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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눅7:30-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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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30절-50절.
30절: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스스로’ 라는 말은 찬송 부를 때 도망간 놈 아니야? 허허. 인간 타락된 기존적인 지식을 가지고 판단을 하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의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판단 잘 하지요? 우리의 판단은 스스로 판단인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의 판단을 자기가 갖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예, 자기가 판단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 잘못됐다고 그러면 이게 어떻게 하려고? 판단할 때는 여기는 법적인 심판적인 의미가 들어있단 말이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배울 때에 판단성도 우리 인간 편에서 최고로 옳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알아주는 판단을 우리가 가지려고 연구를 하고 애를 써야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모세로 통해서 주신 율법 속에는 하나님의 은밀한 뜻이 들어있는데, 이 뜻을 위해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 뜻을 찾게 되면 요단강가에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따를 수 있을 텐데. 죽음의 선을 넘어가기 전에 옳은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바로 영접하여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텐데 그 말이요. 오늘날 거짓된 기독자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과는 멀고, 입으로는 세상소원 목적을 이루어 달라고 하니까 예수님 당시 그 율법사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그 외식자들, 그 때의 그 외식자들이나 지금 외식자들이나 예수 믿는 외식자들의 그 중심사상은 똑같구나.
예수 믿으면 예수님을 닮는 마음을 소원을 가져야 할 텐데 세상을 향해서 가고 있으니 이게 외식자다. 외식적인 믿음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그걸 외식이라고 가르쳐주느냐 그 말이요. 문제는? 그 중심사상은 똑같아요. 그 중심사상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역사 속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었단 말이요. 제 명대로 못 살고 심판을 받고 죽었단 말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된 신앙은 아니고 세상 뜻대로 된 신앙이더라. 세상 뜻대로 된 신앙이더라.
31절-32절: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아이들은 북소리나 피리소리 나팔소리 등등의 그런 소리에 민감해요. 말로써 ‘다 모여라’ 하는 그 소리보다 악기소리가 나면 빨리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귀머거리처럼 아무 반응이 없다는 거지요. 반응이 없구나. 어른들이 성경을 가지고 그 때 당시 하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이 없구나. 예수님을 그렇게 오래 믿었으면 그 마음중심에 성령님의 감화 감동에 상당히 민감하게 빠를 텐데 빨리 움직일 텐데 반응이 없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소식은 기쁜 소식인데, 기쁜 소식은 뭐냐? 천국복음 소식.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기뻐할 줄을 모른다는 거지요. 말하자면 세상소리가 나면 더 기뻐한다 그 말이요.
주일날 교회 가서 하나님 말씀 깨닫는 것보다 직장에서 남편 월급 올랐다 그러면 엄청나게 기쁘지요? 그 속에 세상이 들었다는 증거란 말이요. 세상이 들었어. 그러니 주일날 설교가 그게 귀에 들어오겠어요? 졸다만 가고. 졸다가 졸다가 미안하면 자꾸 끝에 가서 있다가 툭 떨어져버려요. 조는 사람치고 시험 안 드는 사람이 없어. 백 프로요. 자기와 상관없다 그 말이요. 상관없는 곳에서 그 말 듣자니 얼마나 지루하고 힘들겠냐 그 말이요.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를 않는구나’ 하는 것은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외쳐도 남의 말처럼 먼 나라의 일처럼 무관심하게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양심이 모두 화인을 맞았구나. 불도장. 소 배 옆구리에 불도장 찍지요? 양심이 모두 화인을 맞았다. 그러니까 둔감하다 그 말이요. 둔감해. 세상을 향한 말에는 귀가 번쩍번쩍해도 진리이치 생명이치 하나님의 도덕이치를 말하면 안 듣는다 그 말이요. 부자 된다는 소리에는 귀가 솔깃하지만 참 사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자’ 하면 그게 그만 귀에 안 들어온다 그 말이요. 복을 달라고만 하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는 싫다 그 말이요.
복을 누가 줘요? 하나님이 주시는 건데 사람은 바로 안 돼 있으면서 달라고만 자꾸 하면 하나님이 주느냐? 쉽게 그저 이해를 해 봅시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고 월급만 올려달라고 하면 그 월급 올라가겠어요? 안 그래요? 공장을 살려놓고 월급을 달라고 그러면 공장 잘 돌아가면 자꾸 월급이 올라가지. 월급 안 올라간다고 자꾸 물건을 나쁘게 만들어 놓으면 그건 천상 그 공장 망하고 같이 망하는 수밖에 없다. 안 그래요? 복을 달라고만 하고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이게 참 문제가 심각하다. 그러니까 모두 양심에 화인을 맞았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그저 무덤덤한 화인 맞은 사람이 아닌가?
33절-35절: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여러 소리 말할 것 없어.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고 하든지 안 옳다고 하든지 그건 드러나게 된다. 무슨 말이냐? 세례요한이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나의 신앙은 금욕주의다’ 하고 안 먹자 주의로 산 겁니까? 세례요한이? 바리새인 자기들이 볼 때에 세례요한을 금욕주의로 본 겁니까? 금욕주의가 뭐냐? 육체의 모든 욕망을 끊고 살아야 구원을 얻는 것이고, 금식을 많이 할수록 신앙은 더 크고 금식을 안 하면 신앙은 없다고 보는 자들.
그런데 그들의 말대로 세례요한이 과연 떡도 포도주도 안 먹었는지? 옆에 두고도 안 먹자 주의로 나갔는지? 왜 안 먹었는지? 금욕주의로 사느라고 안 먹었는지?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다 보니 안 먹어졌는지?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느라고 신경 쓰다 보니 안 먹어졌는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만 먹다 보니 그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는지? 예, 세례요한이 금욕주의냐 그 말이요.
자식을 위한 걱정에 어머니가 음식이 목구멍에 안 넘어간다면 어머니가 금욕주의가 된 겁니까? 예수님께서는 먹자 주의?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무 거나 잘 잡수세요.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 예수님은 먹자 주의도 안 먹자 주의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활동에서 계시목적으로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상황 따라 장소에 따라 사람에 따라 먹기도 하고 안 먹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것하고는 상관이 없다 그 말이요. 그 말에는 이해가 갑니까?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행위 종교적 활동을 기준 삼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신앙이 크다. 신앙이 좋다’ 그렇게 말들을 하지요. 이렇게 보는 기준은 이방종교적 정신 사상을 가진 겁니다. 안 믿는 사람들하고 똑같단 말이요. 그 기준성이. 오늘날 교회 안에 얼마나 그런 정신이 퍼져 있는가? 많이 퍼져 있다.
먹는 사람은 안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안 먹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주를 위해서 안 먹기도 하고, 구원을 위해서 안 먹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위해서 그랬나? ‘네 몸을 위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써라.’ 포도주는 술이지요? 네 몸을 위해서. 음식이 죄가 아니란 말이요. 음식 놓고 술을 먹으니 타락됐구나? 타락되게 술 먹는 그건 우리가 봐도 다 알지요. 약으로 먹는 것, 몸을 위해서 먹는 것, 건강을 위해서 먹는 것. 그런 것을 그 뭐 술 먹는다느니 타락됐다느니 그렇게 보면 안 돼요. 자기가 어디 몸이 아프면 병원 약 속에는 마취제도 들어있고 독약도 들어있고 그래요. 그런 요소가 다 들어있어요. 약 먹으면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그만 귀신이 잡아가도 모릅니까? 그럼 그 약속에 뭐가 들었다는 거요?
예수 믿으면서 자기가 마약 먹고 그렇게 말하면 되겠냐? 몸을 위해서,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믿음 없는 사람이 ‘이제 믿음이 없으면서 알지도 못하고 이제 힘을 얻을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 면에서는 성장될 때까지는 그건 안 되지요. 말하자면. 내가 그런 걸 먹어도 목숨이 더 연장되는 것도 아니고. 지혜롭게 생각을 해야지요.
35절에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 지혜로 된 자기의 모든 자녀란 최종적 실상적 영원 궁극적 목적적 결과를 염두에 둔 행위들입니다. 알겠어요? 자기가 행한 대로 뿌린 대로 뒤를 따른다고 하는 그게 바로 네 새끼들이다. 말하자면 네가 다 한 거다 그 말이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첫째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 지혜에서 생산된 즉, 가르침으로 생산된 자녀는 지혜로 교육을 받고 지혜로 성장된 자녀들이다. 영어선생이 학생들을 영어로 가르쳤다면 영어로 생산된 자녀란 말이요. 이해되시죠? 두 번째, 지혜로 모든 행함에는 공의로 된 것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옳음이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입니다. 지혜로 하나님의 공의로 된 것이 아니면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공의에서 얼마나 틀려졌는지 얼마나 빗나갔는지 알지 못하고 외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에 기준을 삼고 무조건 정죄하며 살게 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그 말이요. 이해됩니까?
네가 옳으냐? 옳으면 그건 지혜로 된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영원히 틀리지 않아야 되고 자타의 구원이 돼야 되는 건데, 그 지혜로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만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보는 것으로 기준이 들어가 있다 그 말이요. 기준이 틀려버렸다 그 말이요. 보는 것으로만 돼버리면 나중에 어떻게 할 거냐?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거냐? 네가? 쉽게 말하면 네가 어떻게 책임질래?
36절-39절: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조금 전까지도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술을 즐기는 자요.’ 예수님도 술을 먹었다는 말이지요? ‘즐기는 자요 탐식가요’ 하면서 예수님을 까 내렸는데 바리새인이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니 따라가신 것을 보면 까 내린 그 바리새인이 ‘예수님, 식사 좀 같이 합시다’ 하고 말했거든. 예수님을 막 까 내린 바리새인 집에 따라 들어갔단 말이요. 이제.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볼 때에 예수님이 속 알맹이가 있어요, 없어요? 글자대로 보면 없는 것 아니냐 그 말이요.
우리들 같으면 그래요? 어떤 사람이 자기를 막 그냥 씹었는데 꼬집고 씹었는데 그 사람이 ‘식사 좀 같이 합시다’ 그러니까 꺼덕꺼덕 따라가는 그런 사람 있을까요? 없지요? 맞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이 볼 때도 얼마나 예수님이 우습게 보였겠느냐 그 말이요. 맞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몰라서 갔을까요? 아신다 그 말이요. 아시면서 왜 가셨을까 그 말이요. 가실 때는 분명히 목적이 있다. 좋은 목적, 나쁜 목적? 아, 예수님이라 그러니까 무조건 좋은 쪽을 갖다 붙이지. 35절에서 뭐라 그랬지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그렇지요? 지금 그 말끝에 이게 나온 거란 말이요. 그러니까 그 일을 말씀을 해놓고 그 일을 행하시는 거요. 이제. ‘자, 너희들이 봐라.’ 하고. 근데 당시에 그들은 아직 모르는 거요. 우리 입장에서도 이 말씀을 이게 꼬치꼬치 캐면서 이치적으로 좀 들어가야지.
여기서 뭐요? 강의로 해나가니까 자꾸 ‘이게 해석을 어떻게 하나? 참 딴 데보다 깊다. 참 신비롭다’ 그것만 갖다가 적어서 뭐하게요? 비록 못난 사람이지만 믿음은 없지만 그걸 보는 사고방식에서 제가 일을 해나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일한 것만 냅다 갖다 겉만 보지 말고 사람을 논하지 마라. 아무리 방편적 일이 좋아도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게 뜻이 안 나오면 그건 닫힌 거요. 이제. 알겠어요? 스승목사님 교회에서도 내가 그런 걸 많이 봤어요. 분명히 성령님께서 그 분을 통해서 역사를 하시는데 이게 목사 강도사 전도사들은 어떻게 물고 씹는지? 어떻게 끄집어 내리는지? 이건 아니다.
3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지혜와 그 지혜의 사역적 활동이 연결이 되어 지금 들어가는 겁니다. 그 결과를 미리 보면 죄인 여자를 바리새인의 집에서 구원하는 장면을 보여주시고, 따라서 그들의 신앙이 여자보다 형편없음을 만천하에 드러내주시고 우리에게 그 깨달음을 주신단 말이요. 그래서 당신을 까 내린 그 바리새인의 집에 바보처럼 소처럼 꺼떡꺼떡 쓸개 없이 가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요.
예수님 당신은 가견적 임시성의 기준에서 생각하고 활동하심이 아니고 영원 궁극적 우리의 구원을 내다보시고 나 때문에 지혜롭게 행하셨음을 우리는 아멘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지요. 예, 참 멋있어요. 예수님 하시는 일이 정말 멋있구나.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아예 면상을 대패로 싹 깍듯이 깎아버리는구나. 멋있구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식사자리에 앉으셨는데 그 동리에 사는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겁니다. 기회란 말이요. 여자입장에서는 죄인여자 입장에서는 바리새인의 식사자리에 앉은 것이 여자로서의 기회란 말이요. 그러니까 남이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을 만나야 된다는 면에서.
‘죄인’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동리사람들이 다 아는 죄를 지은 모양이요. 그렇지요? 다 아는 죄. 도둑질을 해서 얻어맞았는지? 간음을 하다가 뭐 어떻게 그냥 들통이 나버렸는지? 어쨌든 이 여자는 바리새인의 집에 예수님께서 오셨음을 알고 애써 준비해둔 한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을 향하여 급한 걸음으로 뛰다시피 예수님을 찾아온 겁니다. 옥합을 가지고 오면서 이 남자 저 남자 다 만나주고, 남자가 ‘다방에 잠깐 들어가서 말 좀 하자’ 그러니까 그거 다 만나주고, 백화점에 다 들리고 굼벵이 걸음으로 기어왔을까요? 죄인인 여자가?
여기 계신 분들은 다 그러지요? 교회 오는데 아는 사람 만나면 그만 그 사람 휙 따라가 버리지요? 그러면서 주일 까먹어 버리지요? 시골에서 친정어머니 시어머니 오면 까먹지요? 이치는 그 안에 다 들어있어. 이게 딴 사람이냐 그 말이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의 입장에서 자기는 죄인을 모르니까 지금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고 그러는 거지. 하나님 앞에 한 번 치임을 받아 봐요. 어떤 현상이 되는지?
기회를 놓칠세라 예수님을 만날 여자가 오면서 곧장 바쁜 걸음으로 뛰다시피 오는 거요. 주님을 향해서 달려오는데 골목에서 어떤 남자가 돈다발을 흔들면서 휘파람을 휙 부니까 달려오면서 여자가 돈다발을 든 남자를 향해서 ‘이따 봐요’ 하면서 예수님께로 뛰어오는 겁니까? 성령의 눈으로 보면 신앙사상이 그런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이 보이는구나. 예수 믿으면 곧장 진리 따라 믿을 일이지 어디서 손짓하니까 그리로 싹 나가고, 직장에서 누가 손짓하니까 그리로 가고, 돈이 손짓하니까 그리로 가고, 아는 사람이 손짓하니까 그리로 싹 빠지고. 아이고, 참말로. 그렇게 살면서 세상에서 일인자 부자 되라고요. 어중간하게 그렇게 살지 말고. 사람이 쓸개가 있고 깡다구가 있어야지. 어째.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이 여자는 예수님 앞으로 온 것이 아니고 이 여자가 마음으로 예수님의 뒤를 밟아 와서, 예수님의 뒤를 밟아온다는 이게 뜻이 깊어요. 그 정신을 밟아 와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요. 교회 온다고 그냥 만나는 게 아니요.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의 뒤를 밟아. 그 행하신 그 마음 정신이 뿌린 그 행동, 숨어있는 그 뜻을 밟아 와야 돼요. 그래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 그래야 정신 대 정신, 사상 대 사상이 딱 만나.
그래, 마음으로 예수님의 뒤를 밟아 와서 예수님의 발 곁에 와서 스스로 웁니다. 왜 울까? 마음에 무엇이 맺혀서, 한이 맺혀서 울까? 구원자를 만난 기쁨의 눈물일까, 아니면 자기를 데려가 달라는 눈물일까? ‘난 아무도 없어요. 나 예수 당신 따라 갈래요’ 뭐 그런 거. 마음 깊은 속에서 나오는 이 뜨거운 눈물이 예수님의 발등으로 툭툭 떨어집니다. 눈물도 식은 눈물이 있고 뜨거운 눈물이 있어요. 뜨거운 눈물은 마음이 뜨거워야 눈물도 뜨겁다. 뜨거운 데서 나오는 거니까. 맞잖아요? 예수님의 발은 여인의 눈물에 적셔지고 예수님의 발등의 뽀얀 먼지는 씻겨져 나가는구나. 그렇지요?
예수님 당신이 죄인 나를 위해서 무시를 당하면서까지 이 자리에 왔지 않았나? ‘죄인 나를 구원하려 이 험한 먼 길을 오셨나이까?’ 얼마나 핍박이 있었고 얼마나 죽는 그런 사건도 피하고 하늘로부터 오신 그 거룩하신 삶의 걸음걸이. 오신 그 걸음걸이를 생각하면서 자기를 찾아오신 것을 생각을 하면서 눈물로 머리털로 발을 씻기고 그 거룩한 발에, 여인을 살리기 위한 그 거룩한 발에, 아무데나 간 발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의 말씀대로 사는 그 여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말이요. 나대신 살으신 그 걸음걸이, 그 거룩한 발에 향유를 붓는구나. 육신의 몸은 어떻게 짓밟혔는지?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눈물로 살아온 거라 그 말이요. 여인이.
여자의 마음속에 감추어 두었던 것이 향유로 나타나 그 향기로움이 온 방안을 진동시키고, 그 냄새가 세월이 흘러 우리의 양심에 까지 우리의 신행의 향기로서 진동이 오는구나. 우리에게. 그 냄새 맡을 줄 알아야지. 이해갑니까? 어떤 정신으로 살아온 것인지 그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돼.
죄인인 여자가 스스로 죄짓는 게 좋아서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가난해서 자기 몸이 밟혔는지 어쨌든 죄인으로 돼버렸어. 눈물 흘리는 그 마음속에 소리 없이 눈물로 예수님께 아뢰는 마음상태를 한 번 생각을 해봐라. 생각을 좀 해봐라. 왜 사람의 마음을 느낄 줄 모르느냐? 사람의 마음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은 이기주의요.
물론 게으른 남편도 있지만 만날 돈 적게 벌어온다고 그러고, 바가지나 긁고, 자기는 값비싼 뭐요? 바르는 것? 화장품. 신발도 엄청나게 비싼 거. 옷도 비싼 거. 그런 걸 못 사서 안달하고. 친구나 어떤 아는 사람이 비싼 거 어떻게 쳐 감았으면 그저 남편을 달달 볶고. 남자들, 그런 여자 얻지 말아. 평생 고생이야. 뭐 그런 여자는 안 얻겠지만 누가 알아? 또 눈이 삐어가지고. 여자들은 날 때부터 부자로 살았고 그러면 고생을 안 해봤어. ‘젊어서 고생은 돈으로 산다’ 뭐 이런 말도 있지요? 그만큼. 그러면 사람이 꼭 고생을 해야 되느냐? 아무렴 고생 안한 사람과 고생한 사람은 이건 느낌의 차이가 상당히 있는 거다. 아무렇게나 생각지 마라.
사람이 살다보면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는데 말씀으로 인해서 미래적으로 그걸 다 이길 수 있는 지혜를 준비를 하는 것이 참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거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든 일반사회를 통해서든 궂은일이든 자기가 할 만하면 하는 거예요. 방청소도 안 하지, 걸레도 안 짜지, 자고 나서 이불도 안 개지, 밥도 안 해 먹지. 어떻게? 그렇게 사는 아가씨들 있나요? 그렇게 사는 남자들도 있어요? 남자들 그렇게 살면 아가씨들 정신 바짝 차려. 죽을 때까지 그건 창자 긁어먹고 죽을 거요. 겉이 매끈하다고 절대로 그렇게 보지 마라. 겉만 보고 가면 백 프로 이건 뭐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이미 과거는 잘 몰라서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고치란 말이요. 고쳐.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건가? 고생 안한 사람은 살면서, 결혼해가지고 살면서 이게 뭐요? 자꾸 싸움이 나면 아, 요거 두 가지가 있어요. 돈이 이제 좀 궁하구나. 돈 궁하면 싸움이 일어. 제 맘대로 못하니까. 그 다음에는 성격 탓이에요. 이기적인 그게 들어있어. 그렇게 되면 아기 낳고 아기 옆에서 투닥투닥 싸우고 큰 소리 오고가고 그러면 아기가 안 듣겠어요? 아기는 집나가 버린다. 엄마 편을 들겠어, 아버지 편을 들겠어? 그래서 어린 아기들이 날 때 울 거야. ‘험하고 괴로운 세상 내가 어떻게 살까’ 하는 참 어떤 그런 의미가 들어있어. 그 참 일리가 있어요. 괜히 우는 게 아니요.
참 이게 그 여자의 신행의 향기로움.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사 서기관들은 계속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여자를 또 그렇게 하고. 사람들은 대부분 가만히 보면 과거를 잘 들추어내고, 현재 잘하고 있어도 사람을 과거처럼 생각해서 자꾸 매장시키려고 하는 그런 악한 습성이 있어요.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현재 구원을 잘 이루고 새사람으로 살고 있는데 과거를 가지고 사람을 자꾸 깎아내리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못 받는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파 교인들과 율법사 서기관 장로들 제사장들 그들의 마음을 훤히 다 알고 계시고 회개한 여자의 마음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여자는 여기에서 사람의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그 분으로부터 사죄의 선언을 받아야 합니다.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그 분으로부터 사죄의 선언을 받아야 된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사죄의 선언을 받아야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으려면 비상수단적인 지혜와 용기와 각오가 필요하구나. 왜냐하면 죄인을 정죄하는 예수님이 그들의 집에 앉으셨고, 정죄하는 그들의 집에 예수님이 앉으셨고, 그들 또한 예수님을 헐뜯기 위해 식사를 같이 합시다. 그렇게 들어가 있단 말이요.
그 분께 부어드릴 향유,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뜨거운 마음. 여자는 예수님께 향한 전 인격 전 삶의 전폭이 다 들어있구나. 식사자리에 나타난 이 여자의 하는 일에 예수님은 여자가 하도록 가만 두고 있는 겁니다. 왜 가만두고 있어요? 눈물 흘리고 머리카락으로 발등을 닦으니까 발등이 간질간질하니까 그냥 가만 두는 거지요? 누구 때문에 가만 두는 거요? 첫째는 여자를 위해서, 두 번째는 우리를 위해서 깨닫게 해 주신다. 여자의 마음을 읽도록 하려니까. 그 마음을 읽는 예수님을 우리가 또 알아야 되니까.
이 장면을 본 청한 바리새인은 중얼거리기를 ‘예수가 만일 선지자라면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 것이고 여자의 행동을 금할 것이다’ 했는데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중얼거리는지 그것도 안다 그 말이요. 그것도 알아. 이 자리에서도 중얼거리는 사람이 있어. 마음속으로 뭐가 불평불만이 가득 차가지고. 얼굴 좀 들어봐요. 상을 좀 펴. 봄인데 어찌 그러냐? 마음에 들어있는 그대로 자기 상이 돼서 드러나요. 마음이 편하면 얼굴이 환해요. 마음에 근심걱정이 있으면 얼굴이 검어져요. 맞잖아요? 제 말이 틀렸어요? 설교시간에 자기의 원망불평 소리를 다 아실까요? 예수님이 아실까요? 모르지 뭘. 예수님이 어디 보여요? 안 보이지. 거짓말도 잘 하지.
예수님을 식사자리에 청한 바리새인은 무엇이든지 흠을 잡아 깎아내리고 정죄하고 미워하고 없이하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자꾸 부글부글 끓어요. 그런 마음으로 가득 찼어. 그 악한 마음을 다 아시고 40절에서 뭐라고 그래요? 읽어봐요.
40절-5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주님의 말씀의 선언이지요? 그러니까 이 ‘네 믿음’이 기본구원에 관한 믿음입니까, 이룰구원에 관한 믿음입니까? 이룰구원. 그렇지요. 이해됩니까? 그렇다면 이 여자를 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그 면에서도 우리는 일반 죄를 갖고 와서 말하면 안 된다. 일반 죄는 우리가 말할 필요가 없고. 그들이 볼 때에 그들은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 지식가지고 여자를 본 거지만 우리가 보는 입장에서는 그 기준가지고 여자를 보면 죄를 못 찾는다.
자, 이제 이 말을 다 듣고 난 시몬의 얼굴빛이 어떻게 되었을까? 이게 이제 궁금해요. 어떻게 됐을까요? 시몬의 태도가 궁금하지 않아요? 의인인 것처럼 돼있는데 예수님으로부터 하여튼 한 펀치 얻어맞았어. 얼굴에. 어떻게 됐을까? 얻어맞은 인상 누가 한 번 배우처럼 할래? 누가 지어볼까? 인상파 없나? 여기? 자, 얼굴이 찌그러지면서 입술을 깨문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홍당무가 된다? 양심적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한다? 묻는 말입니다. ‘그렇게 될까, 저렇게 될까’ 묻는 말이에요. 지금. 화장실에 들어가서 펑펑 운다? 너무 억울해서. 거기에는 자기의 태도도 들어있는 겁니다. 괜히 늘어놓는 거 아니요. 자기 감정을 추스리지 못해가지고 괜히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딴 사람에게 신경질만 부리더라? 그런 것도 자기에게 있을 수 있지요. 있을 거요.
그만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 듣기 싫어서. 예배 마치고 자기한테 하는 소리인 것처럼 생각돼서 ‘누가 일러바쳤나’ 뭐 그런 거. 아니에요. 진리대로 하다보면 저는 제 나름대로 70년 동안 사람을 많이 겪어왔기 때문에, 겪은 것만 아니고 나도 그런 게 있단 말이요. 사람의 마음은 다 거의 비슷해요.
자, 분을 참느라고 안 그런 척 하면서 웃음이 나오는 상황도 아닌데 자꾸 히죽히죽 웃는다? 그런 거 없나요? 그러니까 사람이 괜히 오해받는 일 하지 말아요. 이를테면 어른이 묻는데 말대답은 하지 않고 자꾸 히죽히죽 웃는다. 어떻게 된 거요? 뭔가 뇌 안에 벌레가 들었나? 어른들이 묻는 말에 명확한 대답이 돼야지 왜 히죽히죽 웃나? 아니면 묘한 느낌에 자기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른다? 멍해지면서. 유OO, 너 왜 조냐? 너 집에 가서 되게 얻어맞지? 저 OO엄마 마음속을 봐봐. ‘끝나기만 해봐라.’ 허허허. 괜히 그러지 말아요. 야, OO, 우리 집에 있다 가라? OO이 따라가고. 허허허.
자,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요? 머리가 아프더니 밤새도록 잠을 못 잔다? 사람이 그런 거 있을 수 있다. 어떤 한 소리 들어놓으면 밤새도록. 문제는 자기가 잘못한 건데 그게 그만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가지고 잠을 못 자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런 경험들 안 해봤어요? 그런 경험도 해봐야지. 사람이 다 오각의 오감성이 있는 건데.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냐? 제 성질을 자기가 못 이겨서 머리를 벽에다 박아버린다? 그런 거 있어요. 자기가 잘못해놓고 너무 원통하다든지 아니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기가 꾸중 들으면 억울해가지고 막 벽에 박는 그런 애들도 있고요. 그럼 누구 머리만 아플까? 그거?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냐? 다음날 안 나와 버린다? 꼴도 보기 싫다. 또 어떤 현상일까? 예수 죽일 계획을 짠다?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지요?
그러면 오늘날 자기 같으면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태도로 나올까? 그거 없어요? 목사님에게 꾸중 들으면 그 다음 날 안 나올 걸? 다음 주일에? 그렇지 않아도 나오나 안 나오나 보려고 지금 실험대에 앉은 그런 분들이 있어. 이거 암만해도 안 되겠구나. 본보기로. 그러니까 이게 나쁘게 말하면 ‘나오지 말아라. 그래도 네가 나오겠냐?’ 고게 있을 수 있고. 무슨 얼굴로? 정말 진리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올 것이고 아니라면 안 나온다. 거기에는 인간 그런 요소로 들어간 거다. 나오지 마라. 예, 그게 들었어. 안 그러면 안 고처지는 걸 뭐.
성경을 가지고도 예수님을 모르면 죄인취급을 하게 되고, 성경을 가진 사람이 그래요. 예수님을 푸대접하게 되고, 신앙 믿음 있다고 뻐기고 남 무시하다가 진노의 형벌을 받고 완전히 멸망을 받게 됩니다. 이해됩니까?
이게 가만히 보면 전부 나보고 우리보고 하는 소리다. 딴 사람이 아니요. 성경가지고 의인시하는 그들은 이 여자만도 못하잖아요? 안 그래요? 이룰구원 차원에서 네가 죄가 그대로 있구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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