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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걸고 예배드려야 한다?!

칼럼수필 손성찬 목사............... 조회 수 146 추천 수 0 2020.08.28 13: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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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걸고 예배드려야 한다?!

1. “목숨걸고 예배해야 한다”가 일종의 구호처럼 들려온다. 그 충심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쓸데없이 비장하다. 그런 말을 쓰시는 분들께, 무언가에 진짜 자기목숨을 걸어본 적 있는지 묻고 싶으나, 그 정도 중요하다라는 관용어겠지 싶다. 왈가왈부하기 싫다. 그 진정성을 누가 판단하랴? 다만 “목숨 걸고 예배해야 한다”는 말에는 이런 질문이 선행되어야할 듯 싶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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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만보니 예배(禮拜)라는 한자어 해석. 즉 “경배 의식”이라는 뜻에 진짜 목숨을 건듯 한데, 과연 그럴까? 성경은 한문으로 쓰여있지 않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앙용어가 그러하듯, 한자어 ‘예배’ 역시, 기독교가 전래되던 당시 의미를 반영하여 새로 만들어진 용어가 아닌, 그 기원이 5세기까지 올라간다. 이는 이미 동양종교들에서 사용되던 단어, 즉 ‘신을 행한 경배 의식’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그렇다면 우리네 전래동화 말고, 성경에서 ‘예배’라고 번역된 단어의 뜻을 찾아보는게, ‘예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의 출발일 것이다. 결국 단어/용어의 의미이해의 다름으로 인해 맨날 개싸움이 일어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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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약을 기준으로 3개의 단어가 맥락에 따라 ‘예배’로 번역된다. ‘프로스퀴네오’, ‘라트레이아’, ‘레이투르기아’. ‘프로스퀴네오’가 어쩌면 우리네 전통적 ‘예배’의 의미와 비슷하다. ‘주인에게 절하다’. 그러나 ‘절하다’는 행동 이전에 주인됨에 의미가 더 부각된다는 점을 알면 좋겠다. 이어지는 ‘라트레이아’가 뒷받침한다. 절하는 그 지점을 넘어서, 자신이 주인의 종됨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모든 삶이 포함된다. 때문에 ‘삶의 예배’라는 말이 가능하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하찮게보는 설거지를 하면서도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둘다 “주인-종” 이라는 ‘관계적 정체성’의 이야기가 우선되는 것이지 ‘예식과 행동’이 우선은 아니다. 물론 그런 중심이 있다면, 삶이나 의식에의 참여로 드러날수 밖에 없지만, 우선되는 것은 ‘정체성’이다. 왜냐하면 행동이란 제한적 상황에선 드러날 수 없기에. 물에 빠진 누군가를 구하다가 절하지는 못한다. 연골이 나간 종은, 병상에 누운 종은 절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적 환경과 요건으로 ‘절’이라는 행동이 없더라도, 눈치 빠른 주인은 알 수 있다. 눈빛만 봐도. 하나님의 전능성을 우리가 무시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신다. 우리가 ‘목숨걸고 예배해야 한다’라고 말할 때, 그 예배는 아마도, ‘프로스퀴네오’를 말하는 것 같은데, 과연 그게 예배를 의미하는지 알아서 판단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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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지막 ‘레이투르기아’는 그 주인을 섬기기 위한 노동, 특별히 나혼자가 아닌 함께 연합하여 섬기는 것을 말한다. 공동체적 예배, 섬김의 예배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묻고 싶은것은’ 대면예배’라는 신조어이다. 무슨 뚱딴지같은 용어인지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묻고 싶다. 그 ‘대면’이 혹시 하나님의 얼굴인가? 아닐 것이다. 이거야 말로 신성모독이다. 아무리 친해도 어찌 얼굴을 보는가?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정도 할 수 있는 신계급 인간만 가능할 것이다. 아니면 교회당에 와야만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다는 성속이원론적 사고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물론 이 ‘대면’이 교인들의 얼굴을 의미한다면 이제서야 논의가 가능하다. 그것이 ‘레이투르기아’의 의미의 연장선상이라면, 그 공동체성은 진짜 필요하고 교회의 본질이니. 그러나 그런 것 치고, 한국교회는 예배가 다 한자리에 있다는 것 빼고 그리 공동체적이지는 않았다. 그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으나, 사실은 설교 시작전 목사님의 인도에 따라 ‘인사’정도만 한 것 말고, 얼마나 공동체적이었나? 그냥 앞만을 보고 ‘나 혼자 예배한다’ 찍다 온 것이지. 그리고 코로나 이전에도 넘치는 교인들을 위해, 별개의 공간에서 모니터를 통한 예배 많지 않았는가? 이미 우리의 ‘예배’는 언택트 시대를 살고 있었다. 촌스럽게 왜 그러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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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요새 Q.T를 하며, 이사야서를 묵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대해 정말 많이 질책하셨다. 그런데 예배에 대해 질책한 것은 예배행위가 아니라, 그 중심에 대한 질책이었다. (이사야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것 같은가? ‘예식참여’의 문제 이전에 정체성과 중심의 문제를 묻고 있다. 그게 ‘예배’의 본질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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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그 정체성이 우선이고, 그로부터 나온 행동들이 예배이며, ‘예배의식’은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 주인께서 유일하게 남기신 대계명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 사랑은 ‘예배’라는 구도에서 해석될 수 있다면,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우리가 실제 행해야하는 지점이다. 이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그는 예배자로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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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래서 이런 구절도 눈에 들어온다. (이사야 1:15-17)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세상의 아픔과 연약한자들에게 눈을 감는 자의 기도, 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 그것은 이미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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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렇다. 우리는 “목숨걸고 예배 드려야한다” 주인을 위해. 그렇다면 목숨걸고 방역에 협조하며, 목숨걸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목숨걸고 코로나로 아픈 세상과 자리에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야한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지 않았는가? 진짜 목숨걸고 박해받으며 신앙의 자유가 박탈되었던 초대교인들. 그들은 전염병앞에 모두가 다 도망갈 때, 오히려 그들을 위해 남고 치료하였다. ‘목숨’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내 옆에 있는 이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기에.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박탈된 것도 아니고, 다만 모임이 제한되지만 예배의식을 못하는게 아니고, 영원히 폐지되는 것도 아니다. 신사답게 협조를 구할 때 신사답게 응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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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안다. 수십년간 단한번도 예배당에 안나왔던적이 없던 분들의 박탈감. 안다. 텅빈 예배당에서 카메라 보고 하는게 얼마나 어색하고 박탈감 느껴지는지. 안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라 이대로 적응하면 돌아오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안다. 우리가 예상하듯 코로나 이후에 많이 빠질 것이다. 아무리 빨리 잡아도 내년전반기까지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아마 30%는 날라갈 것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라면 더 날라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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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러한 설명이 ‘주일성수’나 ‘예배참여’의 폄하로 이어지지 않았으면한다. 또한 믿음이 연약한자에게 쓸데없는 자기합리화의 근거로 쓰이지 않길 원한다. 물론 말해서 뭐하는가? 어차피 주인됨의 의미가 없는 이들에게 예배참여는 본래부터 의미없었다. 그가 본래 예배하던 것들에게로 돌아갈 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자였다면, 상황이 호전된 후 알아서 나올 것이다. 현장에서의 오감을 통해 누리고 드리는 예배, 의미있는 의식을 통한 공식적인 주인됨의 고백, 공동체적 모임과 교통함. 중심이 있는 이들은 그것을 모른체 할 수 없다. 온라인으로 참여하는게 얼마나 제한되는지 알기에, 도리어 더 열망한다. 수준을 너무 낮게 보지 말자. 차라리 이 기간 ‘예배예식’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결코 주커버그가 오더라도 만들어낼 수 없는 현장참여만이 줄 수 있는 예배의 맛이 들어있는 ‘예배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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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려한다면, 목숨걸고 항거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피해주지 않는 상황인데도, 법적으로 보장된 모임의 권리를 제한하려한다면 목숨걸고 항거할 것이다. 다름아닌 내 정체성을, 내 주인됨의 고백을 제한하기에. 그게 ‘목숨걸고 예배 드린다’는 의미라 생각한다. 그러나 남의 목숨 걸고 ‘예배’를 지키는 것이라면, 이미 ‘예배’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며, 그것이 고작 ‘주일예배예식’의 의미라면 조금 더 공부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사야가 말한 ‘사람의 계명’이 그런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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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명색이 목사라 우리가 사랑하는 12라는 숫자에 맞춰본다. 첨부된 사진을 보고 어떤 생각이 나는가? 이 사진 한 장으로 마침표를 찍겠다. 이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난 신학도이지 신학자는 아니기에, 이 글을 맹신하지는 마시라. 우리 모두 예배자 되길 소망한다. 그리고 나도 어서 빨리 모이길 소망한다.

이음숲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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