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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7:2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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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23절-28절.
23절: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아까 나중 말에 제일 실족되기 쉬운 사람이 누구라? 세례요한. 그런데 고 해석을 그렇게 하면 그건 안 돼요. 일반사람이 볼 때도 세례요한이 제일 실족하기 좋겠다. 일반사람이 볼 때도 그렇고, 교인들이 볼 때도 일반사람들의 해석을 취하게 되면 그 지식의 차원이 일반 눈을 가진 일반지식의 차원으로 돼버려요. 성경은 그런 뜻이냐? 그건 아니에요. 항상 우리의 이룰구원은 하나님 앞에서 기준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기준은 영적 차원이 되는 겁니다. 신학자들이 해석하는 것이 일반인들하고 같으면 이건 아니에요. 아니라고 일단은 때려야 돼요.
자, 그래서 우리입장에서 이룰구원 차원에서 성경해석을 생각해보는 겁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세례요한을 보았을 때에 세례요한은 사명을 다 했습니까, 못했습니까? 사명을 다 했어요. 그러면 세례요한의 사명은 뭐지요? 예수님을 오심에 ‘저 분이 메시아다. 오실 그 이가 바로 저 분이다’ 여기까지 딱 되는 거요. 그걸 아셔야 돼요.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저 분이 예수님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세례요한을 따르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야 되는 거예요. 역사적으로 그렇단 말이요. 그 다음에 은밀계시적으로는 나중에 말씀을 드리기로 하고.
세례요한은 사명을 다했습니다. 선지자들보다도 나은 자로서. 예, 나은 자로서. 어떤 면에 나은 자라 그랬어요? ‘선지자들보다 나은 자로서’ 이 말씀을 드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칭찬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누가 칭찬을 했죠? 예수님이 칭찬을 했단 말이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실족된 사람이라는 이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에게는. 일반사람들이 그렇게 볼는지 모르지만. 무슨 일을 하다가 다쳐놓으면 ‘내가 당신의 집의 일을 하다가 이렇게 다쳤는데 왜 나를 안 도와줍니까?’ 그건 일반생각. 세례요한을 주님께서 앞서 보냈는데 주님을 증거하다가 이게 감옥에 이제 갇혀져 버렸는데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일반생각을 가진다면 ‘왜 나를 안 도와주십니까’ 그렇게 말할 법도 하거든요? 그건 일반생각이다. 성경을 몰라도 그건 일반생각.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리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한 이 말은 온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있다는 이 메시아에게 초점을 맞춘 세례요한의 의도성이라고 한다면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세례요한에게 전해줄 때에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제자들의 소리를 듣고 안심이 되었을까요, 걱정이 됐을까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면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 물었을 때에 그 때 마침 많은 병자들이 왔단 말이요. 그거 다 고쳐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지요? ‘죽은 자가 살아나며 병든 자를 고치며’ 그 얘기를 쭉 해줬단 말이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 가서 그 말을 쭉 했단 말이요.
그랬을 때에 세례요한이 그 소리를 들을 때에 ‘왜 나를 감옥 속에서 안 끄집어 내주냐’ 그런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온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바로 그 분이로구나’ 하고 안심이 되었는지 그 말이요? 어느 쪽이요? 이제 알아듣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을 보라는 거요. 일반해석으로 들어가면 그냥 일반적으로 그저 이해가 될는지 모르지만 성경의 뜻은 안 그렇단 말이요. 그게 이해가 된다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란 말이요. 본인들은 그냥 하는 말대답하는 말 같아도 그게 성령님의 역사로서 깨달아지는 거지.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일반해석으로 들어갈 때에 성령의 감화를 받는 그 깨달음은 그 소리는 안 들어오는 거요. 이게 안 들어오는 거요. 틀렸다 그 말이요. 예, 이제 보면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요한이 실족될 가능성이 많다는 그 점에서는 이제 실족 안 되는 거지요? 세례요한은 실족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제자들 쪽으로 가서 한 번 우리가 생각을 해보자. ‘누구든지’ 그랬으니까.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실족될 가능성이 있겠구나’ 그렇게 또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 만능의 능력을 가지고 세례요한을 옥에서 건져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또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만능의 능력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봤거든? 그러니까 세례요한을 건져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만능의 능력만 자랑을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당시의 예수님의 제자들과 따르던 무리들도 같은 생각이라면 요것은 ‘누구든지’ 하는 거기에는 실족의 대상이 들어가 버리는 거다. 고 생각이 그렇게 들어갔다면 그렇게 들어갈 가능성이 많다 그 말이요. 이제.
그리고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인간생각 육신의 생각으로 믿는다면 전부는 예수님과 떨어져있는 실족 상태가 돼버리는 거다. 이건 질이 그렇다. 만능의 능력을 가지고 자기 일 도와달라면 이건 전부는 실족 상태다 그 말이요. 예수 믿으면서 예수이름을 가지고 자기는 넘어져있다 그 말이요. 이해됐습니까?
24절-25절: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지형적으로 광야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거칠고 넓은 험악한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풀밭에 독사들도 많고 전갈도 있고 맹수들도 많이 사는 곳입니다. 비유적으로 광야를 말하자면 사람이 살기 험난하고 고통스럽고 저주받은 이 세상을 광야라 그렇게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지금 광야에요. 이 세상은 광야라고요. 왜 광야라고 붙이지요? 이 세상은 사람 살기 힘든 곳이다 그 말이요. 그런 면에서 천국보다 살기 힘든 곳이다 그 말이요.
뭐 젊은이들이야 뭐 실감 안 나지. 이제 시집장가 가서 애들 낳고 애들 깽깽거리면 ‘아이고, 괜히 결혼했나보다’ 이러고, 아내와 남편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이제 거짓말도 실실해가면서. 안 그럴 거 같아요? 세상법정에서 자꾸 오라 가라 그러고, 배가 고프면 도둑질하면 자꾸 감옥에 들락날락하면 참 그 살기가 피곤한 거요. 자기 얼굴이 세상에 다 알려지면 어디 가서 일도 안 돼요. 그게 인간의 세상이라. 그게. 예수 믿으면서 정신을 바짝 차려라. 오늘 못 깨달으면 내일 깨달아지느냐? 안 돼요.
역사계시인 성경에 보면, 성경은 역사계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려면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법궤를 모시고 짊어지고 거칠고 험한 광야를 장막생활을 해가면서, 장막은 뜯어서 옮기기 쉽지요. 해가면서 필연적으로 거쳐 가야 할 세상입니다. 그걸 아셔야 돼요. 법궤가 어디로 가느냐? 장막이면 텐트 아니요? 그러니까 얼른 뜯어서 뒤로 가기가 쉽단 말이요.
그리고 집을 가진 분들도 자기가 어느 교회로 나가던 정말 다 돌아다녀보고 ‘그래도 아무데 교회가 제일 낫구나’ 그러면 그 주위로 이사를 가세요. 그게 옳은 거요. 옳은 거. 알겠어요? 옳은 거요. 옳은 거. 멀리 이사를 가면 이게 쉬운 거냐? 참 어려운 거다. 그나마도 시대가 발전해서 차들이 왔다 갔다 하니까 그렇지. 자기가 이를테면 집을 하나 딱 사놓고 언제든지 거기서 살겠다? 그건 어려워요. 우리입장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움직여야 돼.
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면 어느 한 고을에 같은 종씨들이 있으면 발전이 안 돼요. 절대로 발전 안 돼요. 그런 데를 탈피해야 돼요. 그런데는 만날 보고 듣고 하는 게 외지의 것이 없기 때문에 같은 종씨끼리 돼놓으니 여기서는 족보 따지지, 무슨 새파란 애보고 할아버지뻘 된다느니 맨 이런 걸 따지기 때문에 골치 아파요. 그거. 옛날 뭘 붙여가면서. 그거 정말 골치 아파요. 정말 골치 아파. 우리 한국은 부모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또 뭐가 있어요? 아비도 있고 엄마도 있고. 웬 용어가 그렇게 많은지. 외국사람들은 용어가 몇 개 안 돼. 참 힘들어.
법궤를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시고 거칠고 험한 광야생활을 장막생활을 하면서 필연적으로 거쳐 가야 한다. 우리의 세상생활이 그렇단 말이요. 사십 년 동안을 그렇게 거쳐 갔지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광야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에서 말씀하고 계시지요. 광야교회는 반드시 이 말씀이 중심이 딱 돼 있어야 된다. 하나님의 법궤다. 원리원칙 중심 총 집결되는 정신 사상이 그렇게 들어가 있어야 된다. 그것이 없으면 법궤가 없으면, 구약시대에 법궤가 없으면 성전이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 된다. 이걸 좁혀서 얘기해 보면 우리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중심 사상은 이룰구원이 들어있어요. 없으면 그거 안 돼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면 자기 속에 시대나 환경이나 어느 처소에서도 변질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서 기준으로 딱 들어있어야 돼. 그럼으로써 자기 몸은 전이에요. 하나님이 계시는 주님이 계시는 전으로 들어가는 거요.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 늘 세상 것을 달라고 그러고 세상이 주인이 돼 있고 들어있으면 그 사람 몸은 전이 아니라 그 말이요.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는 안 계신다 그 말이요. 이해됐어요? 그럼 마귀의 귀신의 시험이 그저 들쑥날쑥 하는 거지. 보면 알지요. 신앙생활 하는 거 보면 ‘어떤 정신을 가졌구나’ 알지 왜 몰라. 신령천국에 들어갈 때 까지 광야교회 생활입니다. 주님 앞에 불림을 받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 이 땅에서 광야교회 생활이다.
그럼 광야교회 생활에서 어떻게 만날 헌금만 내고 예배만 올리고 그거요? 아니요. 그거 아니다. 반드시 광야교회 생활에서 영능의 실력 믿음실력 신앙의 실력을 닦아야 한다. 말씀의 이치를 깨닫고 교회 안에서 서로 봉사하고 서로 사랑하고, 그 정신 사상가지고 교회 밖에서 일상생활 하면서 써먹고 그렇게 나가야지. 교회를 수 년 수십 년 다녀도 이게 그냥 사람이 하나도 안 만들어져서 목사가 조금 뭐라 그러면 그냥 이게 없는 사람은 없다고 비껴 나가고, 있는 사람은 물질봉사 하다가 또 자기 마음에 거슬림을 받거든. 그럼 이게 비껴나가고. 그럼 사람이 언제 될 거요? 잘 하겠다고? 신앙실력을 닦아야 한다. 예, 지혜지식이 자라고 성장성이 사람 앞에 아름답게 나타나 보이고.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나갔더냐? 화려하게 입고 사치하는 사람은 왕궁에 있다.’ 이 본문으로 보면 백성들이 광야로 나간 것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꼭 주님을 만나보고 가야 할 그 길을 가르쳐주는 세례요한을 만나러 간 것이지요. 이 본문을 가만히 보면 그렇지요? 맞지요? 틀렸어요? 광야에 나가서 보니까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입은 의복이 사치했습니까? 사치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어요. 사치 안 했어요. 광야에서 입은 옷이 사치 안 했어요. 약대털옷을 입었다 그랬지요? 그러니까 이게 가만 보면 ‘이게 밍크다. 어쨌다. 비단옷이다’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고 광야에서 생활하기에 제일 편한 옷이고 활동하기에 제일 편하게 입었구나. 그런 느낌이 들어요. 말의 의도성을 잘 알아들어야 돼요. 부드럽고 펄럭거리는 옷에다가 귀걸이 코걸이 배꼽 피어싱도 했습니까? 세례요한이?
혹시 젊은이들, 배꼽 피어싱 했어요? 배꼽 함부로 건들지 말아요. 배꼽에 철물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죽으려고 그러는 거요. 참말로 이게 바른 정신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례요한 손가락 마디마다 다이아 반지 끼었고, 머리에다가 노랑물 빨강물 파랑물 칠했습니까? 요단강 근처에다가 호화스런 별장을 지어 기름진 진수성찬으로 무녀들을 데려다가 풍악을 울리면서 호화로이 살았습니까? 말하자면 그런 거 보려고 광야에 나간 것이냐? 그 때 당시.
세례요한의 의복은 다른 곳에 보면 약대털옷을 입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어요. 이게 지금 무슨 말이냐?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약대털옷은 광야생활에 적합하게 입었다는 말이요,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생활 하는데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양식이었다 그 말이요. 자연으로 통해서 주시는 양식이었다 그 말이요. 자연양식이라 그 말이요. 메뚜기와 석청을 꼭 고집할 필요는 없고 통틀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연적인 양식.
그래, 그렇게 살면서 이 세례요한이 원망과 불평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뭐도 안 해주고 뭐도 안 해주고’ 그런 불평이 있었느냐고요? 왜냐하면 광야생활에는 당연한 거다. 그게. 당연한 생활이다. 그거는. 맞잖아요? 그러나 헤롯 궁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헤롯궁의 정신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날도 죽었다가 깨어나도 세례요한의 그 생활 정신이 이해가 안 되는 거요.
이 세상은 광야생활이다. 광야교회 생활이다. 기독교인들이 이걸 모르면 세례요한의 그 정신 사상을 모르는 거요. 알 리가 없다. 만날 원망불평이고. 하나님의 말씀통치를 받는 백성들은 충분하게 이해가 되는 생활입니다. 깨닫지 못한 교인들은 광야교회에서 사치하게 살고 파서 하나님보고 자기 기도 들어달라고 조르고 있지요. 헤롯의 정신 사상으로 가르치는 목사도 많고 또 그렇게 사는 교회도 많아요.
광야교회에서 헤롯궁의 생활을 원하면 안 되지요. 그런 생활을 원한다면 그런 곳으로 가야지요. 그런 곳으로 가라. 그런 생활을 원한다면. ‘진리가 좋사오니’ 하고 광야교회로 나왔으면 영인성장과 영능의 실력과 영모의 미모성을 하나님의 온전한 인격과 성품으로 자기의 존귀영광을 만들어 가야지요. 비 맞은 소똥처럼 산다면 참 사람 노릇을 언제 하겠느냐? 언제 만들어지겠느냐? 밥만 먹고 살면 참 사람이 됩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광야로 나가면 갈대 많지요? 갈대밭으로 바람 내리 불면 한 쪽으로 쓰러지면서 참 멋있게 보이지. 또 반대쪽으로 불면 반대쪽으로 쓰러지면서. 세례요한이 그렇게 살았느냐 그 말이요. 오늘날 우리는 어떠냐 그 말이요. 우리교인들이 그런 사람 구경 나왔느냐 그 말이요. 말하자면 인간 나는 세상이라는 이 광야에 왜 태어났느냐 그 말이요. 뭘 보려고 태어났느냐 그 말이요. 왕궁생활하려고 태어난 것입니까? 세상풍조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인생으로 살려고 나왔느냐 그 말이요. 세례요한은 자기부터 먼저 광야생활을 하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그 증거를 하는 인생입니다. 참 멋있고 가치 있는 삶이요. 정말 멋있고 가치 있는 삶이요.
26절: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으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만나고 신령천국 하늘나라로 가야지. 안 그런가 그 말이요. 광야 같은 세상에 왜 태어났으며 광야교회는 왜 다니느냐? 세상부자 되게 해달라고 다닙니까?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는 이방종교에서 소원하는 세상 것을 소원 목적 그걸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되게 만드는 그 가르침입니다. 세상부자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세상부자에게 가서 돈을 버는 방법을 배워야지요. 안 그래요? 광야교회는 그런 것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광야교회는 자기의 세상명예와 영광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고 인간 자기 종교적 그룹을 키우는 곳도 아닙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찾고 있지요? 벽에 붙은 십자가, 가운 입은 찬양대, 자기 노후대책 세울 교회를 찾습니까? 큰 교회는 왜 찾는 거요? 큰 교회는 왜 찾아? 무슨 꿍꿍이로 교회 다니느냐?
선지자는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되어질 사람에게 되어질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보다 나은 자가 또 무엇이냐?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그랬어. 그럼 어떤 사람이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인가 그 말이요. 성경대로 보면 누구지요? 세례요한. 누가 이 말씀을 했지요? 예수님이. 예수님이 누굴 지칭해서 하는 말이지요? 세례요한. 자, 그래서 그 답은 27절에 나옵니다.
27절: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그게 누구라고? 세례요한. 어째서 그럴까? 역사계시로는 세례요한을 분명히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와서 요단강 근처에서 살면서 세례 주는 일을 하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백성들이 잘 영접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는 그 말씀에서 오늘날 광야교회의 참 종들의 신앙사상을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27절에 ‘기록된바’ 그랬단 말이요. 기록된바. 무엇이 어떻게 기록된 것이냐?
‘보라. 내가, 주님이 내 사자를.’ 당신의 사자를 누구 앞에 보낸다? 네 앞에 보낸다. 인간이라고 하는 네 앞에 보낸다.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인간 내 앞으로 보내신다는 거요. 내 앞으로. 내 앞에. 왜 내 앞으로 보내느냐? 내가 누군데, 인간 내가 누군데 왜 그 분을 내 앞에 보내느냐 그 말이요. 내가 누구지요? 모두 내가 누구요? 어느 날 한참 됐지만 방송에 ‘내가 누구냐 하면 나는 곰이다’ 그렇게 한참 떠들더니 요새는 다 기어들어갔어. 본인들이 다 누구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는 또 뭐요? 신령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 그래서 나의 길을 알게 해주러 온 겁니다.
나의 길, 사람 사는 길, 어떻게 사는 길, 도, 말씀, 언행심사, 인간이 지어진 목적, 네가 지어진 목적, 사는 정신 사상, 그리고 소원 목적, ‘네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된다’ 하는 방향설정. 이런 것을 알려주고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지요.
누가 보냈다고요? 하나님이. 역사적으로는 누구지요? 세례요한. 계시적으로는 오늘날 목사님들. 질을 두고 말하는 거요. 아무 목사가 아니다. 그건 어째서 그러냐? 광야에서 살지 않고 헤롯 궁에서 사는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건 아니란 말이요. 이해가십니까? 그 면에? 어렵나? 역사를 통해서 정신면으로 이렇게 끌고 들어오는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그렇게 가르쳐주는 그 자, 그렇게 가르쳐 주는 바로 그 사람 그 말이요. 역사적으로는 세례요한, 계시적으로는 그 정신 사상으로 가르쳐주는 바로 그 사람, 그 목자, 그 전도사, 그 선생.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자라고 그렇게 성경에 기록해 놓았다고 하는 뜻으로서 예수님이 말씀을 해 주셨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기록된바’ 하는 거예요. ‘그렇게 기록이 돼 있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란 말이요. 역사적으로는 세례요한, 교훈적으로는 그 사상을 가진 바로 이 사람이 네 앞에 보내진 사람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보냈다 그 말이요. 당신의 참 종이다 그 말이요. 쉽게 말해서.
근데 그 면에서 신앙의 정신 사상 면에서 진하게 느낄 줄 모르니까 말하자면 들어먹나? 안 들어먹어. 말속에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누구의 말이냐’ 이걸 잘 알아야 되겠는데 그냥 소리 말 그렇게만 알면 이거 큰 코 다치는 거다. 이게 지금.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누구의 말이지요? 역사에서? 세례요한은 누가 보냈어요? 주님이 보냈으니까 세례요한이 말하는 것은 그 주님의 말로 들어가 있단 말이요. 그게. 오늘날도 어느 교회 목사님이던 세례요한이 말한 그 속에 세례요한의 그 정신 사상이 들어있다고 하는 것은 이건 주님이 보내신 사자란 말이요. 이게. 그런데 사람의 말로 알아듣고 개떡같이 알아먹어?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그 모양이지. 가정에서도 옳은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 자식이 뭐가 되겠어요? 딴 데 가면 사람노릇 하겠어요? 딴 어른의 말씀을 바로 알아듣겠어요? 막 돼먹은 거지. 이제. 사람대우 받겠어요?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믿음이 좋고 나쁘고 그걸 떠나서 기본적으로 그 자세가 틀려먹어 있으면 언제 신앙이 자라요? 에미 애비가 그 모양이면 나오는 자식도 이건 틀림없어. 따라가게 돼있어. 그걸 몰라? 그러면서 어른행세는 더하려고 그러지. 모든 세상만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는데 하나님이 자기 마음을 모를 줄 알아요?
새 엄마들, 자기 뱃속에 어린 아기 누가 생기게 한 거요? 남편이 생기게 한 거요? 남편 닮으면 좋겠어요? 주님 닮고 하나님 닮아야지.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지. 아무리 부부라도 자식 안 주면 그건 안 돼. 안 되더라고. 못된 자식 낳고 원수처럼 키울 바에야 없는 것이 낫지. 차라리. 안 그래요? 그런 면에서 보면 자식 없는 것도 참 복이요. 정말 복이요. 자식이 없으면 하나님께 정신 마음 모든 소원 목적을 두지만 이 개떡 같은 막 돼먹은 자식이 있으면 부모가 죽을 때까지 원수고 골치 썩고 부모 속에 속병 다 들어. 부모 속에 속병 들어놓고 ‘아이고, 자식 낳아서 잘되겠다. 행복하겠다. 이제? 자식 낳고서도 애를 탱탱 먹여. 듣기 싫으면 교회 안 나올 거고. 누가 그런 말을 해 주겠어?
자, 이제 우리 본인들 자신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보다 나은 자를 찾아야 할 거다. 그래야만이 다음 구절에서 신령천국에서 큰 자로 나오게 돼 있어. 원리가. 또 어느 교회 목사이던 누가 자기를 교회에 보냈으면 목사입장에서 또 어느 교회 교인이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교인 내가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를 찾았는지 생각들을 하고 믿어야 된다.
왜 이렇게 성경을 써놓고, 주님이 하늘로부터 오셔서 말씀을 하시는가? 내 존재라는 게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 그 말이요. 하찮은 사람인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사람인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게 찾아오시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 해당 안 되면 마음대로 살아요. 교회 안 나와도 되고 딴 데 가서 예수는 믿으세요. ‘예수 믿지 말라’ 그러면 그건 안 되니까.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복덕방이 아니며 심판과 형벌이 따르고 있다고 하는 것을 명심해야 된다. 그러니까 두렵고 떨린다 그 말이요. 두렵고 떨리는 일이라. 이게 지금.
28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참 하나 하나 새겨듣지 아니하면 참 힘들어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 문제 1. 세례요한이 신체적으로 세계에서 제일 큰 거인이란 말이다? 여자가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을 큰 거인을 낳았다. 그런 면에서 맞아요, 틀려요? 틀려요? 두 번째 문제. 헤롯에게 순교를 당했기 때문에 큰 것이다? 요건? 아니다. 세 번째 문제. 요단강가에 별장 같은 큰 기도원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건 귀머거리도 알아듣겠다. 허허. 네 번째 문제. 선지자들보다 더 큰일을 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죽음의 강 요단강 건너기 전 요단강 근처에서 광야신앙으로 나오게 하여 세례를 주었고, 백성들이 예수님을 쉽게 영접할 수 있도록 길을 닦았다는 점에서 큰 자이다. 맞아요, 틀려요? 맞아요? 확실해요? 목이 달아나도? 확실해요. 확실히 네 번째 말이 맞는 거 같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말이 길기 때문에. 허허. 맞습니다. 그 속에 뜻이 들어있는데. 무슨 말인가 하니 그러나 뒤집어 놓는단 말이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 세례요한보다 크다. 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상당히 어지러워요. 이 말을 말 그대로 보면서 이치를 한 번 생각해보자. 어렵기 때문에 말 그대로 보면서 하나 하나 또 이치를 따져보자 그 말이요. 자 첫째, 하나님의 나라를 붙잡은 자가 크다? 이렇게 되면 그러면 세례요한은 안 붙잡았다는 그 말이냐? 하나님의 나라를 안 붙잡았다는 그 말이냐? 그건 아니지요. 그건 아닙니다. 자 그러면 두 번째,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간 자는 크다’ 그랬으니까 저보다 크다? 그러니까 커지려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면 된다? 맞아요, 틀려요?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면 된다는 말이 지금이라도 죽으면 된다. 그러면 큰 자다. 되는 거요? 안 된다. 그것도 아닌 거 같고. 세 번째, 질적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것을 붙잡으면 된다? 맞아요, 틀려요?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약간 비스듬한 데가 많지요.
자, 그러면 좀 더 아주 똑떨어지게. 이제 몇 번째죠? 네 번째. 항상 정답은 끝에 있지요? 지금 여기서 하나 둘 셋 넷, 4번까지 왔는데 내용면을 봐서 이제 하나밖에 없겠구나. 그럼 똑떨어지는 말은 거기 있는 것이 분명하지요? 허허허. 자 네 번째, 여러 말할 것 없다. 세례요한보다 큰 것을 잡으면 크다? 맞아요, 틀려요? 이게 똑떨어지는 말인데. 그러니까 그 말씀에 해석을 조금 더 붙일게요. 세례요한을 붙잡으면 작고 예수님을 잡으면 크다. 허허허. 그건 맞습니까? 확실해요?
그러니까 이 말의 뜻은 광야의 종을 만났으면 그 가르침 끝에 요한이 말하는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붙잡아라, 놓쳐버려라? 붙잡아라. 그러니까 진리 자체화가 된 것을 천국에서 알아준다는 말이지요. 그 분을, 예수님을 붙잡으면 진리 자체화가 들어가는 건데 그것을 천국에서 알아준다 그 말이요. 꼭 필히 전제할 조건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세례요한을, 선지자들보다 더 큰 역할을 하는 세례요한을 만나지 못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 세례요한의 사상을 만나야 이룰구원의 이치의 주님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연결이 들어간단 말이요.
세례요한을 경유하여 예수님을 만난 자들이 세례요한을 보고 ‘천국에서는 예수님을 만난 나보다 작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 지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요? 지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요 지금?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었지요? 못 알아들은 거지요? 알아들었어요? 내가 점심을 두 그릇이나 먹어야 이게. 못 알아먹었지요? 방금 한 말 못 알아들었지요? 뭐 이런 사람들이 있나? 아니, 솔직히 못 알아들었지요? 다음에 알아듣도록 해야지 뭐 어떻게 하겠어. 못 알아들었다는데. 이제까지 아침서부터 오후시간 두 시가 넘도록 했는데, 점심시간 한 시간 빼고 특송시간 빼고. 어쨌든 그래도 어디 가서 말은 못 하더라도 ‘아, 요런 뜻이로구나’ 하는 것은 이제 느끼겠지요?
성경 보실 때에나 테이프 들으면서도 가만 생각해보고 이치를 찾으세요. 그냥 이 시간만 듣고 일주일 내내 그렇게 하지 말고 간간히 들으면서 이치를 생각해보면 전부는 자기에게 해당되는 말이요. 해당되는 그 정신이 변화 부활 때 나와야지. 안 그래요?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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