.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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