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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린도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04 추천 수 0 2020.07.25 00: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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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2:1-1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1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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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전 2:1-12, 주현 후 다섯째 주일, 2020년 2월9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절에 가면 대웅전 중앙에 놓인 부처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유대교 신자들이 모이는 회당 정면은 비어있습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에 따른 조치입니다.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모스크에도 아무런 형상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와 다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 성당에는 십자고상이 정면 벽에 달려 있고, 개신교회 예배당에는 십자가상이 정면에 달려 있습니다. 한 유대인 남자의 처참한 죽음을 종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내세운다는 건 자연스러운 게 아닙니다. 더구나 기독교 예배의식의 중심에는 예수의 죽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반복해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합니다. 모두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당에 정반대로 살았던 인물을 구원자로 받아들인다는 건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


저는 오늘 이 문제를 가장 솔직하고 정확하게 선포한 바울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울 자체를 소개한다기보다는 바울이 믿는 한 사람에게 얽힌 기막힌 사건을 소개하는 겁니다. 이 사람 예수는 아주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당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조차 버림받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고전 1:23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서 인류 구원의 길이 열렸다고 믿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마가복음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다고 전했겠습니까.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그 한 마디 외침을 끝으로 예수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절규가 이해됩니다. 그는 공생애 초기부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선포했습니다.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온 영혼과 삶 전체로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모든 사람에게 은총으로 주어졌습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았는데 결과는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통속적인 예를 들면 한 남자를 사랑한 한 여자가 그 남자에게서 버림받은 거와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목회자를 예로 들면 정직하고 성실하게 목회에 전념한 목사가 목회에 완전히 실패하고 집안도 풍비박산 난 사건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정도로 착하고 의롭게 산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허무하게 세상을 뜬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욥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님이 인류 역사에서 억울하게 고통당했던 의로운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친밀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새롭게 세상에 선포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은 하나님과 하나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친밀했고,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에만 집중했다가 그 하나님 나라로부터 배척당한 경우입니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외마디 비명에는 자신이 전적으로 믿고 매달렸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깊고 어두운 불안이 자리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불안을 느껴본 적이 있으신가요?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이 예수,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대상이고 이방인들에게 미련한 대상인 십자가에 달린 이 외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고전 2:2절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들어보십시오.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만 보면 과장된 표현으로 들립니다. 기독교인이라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만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예수의 부활도 중요하고, 예수의 재림도 역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겠다는 바울의 말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어떤 신앙 행태에 빠져들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 신앙 행태는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는 영육 이원론이라는 플라톤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상입니다. 그들은 관념적이고 비밀스러운 깨달음과 신앙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고전 2:1절에 따르면 영지주의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말은 ‘로고스’이고 지혜는 ‘소피아’인데, 그리스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입니다. 로고스와 소피아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거기에 치우침으로써 신앙의 본질을 가리는 게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 중에서 영지주의에 근거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그런 가르침을 좋아했습니다. 영지주의 관점에 서면 복잡한 세상 문제에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모두 죄로 물들었으니 관심을 기울 필요가 없고 영적으로 순전한 사람이 되기만 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에도 이런 영지주의 성격은 드물지 않게 나타납니다. 기복주의는 일종의 영지주의입니다. 복 받고 편안히 살다가 죽어서 천당 가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신앙이니까요. ‘영적 싸움’을 트레이드 마크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선한 영과 악한 영의 싸움터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구절들이 부분적으로 나오기는 합니다. 갈 5:16절 이하에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은 성령을 말하기도 하고, 악한 영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세상을 성령과 악령의 싸움판으로 보는 건 잘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하나님이 승리했다고 봅니다. 악령은 패잔병에 불과합니다.


영적 싸움을 말하는 이들에게 더 큰 문제는 기독교인의 삶을 개인 윤리에 제한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영적 싸움을 본격적으로 거론하려면 천박한 자본주의의 악한 성격을 들춰내고 저항해야 합니다. 남북통일 문제와 인간 노동 문제, 그리고 기후 변화로 집약되는 지구 생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다루고, 교회가 체계적으로 여기에 대처해야 합니다. 이런 사회 문제는 회피하고 개인 윤리에만 머물면서 영적 싸움 운운하면 기독교 신앙이 탈(脫)역사로 떨어집니다. 이런 신앙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만 알겠다는 바울의 신앙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이원론적이고 몰(沒)역사적인 영지주의 신앙입니다. 한국교회에 영지주의 신앙이 대세로 자리 잡은 이유는 한둘이 아닙니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예수 십자가의 실체를 잘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 처형당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그가 당시 사람들에게 착하게 살라거나 신앙생활 잘하고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만 말했으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유대교 권력자들이 예수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두 가지 사건입니다. 하나는 안식일에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성전에 관련됩니다. 마 12:9절 이하에 따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장애인을 보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 후에 이 사람의 장애를 고쳤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막 11:15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이들을 몰아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두 사건이 가리키는 것은 예수님이 당시 유대교의 종교 이데올로기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저항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저항에는 구체적인 ‘사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 권력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종교적 자랑거리로 삼을 뿐이지 실제 사람의 영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안식일은 민중들에게 해방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종교적 체제로서만 기능했습니다. 성전과 안식일에 구원받아야 할 사람은 실종되고 종교적 허례와 율법적인 강제력만 남았습니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바로 예수 당시의 유대교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날 그 광인은 여러 교회에 뛰어들어 신을 위한 진혼곡을 불렀다고 한다. 밖으로 끌려 나와 심문을 받았을 때 그는 이 대답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 교회가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님은 유대교 체제와 종교 이데올로기에 혁명가처럼 온몸으로 저항했습니다. 유대교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의 고발 조치로 로마 총독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 처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십자가에 죽은 게 아닙니다. 그것만 강조하면 영지주의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체적인 역사적 인간 삶에 관계됩니다. 그렇습니다. 공중부양하는 듯한 고린도 교회의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구체적인 역사 한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알고 싶은 게 없다는 바울의 진술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바울은 본문 2절에서 “예수”라고만 말하지 않고, 그리고 “그리스도”라고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했습니다. 고유 명사로서의 예수와 보통 명사로서의 그리스도는 바울에게서 늘 붙어 다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구체적인 이 역사에서 살았던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 즉 인류를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다음입니다. 구원자가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일까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힌 이가 어떻게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인류를 구원하려면 십자가에 죽으면 안 됩니다. 초월적인 능력으로 세상의 악을 쓸어내고 명실상부 정의로운 세상을 실현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바울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걸까요?

바울은 이 문제를 4-12절에서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하면서 비교적 길게 설명합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것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있다면 당시 권력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지 않았을 겁니다(고전 2:8).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표현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손에 잡히지 않을 겁니다. 세상의 영은 무엇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은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다시 예수님의 공생애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당시 유대 사회의 절대 규범이었던 율법은 죄인과 의인을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은 의인에게만 주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죄인들과는 함께 먹지 말고 어울리지도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먹고 마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과 태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기쁜 소식으로 들렸고 어떤 사람에게는 언짢게 들렸습니다. 똑같은 가르침이 왜 이렇게 다르게 들렸을까요? 이건 지식이 많고 적음에 달린 게 아닙니다. 돈이 많으냐 가난하냐에 달린 게 아닙니다. 인격의 고상함과 천함에 달린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영이냐, 하나님의 영이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세상의 영에 묶인 사람의 눈에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가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보였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의 눈에는 복음으로 들렸습니다. 여기서 세상의 영은 세상에서 배운 고정관념에 묶이게 하는 힘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이 세워가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여는 힘을 가리킵니다. 이런 표현도 어떤 분에게는 멀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 왜 하나님이 구원 능력인지를 다시 한번 짚을 테니 그게 이해되고 믿어지는지 아닌지를 살펴보십시오. 이를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본다.”라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과 가까이 계셨던 분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 암흑의 자리에, 그 절체절명의 자리에, 깊고 어두워서 하나님이 없을지 모를 정도로 불안한 자리에 존재하신다는 뜻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확인되었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게 이해가 되고 믿어지시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세상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도 됩니다. 거칠게 표현해서 세상에서 버림받아도 괜찮습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해도 괜찮습니다. 좀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거기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비밀을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될까요? 우리는 결국 언젠가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가난하게 됩니다. 죽음의 어둠으로 들어가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즉 하나님이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하실 터이니, 지금 여기서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말고 각자의 삶을 살아내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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