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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눅7:4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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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42절-50절: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죄가 무엇이냐? 세상 사람들이 아는 죄는 다른 사람을 해코자하는 행동에서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불순종에서 죄를 찾는다.
아까 우리가 신명기 28장을 읽었는데 이 말씀은 믿는 사람에게 주는 거냐, 안 믿는 사람에게 주는 거냐? 이 성경을 믿는 사람이 읽는 거냐, 안 믿는 사람이 읽는 거냐? 성경은 믿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성경은 믿는 사람이 읽는 것이다. 고로 각자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말씀 속의 영적인 뜻을 풀어서 대어보면 현재 우리에게 안 걸리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안 믿는 자는 설교를 들을 자격도 없고, 성경을 기본적으로 안 읽는 자는 기본신앙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영적 계시의 마음 정신이 돌아가는 설교를 들을 때 못 알아듣는다. 자기 집에 먹고 마시는 거, 돈이 나가고 들어가는 것만 알지 자기 마음속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돌아가는 것을 모른다.
자기 좋은 대로 살면 하나님의 뜻이냐? 평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서 주일날 왜 뭘 사서 들고 다니고 왜 쇼핑을 하느냐? 평소에 세상이 들어있으니 주일날 하루만큼도 거룩히 지키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자는 사람의 차원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기에게 좋으면 좋은 것이냐?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나님께서 사건을 몰고 오시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이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사건을 몰고 오시겠구나.’ 쉽게 말하면 학생이 공부를 못하면 ‘얻어 맞겠구나’ 하는 왜 이걸 모르겠느냐? 정신이 멀쩡하면 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일반차원의 생각도 못하면 어디 쓰겠느냐? 예수 믿으면 차도가 있어야 한다. 자기 욕심 채울 바에야 뭐하려고 예수 믿느냐? 안 믿는 사람하고 같이 살지.
성경은 하나님 말씀 불순종에서 죄를 찾는 거다. 먹고 다스릴 수 있는 생명과는 안 먹고,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하는 선악과를 먹고 죽은 것이다. 그때뿐만 아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하나님 말씀이 안 믿어진다는 것이다. 자기 집안에 자식이 있다면 부모 말이 안 믿어진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어떻게 사람이 돼갈까? 어른이 되면 어떻게 어른행세가 될까? 무슨 인격의 형성이 있겠느냐?
자신의 영은 즉시 죽고 이성과 몸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데 그 상태를 모른다. 결국은 죽었다. 죽었으니 눈물 콧물 흘리지만 회개는 안 된다. 영이 죽으니 우리에게 영혼이 죽으니 이성 몸이 죽어가는 동안 온갖 죄로 자타에게 몹쓸 짓하고 죽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몹쓸 짓 하는 건 빤히 알지만 일반적인 선이나 의나 하나님 것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제 혼자 제 벌어 자기 먹고 사는 것이고, 남 도울 줄 모르고 자기 욕심만 부리는 이기주의적 성질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예수 믿어도 그렇다. 이기주의적 성질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을 하면 남보다 돈을 더 받기를 바란다. ‘어떻게 하면 자기 쪽으로 끌어 모으나’ 자꾸 그런 발상을 한다.
죄인은 몸이 죽어가는 동안 온갖 죄로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그 죄를 짓고 다 죽는다. 사는 게 없다. 큰 죄이던 작은 죄이던, 일반적 죄를 안 지은 사람이던, 일반적 의를 행한 사람이던 다 죽는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룰구원이 없이 죽는다.
일반적으로 의를 행하고 죽는 사람에게는 기념을 하고 칭찬이 들어간다. 그러나 죄를 행한 사람은 죽을 때에 사람들의 입질의 저주를 받고, 죽어도 저주를 받는다.
우리가 왜 욕을 먹느냐? 예수 믿으면서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칭찬 듣는 것은 기준이 안 믿는 사람 쪽으로 서 있을 가능성이 많다. 예수 믿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교회에게 주님에게 칭찬을 발을 줄 알아야 되겠는데 그게 없다면 어떻게 살았다는 증거냐?
우리에게는 뚜렷하고 확실하고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목적이 뭐냐? 우리 모두 자기에게 뚜렷하고 확실한 목적이 무엇이냐? 부자가 되어도 그 목적이고, 가난한 자가 되어도 그 목적이고, 어느 장소에서 무슨 일을 해도 변치 않는 그 목적 이것이 무엇이냐?
자기의 존재목적이 무엇이며, 자기의 출생목적이 무엇이며, 자기가 사는 동안 무슨 일을 하고 가야 하는가? 그 목적은 다 똑같다. 뚜렷한 목적이다. 이 목적을 모르면 이거는 왔다 갔다 사는 것이다. 시간 있으면 믿고, 몸 아프면 안 믿고, 부자 되면 돌아다니기 쉽고, 빠지고, 급하다고 변명 많고. 이 사람은 목적 없이 사는 것이다. 목적 없이 예수 믿는 거다. 나쁘게 말하면 이 사람이 지금 귀신이 들었구나.
자기의 뚜렷한 목적이 뭐냐? 출생해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 인간 자기의 창조 원인 동기 목적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구원이다. 이게 내 목적이다. 이렇게만 산다면 사람 위에 뛰어나고 나라 위에 뛰어나고 꼬리가 아닌 머리가 된다. 역사적으로 증명을 하는 거다. 바보 멍텅구리처럼 살아놓고 남 원망하고 세상 원망하고 눈물이나 찔찔 흘리고 그 어디 쓰겠느냐?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슬프고 고독하고 눈물이나 흘리라는 말이냐? 범사에 감사성은 날마다 이룰구원을 잘 이루고 간다는 의미이다.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자연만물을 보고 깨닫고 산천초목을 보고 깨닫고 허공을 보고도 깨닫고,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사람을 만날 적마다 깨닫고, 혼자 있어도 깨닫고, 고난 받을 때도 깨닫고. 참 멋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웬 변명이 그렇게 많은가?
요즘 사람들은 옛날사람들처럼 6. 25를 안 만나서 그렇다. 6. 25를 만난 사람은 아무리 무식해도 민족석 애족성 국가성은 뚜렷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은 돈만 벌면 외국으로 뛰려고 그런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이 구원이 나의 구원이다. 하나님처럼 온전케 되는 것과, 하나님 나라를 내 마음대로 영능의 실력대로 누리는 것이다. 실력구원이 돼야 누릴 구원이 된다.
예수 믿는 그 길로 깨달음이 올라가면서 교회의 짐도 지고, 교회의 살림도 살고, 교육하고 가르치고 해야지 믿는 그날부터 빈둥거리고 십년을 믿어도 빈둥거리고, 수십 년을 믿어도 빈둥거리고. 이게 사람 꼴이냐?
이 구원은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영원한 신령천국에서 영원히 존귀 영광자 되는 것이다. 복합적으로 다 들어있다.
이제 본문에서 흔히 여자가 창녀인고로 일반 사회적 도덕적 개념으로 죄인으로 보는 자들이 많다. 물론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보았고. 그들이 그렇게 본 것처럼 오늘날 교인들이 또 그렇게 보고 있다. 우리는 이 성경에서 창녀라 할 때는 일반창녀를 생각하면서 그 속에 들어있는 정신 팔고 마음 팔고 하는 진짜 창녀, 영원한 창녀를 봐야 한다.
창녀라도 억압과 강압에 못 이겨서 창녀가 된 자도 있다. 이런 자는 그 마음의 상처가 나으면 다른 사람이 된다. 깨끗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은 속중심을 보신다. 억압 강압적으로 창녀가 되었으나 마음은 순수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마음이 창녀로 되어 있으면 몸은 깨끗하게 보이는데 환경이 조성이 되면 몸 파는 것은 자동이다.
정신 마음이 창녀가 되면 이 창녀는 일반적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영의 눈으로 정신 사상으로 보면 창녀다. 지조가 없다. 신앙정조 판다. 자기가 세상 좋아하는 세상 쪽으로 신앙정조 팔아먹는다. 주님을 배반한다. 이것이 순간마다 들어있다 그러니 어떻게 이룰구원 차원에서 신앙이 올라가겠느냐? 못 올라간다.
그래서 오늘날 유형교회는 많고 교인들은 많으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창녀요, 그 하나하나마다 귀신집이요 세상화다. 교회가 정결하고 성결하고 깨끗하고 거룩한 맛은 없다. 맨 세상 판이다. 이건 하나님 심판이 임한 것이다. 그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이 불을 내리든지 아니면 지엽적으로 전쟁을 일으켜서 처리해 버리든지 하게 된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창녀처럼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비교급으로 생각하면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의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마귀들이다. 그러면 마귀가 나으냐, 본문의 창녀가 나으냐? 창녀하고 마귀하고 분석하면 마귀는 어느 쪽이냐? 창녀가 주권적인지, 마귀가 주권적인지? 마귀가 끌려가는 쪽인지, 창녀가 끌려가는 쪽인지? 마귀는 끌려가는 쪽이냐, 죄를 짓는 면에서 주권적이냐? 주권적이다. 창녀는 끌려가는 것. 돈 많은 사람이 끌면 끌려가는 것.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의인이라 했지만 우리가 판단해 볼 때는 바리인보다 창녀가 훨씬 낫다. 그러니 우리가 창녀 짓 할 것이냐? 그건 아니다. 창녀 짓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죄를 보는 눈이 근본적으로 빗나갔다는 말이다. 보는 눈이 정확도를 가져야 한다.
여자는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자기를 지은 원인 동기 목적 면에서 얼마나 빗나가게 살았는지? 일반 사람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이 여자를 일반적인 창녀로 보는데 우리가 영의 눈으로 볼 때 에 이 여자가 주님께로 찾아왔으니, 이 여자가 실지로 그렇게 안 살았는데 다시 끌어서 올려놓고 보는 것이다.
일반 창녀는 저 아래고, 영으로 보는 창녀는 올려놓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 창녀는 몸 파는 창녀고, 올려놓고 보면 정신 사상에 영적 지조 없이 사는 것을 말한다. 지조 없이 사는 그 자기를 발견하고 예수님 앞에서 영적으로 자기를 보는 것이다. 창녀라고 하니까 일반 창녀로 볼 게 아니고 1층에서 보는 눈과, 2층에서 보는 눈과, 3층에서 보는 눈을 각기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일반 창녀는 육의 눈을 가지고도 본다. 영적 창녀는 몸을 안 팔아도 벌써 정신면서 보고 들어간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신면에서 창녀를 보자.
정신면에서 이 여자가 깨달았을 ‘아, 내가 지조 없이 살았구나. 나의 창조 원인 동기 목적이 뚜렷한 건데 내가 빗나가게 살았구나’ 하고 그 죄를 찾았으면 즉,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았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 뒤에는 모든 봉사심은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가만 보면 육적인 몸의 병이 낫는다고 해서 주님께 수종을 들 수 있느냐? 못 든다.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몸의 병든 것이 나았더라도 그 다음에 영적 차원에서 심령적 차원에서 깨끗해지고 나음을 받고 고침을 받아야 주님께 수종을 들게 된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 그래서 병든 것을 고침을 받았다고 해도 부모를 섬길 줄 모른다. 그러나 그 부모마음을 알게 될 때, ‘부모공경 하는 것을 내가 몰랐구나’ 하고 알았을 때에 고침을 받고 부모를 공경할 수가 있다. 이치가 그렇다. 예수 믿는 이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오늘날 교인들이 성경에서 몸 신체적 병이 나은 것만 생각을 하지만 우리는 더 들어가서 2층에서 더 차원을 높여서 보는 영적인 면에서의 병 고침을 봐야 한다. 성격 성질이 고쳐지고, 예수 믿으면 그게 고쳐져야 한다. 수십 년을 믿어도 그 성격 성질 하나 못 고치니 어떻게 예수를 바로 믿을 수가 있느냐? 어떻게 은혜를 받겠느냐? 은혜 못 받는다. 그런 상태에서 세상에서 배 따뜻하게 사는 것뿐이다.
그렇게 사는 게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이냐?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예수 믿으면 180도로 주님 앞으로 바로 돌아서야 한다. 안 돌아섰는데 진리지식을 알면 무엇 하느냐? 자기에게 아는 게 효력이 없다.
많이 용서를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게 되고, 적게 용서를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하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 많이 사랑하는 사랑은 큰 사랑인데, 이 큰 사랑은 하나님을 많이 발견했다는 뜻이요, 하나님을 많이 발견할수록 자기의 죄를 더 많이 발견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적게 사함 받았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죄가 원래 하나님 앞에 적었다는 말이냐? 일반적인 죄를 끌고 와서 적게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적게 사랑함을 받은 자는 그만큼 적게 하나님을 발견했다는 의미이다. 많이 사함 받은 자는 많이 발견한 사람이다. 그게 아니면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안 그러면 다 똑같이 죄 지었는데 어떤 사람은 큰 것만 하고, 어떤 사람은 잘잘한 것까지 다 했으니 많이 사함 받았다는 의미냐? 그런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을 적게 발견한 자는 자기의 죄도 적게 발견한 것이고, 또 하나님을 적게 사랑하게 된다. 하나도 발견 못하면 하나도 사랑을 못하게 된다. 하나님을 전혀 발견을 못한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을 하느냐? 안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못한다.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많이 발견하면 부모를 공경하게 된다. 부모님의 마음을 하나도 발견 못했다면 전혀 공경할 수 없다. 애나 탱탱 먹이고 한다.
사람이란 사랑의 존재인데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아야 사람이 산다. 사랑이 아니면 미움인데 미움을 주고 미움을 받고 어떻게 사느냐? 살인이 일어나지.
마음이 가는 곳에는 봉사심은 자동적이다. 사랑의 존재라서 마음 가는 곳에는 자동적으로 봉사심이 나온다. 그런데 봉사심도 없고 이유와 변명이 많고 대우만 받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발견 못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다. 사랑을 못 받으면 가정이고 사회에서고 사람이 이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봐도 이상하다’ 이런 느낌의 사람이 된다. 정상인 사람이 왜 이상하게 보이게 사느냐? 성격이 문제다.
여자가 예수님께 한 행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이다. 즉 지금 하나님 사랑의 증거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운동에 봉사로 이어지는 것이다. 단순히 여자의 나타난 행위가 기준이 되어서 즉, 봉사의 양이 기준이 되어 죄 사함을 받은 것은 아니다.
여자의 신앙심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율법사 제사장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깎아내리고 짓밟는 그런 신앙심은 아니었다. 여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이 되는 그 일에 자기의 몸과 마음과 전 인격을 다 드린 셈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주님이다. 주님의 언행심사는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나온다. 그걸 발견한 사람은 오늘날 그 교훈에 그 일이 잘 되라고 자기의 전 인격을 드려서 그 일에 봉사하게 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그 일에 봉사하게 된다.
자기의 생애도 그 소원 목적으로 살고, 자기의 전 인격을 다하고, 그런 교회가 있으면 그 교훈 때문에 그 교훈 안에서 살고 싶고, 그 은혜 받고 싶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곳에서수종 들게 된다. 단순히 일반교회에서 말하는 봉사한다는
그런 차원만 보지 말라. 우리는 더 들어가서 생각해야 한다. 아무 교회나 가서 충성봉사 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다. 우리의 봉사는 아무데서가 아니라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나가는 그 일에 전 인격을 다해서 수종 들고 봉사하는 것이다. 그건 목사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다. 이게 지금 성경이 말하는 거다.
예수 믿으면서 많이 발견한 사람은 그 일에 수종 든다. 예수를 수년 수십 년 믿어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게 발견이 안 된 사람은 아무데나 가서 사기 처먹고 사기 당하고 한다.
이 여자에게 죄 사함을 확실히 믿게 해 주려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집에 주격이 되어 가신 것이다.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보면 바리새인 자기가(바리새인 시몬) 예수님을 대접을 한다고 했으니 시은자로 보이고, 예수님은 이 대접을 받으러 갔으니 수은자가 된 셈이다.
이걸 정신면으로 봤을 때는 예수님이 참 바보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예수님을 깎아내렸는데, 깎아내린 그 사림이 ‘우리 집에 가서 점심 좀 합시다’ 했는데 우리 마음 갔으면 어떻게 가겠느냐? 그런데 예수님은 갔다. 누구 때문에 간 것이냐? 이 여자 때문이다. 여자를 구원해 주려고 당신이 바보소리를 들어가면서! 그러니까 이 사건에서 누가 주격이냐? 예수님이 주격이다.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가신 것은 사실은 죄인 여자를 등장시켜서 바리새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것이고, 여자는 여자대로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다. 참 멋있는 장면이다.
예수님의 죄 사함은 인간들의 세계에서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과는 그 내용과 질이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인간들이 죄를 용서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그대로 있을 수 있다.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이 죄 사함은 여자에게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죄 사함이고, 영원히 죄를 기억치 아니한다 함이다. 죄를 사한다는 것은 무슨 죄를 지었던 영원히 기억치 아니한다는 뜻이고, 또 한 뜻은 천국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그 안에 들어있다. 죄 사함 받으면 천국복음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그 안에 들어있다.
봄이 되면 풀이 살아있는 뿌리는 밑에 있고, 옛날에 나온 잎사귀는 비가 오면 자꾸 썩어 내려간다. 썩어 내려 갈수록 가운데서는 새싹이 돋는 것이다. 이 여자가 그런 생태이다. 죄 사함 받고 과거는 다 죽고 동시에 천국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 안에 생산이 되는 거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이 아니면 죄 사함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의사단일성으로 찾아온 셈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적중성으로 들어온 것이니 다른 것은 다 해결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췄다는 것은 예수님의 발을 물어뜯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입맞춤은 사랑의 표시인데 즉,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구원을 위해 오신 그 발걸음, 그 생애, 나를 위해서 마귀의 혹독한 시험을 이기고 오신 발걸음, 나를 찾아오신 한 발 한 발 디딤 속에는 사랑과 생명과 능력이 가득 가득 담겨서 나에게 참 자유를 주려 찾아오신 것이니 그 걸음걸이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주님의 오신 그 마음을 읽어야 한다. 겉 넘겨치기 하면 안 된다. 남의 마음을 제 마음처럼 겉 넘겨버리면 안 된단 말이다.
한 발 한 발 주님이 그 생애의 삶을 그렇게 걸어 나오실 때 이 주님은 누구를 생각을 했을까? 본문 상으로는 이 창녀를 생각하며 그렇게 걸어온 걸음걸이다. 주님의 이 마음 이 심정을 생각하라. 서울에 간 딸이 소식이 없어서 물어 물어 서울로 올라가는 어머니의 그 심정을 생각해 봐라.
향유를 그 발에 부은 것은 첫째는 예수님의 걸음걸이는 성령의 향기로운 걸음으로 걸어오셨다는 것이다.
좋고 귀한 그릇에 향유를 붓느냐, 똥물을 붓느냐? 사람의 마음이 좋고 귀한 것에 향유를 붓는다.
예수님의 걸음걸이가 성령의 향기로 오셨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의 여자의 향기로운 봉사심을 말한다. 그 봉사심은 참으로 향기롭다. 그 향기성을 말하려고 향유를 붓는 것이다. 향유를 붓고 싶은 여자의 마음은 붓는 향유보다 더 값진 것이다. 그 마음이 정말 향기롭다. 고운 향이다.
가정이나 교회나 어디를 가던 3D가 있는지 교회에서 걸레 빠는 그런 일은 잘 안 하려고 하고 애들 데리고 저기로 나가려고만 한다. 사람이 향기로운 봉사심을 가진 자는 손발이 억세더라도 그 마음에는 향기가 있다. 가치가 있다. 게으른 자는 가치가 없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자기의 모든 소유가 예수님의 구원을 위한 활동에는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것이 들어있다. 참 아름답다.
당시 바리새인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했으나 이들은 예수님의 오신 목적과 여자의 신행을 전혀 모른다. 정죄만 하는 사람은 ‘내가 의인이요’ 하는 사람이니 목을 세우는 그 의인이 뭘 하겠느냐? 의인은 저기 딴 데 가서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과 여자의 신행을 그들은 모른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창녀 같은 자기를 위해서 오신 그 걸음걸이를 각자 개인적으로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자기가 원래부터 의인이었느냐? 하나님을 몰랐고 하나님이 없이 살았고 제 멋대로 살았고 세상사람 비위 맞추며 살았으니 이게 창녀가 아니냐? 정신면에 창녀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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